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풍경
 - 소설 『너무도 쓸쓸한 당신』,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 영화 <로큰롤 인생>

홍성희 | 논술교사 assilience@yahoo.co.kr

아파트 공터 밤나무 나무 아래에 노인 몇이 모여 있습니다. 누군가가 내다 버린 의자 주위에 서거나 앉아 노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 서로 말들이 없습니다. 어둑신한 하늘에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은 오후. 날씨가 찬데 춥지들 않으실까 생각하는데, 중년 여성의 새된 소리가 귓전을 때립니다. "저래서 나이 들면 죽어야 돼. 이렇게 날씨가 을씨년스러운데 왜들 밖에 나와서 청승들이야, 저게 다 자식들 욕먹이는 일이지. 어이구, 추해……." 흙으로 돌아가지 못한 시멘트 위의 낙엽들이 겨울바람에 하얗게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노인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이 에둘러 그렇게 표현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노인들을 향한 이웃의 매서운 그 한 마디가 노인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을 얼마쯤 반영한 것은 아닌지 씁쓸합니다. 노인들에게는 이웃들과의 짧은 담소나 산책이 답답한 아파트 생활의 작은 활력이 될 텐데, 그것마저도 자식들의 체면이나 젊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물며 집에만 있는 노인은 집에만 있다고 타박을 받는 것은 아닌지, 그럼 노인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우울한 생각들이 꼬리를 뭅니다.
연령대를 알리는 명사인 아이, 젊은이, 노인. 이것들 중 차라리 처음부터 없었으면 좋았을 명사는 '노인'이 아닐까 하릴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 개의 명사 중에서 그들이 가진 것들에 비해 가장 가치가 폄하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명사의 범주 안에 들어서는 순간 일방적인 돌봄의 대상이라 여겨져 동시에 귀찮음과 꺼림의 대상으로 저절로 자리매김 되니 말입니다. 수업 중에 '냄새나고', '알지도 못하면서 참견한다'고 자신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의를 표현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당황한 적이 여러 번입니다.  
김노인, 이노인, 박노인이란 말은 참 쓸쓸합니다. 그가 살아왔던 삶의 고갱이들을 깡그리  털어버리고 한 사람을 간단히 껍데기로 퇴행시키는 언어의 폭력. 이 사회가 노인들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더 이상 부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더 이상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소비'의 주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하지 않는 개인들이란 무용합니다. 효용이 없는 존재들은 그것이 사람일지라도 폐건전지처럼 유폐됩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김노인, 이노인, 00할머니, 00할아버지라는 같은 호칭들이 그처럼 쓸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무엇을 더 생산해야 할까요? 그들은 이제 한 평생 그들이 일구어낸 것들을 돌보며 자신들의 남은 삶을 향유할 권리가 있습니다. 아니 그들도 기꺼이 생산에 참여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 중 어느 것도 허락지 않습니다. 부모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아는 사회에서 노인들은 자식들을 위해 한 평생을 받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철든 자식들 뒤치닥꺼리에 마지막 힘까지 쏟아 부어 자신들의 노후를 준비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 미래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해 출산율을 높이자고 성토하는 국가는 일자리를 찾는 노인들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잉여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

많은 노인들이 갈 곳이 없습니다. 거리에도, 공원에도, 관공서에도, 영화관에도, 도서관에도 그들은 없습니다.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여 노인 인구 비율이 10%에 달하는데 그 많은 노인들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 활달하던 김00씨와 수다스럽던 박00씨, 바지런하게 타인을 챙기던 윤00씨는 어디로 갔을까요? 탑골 공원과 종묘 공원에 저들은 누구일까요? 사회는 그들에게 유통 기한이 지나 용도 폐기한다고 무언의 선고를 내렸습니다. 사회는 그들을 잉여 인간이라 부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꾸 보이지 않는 곳에 숨으라고만 합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잉여 인간에게 사생활이 허용될 리 없습니다. 사생활이란 무엇입니까?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새로운 일을 탐색하기도 하고, 취미 생활을 즐기기도 하고, 우정을 쌓고, 그리고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잉여 인간은 철저히 무성적이고, 무욕적인 개인이 되라고 강요받습니다. 그건 범인에게 성인이나 도인이 되란 강요와 마찬가지입니다. '곱게 늙다.'라는 말을 합니다. '곱게', 보통 이 말은 후손들이 그들의 연장자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상찬으로 쓰입니다. 이런 영예를 누리기 위해서 노인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야 하고, 자손들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위의 삶에 만족하는 법을 가장 먼저 터득해야만 합니다. '늙다'라는 말은 또 어떤가요? 그저 '나이 들어간다' 해도 충분할 것을, '늙다'라는 말 속에는 분명 나이 듦에 대한 혐오가 묻어납니다.
