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를 묻다
 - 한국 근대미술 걸작전

홍성희 | 논술교사


올 겨울, 아니 지난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반도에 불어 닥친 북서풍은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매서웠고 혹독한 폭설에 대한민국 전체가 쾅쾅 얼어붙기도 했다. 그랬다. 지난 겨울은 추웠다. 아무리 두터운 것들을 껴입고, 아무리 뜨끈한 것들을 목으로 넘겨도 몸이 시리고 허기가 지고 기분 나쁜 냉기와 피로에 졸음만 몰려왔다. 차디찬 땅 속에서 발견된 주검들과 재개발 지역 철거 건물 옥상에서 뱀의 혀처럼 치솟던 화염의 기억은 우리들 가슴 밭에 하얀 서리꽃을 피웠다. 서걱서걱,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서리꽃들이 부서진다. 진저리가 쳐진다.
태양도 고개를 돌려 버린 듯한 2월의 어느 날 덕수궁을 찾았다. 작년 말부터 덕수궁 미술관에서는 <한국 근대미술 걸작전>이 열리고 있다. 진작부터 구미가 당기는 전시회였으나 이번 겨울에는 유독 대형 전시들이 연이어 열려 이제야 찾게 되었다. 하필 왜 이 전시가 가장 나중인가? 제일 나중까지도 묵묵히 나를 기다려줄 것 같은 사람, 찬찬히 오래도록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옛 집의 우물, 내 기억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오래된 서랍장. 이 전시가 내겐 그랬다. 바깥바람을 제멋대로 실컷 쏘이고 돌아온 자식을 말없이 맞는 노모의 슬픈 그것.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그리고 그 질곡의 세월들을 속절없이 살아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역사 이래의 길고긴 봉건 사회가 막 내리고 새로운 세상을 연 '근대화'라는 대사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변화했을까? 표면적으로 나마 수직적인 신분의 위계가 사라지고 여성도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서양의 신기한 문물들은 '편리'와 '위생' 그리고 '세련',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옛것들을 대체한다. 어떤 이들은 그 변화를 반겼고 어떤 이들은 그 변화에 노여워했다. 그리고 또 많은 이들은 두려워했다. 그림 속 그들은 변두리, 주변에 있었다. 내 나라, 내 땅에 두 발로 서 있어도 그들의 시선은 서성이거나 정처가 없다. 삶의 언저리에서 배회하는 듯한 그들의 모습이 낯설지만은 않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들과 우리를 주변으로 내몬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문물과 생각, 사람과 문화가 들어오고 사라지고, 사라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어디쯤에서 균열이 생겼다. 사람들 마음속에도, 공동체에도 크고 작은 균열이 생겼다. 시간이 흘러도 그 균열들은 여전하고 더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근대의 시간 이후로 사람은 자연을 낯설어 하고, 자연은 사람을 낯설어 한다. 시골은 도시를 낯설어 하고, 도시는 시골을 낯설어 한다. 일하는 사람은 돈 주는 사람을 낯설어 하고 돈 주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을 낯설어 한다. 부모는 자식을 낯설어 하고, 자식은 부모를 낯설어 한다. 시간의 너그러움으로도 메우지 못하는 그 균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20세기 초중반, 근대화 과정을 제대로 보려는 노력 없이는 그 균열과 간극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에게 근대란 어쩌면 역사책 속 근대의 모습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1876년 강화도 조약, 1894년 갑오개혁, 1910년 한일합방 등등 연대순으로 줄줄이 외던 정치사 중심의 그 근대. 서양의 선진 문물과 사상이 유입되어 우리 사회가 급속도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양반 유생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옛것을 지킬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대충 근대의 이미지란 이런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이 부족하다. 이번 전시회는 그 부족함을 충분히 덜어줄 만한 기획이다. 그것도 정보가 아닌 정서로 근대를 살아간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이다. 근대와 근대인은 다름 아닌 나였다. 나이테처럼 내 안에 켜켜이 쌓인 근대인의 흔적들.
<한국 근대미술 걸작전>은 근대 미술가 105여명의 대표작 232여점들을 한 곳에 모은 규모 있는 전시회로 여유 있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날 폐관 한 시간 전에 도착해, 다 둘러보지 못하고 하루를 더 내야 했던 본인의 경험에서 나온 사족이다.) 참고로 덕수궁 입장료만 내면 본 미술전 관람비는 따로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횡재다! 의미 있는 저 많은 그림들을 공짜로 보다니, 관람 후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좀 염치없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또 더 아주 잠깐 '이 나라가 문화 국가가 되어 가고 있나'라는 착각도 했다. 하지만 '건국 60년을 기념하여'로 시작되는 전시 설명에 정신이 확 들었다. 아, 공짜란 사람을 이렇게 눈멀고 귀먹게 하기도 한다. 여하튼 근대의 풍경을 조감할 수 있는 전시회였다. 그림들은 근대인, 근대인의 일상, 근대의 풍경, 근대인의 꿈이란 소주제로 전시되었다. 그림들의 구분이 약간 끼워 맞추기식이라는 느낌이 들어 감상에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소주제에 연연하지 말고 감상하기를 권하고 싶다. 자, 그럼 주제랑은 잊고,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자.

