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 비교하기’에서 자주 범하는 오류들

김형준 | 본지 편집주간 hystiny0@naver.com

 

어떠한 논제이든 기본적인 구조는 동일합니다. 첫 번째로 문제 현상을 파악하고, 다음으로 문제 현상에 대한 가치판단이나 해결책, 다른 상황에의 적용 등을 요구하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제현상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그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답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입시 논술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출제자가 요구하는 ‘문제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답안을 작성하면서 범하는 오류가 ‘논제이탈’이라는 점 역시 ‘문제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증명하는 사례입니다. 그렇다면 왜 수많은 학생들이 ‘문제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논제이탈’의 오류를 범하게 될까요?

그것은 근본적으로 논제에서 말하는 ‘문제 상황’이 제시문의 독해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고, 많은 학생들이 그 ‘문제상황’을 읽어내는 독해과정에서 여러 가지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초창기 입시 논술의 경우, ‘문제 상황’을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비교적 ‘친절한’ 논제들로 존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최근 출제되는 논제들은 ‘문제 상황’을 직접적으로 말해주기 보다는, 학생들이 제시문의 독해들 통해 추론해내도록 요구하는 형태가 일반적입니다. 간혹 핵심 키워드를 명시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 역시 보다 구체적인 주제는 제시문의 독해를 통해서만 이해되도록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제상황’을 읽어내는 학생들의 독해능력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약에서 분류와 비교로

 

그런데 제시문을 통해 문제를 읽어내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가장 단순한 방식은 제시문의 요약을 통해 ‘문제상황’을 파악하는 방식입니다. 이 경우 제시문의 내용만 정확히 이해하면 별다른 문제 없이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최근의 출제 경향은 단순한 요약이 아니라 제시문들간의 분류 혹은 비교를 통해 ‘문제상황’을 파악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실제로 대다수의 학교에서 출제되는 문제를 살펴보면 분류 혹은 비교를 요구하는 문제가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수험생들의 철저한 대비가 요구됩니다.

각 대학에서 분류 혹은 비교 문제를 출제하는 까닭은 이러한 방식이 학생들이 가진 사고능력을 보다 복합적으로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분류 혹은 비교는 제시문에 대한 정확한 요약을 전제로 합니다. 제시문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서는 분류나 비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분류 혹은 비교를 묻는 문제들은 저절로 학생들의 요약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나 분류 혹은 비교를 묻는 문제들은 제시문에 대한 요약만으로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내용의 제시문들을 분류 혹은 비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통적인 기준을 세우고, 이를 통해 제시문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추론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요약에 비해 분류 혹은 비교를 묻는 질문은 수험생들의 독해 능력뿐만 아니라, 추론 능력 또한 요구한다는 점에서 보다 난이도가 높아진 유형의 논제라 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보아 분류와 비교 중 보다 난이도가 높은 질문은 비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분류가 특정한 기준 한두 가지를 바탕으로 비교적 간결한 대칭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면, 비교는 기준점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단순한 대칭구조가 아닌 경우가 많으며, 그에 따라 보다 고도의 독해 및 추론 능력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특히 제시문들간의 비교를 요구하는 논제들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자주 빠지는 오류는 어떠한 것이 있으며, 또 그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를 그 동안 출제되었던 기출논제 사례를 통해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오류 유형 1. : 제시문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경우

 

제시문들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제시문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이 제시문의 내용을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 제시문을 정확히 비교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오류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다음 사례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사례 1] 다음 두 제시문의 관점을 비교하시오. (2007년 이화여대 수시 기출 논제 변형)

 

