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동화책이 필요한 이유

 

이선희 해오름평생교육원 전임강사 sunanna@naver.com

 

봄눈이 옵니다. 싸락싸락 내리는 눈이 아니라 한겨울처럼 펑펑 내립니다. 산수유나무며, 매화나무엔 봄눈이 봉긋이 나와 있는데, 그 봄눈 위로 눈이 쌓입니다. 봄과 겨울, 나오려는 기운과 가지 않으려는 기운 사이에 묘한 줄다리기가 시작됩니다.

 

1. 요 몇 년 사이 독서교육 현장에 이상한 기류들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2000년대를 전후해 아동문학이 활발히 꽃피우기 시작하더니 2000년대 후반이 되니 아동문학계에서도 문학 책보다는 지식 정보책이나 실용서들이 더 많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세계화 시대의 영어 붐은 아이들을 영어 학원으로 내몰기 시작하여 유아시절부터 영어로 듣기, 말하기를 하고 초등학생이 되면 영어로 읽기, 쓰기 게다가 문법까지 마스터해야 하는 실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너무 바빠졌습니다. 책을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구석에 앉아 책에 빠져 자유롭게 키득대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아니, 어찌 보면 예전 아이들보다 지금 아이들이 책을 더 많이 읽고 있습니다. 독서의 “더 이르게, 더 빨리, 더 많이” 현상은 지금 우리의 독서 현실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속에서 “한 권이라도 제대로”라고 말한다면 시대에 너무 뒤처지는 것일까요?

 

2. 또한 요즈음은 독서교육이 교과서와 연계되어, 교과서에 나오는 것들을 더 심화하고 확장하는 독서로 많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불황의 늪에서 사활의 기로에 선 아동물 출판계에서도 시장성을 고려해 친절하게 교과 관련 자료를 연결해 소개해 주고 있는 게 현실이기도 합니다만 이는 좀 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것들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배경지식으로 그와 관련된 책을 읽는다는 견해에는 이견이 없으나 어찌 보면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만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된다면, 그래서 교과서가 주식이 되고, 그 밖의 세상에 대해 말하는 책들은 간식거리가 된다면 이 또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교과 연계 독서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 밖의 세상도 크고 넓은데 우리 아이들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너무나 좁은 시야를 갖게 되지나 않을까 우려해서 하는 말입니다.

 

3. 해가 바뀌어 여러 독서 단체나 모임에서 어린이 도서목록을 새로 발표합니다. 아이들의 발달 단계나 학령 단계에 맞게 예전에 나온 책들과 새로 나온 책들이 적당히 섞여 발표됩니다. 0세부터 만나는 그림책들도 있고, 초등학교 학년에 따라 읽어야 할 책들이 간략하게 소개된 목록들도 있습니다. 연일 쏟아지는 책들 속에서 내 아이에게 읽히고자 하는 책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목록들을 보니 또 걱정이 앞섭니다. 우리나라 창작문학이나 다른 나라 창작문학 같은 문학 책들, 한국역사와 세계 역사를 통사로 소개하거나 미시적 관점에서 소개하는 역사책들, 수학의 개념과 원리, 역사나 일화를 알려주는 수학책들, 차이와 차별의 차이를 알려주는 인권,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사는 터나 생활 문화를 알려주는 사회책들, 동물이나 식물, 광물 등등의 자연 모습, 우리 몸, 기후와 토양, 에너지나 기계의 원리, 미래의 발전상을 소개해주는 과학책들, 음악과 음악가에 대한 책들, 그림과 화가들에 대한 책들, 인류의 길을 밝힌 위인들에 대한 책들, 기타 등등…… 읽어야 할 게 너무 많습니다. 또 어려워진 교과과정 탓인지 아이들의 발달 단계를 고려하지 않고 예전보다 학년이 내려와 소개된 책들도 많습니다. 이러다보니 아이들에게 숨통을 트이게 해 주어야 할 책이 또 하나의 짐이 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토론은 ___________ 사람을 만들고

 글쓰기는 --------- 사람을 만들고

 책읽기는 --------- 사람을 만든다.



