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자꾸 우신다. 설에도 우시더니 어제 할머니 제사에도 우셨다.  할머니 기일에는 그전에도 가끔 우셨다. 유난히 서로 정이 많은 고부간이었던 터라 할머니 생전에 못다한 며느리로서의 회한이리라 짐작했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 당신 기운이 더 빠지면 이제 제사마저 못 모실까봐 흐르는 눈물이다.
  설 전전날, 며느리 셋이 모두 일이 생겨 못 온다고 하고 하나는 설날 아침에 오겠다고 한다며 일흔 여덟의 엄마가 우셨다. 나는 또 씩씩한 해결사가 되어 밤새 차례상 음식을 만들어냈다. 음식이야 주문하면 뚝딱 배달되는 요즘 뭐 그리 큰 문제도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의 위안이 될까 하여 급하게 만들었다. 아침에 엄마에게 들렀다가 시댁으로 가면서 엄마만 돌아가시면 다 사라질 일들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옛 조상들이 명절이나 제사를 일상사중에 큰 일로 여겼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죽어서도 이 승을 잊지 못해 밥 얻어먹으러 온다고 진정 믿었을까? 제사를 잘 모시는 것이 효도이다 라는 말은 제사를 잘 모실만큼 여유롭게 잘 살아라, 혹은 제사에 모두 모일 만큼 부부간, 형제간에 우애를 잃지 말아라 따위의 말이 들어있지 않았을까?
엄마 품 아래 다섯 자식, 그 베필들, 그리고 또 그의 자식들까지 합하면 모두 열 아홉명이다. 그런데 설이라고 여덟이 모였다. 큰 며느리는 아들보러 뉴질랜드 갔고, 둘째 아들은 가족 모두 유럽에 가 있고, 셋째는 싸워서 각각 찢어져서 자신의 친정으로 헤어져 가고... 가히 세계화가 아닌가. 특별히 사이가 나쁘거나 그런 게 아니라 이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신 유목민 시대의 풍경이다.
내가 어렸을 때를 떠올려보면 그 시절 명절이나 제사는 엄마에게 큰 고역이었겠지만 어린 우리들에게는 더없이 풍성한 시간이었다. 물론 먹을 거리도 많았지만 온 집안 사람들이 모여 북적거리고 온갖 이야기며 웃음이 둥둥 떠 다니던 그 시간은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기억된다. 오랜만에 오신 어른들 앞에 가서 도덕책(별 다른 책이 없었으므로)을 큰 소리로 읽으면 모두 기특하다고 칭찬해 주고 그러면서 무슨 할아버지, 무슨 아재 따위의 호칭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아마 우리 세대까지 기억될 풍경일 것이다.  
또한 가족의 의미에서 군살이 다 빠진 지금의 시대에 재빨리 적응해 살고 있는 것도 우리 세대가 시작일 터이다. 늘 사는 일이 바쁘고 나와 내 자식의 일이 더 중요한 이 시대에 한 해 동안 설, 추석, 제사, 생신 다 합치면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적지 않은 이 일이 큰 일이기는 하다. 그래서 마치 힘겨루기하는 것처럼 언제, 어떻게 치고 빠질까를 머리 굴려 고민하는 젊은 자식들을 보며 엄마는 쓸쓸한 것이다. 와도 쓸쓸하고 가도 쓸쓸한 그런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우시는 거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제사를 어떻게 모실까 따위의 걱정은 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런 형식적인 일에 별 의미를 두지 않으므로. 그러나 엄마가 살아계신 동안 쓸쓸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하고 싶다.
늙은 엄마의 눈물을 보는 중년의 딸은 그저 마음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