[가]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볼 때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은 표면에서 반사된 빛에 의해 촉발되는 일련의 신경 활동에 의존한다. 전적으로 물리적 특성만을 가지고 있는 빛이 눈의 망막에 도달하면, 신경 활동으로 변환되어 두뇌로 전달된다. 빛의 물리적 특성은 질서정연한 규칙에 따라서 작동한다. 따라서 신경 변환도 매우 규칙적이며, 사람들 간에 구체적인 차이를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각적 인상은 말초신경계의 수용기세포를 흥분시키는 감각경험에 국한되지 않는다. 시각적 인상에는 감각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관찰자의 인지적 배경이 수반된다. 따라서 메리 카삿(1844~1926, 미국 출신의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을 볼 때 여러분이 경험하는 정서적/지적 반응은 나의 경험과 전혀 다를 수 있으며, 동일인의 경우에도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네덜란드 출신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의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한 반응과 카삿의 <목욕>에 대한 반응이 판이할 수도 있다. 우리들 각자는 세상에 대한 심적 구조를 발달시키는 화가에 있어서 엄청난 다양성을 보이기 때문에 세상90,혀 다르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주의 주장이 지나치게 과장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들 간에는 광범위의 공통경험의 영역이 있어서 어느 정도는 지적 등가성(intellectual equivalence)90유지시켜 준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또한 생리적으로도 공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시각자극의 최초 처리 과정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동일하다. 이와 같이 단순한 예로부터 우리가 내릴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결론은 시각의 이중성 개념이다. 시각경험은 눈에 주어지는 시각자극뿐만 아니라 두뇌에 의한 감각경험의 해석을 통해서 달성된다.

 

[나] 눈이 있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것이며, 인식한다는 것은 전체 중의 부분만을 파악한다는 것이기에 눈이란 진정 감옥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두지 않고 부분이라는 틀, 인식의 틀 속에 가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인식의 세계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전체 가운데 부분을 떼어내어 그것을 전체인 것처럼 ‘틀짓는’ 감옥의 세계, 관견(管見)의 세계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식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논리적 사유―이성적 담론―는 일면 가장 비철학적이다. 인식의 역사는 감옥의 역사이며, 인간 사유의 역사는 ‘틀짓기’의 역사다. 틀짓기의 역사는 전체를 부분으로 난도질하는 ‘비틀기’의 역사다. 눈이 있고 그 눈이 바라보는 대상이 있는 한, 즉 인식의 주체인 ‘나’가 있고 인식의 대상인 ‘너’가 있는 한 ‘틀짓기’의 역사, ‘비틀기’의 역사는 필연이자 숙명인 것이다. 눈이 본 부분을 전체인 것처럼 절대화하는 인식의 폭력은 실로 오랜 역사를 지닌다. 그것의 역사가 곧 인간의 역사라 하더라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어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전체 가운데 부분을 도려내어 이를 전체인 것처럼 틀짓는 것, 이것이 인식작용의 본질이자 한계이며 숙명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펼치는 인식작용의 총체적 산물인 언어도 인식작용과 마찬가지로 숙명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언어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와 문명 그 어디서 인간다운 ‘진보’의 역사, 인간다운 ‘발전’의 문명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있는가. 오히려 시기, 음욕, 탐욕 등으로 가득 찬 인간의 눈은 “좋은 눈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는 악한 눈”이라는 라캉의 주장이야말로 모든 대상을 ‘타자화’하고 폭력을 유도하는 파괴적인 인간의 눈에 대한 가장 정확한 규정이 아니겠는가. 타자화는 인식의 주체가 자의적으로 휘두르는 폭력과 다름없다. 이러한 틀짓기, 비틀기의 역사는 바로 모든 개념화의 원천인 눈이 펼친 역사다. 인간의 눈이 본질적으로 ‘악한 눈’이라면, 눈이 있는 한 인간의 세계는 파국을 면할 길이 없다. 종교적 용어를 구사한다면 인간에게 구원은 없다.