하지만 그럴까요? 노년의 삶이란 과연 어떤 욕구의 격랑도 없는 무욕한 삶일지 의심스럽습니다. 정숙하고 고요한 노년이란 신화는 도대체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노인을 거추장스러워하는 사회가 노인 부양의 편의를 위해 만든 편견이란 혐의를 지울 수 없습니다. 그 편견에 눈멀어 우리는 노인들의 사생활에 정말 무지합니다. 몇 년 전 개봉한 영화 <죽어도 좋아>의 파장은 그 무지의 깊이를 반증합니다. 평균 수명이 점점 길어져 노년의 삶이 우리 일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인들의 사생활에 대한 의도된 무관심과 무지는 평균 수명이 50∼60세 일 때에 머물러 있으니 딱한 노릇입니다.
노인들의 사생활을 꿈꿔 봅니다. 노인들이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사회를 그려봅니다. 공동체의 특정 연령대들이 불행하다면 그 공동체는 더 이상 건강하다고 할 수 없겠지요. 나의 안락함과 행복이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방임 위에 세워졌다면, 그 안락함과 행복도 진정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새해를 맞으며 또 한 살을 먹는다고 푸념하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시간에도 마디가 있는 듯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연속된 시간 속에 살아갑니다. 유년과 청년, 중년, 그리고 노년 그렇게들 구분하지만, 우리는 연속하는 시간 속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모두 노년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을 뿐입니다. 
노인들이 겪는 여러 어려움들을 '노인 문제'라 하여 사회는 이슈화합니다. '노인 문제'라는 사회학적 용어는 노인들이 겪는 구체적인 상황들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한 객관화는 그것이 나의 상황, 내 가족의 상황이라는 자각을 때로는 방해하기도 합니다. 또한 노인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들을 지나치게 일반화하여 노년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만을 심어주기도 합니다. 노년의 표정은 그 어느 연령 때보다 풍부합니다. 노년의 삶에도 노인의 얼굴에 파인 주름만큼이나 깊은 열정과 고뇌는 지속됩니다. 노년의 풍경을 담은 연극, 소설, 영화를 통해 노년의 삶에 대해 사색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1. 소설 「길고도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박완서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창비) 중에서 )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된 친정 아버지를 모셔오기로 결정한다. 나의 결정에 오빠는 친정 아버지의 땅을 욕심내는 것 아니냐고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한다. 또 혼자만 효녀인척 해 자신을 불효자를 만든다고 쏘아붙인다. 먼저 가신 어머니의 간병도 출가한 여동생인 내가 했는데, 아버지까지 내가 모셔간다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어디 있냐고 난리인 것이다. 어머니는 암이었다. 수술 후에는 항문의 괄약근이 느슨해져 배변을 혼자서 처리하실 수가 없었다. 생판 남이 어머니의 똥구멍을 진저리를 치며 구박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건 효도 따위보다 훨씬 진실하고 씩씩한 분노였다. 어머니는 완벽하고 한결같은 인고의 세월을 보낸 부인이요, 며느리로 동네에서 유명했다. 아버지는 결혼식 때부터 어머니를 소 닭 보듯 하셨다. 그리고 계속 소실을 들이셨다. 아버지는 월급만은 꼬박 꼬박 어머니에게 가져다주었고, 어머니는 철저하게 자신의 고통을 숨긴 채 체통과 품위를 지켰다. 나이가 들어 아버지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셨지만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무관심과 냉대는 계속되었다. 암 판정을 받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그것을 숨기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항문에 문제가 생겨 아버지가 어머니를 구박하자, 나의 집으로 오셨다.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를 챙기라고 나에게 성화다. 어머니의 건강 상태를 모르는 아버지는 걱정은커녕 어머니의 똥구멍이 언제 아무냐고 난리를 친다. 분노에 찬 나는 어머니가 지금 암이라고 소리친다.
