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오랜만에 영화를 한편 보려 비디오 가게를 들렸습니다. 젊은 아버지가 어린 아들과 함께 비디오를 고르고 있었습니다. "이 만화는 본 것이다", "그래도 그 만화를 보겠다"는 실랑이가 한없이 이어졌고, 주변 사람들은 그 큰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습니다. 겨우 비디오를 빌려 전철을 탔습니다. 두 정거장쯤 지나칠 때였습니다. 객차 안에 전화벨 울리는 소리가 끝없이 울리더군요. 주위 사람들의 벨소리가 애타게 부르는 사람을 찾으려 두리번거리는 동안 막상 당사자인 젊은 청년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심취해 있더군요.
그러나 그날 제가 겪었던 사소한 불행의 최고봉은 단연 한밤중의 단잠을 깨운 창문 밖 술취한 목소리였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어?"라는 허망한 자기확인에서 출발한 목소리는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과 애증의 폭발과 침체를 아주 오랫동안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담스러운 솔직함과 목소리 크기 덕분에 저는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멍한 정신을 가다듬게 되었습니다.
잠시 동안 오늘 제가 겪은 사소한 불행들과 그것이 만들어낸 불쾌감을 돌이켜봤습니다. 그 사소한 불편함들이 불쾌했던 것은 그 불편함 자체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아들과의 사소한 실랑이, 이어폰 속에 흘러나오는 음악, 그리고 술기운에 취해 있는 그들의 세계에서 저의 존재가,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존재가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느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타인과 공유하는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타인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존중을 형성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인가에 취해 이렇게 사실을 종종 망각합니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사람에게 이제 타인은 나와 똑같은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 바깥에 의미 없이 존재하는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소외 현상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는 오직 자신의 이익과 쾌락만을 극대화하도록 종용하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해갑니다. 오늘날 과연 우리는 무엇에 취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나와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이 믿기지 않는 인연으로 엮어진 타인의 삶을 망각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돌이켜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김형준 본지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