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하면서 내내 찜찜했습니다. 끝내지 못한 토론을 접고 샘들과 밥을 먹을 때는 잠깐 기뻤지요. 목요일마다의 영양 결핍을 귀한 샘들과 둘러 앉아 담소하며 채웠기에 말입니다. 그러나 끝내고 돌아오면서, 하룻밤이 지나 새 날이 훤히 밝다못해 오후가 되버린 지금까지도 토론에 대한 찜찜함이 가시질 않습니다. 이 이상하고 찜찜한 느낌의 정체를 이 아둔한 머리로 밝혀내려니 진짜 괴롭습니다. 근데 어떻게라도 밝혀 내고 표현해 버리지 않고서는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네요. 샘들, 수업 시간에 못한 얘기들 제 글에 이어 많이 나눠 주시길 바랍니다.

    토론 주제에 대한 반론
토론 주제 설정은 가치 있는 토론의 필요 조건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잘못됐다면 그 토론은 토론을 위한 토론,말장난에 불과하다. '토끼'는 장용학의 '요한 시집'이란 단편 소설에서 서론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본편에 등장하는 '누혜'라는 인물의 삶을 대변하는 상징적 존재로서 작가가 설정한 장치인 것이다. 누혜는 6.25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인간 존재가 이념 앞에서 무참히 유린당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자신이 추구한 이념(공산주의)에 회의와 혼란을 느낀다. 이제 그의 고뇌는 이념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존재, 그것이 갖는 비극성으로 환원된다. 결국 그는 수용소에서 반동으로 낙인찍혀 고통받으며 수용소와 바깥의 경계인 철조망에 목을 매고 자살한다. 좀 어렵지만 작가는 이를 통해 '자유를 위해 자유가 죽어야 한다'는 주제를 제시한다. 기독교에서 진짜 메시아 예수가 오기 이전 예언자 요한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요한이 메시아인 줄 알았으나 그는 예수가 오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 존재였다. 주인공 '누혜'도, 서론의 '토끼'도 이 요한과 같이 진정한 자유 내지 진정한 가치의 도래를 위해 죽는 존재, 즉 희생하는 존재라는 공통 분모가 있다. 작가는 이를 작품 제목과 서론의 상징적 장치,주인공의 삶으로 치밀하게 엮어 놓았다. 프린트에 다 제시되지 못했으나 이 '토끼'가 죽은 자리에서 버섯이 자라났는데 다른 토끼들이 그 사연을 알고 '자유의 버섯'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로써 프린트 내용만으로도 토끼의 삶의 자세를 '더 나은 삶을 향한 도전'으로 추론하는 것은 그리 무리가 없을 듯하다. 또한 소설이란 상징의 활용이 무한히 허용되기에 우리가 프린트물만 읽고, 또 '요한 시집'이 소설이란 상식 정도만 있으면 토끼의 양상을 통해 앞서 언급한 삶의 자세를 무리없이(논리적 비약없이) 추론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징수원'의 예화에 있다. 그것은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일종의 잡문(수필?)집에 실린 글이다. 어제 우리는 그 글을 읽고 '징수원'의 태도를 일반화시켜 '현실 안주적 삶의 자세'라는 부정적 평가를 내리기도 하고 이와 반대로 '현실 긍정적(능동적) 삶의 자세'라는 긍정적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차라리 이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을 가지고 징수원에 대해서만 토론을 했다면 훨씬 더 논점이 명확한 토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단편적으로 해석해야 할 징수원의 예화에 무리하게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면서까지 토끼와 견주어 토론을 벌였다. 한 마디로 위상이 맞지 않는 대상 간의 토론을 벌인 것이다. 토론을 위해서 상징적 의미까지 가지 않아도 될 텍스트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징수원은 객관적으로 볼 때 따분하기 그지 없을 직장 생활을 자기식으로 따분하지 않게 해 나가고 있는 인물이다. 단지 그뿐이다. 그에 대해 여타의 것을 함부로 추론할 근거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그의 직장 생활만 보고 그의 삶의 자세 전반을 논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거기에는 다음 두 가지 오류가 개입됐을 것이다. 첫째, 인간의 삶의 자세는 그가 물리적으로 가장 오랜 시간 종속되어 있는 환경에서 살펴야 한다. 둘째, 직장 생활 태도는 한 인간의 삶 전반을 지배한다.
또한 한 인물의 삶의 태도는 그 인물이 속한 시대적,사회적 맥락을 통해 살펴야 하고 이는 구체적 사건 속에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징수원의 예화 자체는 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얘기로서 이러한 요소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징수원의 행동을 특이하게 느끼고 대화를 열고 식사까지 나눈 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굳이 사건을 따져 볼 수 있으나 이 사건이 징수원의 삶의 태도를 좀더 신빙성 있게 분석하는 결정적 단초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징수원의 어떤 의도,의지가 개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저자의 징수원에 대한 개인적 호기심,관심밖에 없다. 그리고 징수원의 이야기를 책으로 상품화하려는 저자의 무서운 관점만이 있다. 굳이 징수원의 특성을 삶의 태도로 추상화시키려면 다음과 같은 억지를 써야 한다. 미국 도로공사 하급 공무원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이 어쩌고 저쩌고....그런데 아는 바로는 한국 도로 공사 공무원 중 징수원의 경우 월급 수준이 그리 나쁘지 않은데다 그야말로 공무원이니 평생 직장 아닌가? 실업 대란이라는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 중 과연 몇 퍼센트가 징수원의 노동 환경 개선이 시급한 문제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오히려 더없는 부러움의 대상 아닐까?  좁은 부스에서 하루 종일 똑같은 일만 해도 좋으니 제발 일자리만 달라고 하소연할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미국 역시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철저히 확인해 볼 문제이나 거기까지 파고드는 건 시간상 미루기로 한다. 그리고 좁은 부스에서 단순반복적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건 열악한 노동 환경이 아니라 징수원의 업무상 가장 큰 특성이 아닌가? 도로 상에 설치할 수 있는 최적의 부스 면적은 얼마이며 징수원이 갑갑함을 느끼지 않도록 인간적으로 배려하는 부스 면적은 얼마인지를 일일이 다 따져 보고 예화 속의 징수원을 직접 만나 노동 환경에 대한 견해를 확인해 보지 않는 이상 우리는 함부로 징수원에게 현실안주적인 노동자,안일한 노동자라고 돌을 던질 순 없을 것이다. 부스를 넓히고 화장실까지 갖춰 달라고 징수원이  시위를 했어야 한다고 떼를 쓴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징수원이 댄스 파티나 하고 이런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고 비판할 여지는 전혀 없는 것이다. 더불어 동료들과의 관계를 다분히 단절적으로 파악했는데 이것도 순전히 토론자들의 억측이라 생각한다. 징수원은 업무 특성 상 업무 시간 내에 다른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협의하기가 어렵지 (불가능하지)않은가? 이걸 두고 타인과 인간적인 관계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퇴근 후의 징수원의 일상, 인간 관계까지 다 따져 보아야 하는데 텍스트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결국 징수원의 예화 같이 삶의 태도 분석이 상당히 어려운(대체로 그 분석이 근거없는 일반화의 오류로 흐를 것이기에) 텍스트를 설정한 것이 이 모든 무리한 논의를 낳지 않았나 싶다. 언론에서 접하는 각종 사건이 단편적이고 일회적인 예화에 그치지 않고 시사적 분석이 가능한 것은 그 사건이 시대적,사회적 함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징수원의 예화는 결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토끼'와 토론할 만한 대상은 '아큐' 와 같은 인물이 적절하지 않나 생각한다. 왜냐하면 토끼가 자신이 부당하다고 느끼는(개선,변화시켜야 한다고 느끼는) 환경에 대해 결과를 가리지 않고 과감하게 도전한 것과 달리 아큐는 부당한 세계를 알면서도 '정신승리법'이라는 자기합리화적  방법으로 이를 묵인했기 때문이다.또한 아큐정전의 경우 시대적,사회적 배경 및 이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을 통해 아큐의 삶의 태도를 소설의 상징성을 발판으로 무리한 억측없이 논리적으로 추론가능하다.   물론 이 외에도 각종 소설에서 징수원보다 훨씬 더 위상이 맞고 토론의 가치가 있는 인물 선정이 가능할 것이다. 또는 한 작품 내에서 동일한 조건 하의 두 인물이 상반된 행동을 하는 경우를 놓고 토론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토론에서 양방의 입장 간에 위상이 맞아야만 함을 강조하고 싶다.

