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희 선생님께    
                                                                    이길례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주말 농장에 심어놓은 상추랑 배추가 잘 자랄까 걱정했는데 한시름 놓입니다. 겨우 열 평에 씨앗 심어놓고도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농사에 온 힘을 기울이고 계시는 시부모님은 어떨까 그 마음을 새삼 헤아려 봅니다. 역시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라는 게 맞나 봅니다.
예전엔 날씨에 무관심했었거든요.
선생님과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오는 발걸음이 참 무겁고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아마도 다음 수업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3월부터 5월까지 짧았지만 그래도 봄 한 계절을 함께 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올 봄 내내 설레고 행복했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이 예전에 배우는 것과는 다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결혼하고 나서는 아이를 키우면서 저를 위해 뭔가를 배우는 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아이를 맡기기도 쉽지가 않았고 첫애가 좀 크면 둘째가 생기고.... 아이들과 지내면서 저를 가꾸는 걸 잊고 살았습니다. 둘째가 네 살이 되니 이젠 품에서 조금씩 떨어져도 잘 노는 걸 보고 용기를 얻어 배움터를 찾아 나섰지요.
독서지도 하는 친구의 권유로 선생님 강의를 듣게 되었어요.
글쓰기 공부는 전부터 관심이 있던 분야이고 우리 아이들 돌보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주저하지 않고 등록했지요. 설레는 마음으로 강의실 문을 열었던 때가 생각납니다. 아니, 실은 전날 밤부터 잠을 설쳤답니다. 마치 초등학교 때 소풍가기 전날 밤 처럼요. 낯선 사람들 사이에 끼어 첫 수업을 들었을 때는 질문도, 대답도 섣불리 할 수가 없었어요. 저의 무지가 들통날까 봐서요. 그냥 선생님 얼굴만 봤지요.
선생님의 마른 체구에 단아한 모습은 가까이 하기에 조금은 어려운 느낌이었어요. 왜 큰 나무를 올려다봐야 하는, 차마 오를 수 없는 어려움이요. 그런데 강의 내내 제 가슴에서는 꿈틀대는 게 있었어요.
‘아, 그렇구나!’ 하는 마음이 울렁거렸어요. 배운다는 게 이렇게 신선하고, 즐겁고, 감동적일지 미처 몰랐거든요. 선생님이 아이들과 공부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그 아이들은 참 행복하겠구나 하는 게 느껴지고 우리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데 도움을 받으려 했던 목적이 이젠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해보고 싶은 마음이 일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선생님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앟으려고 열심히 받아 적었어요.
네 살된 작은 아이를 친구에게 맡기고 수업을 받으러 다녀야 했기 때문에 수업이 끝나자 마자 나와야 해서 함께 공부하는 분들과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없어서 무척 아쉬웠지만 집으로 오는 길 내내 들떠 있었어요. 아이가 지하철에서 잠이 드는 바람에 업고 오느라 허리가 휠 것 같아도 저의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진 못했어요.
선생님과 함께 했던 열두 번 강의를 최대한 내 것으로 만들려고 다짐하고 내주신 숙제도 꼬박꼬박 했어요. 어쩔 땐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컴퓨터 앞에, 책 앞에 앉아 있었지요. 묘사 글을 써오기 숙제를 할 땐 아이의 잠든 모습을 그려 보려고 함께 잠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불을 켜고 잠든 아이를 들여다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다음날 전혀 피곤한 줄을 몰랐답니다. 마냥 재미있었거든요.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아서 이른 아침에, 주말에 책을 붙들고 있으니 남편이 ‘책벌레’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어요. 아이를 낳고 아이 동화책만 읽어주다가 저를 위한 책을 읽으니 그 맛 또한 좋았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과 수업할 때 활용했다는 방법은 최대한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집에 와서 직접 해 보기도 했어요. 풀을 뜯어서 말려 도화지에 붙이고 설명글도 써 보고, 상자 속에 무언가 넣어 만져보고 느낌을 살피게 하는 수업을 위해 귤 상자를 오리고 종이를 붙이고 해서 만들어 놓기도 하구요. 모둠일기를 쓸 날을 위해 노트도 만들어 놨지요.