 

사실 이 문제의 난이도는 그리 높지 않습니다. 제시문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기만 한다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학생도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학생들이 제시문 (가)의 내용을 꼼꼼히 파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여기서 오류를 범하는 이유는 제시문 (가)를 단순히 ‘인식의 주관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글로 읽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시문 (가)는 인간의 인식이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시문 (가)를 ‘인식의 주관성’으로 독해한다면, 제시문 (나)와의 차이를 찾을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출제의도에서 벗어난 엉뚱한 부분을 차이점으로 내세우게 됩니다. 예를 들면 제시문 (가)는 인식의 주관성을 단순히 설명하는데, 제시문 (나)는 인식의 주관성이 역사에 끼친 영향까지 이야기하고 있다는 답을 작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비교가 되기 위해서는 두 제시문에 모두 나타난 내용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한 제시문에 나타난 주장을 확대해서 다른 제시문에는 이 주장이 안 나타나므로 두 제시문에 차이가 있다고 비교를 하는 것은 정확한 답안이 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제시문 (가)는 ‘인식의 주관성’이 아니라 ‘인식의 이중성’을 주장하는 글입니다. 인간의 인식은 ‘물리적 과정’과 ‘인지적 과정’의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는 내용인 것입니다. 제시문을 이렇게 이해하면 제시문 (나)와의 차이점이 뚜렷해집니다. 즉, 제시문 (가)가 인간의 인식이 객관적인 부분과 주관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반면, 제시문 (나)는 인간의 인식이 처음부터 ‘선택적’이기에 주관적이며, 이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글이라는 점에서 두 제시문의 내용이 비교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제시문의 내용을 정확하고, 꼼꼼하게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게 비교를 하기 위한 기초 중의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은 제시문의 주제문을 한 문장으로 명확히 정리해보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오류 유형 2. : 보이는 그대로 외형적인 분석에 그치는 경우

 

입시 논술에서 쉬운 문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수시의 경우 경쟁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시험의 난이도는 매우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난이도가 낮다면 변별기준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학생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논제들을 매우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많습니다. 특히 요구조건을 주의깊게 읽지 않고, 제시문에만 집중하는 경우 출제자가 파놓은 함정에 빠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다음 사례를 통해 학생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례 2] 다음 두 제시문에 나타난 ‘흡연행위에 대한 시각’을 비교하라. (2008 서강대 수시 2-1 기출문제)

 

[가] 남초(南草)인 담배는 재계(齋戒)를 하지 못하게 하여 신명(神明)을 통할 수 없게 하고, 공연히 재물을 소모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는 할 일이 많은데 상하노소 없이 종일 또는 종세(終歲)토록 담배를 피우는 데만 주력하고 있으니, 만일 그 마음을 바꾸어 진리를 탐구하면 대현(大賢)이 될 수 있을 것이며, 학문을 닦으면 문장이 될 수 있고, 살림을 다스리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남초(南草)-남쪽에서 전래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담배의 별칭

*재계(齋戒)-마음과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하는 일

-이익(李瀷), 『성호사설(星湖僿設)』

 

[나] 흡연가는 그의 담배를 통해서 인생을 살며, 담배는 곧 그의 삶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없애버리는 것은 그에게서 건강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존재의 한정적 순간을 박탈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는 이미 건강하다. 즉 그것이 바로 그가 담배를 피우는 이유인 것이다. 그는 하루 종일 피워대는 담배 속에 들어 있는 독이 담배를 피우면 피울수록 더욱더 예민하게 느껴지는 많은 병과 역기능을 야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양한 상황에서 그의 모든 감정과 운동에 수반이 되는 임무를 수행하고 쾌락을 획득하기 위해 담배를 조직적으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흡연습관을 계속해 나간다. 담배가 없으면 그가 더 건강한 삶을 누릴 것인가? 그는 단순한 삶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삶 그 자체가 메마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도덕주의자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흡연가들은 사르트르가 말하고 있는 것, 즉 “담배가 없는 삶은 살 가치가 거의 없는 것이다.”라는 말이 옳다고 수긍할 것이다.

-리처드 클라인, 『담배는 숭고하다』

 

많은 학생들이 이 논제에 대해 쉽게 답을 작성합니다. 제시문 (가)는 흡연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제시문 (나)는 흡연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식으로 쓰는 것이지요. 그런데 출제자가 과연 그렇게 눈에 보이는 답을 요구하는 논제를 출제했을까요?