대형서점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베이컨의 명언인데 순서를 살짝 바꿨습니다. 베이컨의 말이라고 알려진 이 말은 우문현답처럼 우리들에게 다시 한 번 본질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저는 선생님들과 첫 논술 수업을 할 때 이 말을 잘 물어보곤 합니다. 독서 토론․논술이 지상 과제이던 시절도 있었는데, 요즘은 이런저런 것들에 밀려 다음 순위가 되고 말았지요. 어쨌거나 이 말은 우리가 하는 독서나 논술 교육이 어느 곳에 목표를 두고 있는가를 점검해 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솔직하게 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토론은 어떤 사람을 만들까요? 토론은 말 잘하는, 똑똑한, 논리적인, 자기주장을 세울 줄 아는, 주장의 근거를 찾을 줄 아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설득력 있는……(여러 분들의 의견입니다.) 사람을 만들겠지요. 어느 것 하나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베이컨은 토론은 ‘부드러운 사람’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보이는 우리의 토론 문화를 보면 어떻게 토론이 부드러운 사람을 만든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베이컨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답이 꼭 정답일 필요는 없습니다. 나에게는 내 생각이 있고, 그에게는 그의 생각이 있지만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그의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글쓰기는 어떤 사람을 만들까요? 글쓰기는 사색적인, 감상적인, 주변을 잘 관찰하는, 상상력이 넘치는, 생각이 깊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어휘력이 풍부한, 자신을 성찰하는,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을 만들겠지요. 베이컨은 글쓰기는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글쓰기와 정확성. 어찌 보면 우리 상식의 허를 깨뜨리는 말이기도 하고, 진짜 정확한 말이기도 합니다.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을 정리하자면, 꼭 맞는 말을 찾아 쓰려면 정확해야겠지요.

책읽기는 어떤 사람을 만들까요? 책읽기는 지식이 많은, 사고력 있는, 생각을 많이 하는, 똑똑한, 상상할 줄 아는, 공감할 줄 아는, 현명한, 간접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만들겠지요. 어떤 분은 책읽기는 행복한 사람을 만든다고도 했습니다. 정말 좋은 말이지요. 그러나 좀 더 솔직하게 우리의 속내를 드러내자면 책을 많이 읽어 배경 지식이 풍부한 사람을 만들고, 공부 잘하는 사람을 만들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사람을 만들고 싶은 것도 한 몫을 차지하겠지요. 역시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많은데, 베이컨은 책읽기는 ‘완전한 사람’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보다 더 완벽한 말은 없습니다. 책읽기가 완전한 사람을 만든다니요. 1%가 부족하든 2%가 부족하든, 지식이든 감성이든 사람은 어딘가 부족한 면이 있게 마련입니다. 책을 통해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책은 그만큼 사람의 부족한 면을 채워줄 수 있다는 역설이지요. 어른들은 이미 완전하므로 책을 덜 읽으면서, 보다 완전한 아이들을 만들기 위해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책을 주입하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어야 할 책이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재미만 가지고는 아이들에게 읽히기 어렵고, 공부에 도움이 되거나 선행 지식을 쌓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만 읽히고 있습니다. 만화책도 학습서 위주로 출간됩니다. 이런 현상이 대세이다 보니 동화책은 자꾸 뒤처지게 됩니다. 시간이 있어야 책을 읽을 텐데 아이들이 편안히 책을 읽고 상상하며 꿈꿀 시간이 없습니다. 책을 읽고 멍하니 공상에 빠질 시간도 없습니다. 그런 시간들은 아무 쓸데없는 시간처럼 여겨집니다. 세상을 많이 경험하고 느껴야 할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의 울타리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가 그것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게 답답하니까 체험학습들이 번성하고 이 또한 과외학습의 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부모들이지만 지금 부모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는 불안감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더욱 아이들을 쪼아댑니다. ‘너희들 세대에 이 불안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최선을 다해 이 세상을 바꿔볼게’가 아니라 ‘너희들 세대는 더욱 살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답게 살 수 없어’ 그러면서 이 세대에 우리는 끝장을 보려고 합니다. 『생명이 들려준 이야기』라는 책 중에 「아이는 왜 빨리 어른이 되어서는 안 되나」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지금 아이들은 그 책에 나오는 것처럼 속성 재배되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현실의 안락함, 현실의 위기감을 너무 빨리 알아버렸습니다. 강퍅한 지식을 채우느라 아이들 마음속에 감성이 없고, 아이들의 생각 속에 상상이 없습니다. 지식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드럽고 우아한 존재입니다.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슬픔에 눈물 흘릴 줄 알고, 아이들은 이루어질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이 요즘은 “그래서요? 그래서 어쩌란 말이에요?”를 되풀이합니다. 사람살이를 가르치지 않고 지식만 가르치는 못된 사회가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합니다. 이런 현상을 극복하고자 한편에선 아이들과 함께 삶을 고민하고 배우는 자리에 인문학이 놓이기도 합니다.

