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 글쓰기 강의 나눔터
2007.09.29 07:23:41 (*.151.3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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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가는 배를 타면 꼭 만세를 부를 작정이었다. 물론 소리를 크게 내지는 않겠지만 두 팔을 벌려 온 가슴으로 바람을 맞으며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작정이었다.
나는 여행을 많이 다니지 못했다.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읽다가 좋은 곳이 나오면 눈이 시리도록 또 보고 또 읽어서 마음으로야 골백번도 더 가보지만 실제로 그런 곳으로 떠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결혼 전에는 돈이 없어서, 결혼 후에는 돈도 없거니와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서 여행이란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해마다 여름 휴가는 시부모님, 두 시누이 식구와 함께 보냈다. 늘 밥순이가 되어 밥만 열심히 챙겼다. 어느 해인가는 바닷가에 갔는데 시아버님, 시매부들과 함께 있던 나는 반바지에 티셔츠차림으로 햇빛 찬란한 모래사장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왔다. 물론 그들도 그랬다. 시쳇말로 '그건 휴가도 아니고 바닷가도 아니여'였다.
결혼 십년째 기념일이랍시고 시아버님 몰래 남편과 단둘이 하룻밤 자고 오는 여행을 떠났는데 둘다 얼마나 쫄았는지 한밤중에 악몽을 꾸고 새벽에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다. 스스로에게 너무나 화가 나서 그 뒤로는 여행 생각을 아예 접고 살았다.
해오름에 들락거리면서 나는 사람이 변했다. 교사연수라고 외박도 하고 계절학교 한다고 사흘씩 집을 비웠다. 즐거웠다. 이제 횡성가는 길은 마치 고향길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면서 한 십년 뒤 쯤부터는 제대로 여행을 다녀야지 하고 꿈을 꾸었다.
다행이 그렇게, 내가 꿈꾼 바 대로 조금씩 되고 있다. 서해 바닷가를 쭉 다녀 보기도 하고, 동쪽으로 가 보기도 하고...... 여행이라 하면 해외로 가는 것을 떠올리는 초등학생도 많은데 이게 무슨 꿈이 될까싶겠지만 내가 좋으면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쁨이 충만한 마음으로 가는 곳이 어딘들 무슨 상관이랴.
여름 휴가도 아니고, 그냥 주말도 아니고 추석연휴에 울릉도에 가자고 했더니 남편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말도 섞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누구냐. 첫술에 배 부른 적이 한 번이나 있었던가. 며칠씩 뜸을 두고 자꾸 말을 꺼냈다. 혼자 계실 어머님 때문에 안된다고 하길래 속으로는 '자기 엄마만 혼자 있나? 우리 엄마도 혼자 있는데!' 싶었지만 절대 그런 내색 없이 어머님도 함께 가자고 꼬셨다.
"그럼 어떻게 갔다 올 건지 자세히 알아봐"
으하하하.
그렇게 해서 울릉도를 다녀왔다.
묵호에서 울릉도로 가는 배는 선상에 나갈 수가 없었다. 잠수함처럼 꽉 막힌 선실에서 의자에 얌전히 앉아 두시간 반을 가는 거였다. 당연히 만세는 부를 수가 없었고, 배멀미 탓에 거의 초죽음이 되어 울릉도에 내렸다. 속이 울렁거려 한나절은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추산이란 곳에 묵었는데 아주 좋았다. 송곳산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바다와 하늘이 한 빛으로 보이는데 원추모양의 산이 그냥 우뚝 서 있었다. 쓸쓸하기도 하고 장엄하기도 했다. 거침없이 불어대는 바람 속에 서서 오래도록 산을 보다가 바다를 보다가 그랬다.
나리분지로 들어가는 구불구불한 길, 석포로 가는 흙길도 참 좋았다.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산길을 걸으며 풀잎에 맻힌 이슬도 만나고 후드득 놀라 날아가는 작은 새와도 인사를 나누며 행복했다. 해변산책로도 좋았고 홍합죽도 맛났지만 무엇보다 잠시도 쉬지 않고 종알대며 사진찍으며 나풀거리는 딸 덕분에 남편과 나는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기쁘고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딸이 사진을 찍는다면서 우리 둘이 손을 잡고 걸으랬다.
오랜만에 남편과 손을 잡고 걸으며 내가 물었다.
"당신도 좋지?"
"좋지 그럼."
그렇지. 당연히 좋지. 잘했어. 안정희, 참 잘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