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 글쓰기 강의 나눔터
2007.10.11 23:47:59 (*.151.7.75)
1974
안녕하세요 선생님 강의 들었던 유상현입니다. 오랜 만에 선생님 글을 보니 반갑군요. 샘이 추천하신 책 중에 내 생애의 아이들을 읽고 독후감을 쓸 숙제가 있었습니다. 그 소설 찬물 속의 송어 중에 이런 말이 나오더군요. 인생이 획득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틀렸다는.... 작가이자 화자가 그렇게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조바심낼 때가 많더군요. 비가 올 때는 비를 맞어야 따뜻한 햇살을 맞이할 수 있겠지요. 누군가는 프레드릭처럼 햇살을 준비할 테니까요! 제 독후감 강평을 받아보고 싶은 떼가 슬며시 올라옵니다. 정말 코땡기네요.. 행복이 가득하시길....
내 생애의 아이들 가브리엘 루아/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 2007. 10. 7
이 소설의 화자는 작은 산골 마을의 여자 선생님이다. 그는 열여덟의 교사이다. 지루한 책이구나 생각하면서 드문드문 읽다가 그래도 끝까지 읽어보았다. 마지막에 실린 글이 중편 ‘찬물 속의 송어’ 이다. 그제서야 화자이면서 주인공인 그녀의 나이를 알 수 있었다.
소설의 화자이기도 한 가브리엘 루아는 젊은 시절 자신의 교사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중·단편, 6편을 모아 ‘내 생의 아이들’이라는 하나의 책으로 엮어냈다. 가브리엘 루아는 캐나다 출신의 작가로 1909년 태어났으며, 이 소설은 1977년의 말년에 썼기 때문에 완숙한 작품이다. 비교적 쉬운 단어들인데도 감정의 묘사가 풍부하고 눈앞에 일어나는 일들을 직접 보는 듯이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조금 지루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점들 때문에 캐나다를 대표하는 작가의 멋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길고 마지막에 나오는 ‘찬물 속의 송어’는 커다란 울림을 나에게 주었다. 아이들과 만나다 보면 항상 “아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물음을 새롭게 가지게 된다. 이 소설은 작가이자 화자가 사회 초년시절 경험한 이야기들이어서 싱싱하고 탐스러운 과일과 같은 이야기이며, 싱그러운 햇살과 같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두 가지 시각이 있다. 밝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달라고 말하는 부모가 있고, 공부 열심히 하고 착한 아이였으면 하는 부모가 있다. 먼저의 시각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과 꿈을 존중 받으면서 아이들이 성장단계에 맞게 자기 자신을 실현해가는 삶을 사는 것이 좋다는 시각이다. 나중의 시각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나 틀 속에서 보호 잘 받고 부모가 바라는 대로 열심히 성장하면 된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두 시각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상당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자기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삶이 곧 인간본연의 삶이라는 설명은 교과서 한 귀퉁이에나 나와 있다. 사회가 정한 틀에 맞춰서 살아가는 삶은 동물적인 생존이 최고의 목적이 된다. 그래서 부모와 어른들은 아이들이 남의 손가락질 안 받고 동물처럼 먹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열심히 가르치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커야 하는데!!!!
‘찬물 속의 송어’에서는 메데릭이라는 아이와 그 애의 아버지와 ‘나’만 나온다. 대평원 속에 격리된 마을 한쪽 끝자리에 학교가 있다. 메데릭이라는 아이가 검은 갈기의 말을 타고 학교에 나타난다. 모든 사람들이 그 아이를 경계하고 젊은 교사에게도 조심하도록 주의를 준다. 이 젊은 교사도 이 아이를 도대체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 수 없다. 메데릭은 열네살, ‘나’는 열여덟이다.