 

지식으로 치우친 세계를 균형 잡게 해줄 것이 바로 동화책입니다. 동화책은 아이들에게 살아갈 힘을 줍니다. 아이들의 숨통을 틔워주고 아이들을 꿈꾸게 하고 아이들을 날게 합니다. 나를 알고 남을 알고 사람살이와 세상살이를 알게 합니다. 동화책 속엔 지식이 주지 못하는 따뜻함과 너그러움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힘과 실천하는 힘이 있습니다. 동화책 속의 주인공들은 무언가 나름대로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문제에 굴복하여 쓰러지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이겨내는 주인공들. 그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곤 합니다. 주인공의 의지가 필수적인 조건이지만 그것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라 아이들을 도와주는 좋은 어른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그렇게 되고 싶은 어른들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이 사회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야 이 사회가 발전이 있습니다.


『불량한 자전거 여행』(김남중 글/ 허태준 그림/ 창비 펴냄)이란 책이 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건강한 주인공을 만난 듯해서 기분이 좋습니다.

아빠는 신데렐라입니다.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당했지만 엄마에게 말도 못하고 매일 술로 달래느라 열두 시가 넘어서 집에 오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호진이의 학원비를 버느라 일하시는 건지, 일하느라 학원에 보내는지 알 수 없지만 밤늦게까지 밖에서 일하다 오십니다. 매일매일 싸우다 지친 엄마 아빠는 이제 지긋지긋하다며 다 그만두자고 합니다. 부모님이 헤어진다는 소리에 호진이는 처음엔 불안했지만 차츰 화가 나서 한밤중에 몰래 엄마 아빠가 싫어하는 삼촌한테 내려갑니다. 호진이는 한밤중에 용산에서 광주로 내려가는 무궁화 열차에 몸을 싣고 삼촌을 찾아갔는데, 삼촌은 호진이를 데리고 덜렁 보름 동안 이어지는 자전거 여행, 일명 여자 친구의 여행을 떠납니다. 그 여행 동안 호진이는 자전거 트래킹을 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힘을 기르게 되고 그 힘으로 결국 부모님까지 돕게 됩니다.

이 책에는 여러 인물들이 나옵니다. 호진이의 엄마, 아빠, 삼촌, 그리고 자전거 여행을 떠난 여러 사람들. 그 인물들은 제각기 자기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열심히 일을 했지만 회사에서 내몰린 무능력한 아빠, 남편과 아들이 공범으로 자기 인생을 망쳐놨다고 생각하는 엄마, 엄마 아빠는 대학도 못 나와 사람 구실도 못 한다고 여기지만 막상 본인은 자신이 즐기는 일을 하며 인생을 열심히 사는 삼촌,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 아빠의 따뜻한 사랑이 그리운 호진, 그 밖에 자전거 여행을 함께하는 사람들. 엄마 아빠의 문제는 본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호진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호진이는 그걸 어떻게 풀어야 할지 그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열세 살의 호진이는 삼촌을 따라 광주에서 구례, 진주, 창원, 부산을 거쳐 속초와 통일전망대까지 이르는, 그것도 팔월 한더위에 미친 짓과 마찬가지인 자전거 여행을 하며 세상을 만나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결국 자신을 만납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도 호진을 따라 한여름의 열기 속에 자전거 페달을 힘겹게 밟아 터질 듯이 숨 차오르도록 오르막길을 오르고, 브레이크를 잡고 쌩쌩 바람을 맞으며 신나게 내리막길을 내려오기도 합니다. 암만 힘이 들어도 내 문제는 뒤에 두고 우선 저 길을 가야 합니다. 저 길을 그렇게 오르내리다 보니 세상살이가 아무런 일도 아닌 듯 여겨집니다. 호진이는 값진 여행으로 힘을 얻었지만 아직도 엄마 아빠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풀 능력이 없습니다. 인생의 황금기를 도둑맞았다고 하는 아빠, 그 사이에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엄마는 바로 우리 사회 소시민들의 초상이기도 합니다.

호진이는 식구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고민하다가 함께 흘리는 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무능력한 아빠가 당장 돈을 많이 벌어 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공부 못하는 호진이가 당장 공부를 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어려움 앞에서라도 가족이 함께 한다면, 즐겁게 땀을 흘리며 마음을 함께 한다면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 책은 아이의 문제를 풀어갈 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문제까지 풀어가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좋은 동화책은 아이를 건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건강하게 합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너무 낭만적이지 않느냐구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동화책이 필요합니다. 자신들의 미래가 되는 현실에 희망을 품고 낭만을 가지는 아이들! 모두가 공부만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보듬는 힘이 있으면 이 세상은 그래도 살 만한 곳이라고 여기는 아이들! 공부에 지쳐 파리하고 힘없는 아이들이 아니라 자기 힘을 가지고 행동에 옮기는 아이들이 책 속에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이런 친구를 만난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책 속에서라도 이런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동화책, 그래서 읽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