근대인 - 개인의 발견

구본웅 <친구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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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이 유독 많다. 예술가에게 자의식이란 천형이자 예술의 원천? 어찌 많은 자화상들을 그린 화가들에게만 자의식이 있었겠는가? 아니 근대인들에게만 자의식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들은 자신들의 자의식을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난 것이고, 또 도구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침울한 표정들의 자화상 속에서 자유의 냄새가 눅눅하게 묻어난다. 멍에와도 같았던 신분 사회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자유 그 자체가 아니었겠는가? 하지만 신분의 멍에를 벗자마자 제국주의라는 멍에를 짊어져야 했던 운명,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이 분단이라는 멍에로 이어지는 운명. 마치 그 모든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 근대인들의 자화상에는 미소가 없다. 구본웅이 그린 소설가 이상의 초상화는 얼마나 신경질적이고 우울한가.
그들에게 새 세상의 이미지는 많은 기회로 활짝 열린 세상이지 않았을까? 인물화 속에 꼭 등장하는 소품은 책이다. 남녀 할 것 없이 그토록 열심히 읽었던 책들은 어떤 책들일까 자못 궁금하다. 더 나은 세상이 책 속에 있을 거라는 청년의 소박한 믿음은 순진하지만 청춘답다. 또 누드화도 많이 눈에 뛴다. 금욕과 정신 쪽으로 꺾인 핸들을 쾌락과 육체 방향으로 선회시키는 근대인들은 그 이전의 인류와는 또 다른 인류이다.

근대인의 일상 - 가난, 자유 연애, 가족

박수근 <할아버지와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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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의 그림에는 나목과 아낙들, 노인, 아이들뿐이다. 젊은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화강암질의 표면에 질박하게 붙박인 인물들은 표정이 없다. 남자들은 다 전장으로 떠나고 가난한 마을에는 생계를 책임지는 아낙과 그들이 부양해야할 노인과 아이들뿐이다. 헐벗은 나목의 풍경은 그 시대의 자화상이다. 하지만 나목은 죽은 나무가 아니다. 봄을 기다리는 겨울 나무일 뿐이다. 박수근은 희망을 얘기하고 싶었던 걸까?
근대는 고단했다. 이응노가 그린 <취야> 속의 두 사내는 흡사 도깨비 같은 모양으로 술잔을 들고 있다. 시대의 불안과 생계의 불안 속에 가장들의 마음 속 풍경은 저렇게 어수선했을 것이다. 이응노의 또 다른 그림 <거리 풍경 - 양색시>도 눈을 잡는다. 짧은 치마를 입고 짙은 화장으로 하고 거리를 활보하던 양색시와 그네들을 보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익숙하다. 부인에 대한 연정이 화폭 가득히 녹아든 이쾌대의 <2인 초상>, <상황>, <부인도>도 눈길을 끈다. 문밖의 아이들은 구두를 닦거나 (이수억 <구두닦이 소년>) 구걸을 하고, 유복한 아이들은 서양식 주택에서 환한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이응노 <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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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풍경 - 산수에서 도시로 

오지호의 <남향집>. 근대인들이 꿈꾸던 공간은 저런 것이 아닐까? 따뜻한 햇볕이 드는 남향집에서 가족들과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모습. 햇볕이 노랗게 돌담이며 대문에 내려 앉은 모습이나 그 대문에서 아장아장 걸어 나오는 빨간 원피스 입은 소녀의 모습이나 아련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 따뜻한 풍경 속에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이들은 소수였을 것이다. 전쟁의 폐허나 부러진 한강 철도나 골목 여기저기에 솟은 전봇대, 무질서하게 하늘을 구획한 전기줄의 풍경이 근대인들에게는 어쩌면 더 익숙한 것일지도 모른다. 몇몇 화가들은 유학길에 올라 외국 풍경을 화폭에 담기도 했다. 소주제는 근대의 풍경이지만 근대의 공간을 엿보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전시였다.