그날 밤 아버지는 흐느끼며 어머니에게 사랑한다고 얘기한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그 통화를 생각하며 웃음을 걷잡지 못한다. 70세에 들은 사랑 고백에 돌아가실 때까지 즐거워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아버지는 여전히 유쾌하게 살아가신다. 집에서는 경직되고 근엄했던 아버지가 밖에 나가면 활달해지던 아버지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장남 노릇이 몸을 옥죄는 걸 참지 못해 편안하게 퍼질 자리를 찾아 난봉을 핀 게 아니었을까. 추악하게만 보이던 아버지의 모습이 풍류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오빠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길기만 하고 재미없는 영화가 마침내 끝났구나, 하는 얼굴로 상주 노릇을 했다. 그러나 난 난해한 영화를 보고 나면 혹시라도 이번엔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아버지를 모셔오기로 결정한다.

같은 영화를 보고 어떤 이는 길고도 지루했다 얘기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난해해서 더 이해하고 싶어 다시 본다고 한다. 부모님의 불화와 어머니의 발병, 장남으로서의 부담감으로 오빠는 어서 영화가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장남이란 무게는 그리도 버거운 것인지 그는 그저 부모와의 관계가 지루하고 짜증날 뿐이다. 화자는 인고와 정숙함으로 일관했던 어머니의 말년이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난처하게 된 것, 그리고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며 두 집 살림으로 일관했던 아버지의 말년이 자유로운 것 사이의 아이러니가 흥미롭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를 더 깊이 탐구하고자 아버지를 모셔 오기로 결정한다. 박완서의 이 단편은 평생을 불협했던 부부의 상반된 말년과 전통적인 여인상에 발목 잡혀 희생으로 일관한 어머니에 대한 딸의 복잡한 심정, 부모에 대한 장남의 냉소적인 태도 등 우리 사회에서 노년에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인 상황들을 묘사하고 있다.
영화가 은유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두 남매의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그만큼 노년의 부모를 대하는 태도도 다르다. 오빠에게는 삶이란 그저 지루한 영화일 뿐, 그만큼 부모님의 퇴장만을 기다릴 뿐이다. 반면 화자는 부모님이 보여준 삶의 아이러니가 마치 난해한 영화를 보는 듯해 그 난해함을 풀기 위해 적극적으로 부모님의 노년에 관여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일생을 괴롭혔던 남편에게 사랑 고백을 받고 죽는 날까지 행복해하는 어머니의 마음이나, 평생을 구박만 해오다가 부인의 죽음 선고를 들은 후 태도를 급선회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나 쉽게 이해 안가긴 마찬가지이다. 결국 화자는 자존심을 버림으로써 자존심을 지키며 끝까지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했던 어머니라는 이름 속에 숨은 새색시, 그리고 장남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자신의 기질을 밖에서만 펼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자유인을 만나게 된 것은 아닌지.