언젠가 제가 아이들과 함께 할 날이 있으면 선생님이 수업하신 방법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얼마 전에 문화센터에서 어느 유명 강사의 특강을 들었지요. 선생님의 아이들 대하는 방법과 너무나 달라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감정을 소중히 다루라 하셨지요. 아이들에게 사랑은 주되 생각을 집어넣어주지 말라 하셨어요. 아이들 스스로 생각할 줄 안다고요. 특강에서는 논술에 관해 말했어요. 논술은 따뜻한 가슴이 아니라 감정을 배제한 차가운 이성이라고요. 선생님을 알지 못했더라면 아이들을 대했을 때 내가 어땠을까 생각해 봤어요. 선생님은 논술을 ‘나를 알아가는 것’이라 하셨잖아요. 그리고 한계를 알고 극복해 가는 것이라고도 하셨어요. 선생님 수업에서 느끼는 건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채우기 위해 필요한 수업이구나 였어요.
선생님과 공부하면서 좋은 선생님, 좋은 엄마 상을 세웠어요. 아이를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도 배웠어요. ‘관계맺기’에 관해 많이 생각했어요. 아이와 저와의 관계, 세상과 저와의 관계, 사물과 저와의 관계요. 뭐든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애정과 관심을 가져야만 진정한 관계맺기가 이루어진다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그건 상하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여야 한다는 것을요. 나와 내 아이의 관계일 지라도요. 선생님과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 전 강압적인 엄마로 남아 있었을 거예요. 다른 아이들과 만나더라도 가르치려는 선생님으로만 다가갔을 거구요.
선생님에게 배운 건 많이 가르치려는 선생님이 아니라 함께 노력하는 선생님이 되라는 거였어요. 그리고 몸으로 많이 움직이고 많이 보는 게 글을 잘 쓰는 비결이라는 걸 알았어요. 많이 보고 느끼라고 여행을 많이 하라고 하나 봅니다.
제가 숙제 글을 쓰면서 알게 된 것도 글은 생활에서, 경험에서 나온다는 거였어요. 예전에 겪었던 일을 떠올리며 글을 썼거든요. 아이들에게 접근할 때도 일상생활 속에서 보고 겪은 것 중에 기억에 남는 걸 쓰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겪은 일이 많을수록 쓸 거리도 많아지겠구나 했어요.
선생님이 권해주신 책들은 읽을수록 마음에 남는 책들이에요. 동화책은 아이들에게 읽히기 위한 책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성인이 읽기에 더 좋은 책들이 많았어요. ‘오세암’이나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고는 참 오랜만에 맛보는 감동이었어요. 어린이 시 모음집인 ‘엄마의 런닝구’나 ‘까만손’ 역시 가슴을 적셔주었어요.
책을 읽으면서 읽어야 할, 읽고 싶은 책들이 너무나 많아서 마음이 바빠졌어요. 하지만 아이들에게 읽힐 땐 서두르지 않고, 읽는 책 안에 흠뻑 취할 수 있게 해 줘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배운게 정말로 많은 시간들이었답니다. 선생님과 함께 한 시간들이 무척 소중했어요. 함께 배운 분이 ‘나의 선생님이 계신다는 게 정말 좋은 거구나...’했는데 저도 그랬어요. ‘선생님이 무척 보고 싶을 텐데 어떡하나’했는데 정말 그래요. 이렇게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선생님이 좋아지고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기는 걸 보고 놀랐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 배운 게 가슴에 묻어두기엔 아까워서 어딘가에 펼쳐놓을까 궁리중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감동으로 적셔줄 수 있다면... 책이 재밌는 거구나. 글 쓰는 게 쉬운 거구나 하는 마음이 들 수 있다면 그건 선생님의 방법대로 제대로 했을 때 일 겁니다. 그렇게 노력할게요.
선생님, 늘어지지 않게 생활하겠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한 시간이 행복했던 건 배우는 긴장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늘 그 자세로 생활할게요. 그래서 제 마음이 행복해지고 이 마음을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야 선생님께 배운 게 헛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를 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5월 스승의 날이면 선생님이 떠오를 거예요.
선생님
잊혀져가는 선생님이 아니라 제 맘속에 늘 계셔주세요. 가끔씩 전하는 제 안부도 받아주시구요.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또 편지 드릴게요.      감사할 일이 많은 오월에.

     * 이 편지는 부천시에서 발행한 2006년 편지글 공모전 수상작 모음집 '마음으로 쓰는 편지'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