여기서 요구 조건을 꼼꼼히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구 조건을 보면 두 제시문의 견해를 비교하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굳이 ‘흡연행위에 대한 시각’이라고 강조해 표현하고 있는 것을 눈여겨 볼 수 있습니다. ‘흡연’도 아니고, 더구나 ‘흡연결과’도 아닙니다. ‘흡연행위’라는 말을 쓴 이유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다시 제시문을 살펴봅시다. 얼핏보면 제시문 (가)는 흡연행위가 부정적인 결과를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읽힙니다. 그러므로 제시문 (나)는 당연히 ‘흡연행위가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다’로 읽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제시문 (가)를 생각하지 않고 제시문 (나)부터 있는 그대로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 됩니다. “흡연자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흡연을 선택한 것이다.” 즉, 여기서 흡연의 긍정성 혹은 부정성은 제시문의 핵심이 아닙니다. 흡연자가 흡연행위를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요. 이렇게 제시문 (나)를 분석하고 제시문 (가)를 보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합니다. 제시문 (가)는 흡연의 부정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흡연행위를 하고 있는 흡연자들을 꾸짖는 글입니다. 즉, ‘마음을 바꾸’면 흡연행위를 중단할 수 있다는 내용인 것입니다. 여기서 제시문 (가)와 (나)는 공통된 시각을 보여줍니다. 흡연행위를 흡연자가 스스로 선택한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내용이 바로 출제자가 원하는 비교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학생들이 이 내용을 찾아내지 못할까요? 무엇보다 제시문에 대한 선입견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제시문 (나)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제시문 (가)의 내용에 맞추어 해석하기 때문에 흡연결과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제시문을 독해할 때 선입견을 개입시키는 것은 문제를 왜곡하는 지름길이라 할 것입니다.

또한, 학생들이 한번 떠오른 선입견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논제의 수준을 너무 낮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논제는 시험에 출제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오류 유형 3. : 이분법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

 

입시 논술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함정 유형이 바로 ‘이분법’입니다. 또, 실제로 학생들이 가장 많이 빠지는 함정도 ‘이분법’에 관련된 것입니다. ‘이분법’을 함정으로 활용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사실은 상반된 주장이 아니지만, 상반된 표현을 담고 있는 글을 출제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에서 살펴본 [사례 2] 역시 이분법을 활용한 함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논제의 핵심은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이지만, 많은 학생들이 눈에 보이는 상반된 차이에만 주목해 더욱 커다란 공통점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분법에 익숙한 우리에 사고는 제시문들의 다양한 관계를 파악하는 것을 때때로 방해합니다. 다음 사례를 통해 이분법의 함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례 3] 제시문은 인문학에 관련된 글이다. 두 제시문에서 취하고 있는 입장을 비교하라. (2007 경희대 수시 1 기출 논제 변형)

 

[가] 인문학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공학 등 그 연구대상이 비교적 분명한 분야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인간, 또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를 총체적으로 다루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humanities)은 로마시대에 쓰인 ‘humanitas’가 그 원조격인데, ‘인간임’ ‘인간다움’을 뜻하는 말로 학문적 대상이라기보다는 실천적으로 성취해야 할 목표로 다분히 이념지향적 성격을 지녔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전근대 서구에서는 그 내용이 지배계급이 지녀야 할 덕목으로서 고전에 대한 이해와 수사학, 그것을 가능케 하는 교육 등이었고, 이 같은 점은 동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목표는, 시대적 차이가 있습니다만 어떻게 인간적인 삶, 또는 도덕적인 삶을 영위할 것인가에 두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근대사회의 지배층과 지배이데올로기에 국한되었던 인문학은 근대에 접어들어 주체가 확대되면서 그 내용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인문학이 대학에 자리잡게 되면서 인문학은 대학과 운명을 같이 하게 됩니다. 이 같은 교육내용과 방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화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인간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가치, 인간적인 삶이 구가되는 사회를 추구하고 만들어 나간다고 하는 반성적인 사고, 비판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인걸, 대담 “인문학 위기인가”에서 발췌

