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e   김경옥  첨부파일

Subject  역사 논술 15기 과정을 마치며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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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끝났다. 하지만 찜찜하다.
정말 힘든 공부 과정이었다. 공부를 이렇게 힘들게 해 보긴 처음이다. 공부라면 늘 자신 있었고 공부 그 자체를 즐겨 했었는데...... 못해서 낑낑거린다거나 안 하는 아이들을 그저 게을러서 농땡이 치는 거지 정말 어려워서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해 봤다. 하지만 이번 역사 논술을 하면서 내가 그 동안 공부랍시고 한 것들이 얼마나 얕은 지식이었나, 별 고민 없이 지적 호기심을 채워 가는 심심풀이 과정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 어려워서 숙제를 못해 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진지하게 들었다. 아이들의 마음을 좀더 이해해 주어야지.
진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것, 모든 문제에 자신을 대입시켜 본다는 것, 현상들마다 의미를 찾고 본질을 찾아낸다는 것, 말만큼이나 어려운 과정이었다. 머리로는 도저히 안 풀리는 미로찾기였다. 지난 5개월 동안 개인적인 일들이 계속 꼬여서도 어려웠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하면 할수록 목표는 자꾸 멀어져 가고 이거다 싶으며 아니고 하는 실망에 더 힘들었다. 약이 올랐다. 선생님이 조금 미울 때도 있었다. "그냥 좀 이거다 하고 가르쳐 주시면 안되나요?"하는 생각도 들고, "선생님, 어쨌거나 열심히 숙제 해 온 사람들은 일단 무조건 칭찬부터 해주셨어야지요. 그만큼 해 가느라 다들 힘들었고, 숙제 하면서 갈등은 얼마나 하는데요? 진혜선 선생님은 마지막 숙제를 하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교실에서 쫒겨 나는 악몽까지 꾸었다고 합니다. 선생님께 어설픈 숙제로 혼나느니 차라리 안 해 가자 까지는 아니어도 감히 숙제를 서툴게 라도 해서 제출할 용기가 안 난다고 하는 건 문제가 아닐까요? "
처음 역사 논술을 시작할 때와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르겠지. 달라야 한다. 이렇게 자기 최면까지 거는 것은 이 문제가 나에게 너무도 절박하다는 뜻이다. 선생님 말씀대로 어영부영 부업 삼아 하는 논술교사가 아닌 무언가 자기 확신을 갖고 아이들에게도 긴 인생에 작은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반장이라서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성격적 완벽주의 때문에 열심히 한 것도 아니다. 이번 수업을 통해 무언가를 꼭 찾고 싶었다. 물론 이런 철든 생각을 역사 논술 시작할 때 했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많은 보탬이 되었겠지만, 시작하고 한참 지나서 어렴풋이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다. 역사 논술이 종강한 지금 아직도 안개 속이다.
어제는 선생님들과 오후 4시까지 이야기를 하다 헤어졌다. 특히 주영숙 선생님의 극단적인 피해의식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주영숙 선생님의 "섣부른 논술 수업은 안 시키는 게 낫다"는 말에 모두들 그건 아니라고 힘 주어 말하였지만 조금 뜨끔한 것도 사실이다. 주영숙 선생님이나 우리 모든 선생님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용기와 마음의 여유이다. 자신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부단히 뛰어넘으려는 노력과 용기. 글이 너무 비장해 지고 있다.
그래도 이번 역사 논술 수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역사 공부를 계속 끊임없이 해야겠다는 확신과 나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진혜선 선생님이 <거꾸로 읽는 한국사> 읽고 쓰신 에세이가 특히나 긴 파장으로 가슴에 남아 있다. 사실 나는 그 책을 읽을 때 몇 가지 사실 빼고는 거의 아는 내용이라 약간은 건방을 떨며 읽었는데, 진혜선 선생님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의 순수함과 솔직함, 자유로움...... 아, 한방 먹었다. "정말 마음으로 읽었구나. 많이 알고 있다는 착각이 오히려 마음의 눈을 멀게 했구나" 뼈아픈 각성을 하는 기회였다.
이제 심각한 얘기는 다음에 또 하기로 하고, 어제 밤에 내 모습 좀 이야기 해 보자. 4시까지 선생님들하고 이야기하면서 채워지지 않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다 왔는데 그래도 기분 참 묘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해방감과 허전함에 어쩔 줄 몰라 하다 오후 6시 장 보러 나갔다. 근데 사는 것이 죄다 시간 품을 많이 팔아야 하는 것만 고르는 거다. 웃겨. 쪽파 한 단, 그것도 양 많고 가는 실파로. 조기 18마리. 가장 끝내 준 것은 고구마 줄거리 엄청 큰 걸로 한 단. 그 동안 감히 손 델 수 없던 재료들이다. 왠지 아무 생각없이 단순 노동의 무아지경에 빠지고 싶었나 보다. 쪽파 한 단 다듬고 고구마 줄거리 한 단 다 벗기고 나니 아이고 허리야, 밤 12시가 다 돼 갔다. 그렇다고 머릿속이 정리가 되었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오늘 새벽까지도 머리 속은 전쟁 중이다. "통사 수업 계획안인데, 어떻게 해야 되나? 에이, 몰라, 아니야, 다시 한번 고민해 보자. 그래 절실한 고민이 부족했어. 맞아. 이건 수업 계획안이 아니고 역사 책 도서 목록이야, 그런데 어쩌라고?"
신문지 쫙 펴고 고구마 줄거리 껍질 벗기며, 다 끝난 역사 논술 수업 계획안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으니, 이래서 선생님이 "이제 시작입니다." 라고 했구나. 아이고 머리야, 좀 쉬었다가 다시 해 보자. 참 그 고구마 줄거리 벗긴 거, 쪽파 벗긴 거, 조기 18마리 그냥 냉장고에 있는데 언제나 해 먹을려나? 벌써 저녁 8시가 다 되가네.
다음에 또 쓸게요. 역사 논술 15기 선생님들 안녕히 게세요. 선생님도 항상 몸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