‘나’는 메데릭이 고독한 아이라는 것을 눈치 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나타나기 전에는 우리 반은 잘만 되어가고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이 괴상한 녀석을 물려받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세 번, 나는 그를 못 본 체하고 자신이 바라는 대로 무지와 무료함 속에 팽개쳐두리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이내 나 자신도 어쩔 수 없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밀어주어야겠다는 열망에 다시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그처럼 당시 나의 열정은 사랑만큼이나 절박한 것이었다. 사실 내가 일생 동안 느꼈던 그 뜨거운 욕구, 지금도 내가 각자에게서 최고의 것을 얻어내려고 싸우는 그 욕구는 사랑이었다.”
‘나’는 메데릭이 숲 속을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그래서 교실에서도 숲 속만을 생각하는 전문 몽상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메데릭을 통해서 여교사라는 직분과 인습에 영원히 갇혀버리게 될지도 모르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메데릭도 배움에 대한 기쁨을 느껴간다. 두 사람은 동사변화를 다 외우게 되면 같이 밥코크 산에 올라가기로 약속을 한다.
‘나’는 메데릭과 말 위에 올라앉아 무한히 넓은 평원의 광대함, 그 쓸쓸한 고귀함,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나’는 메데릭의 순수함이 타고난 자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골짜기에서는 찬 물 속에서 헤엄치는 송어를 손으로 잡아본다. 손 안에 뭔가 조그맣고 미끄러운 것이 어렴풋하게 꿈틀거린다. 메데릭이 말했던 그 느낌은 분명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의 느낌이었다.
나도 학생 때 이런 느낌을 나누었던 선생님을 간혹 떠올리곤 한다. 나에게도 대평원의 열정을 가지셨으며, 세상의 무엇보다 순수함과 생명력 넘치는 눈빛을 가지신 선생님이 딱 한 분이 있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이고 체육선생님이셨던 그 분은 나를 그렇게 예뻐해 주셨다. 자신이 출연하는 연극 공연에 초대하는 티켓을 두 장 주셔서 엄마와 같이 보러 갔던 기억이 가슴 깊이 남아있다.
나는 지금도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메데릭과 비슷한 나이의 내가 나의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던 인생살이의 한 대목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직접적인 영향력을 남기셨던 것이다. 내 삶의 일부를 다른 이들과 나누면서 시련도 많이 겪었지만 아직도 그 소신은 잘 변하지 않는다.
‘나’와 메데릭의 순수한 관계는 메데릭의 동물적인 본성을 가진 아버지에 의해서 여지없이 깨어진다. 교육이라고는 받아 본 적이 없는 메데릭의 아버지는 부자이지만 실패한 인생이다. 자신의 실패한 인생 대신 아들이 반에서 일등하기를 바란다. 반에서 꼴찌인 아이에게 일등하기를 바라다니!!
메데릭은 자신의 인디언 엄마를 닮아 슬프지만 순수한 꿈이 담긴 그늘진 보라색의 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거만하고 건방진 태도도 닮은 아이이다. 둘 사이의 우정은 메데릭의 연정으로 바뀌면서 문제는 복잡해진다. 두 사람 사이를 질투하는 메데릭의 아버지의 훼방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발전적으로 회복되기가 어렵다.
소설의 결론 부분에서 ‘나’는 소도시로 전근을 가게 된다. 그리고 산으로 도망가 학교에 나타나지 않던 메데릭이 떠나가는 선생님이 탄 기차를 향해 검은 갈기를 휘날리며 말을 타고 달려오면서 두 사람이 재회를 하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나’는 이제 메데릭이 달려올지도 모를 교실의 창가에 서서 생각한다. 메데릭이 어머니가 물려준 자연의 힘과도 같은 원초적인 순수함의 영향력이 이길 것인가? 아니면 메데릭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아버지의 영향력이 이길 것인가? 아니면 결국에 가서는 ‘내’가 이길 것인가? 찬물 속의 송어와 같은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력이 옳을까? 나도 생각해본다.
아이들을 만나는 교사에게 교훈적인 것은 다음의 대목이다.