부모에 대한 이해는 내 어머니, 내 아버지라는 타이틀을 버리지 않고서는 깊어질 수 없다. 화자의 오빠가 그렇듯이 그 타이틀에 집착하는 한, 부모자식이라는 관계는 각각 그 타이틀에 숨은 개인들에 대한 이해를 방해할 뿐이다. 이 단편이 실려 있는 박완서의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는 이외에도 다양한 노년의 소묘들이 담겨 있다. 작가의 날카로운 글들은 노년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유쾌하게 깨부순다. 아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2.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
(강풀 원작 / 위성신 연출 / 최주봉·우상민 주연 / 대학로 더굿씨어터)

김만석 할아버지는 우유를 배달한다. 괴팍한 성격에 욕이 입에서 떠나는 날이 없지만 죽은 부인을 잊지 못하는 따뜻한 할아버지다. 송이뿐 할머니는 파지를 수거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철모르던 시절 남편을 만나 딸을 낳았지만 곧 남편은 집을 나가고 딸마저 어린 나이에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 이후 자신을 자책하며 신산한 삶을 살아 왔다. 추운 겨울 꽁꽁 언 골목을 오르던 김만석 할아버지의 우유 오토바이는 파지를 줍던 송이뿐 할머니에게 훌러덩 넘어지고 만다. 미끄러진 송이뿐 할머니를 부추겨 일으킨 김만석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얼굴을 본 순간 가슴이 철렁한다. 김만석 할아버지가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아이같은 순진한 마음으로 송이뿐 할머니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리고 일흔이 넘은 두 노인은 예쁜 사랑을 아기자기하게 키워간다. 그들의 이웃엔 주차 관리소에서 일하는 장봉군 할아버지가 있다. 할아버지는 낮에는 관리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치매에 걸린 부인을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할머니가 치매에 걸렸지만 할머니를 향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더 애틋해져 갈 뿐이다. 하지만 곧 할머니가 암 말기에 걸린 것을 알게 된다. 할머니 없는 세상을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는 할아버지는 부부가 같은 날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친구 김만석 할아버지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기고 부인과 함께 삶을 마감한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노인들의 소박한 사랑을 담은 연극이다. 노인들도 사랑을? 그렇다. 노인들도 사랑을 한다. 그 질문이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 이 연극은 참 따뜻하게 일깨워준다. 암에 걸려 먹을 수 없는 우유를 그토록 먹고 싶어 했던 아내를 그리워하며 찬 새벽길에도 열심히 우유를 배달하는 할아버지는 새로운 연인을 만나 얘기한다. "당신이라는 말은 할수 없소. 그 말은 내 아내에게만 허락하고 싶소. 그 대신, 난 당신을 그대라 부르겠소. 고백하겠소. 그대를 사랑합니다." 할아버지의 사랑스러운 고백이다. 독거노인으로 평생을 외롭게 보낸 할머니는 조용한 미소로 그 고백에 화답한다. 그리고 가진 것 없이 남루한 노인들의 마음은 훈훈하게 덥힌다. 조건도 따지지 않고, 화려한 겉모습에 현혹되지도 않고, 상대의 마음에 의심을 품지 않는 그들의 사랑은 건강하고 진실하다.
노인들의 사랑을 보며 생각했다. '사랑은 사랑 하나면 족하구나. 저게 바로 사랑이지'. 큰 집과 좋은 차, 그리고 명예까지. 우리는 항상 우리가 그런 것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봉군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 할머니를 보며 깨닫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한 사람의 지극한 사랑 뿐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우리 모두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린 약한 존재일 뿐이고, 그런 나를 끝까지 사랑해주는 단 한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임을 말이다.
두 노인의 부부애는 거래와 계약처럼 되어버린 결혼을 당연시하는 요즘 세태를 참 초라하게 한다. 가까운 친지 중에 거동을 거의 못하시는 부인을 5년 동안 혼자 간병하시는 일흔이 넘으신 할아버지가 있다. 워낙 깔끔하신 할아버지의 성정을 알아 왔는지라, 가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참, 대단하다.", "자식들에게 불편주지 않으시려고 혼자 너무 고생하신다.", "지치실 때가 왔지." 그뿐이었다. 그런데 연극을 보며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사랑하시는구나, 아주 많이.' 관객 중에는 중년 이상의 부부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혼자 오신 분들도 나오시면서 다들 한 말씀씩 하셨다, "남편이랑 올걸.", "집사람이랑 다시 와야겠다."……. 어딜가나 힘들다, 힘들다가 절로 나오는 각박한 요즘에 가족들과 함께 보면 참 좋을 연극이다. 노인들이 말한다. "사랑이면 족한것을!" 그러니 열심히 사랑하라고. 그리고 연애 조언 먼 곳에서 찾지 마라, 연애 고수인 우리에게 달려오라고.