 

[나] 칸트 이후로 서구에서는 문화적, 예술적 영역을 세속적 영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통합시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960년대 이후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의 대학들에서는 교양교육과 기초 소양교육의 의미와 내용과 목적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 미국교육의 구조와 권위와 전통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대학에서는 그동안 전통적 학문영역에서 쫓겨난 비순수학문 분야들이 새롭게 힘을 얻게 되었지요. 이러한 운동들이 반제국주의/반권위주의의 물결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변화에 대한 서구의 반응 역시 처음에는 매우 보수적이었고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저는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적인 태도에 반대합니다. 순수와 전통을 내세우며, 현실과 괴리된 상아탑 속에서 안주하려는 태도는 이제 더 이상 용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전통 수호자들은 인문학의 위기와 문학의 위기를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문학과 학문은 이제 과감히 세속적이 되어야 하고 현실에 오염되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 순수문화나 신성한 학문이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사이드(Edward Said), 대담 “문화의 시대를 대표하는 비평가들”에서 발췌

 

두 제시문을 읽고 나면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다”와 “변해야 한다”는 구절입니다. 따라서 많은 학생들이 제시문들의 차이를 각각 인문학이 “변하지 않는다”와 “변해야 한다”로 단순하게 파악합니다. 바로 이분법의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사실 “변하지 않는다”와 “변해야 한다”는 엄밀히 말해 상반된 주장도 아닙니다. “변하지 않는다”가 사실 명제라면, “변해야 한다”는 당위 명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명제와 당위 명제를 대칭적인 구조로 파악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더구나 더욱 큰 문제는 “변하지 않는다”와 “변해야 한다”로 제시문을 파악하는 것은 무엇인가 매우 부족한 독해라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다”와 “변해야 한다”로 제시문을 이해하는 것은 “무엇이”라는 내용이 빠져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게 “무엇이”라는 내용을 덧붙여 봅시다.

제시문 (가)는 분명 인문학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제시문 (나)는 인문학의 형태가 방식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제시문을 파악해보면 두 제시문은 분명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표면적으로는 상반된 주장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제시문들의 차이점은 분명 다른 내용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제시문 (가)의 핵심을 다시 한 줄로 정리해 봅시다. 제시문 (가)의 내용은 “인문학의 본질적인 역할은 변하지 않는다”로 요약됩니다. 이제 제시문 (나)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인문학은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제시문의 공통주제는 인문학이 “변하지 않는다”와 “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즉, 제시문 (가)가 인문학의 성찰적 기능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제시문 (나)는 인문학의 현실적 참여기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두 주장도 상반된 것은 아닙니다. 각각 강조점이 다른 것일 뿐입니다.

이분법은 사물을 이해하는 편리한 수단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입시논술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이분법적으로만 제시문들을 받아들이면, 제시문의 주장과는 동떨어진 답안을 작성하기 쉽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류 유형 4. : 표면적인 요구조건만 생각하는 경우

 

마지막으로 제시문들을 정확히 이해하고도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 답안이 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제시문들을 비교하면서 병렬식 구조에 그치는 답안입니다. 분명 논제의 표면적인 요구조건은 제시문들을 ‘비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논제는 단순히 문제를 위한 문제가 아니라, 수험생들이 그에 대해 꼭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라는 출제자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논제에 담긴 출제자의 문제의식이 바로 숨은 요구조건입니다. 이 숨은 요구조건을 찾지 못한 답은 비록 내용상으로는 표면적인 요구조건에 합당하더라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기에는 부족한 답안이 되기 마련입니다. 다음 사례를 통해 표면적인 요구조건과 숨은 요구조건의 차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례 4] 제시문 [가] 와 [나] 의 ‘미래를 내다보는 일’에 대한 관점을 비교하여 설명하시오. (건국대 2009 수시 기출)

 

[가]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유럽 문명권 주도의 근대를 대신할 수 있는 다음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분명하지 않고, 다음 시대의 사회나 문화의 구조를 납득할 만하게 제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역사의 미래를 설계하는 거대 이론에 대한 기대는 헛되다고 할 수는 없다. 인류 역사의 과거에도, 고대인이 중세를, 중세인이 근대를 예견하고 설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려운 일이니까 힘들여 연구해야 한다.

