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예송논쟁"이 문제인가?

   양반과 백성, 임금과 신하,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나타냄에 있어서, '상복을 입는 기간'은 누가 윗사람인가  
   누가 아랫사람인가를 나타내는 방법으로 보았다.

   (1) 왕은 왕이기 때문에 보통 집안의 순서따지기를 넘어서는 사람인가?
   (2) 왕도 다른 백성과 같은 방식을 적용할 것인가? (왕은 절대자? 양반의 우두머리?)

    이처럼 "사림파"가 꿈꾸었던것은 '위 아래를 밝혀 세상을 바로 잡는일'이었다. 그래서 누가 '주도권'을 잡느
    냐 하는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남인 - 왕을 '절대권력'으로 간주했다.
    *서인 - 왕은 '절대자'라기 보다 '양반의 꼭대기'로 보았다.

2. "북벌론"의 주창한 것은 "존명사대"?

    현실적인 준비가 전혀 없었고, 효종의 당대에만 논의되다가 그 이후에는 한번도 논의 된 적이 없었다. 이것
    은 담당인물이었던 "송시열"이 '기강확립'과 '수신제가'를 강조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오랜전쟁으로 새로
    운 질서를 위해서'북벌론'을 꺼냈고, 이것은 "예송논쟁"과도 긴밀힌 연관이 있었다.)

3. 미풍양속, 향약과 두레

   향약은 처음 중종때 실시되었는데, 초기에는 지방의 감사(사림파)의 주도하에 실시되었다. 유향소가 여전히
   존재해서 대립하였으나, 성종때 유향소가 흡수되면서 바뀌게된다. 향약은 윤리까지 다루었고, 두레는 노동
   중심의 조직이었다. 많은 노동요와 풍악도 두레에서 나온 경우가 많았다. 이런 '향촌질서'는 식민지 시기를
   지나면서 강압적으로 해체되었다. 남아있는 것들도 많이 왜곡된 형태로 남게 되었다.

                                                  *기타 의견들

1) "당쟁"의 긍정적인 측면은?
  - 사림파는 어떻게 세계를 볼 것인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 를 고민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 과
     정이었기에 (향약, 두레)  결코 허망하기만 한 싸움은 아니었다.

2) 그 당시의 주변국의 정세를 비교해서 공부해 보자. (명 / 청 / 왜)
  -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소수민족(200만정도)이었지만, '실리'를 중요시하고, 민첩한 군조직(팔기군)을 가
    지고 있었다. 명나라는 '명분'을 중요시 하는 한족의 나라로, 엄청난 몸집과 문화의 우월성을 가지고 있었지
    만, 안으로 곪아가다가 망했다. 청나라는 한족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인재를 등용하면서도 다수의
    한족을 잘 다스렸다. '실리'와 '명분'의 관점에서 비교해 보자.

3)"향약"의 내용중에 구체적인 부분은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자.
  - 신분질서유지(구체적인 부분까지 세세하게 표현)와, 공동체벌의 형태(멍석말이, 조리돌림 등등...)

4) "형벌"의 여러 사례와 변천사에 대해 알아보자. 그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의 관점에서 보
     면 문제가 되는 것이 많다. 그렇다면 미래의 관점에서 볼때,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에는 어떤
     것 들이 있을까?

5) 형벌의 역사중 총살형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 교수형이다. 초기에 교수형을 처할때 높이가 맞지 않으면 사형
    수는 살갖이 찢기며 고통스러워하고 오래 걸렸다. 그래서 "의사"가 사형수의 몸무게와 키를 참조하여 높이
    를 조절하게 되었다. '의사'의 직분이 사람을 살리는 것인데, 사람을 죽이는 과정에 참여한다는 사실에 많은
    의사들이 괴로워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도 사람으로서 덜 고통받을 권리가 있다는 논리도 있었다. 이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더 나아가서 "안락사"문제와 연관시켜서도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