오지호 <남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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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인의 꿈 - 그래도 낙원을 꿈꾼다.

근대인들의 꿈은 과연 '풍요' 뿐이었을까? 과연 '가족과의 즐거운 한때' 뿐이었을까? 아니 인류의 꿈은 어쩌면 그게 전부인가. 소주제를 잊고 감상을 해야지 하면서도 주제가 자꾸 걸린다. 일제 강점기와 분단의 상황 속에서 근대인들이 품었던 꿈들이 풍요와 가족의 안녕만이라는 것이 적이 실망스러웠다. 새삼 이번 전시에 그 혹독한 시대를 본격적으로 다룬 그림들이 거의 없다는 점이 확인되는 듯해 씁쓸했다. 시대의 살벌함이 화가들의 붓을 얼어붙게 한 것 일까? '근대인의 꿈'관에는 천경자의 <목화밭에서>, <굴비를 든 남자>, 이인성의 <어느 가을날>, 이중섭의 <애들과 물고기와 게>등이 전시되었다. 모두 목마른 시대에 평화로운 한 때를 꿈꾸는 그림들이었다. 하지만 질곡 많은 역사를 생각하면 소박하기만한 그림들이 자꾸 걸린다.

이중섭 <애들과 물고기와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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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마네, 드가, 고갱은 알아도(물론 잘 알지는 못한다.) 김중현, 조양규, 김진우는 알지 못했다. 전시회 관람 후 찾아본 한국근대미술 관련 서적들을 보며 새삼 근대 미술에 작은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근대의 화가들은 박수근처럼 전문 미술 교육을 본격적으로 받지 않은 화가들도 있지만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은 유복한 가문의 자제들로 서양과 일본의 미술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근대 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근대의 일상관에 소개된 많은 정물화들은 어딘가 모사의 혐의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근대 미술의 화법에 대해서는 미술 지식이 전무한 필자는 일단 함구해야 옳을 것이다. 이쾌대의 발견은 개인적으로 큰 수확이다. 그의 그림들이 내뿜는 생기와 약동은 달연 살아있는 것으로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월북한 그의 행적과 그림들이 궁금하다.  
백년 전, 오십년 전 우리의 자화상은 솔직했다. 격변기의 혼란과 망설임들이 캔버스에 얼룩져 있었다. 예상과 달리 치열한 항일의식을 담은 그림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없었다는 점(이것은 그저 필자의 판단일 뿐이다.)에서 적잖이 놀랐다. 또 해방 후의 환희를 담은 그림도 발견하지 못했다. 또 한국 전쟁의 소용돌이를 담은 그림도 눈에 띄지 않았다는 점도 의아했다. 돌아와 관련 자료들을 뒤적이다 보니 이번 전시에는 친일 행적이 있는 작가들의 그림들도 많이 전시되었다고 한다, 또 근대 미술사에는 실제로 항일 정신을 그림에 담은 화가들은 많지 않고 근대 화가와 그림은 한국 전쟁으로 많이 사라지고 월북 작가들도 많아 그 연구에 미진함이 있다고 한다.
해독이 어려운 시처럼 근대가 내게로 왔다.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회에서 느낀 근대의 이미지는 무기력함과 침울함이다.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하다. 슬픔과 고통을 과장하지 않는 그림들의 그 우울함이란 울분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 작은 울분의 포말들은 결국 거대한 분노의 바다로 흘러 여기까지 왔으니 말이다.
3월이다. 우리 기억 속의 지난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그리고 그 겨울이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유언비어에 가위 눌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래도 우리는, '그래도 봄은 온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말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수없이 머릿속을 맴도는 애꿎은 3월이다. 지난 겨울, 우리는 너무 상처받았던 것이다.
상처 속에도 새 살은 오른다. 언 땅에도 새 순은 돋는다. 진부하다. 하지만 눈물겹도록 감사한 진부함이다. 약하고, 주저하고, 무기력한 근대인들의 초상은 지금 여기 우리의 초상이다. 상처받고 피 흘리고 우울한 근대인들의 얼굴에서 진실 한 점씩을 마치 살 한 점처럼 조심스레 떼어 돌아왔다. 그리고 따뜻한 피 묻은 진실 한 점을 봄이 오는 창가 화분에 심는다. 봄은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럼 언 흙 속에서도 새 순이 돋을 것이다. 역사는 진보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믿어야 하는 봄의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