과거의 예를 보면 대개의 경우 실제로 가능했던 일은 고대인이나 중세인이나 자기 시대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비판하는 것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불만과 비판을 길게 늘어놓다가 그 대안에 대해서 막연하게 단편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다음 시대를 만드는 지침으로 쓰였다. 후대인이 그 의의를 발견하고 확대해서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었다.

한국의 홍대용이나 프랑스의 볼테르는 중세를 비판하면서 그 대안을 마련하는 데 특히 앞선 선각자였지만, 다음에 오는 근대 사회를 정확하게 예견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선각자의 노력을 다음 시대의 사람들이 다음 시대의 것으로 만들어 활용하면 그 가치가 크게 증대된다. 그 덕분에 의도가 아닌 결과에서 볼테르가 근대의 설계자가 되었다. 홍대용은 다음 시대의 계승자를 만나지 못해 설계자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근대를 극복하면서 다음 시대를 설계하는 작업을 한다는 것은 그 정도의 일이다. 과거의 경과를 알 수 있기 때문에, 하고자 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다고 장담할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실제로 경험해 보지 못한 다음 시대의 대변자 노릇을 할 수는 없다. 지금의 시대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는 방안을 지금의 상황에서 말하는 것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다. 할 수 있는 일을 더 잘하면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지혜를 찾는 것이 온당하다. 그래서 역사철학적 통찰이 필요하다.

고대의 거대 이론을 넘어서서 중세를 만들고, 중세의 거대 이론을 고쳐서 근대의 것을 내놓고 한 경과를 알아 근대를 넘어서는 방안 창조가 그런 전례에서보다 더욱 타당성 있게 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다. 새로운 창조의 필연성과 방향을 역사 이해에서 도출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이론이 적용 범위에서나 내부의 논리에서나 아주 잘 다듬어져 있어야 한다.

- 조동일, <인문 학문의 사명>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나] 미래학자들의 일은 그 성격상 고도로 선택적이고 대단히 기술적(記述的)이어서 사진기와 공통되는 점이 많다. 현재의 현실도 너무나 방대해서 관찰로써는 적절하게 포착되지 않는데, 하물며 미래의 현실은 파악하기가 얼마나 더 어렵겠는가? 모든 예측들, 곧 미래에 대한 모든 ‘관차들’은 피상적인 것이며, 그 본성에 비추어 볼 때 필연적으로 스냅자신일 따름이다. 그것들은 거리를 둔 전망이라고 하는 제약을 지닐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속임수의 계기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된다. 선의에 의한 경우일지라도 피할 수 없는 선택 때문에 이러한 계기들이 생겨나며, 선의가 결여되어 있을 때에는 자의적이거나 어리석은 곡해에 의해 그러한 계기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스냅사진과 마차가지로 미래에 대한 예측들은 대단히 추상적이고 일반적이며, 그러한 추상에는 도덕적 나태가 깃들어 있다. 이로 인해 그것은 세계를 비인간화하는 기능을 한다. 예측이 초래하는 해악은 추상적인 것이고 특정 개인의 미래를 망쳐놓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 때문에 누군가가 불경기 또는 이익률의 상승을 예측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예측 행위가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조장한다고 할지라도 괜찮을 것처럼 보인다. (중략)

분명히 사진술의 최악의 속성은 피상적이라고 하는 점이다. 그런데 미래학은 최선의 경우일지라도 사진술과 달리 어느 정도의 정직한 기록을 남겨놓을 수 있다고 하는 최소한의 특성도 지니지 못한다. 사진가들의 심리적 기질이 대상을 친밀하게 하거나 낯설게 하는 요소들을 짙게 내포하고 있다. 사진가와 미래학자는 피상성의 숭배에 대한 적극적 참여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현실 또는 미래 세계의 미세한 부분을 얼어붙게 하여 우상으로 만들어놓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존경과 숭배까지 바치게 한다. (중략)