3. 영화 <로큰롤 인생> (Young@Heart)
(스티븐 워커 감독 / 발 실먼·아일린 홀·도라 모로 등 출연)

<로큰롤 인생>은 다큐멘터리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현재도 활동 중인 노인 코러스 그룹 '영 앳 하트 Young@Heart'의 활동 모습을 담고 있다. '영 앤 하트'는 이미 유럽, 호주까지 진출하고, 유투브 동영상을 통해 전 세계 네티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유명세는 중요하지 않다. 아마 본인들에게도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노인들이 보여주는 진솔한 삶의 모습들 자체가 가르침과 감동 그 자체이니 말이다.
'영 앳 하트'는 73세부터 93세까지 미국 노스햄튼의 할아버지, 할머니들로 구성된 코러스 그룹이다. 1982년 노스햄튼의 어느 공영주택에 살던 노인들이 취미로 노래 모임을 만든다. '마음은 청춘'이라는 뜻의 '영 앳 하트'로 그룹명까지 정한 이들은 처음에는 클래식한 노래들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밥 실먼을 단장으로 맞는다. 그러던 어느 날 '릴'이라는 멤버가 무대에서 맨프레드 맨의 「Doo Wah Diddy」를 불러 큰 호응을 얻으면서 변화는 시작된다. 클래식을 좋아하던 영 앳 하트가 로큰롤로 음악적 스타일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뒤, 밥 실먼 단장의 지도 하에 원년 멤버들의 첫 번째 공연이 열린다. 율동과 마임을 활용하는 등 무대 위에서 다양한 음악적 퍼포먼스를 선보인 영 앳 하트는 수 차례의 매진을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친다.
그리고 또 새로운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7주간에 연습에 들어간다. 다큐멘터리는 그 7주간을 따라가고 있다. 연습은 수월하지 않다. 노인들은 리듬도 익히지 못하고, 가사는 더 수월치가 않다. 같은 노래를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르고, 공연 날짜는 다가오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다. 그래도 노인들은 비가 오거나 몸이 불편해도 연습에 열심이다. 그리고 공연을 앞두고 두 명의 멤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노인들은 동료를 잃은 슬픔을 공연에 대한 열의에 담아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친다.
노인들의 공연 연습 기간 7주는, 담담하고 한결같다. 며칠 전까지 함께 노래 부르며 웃던 동료가 둘씩이나 세상을 떠났지만 동요하지 않는다. 그저 슬픈 눈으로 조용히 추모할 뿐이다. 열심히 해도 진전이 없는 연습에 호랑이 같은 단장이 모진 말로 상처를 주어도 선한 눈을 껌뻑이며 내일도 또 그 자리에서 노래 부를 뿐이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노래하기를 멈추지 않는 그들은 죽음만이 그 노래들을 그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조차도 슬퍼하지 않는 듯하다. 노인들 개개인의 삶의 여정이나 단원들 간의 소소한 즐거움이나 갈등, 희로애락의 모습은 과감히 생략되어 있다. 그저 정해진 시간 그곳에 와서 노래 연습에 열중인 모습들만이 담겨져 있을 뿐이다. 동료의 부음을 듣고도 공연을 계속 한 이유를 묻는 감독의 질문에 단장인 밥 실먼은 답한다. "왜 공연을 했냐고 묻지만 역으로 어떻게 안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상의 답은 없을 듯하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 순간, 그들은 반짝 반짝 빛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어떻게 삶을 멈출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들이 부르는 노래 하나하나는 인생을 그대로 담고 있는데, 어떻게 그들이 노래를 멈출 수 있겠는가? 그들을 가장 힘들게 한 노래는 앨런 투세인트의 「Yes We Can」이다. Can이라는 단어가 무려 71번이나 빠르게 등장한다. 노인들은 정말 포기하고 싶다. 단장은 거침없이 이 노래는 버리겠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부활절 연휴를 보낸 후 노인들은 모두 거짓말처럼 이 노래를 완창해낸다. 연휴 동안 각자 집에서 쉬지 않고 열심히 연습한 결과일 뿐이다. 듣는 이에게도 정말 고난위도로 여겨지는 이 노래를 공연의 피날레로 멋지게 합창하는 모습은 압권이다. 노인들은 온 몸으로 우리를 격려한다. "우리는 할 수 있어, 보라구, 우리도 해냈잖아, 그러니 용기를 잃지 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