'비판적 텍스트 이해'라는 목적 하에 이 두 가지 텍스트를 학생들에게 읽힐 때 교사는 토끼에 대해서 무모하다,멍청하다, 바보다 비난하기쉬운 학생들의 사고가 사실 결과주의적 발상에 있음을 지적해 주어야 할 것 같다. 또 징수원에 대해 긍정적이다, 능동적이다하며 칭찬하기 쉬운 학생들의 사고가 사실 '긍정적,능동적'이란 추상적 의미에 대한 이해 결핍에 있음을 지적해 주어야 할 것 같다. 긍정적,능동적 삶의 자세는 현실 안주적,자족적 태도와 구분되어야 하며 좀더 나은 삶을 향한 의지,노력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삶의 자세'를 이야기할 때는 '긍정'이 '현실의 무비판적 수용 내지 묵인, 인정'등이 아님을 인식해야 하고 '능동'이 '변화를 위한 노력,행동성'과 직결됨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토론은 이러한 인식없이 어휘가 갖는 표피적 의미,일상적 의미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징수원의 경우 삶의 태도 추론 자체가 어렵고 따라서 옳다,그르다 식의 입장 정리도 어렵다.  또 징수원의 특이함을 책에다 실어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분도 자신의 일을, 환경을 초라하고 지루하게만 보지 말고 징수원처럼 긍정적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즐겨 보세요'라는 메시지를 남발한 저자의 관점이 더 무섭다. 징수원의 경우는 그냥 이렇게 소개되고 말았어야 한다. '어떤 징수원이 있었는데 따분할 것만 같은 업무를  댄스 파티를 하며 즐기고 있더라. ' 이런 류의 처세술 저자들이 제발 자기 의도대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 그대로를 무리하게 메시지화 시키지 않으면 좋겠다. (남의 밥그릇 뺏는 얘긴가?)

결국 최지연 샘께서 비판적 이해와 더불어 '실전,토론 체험'을 기획하심은 좋았으나 토론 주제 자체가 토끼라는 상징적 존재의 상징적 삶의 자세 및 징수원이라는 실제 인물 및 직장 생활 태도라는 위상의 결렬로 인해 소정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본다. 그러니 샘이 마지막에 갈무리해 주신 과제(토끼측:자신의 이상 추구를 위해 주변인이 희생되는 문제/징수원측:타인의 현실 비판 및 개선 의지,노력을 방해하는 문제)는 잘못된 토론의 결과로서 해결의 필연성이 없는 것이다. 또 워낙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