대다수 미래학자들의 전망에 반영되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모호한 견해일 뿐이다. 이러한 경향은 낙관론자들의 세계에 속하기를 바라는 미래학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토마스 모어 이래 과거의 유토피안(utopian)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인간의 영혼을 고결하게 하는 미래의 조건들을 그려내려고 노력하였다. 자기들의 영혼뿐만 아니라 남들의 영혼까지도 오도할 수 있는 미래의 조건들을 선전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환상가들에 대하여 언급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 막스 더블린, (왜곡되는 미래)

 

이 논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답안들이 제출됩니다. “후대의 역할이 필요한지, 그렇지 않은지가 다르다”는 의견도 있고, “미래 예측을 긍정적으로 보는지, 부정적으로 보는지가 다르다”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물론 제시문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답안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부족한 느낌이 들까요? 그것은 답안 자체가 무엇인가 의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출제자가 주제를 고를 때는 반드시 사회적으로 혹은 인간보편적으로 의미있는 내용을 고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표면적인 차이 몇 가지를 찾아냈다고 해서, 또 그것을 늘어놓는다고 해서 좋은 평가를 받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제시문들은 단순히 지엽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 사안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과 관점의 차이를 담은 글입니다. 그 핵심적인 관점을 찾지 못한다면, 출제자가 왜 이런 문제를 출제했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표면적인 요구조건을 채우는 수준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다시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제시문 (가)는 분명 미래 예측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반면 제시문 (나)는 미래 예측을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할까요? 또 그 차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출제자는 분명 이러한 표면적인 차이를 통해 수험생에게 무엇인가 심오한 진리를 이야기하고 싶어합니다. 그 숨은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해야지만 의미있는 답안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제시문 (가)에서 미래 예측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행위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후대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지요. 반면 제시문 (나)에서 주의깊게 봐야 할 단어는 ‘도덕적 나태’와 ‘우상’이라는 단어입니다. 즉, 제시문 (나)에서는 미래예측이 아직 결정되지 않는 미래를 하나의 고정된 ‘우상’으로 만들어 미래를 만들 책임을 등한시하는 ‘도덕적 나태’를 만든다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출제자가 수험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미래예측이라는 동일한 행위가 어떠한 맥락에서, 어떠한 의도로 행해지냐에 따라 때로는 인간의 미래를 건설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미래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가로막는 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제시문의 중심적인 차이로 비교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부수적인 차이를 많이 발견한다고 해도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는 답안이 되기 마련입니다.

논제의 제시문은 단순히 요약, 분류, 비교하기 적당한 글이기에 선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글입니다. 따라서 수험생들은 반드시 자신이 비교하고 있는 제시문들의 내용이 중요한사회에, 인간보편적인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야만 합니다.

 

비교를 잘하기 위한 원칙

 

분명 비교하기를 묻는 논제는 ‘문제상황’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논제들보다, 까다롭고 난이도가 높습니다. 이를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확한 독해능력과 논리적인 사고를 평소부터 꾸준히 연습하는 태도가 필요하지만, 지금 당장 수험을 앞둔 입장에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1. 제시문의 핵심을 한 줄로 요약해보라.

제시문의 핵심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제시문의 내용을 잘못 이해하거나, 부수적인 부분에서 공통점 혹은 차이점을 찾는다면 출제의도에서 벗어난 비교가 됩니다.

 

2. 공통점을 구체적으로 생각하라.

흔히 비교를 차이점만을 찾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차이점은 언제나 공통점을 바탕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제시문들의 공통점을 정확히 찾지 않는다면 제시문들의 차이점을 정확히 밝히는 것도 불가능하기 마련입니다.

 

3. 제시문들의 차이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제시문들의 차이는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 근본적인 입장과 관점이 다르기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제시문들이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해, 그것을 통해 나머지 부수적인 차이를 설명하는 방식이 바람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