“아마도 평원의 그런 외딴 마을에서 이름 없는 여교사 생활을 해본 경험이 없이는 어린이들에 대하여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느낌,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추억을 그들의 삶 속에 남긴다는 황홀한 확신, 그리고 또한 그 아이들과 헤어지는 격렬한 아픔, 어찌나 단단히 맺어져 있는지 마침내 다시 숨을 쉬기 위하여 그것을 다시 푸는 것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슬픔의 매듭, 내가 경험한 이러한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글쓰기 강의에서 교사를 세가지로 분류한 적이 있다. ‘내 생의 아이들’에 나오는 열여덟 살짜리 풋내기 교사를 보면서 매화마을 섬진강 교사 김용택 선생이 생각난다.
내 생애의 아이들 가브리엘 루아/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 2007. 10. 7
이 소설의 화자는 작은 산골 마을의 여자 선생님이다. 그는 열여덟의 교사이다. 지루한 책이구나 생각하면서 드문드문 읽다가 그래도 끝까지 읽어보았다. 마지막에 실린 글이 중편 ‘찬물 속의 송어’ 이다. 그제서야 화자이면서 주인공인 그녀의 나이를 알 수 있었다.
소설의 화자이기도 한 가브리엘 루아는 젊은 시절 자신의 교사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중·단편, 6편을 모아 ‘내 생의 아이들’이라는 하나의 책으로 엮어냈다. 가브리엘 루아는 캐나다 출신의 작가로 1909년 태어났으며, 이 소설은 1977년의 말년에 썼기 때문에 완숙한 작품이다. 비교적 쉬운 단어들인데도 감정의 묘사가 풍부하고 눈앞에 일어나는 일들을 직접 보는 듯이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조금 지루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점들 때문에 캐나다를 대표하는 작가의 멋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길고 마지막에 나오는 ‘찬물 속의 송어’는 커다란 울림을 나에게 주었다. 아이들과 만나다 보면 항상 “아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물음을 새롭게 가지게 된다. 이 소설은 작가이자 화자가 사회 초년시절 경험한 이야기들이어서 싱싱하고 탐스러운 과일과 같은 이야기이며, 싱그러운 햇살과 같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두 가지 시각이 있다. 밝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달라고 말하는 부모가 있고, 공부 열심히 하고 착한 아이였으면 하는 부모가 있다. 먼저의 시각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과 꿈을 존중 받으면서 아이들이 성장단계에 맞게 자기 자신을 실현해가는 삶을 사는 것이 좋다는 시각이다. 나중의 시각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나 틀 속에서 보호 잘 받고 부모가 바라는 대로 열심히 성장하면 된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두 시각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상당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자기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삶이 곧 인간본연의 삶이라는 설명은 교과서 한 귀퉁이에나 나와 있다. 사회가 정한 틀에 맞춰서 살아가는 삶은 동물적인 생존이 최고의 목적이 된다. 그래서 부모와 어른들은 아이들이 남의 손가락질 안 받고 동물처럼 먹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열심히 가르치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커야 하는데!!!!
‘찬물 속의 송어’에서는 메데릭이라는 아이와 그 애의 아버지와 ‘나’만 나온다. 대평원 속에 격리된 마을 한쪽 끝자리에 학교가 있다. 메데릭이라는 아이가 검은 갈기의 말을 타고 학교에 나타난다. 모든 사람들이 그 아이를 경계하고 젊은 교사에게도 조심하도록 주의를 준다. 이 젊은 교사도 이 아이를 도대체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 수 없다. 메데릭은 열네살, ‘나’는 열여덟이다.
‘나’는 메데릭이 고독한 아이라는 것을 눈치 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나타나기 전에는 우리 반은 잘만 되어가고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이 괴상한 녀석을 물려받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세 번, 나는 그를 못 본 체하고 자신이 바라는 대로 무지와 무료함 속에 팽개쳐두리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이내 나 자신도 어쩔 수 없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밀어주어야겠다는 열망에 다시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그처럼 당시 나의 열정은 사랑만큼이나 절박한 것이었다. 사실 내가 일생 동안 느꼈던 그 뜨거운 욕구, 지금도 내가 각자에게서 최고의 것을 얻어내려고 싸우는 그 욕구는 사랑이었다.”
‘나’는 메데릭이 숲 속을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그래서 교실에서도 숲 속만을 생각하는 전문 몽상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메데릭을 통해서 여교사라는 직분과 인습에 영원히 갇혀버리게 될지도 모르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메데릭도 배움에 대한 기쁨을 느껴간다. 두 사람은 동사변화를 다 외우게 되면 같이 밥코크 산에 올라가기로 약속을 한다.
‘나’는 메데릭과 말 위에 올라앉아 무한히 넓은 평원의 광대함, 그 쓸쓸한 고귀함,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나’는 메데릭의 순수함이 타고난 자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골짜기에서는 찬 물 속에서 헤엄치는 송어를 손으로 잡아본다. 손 안에 뭔가 조그맣고 미끄러운 것이 어렴풋하게 꿈틀거린다. 메데릭이 말했던 그 느낌은 분명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의 느낌이었다.
나도 학생 때 이런 느낌을 나누었던 선생님을 간혹 떠올리곤 한다. 나에게도 대평원의 열정을 가지셨으며, 세상의 무엇보다 순수함과 생명력 넘치는 눈빛을 가지신 선생님이 딱 한 분이 있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이고 체육선생님이셨던 그 분은 나를 그렇게 예뻐해 주셨다. 자신이 출연하는 연극 공연에 초대하는 티켓을 두 장 주셔서 엄마와 같이 보러 갔던 기억이 가슴 깊이 남아있다.
나는 지금도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메데릭과 비슷한 나이의 내가 나의 선생님으로부터 배웠던 인생살이의 한 대목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직접적인 영향력을 남기셨던 것이다. 내 삶의 일부를 다른 이들과 나누면서 시련도 많이 겪었지만 아직도 그 소신은 잘 변하지 않는다.
‘나’와 메데릭의 순수한 관계는 메데릭의 동물적인 본성을 가진 아버지에 의해서 여지없이 깨어진다. 교육이라고는 받아 본 적이 없는 메데릭의 아버지는 부자이지만 실패한 인생이다. 자신의 실패한 인생 대신 아들이 반에서 일등하기를 바란다. 반에서 꼴찌인 아이에게 일등하기를 바라다니!!
메데릭은 자신의 인디언 엄마를 닮아 슬프지만 순수한 꿈이 담긴 그늘진 보라색의 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거만하고 건방진 태도도 닮은 아이이다. 둘 사이의 우정은 메데릭의 연정으로 바뀌면서 문제는 복잡해진다. 두 사람 사이를 질투하는 메데릭의 아버지의 훼방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발전적으로 회복되기가 어렵다.
소설의 결론 부분에서 ‘나’는 소도시로 전근을 가게 된다. 그리고 산으로 도망가 학교에 나타나지 않던 메데릭이 떠나가는 선생님이 탄 기차를 향해 검은 갈기를 휘날리며 말을 타고 달려오면서 두 사람이 재회를 하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나’는 이제 메데릭이 달려올지도 모를 교실의 창가에 서서 생각한다. 메데릭이 어머니가 물려준 자연의 힘과도 같은 원초적인 순수함의 영향력이 이길 것인가? 아니면 메데릭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아버지의 영향력이 이길 것인가? 아니면 결국에 가서는 ‘내’가 이길 것인가? 찬물 속의 송어와 같은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력이 옳을까? 나도 생각해본다.
아이들을 만나는 교사에게 교훈적인 것은 다음의 대목이다.
“아마도 평원의 그런 외딴 마을에서 이름 없는 여교사 생활을 해본 경험이 없이는 어린이들에 대하여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느낌,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추억을 그들의 삶 속에 남긴다는 황홀한 확신, 그리고 또한 그 아이들과 헤어지는 격렬한 아픔, 어찌나 단단히 맺어져 있는지 마침내 다시 숨을 쉬기 위하여 그것을 다시 푸는 것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슬픔의 매듭, 내가 경험한 이러한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글쓰기 강의에서 교사를 세가지로 분류한 적이 있다. ‘내 생의 아이들’에 나오는 열여덟 살짜리 풋내기 교사를 보면서 매화마을 섬진강 교사 김용택 선생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