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난장이여, 다시 한번
 
윤성균 본지 기자
friendtolife@gmail.com


더 불행한 사회

불행한 사회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불행한가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 질문들은 한없이 낡았고, 거의 태고적이기까지 하다. 아마도 인간이 (필로소피의 명령에 따라) 지혜를 사랑하기 시작한 이래로, 우리는 끊임없이 그렇게 묻고 있다. ‘나는 행복한가? 불행하다면 왜 그런가?’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고민이 행불행의 문제일 수는 없다. 그러기엔 우리는 너무 설다. 금전적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채 행복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에서, 행복을 묻는 것이 과연 의미 있을 수 있는가? 그렇게 묻는 것 자체가 이미 불행한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고민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다. 그리고 무엇이 더 불행한가 묻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기에 두 가지 사회가 있다 가정하자. 첫째는 ‘책을 읽지 않는 사회’다. 사람들이 더 이상 책을 읽지 않고, 읽어도 얄팍한 자기계발서나 대중소설을 장식품 마냥 들고 다니는 사회다. 책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회, 그래서 책의 힘이 땅에 떨어진 사회, 이른바 책맹(冊盲)사회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책을 읽고도 변하지 않는 사회’다. 사람들이 필독서니 베스트 셀러라며 너나 할 것이 없이 책을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 변하는 것이 하나 없는 사회다. 책을 읽으나 마나 한 사회, 그래서 책의 힘이 땅에 떨어진 사회, 이른바 부동(不動)의 사회이다. 두 사회 모두 불행한 사회이지만, 같은 불행은 아니다. 전자가 애당초 읽지 않아서 불행하다면, 후자는 읽고도 변하지 않아서 불행하다. 그래서 묻는다, 어느 것이 더 불행하냐고.
읽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다. 읽을 의지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애초에 몰라서, 읽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읽지 않는 경우일 것이다. 인터넷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책을 읽을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불충분한 이유임을 깨닫게 되면 곧장 폐기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자주 인터넷에 농락당하기 때문이다. 책은 그렇게 자주 농락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읽고도 변하지 않는 것은, ‘읽다-변하다 혹은 바꾸다’라는 독서의 본래적 메커니즘을 무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왜 책을 읽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퇴행해야만 하는 비극에 직면한다. 책의 힘을, 그 진정성을 믿는 사람에게 그것은 절망적인 말이다. 그래서 더 불행하다.
물론 어떤 방식으로든 좋은 책을 많이 읽는 사회가 더 건전할 사회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변화의 의지가 꺾인 만큼 불행한 사회는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어 왔으면서 여전히 그 대립적인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우리 사회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지 않는 사회보다 어쩌면 더 불행한 것이 아닌가, 라고.


난장이 신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1975년에 발표된 이후로 우리사회에서 가장 많이 읽혔고, 사랑받은 소설이다. 그래서 ‘난장이 신화’라는 말은 비유가 아니다. 그게 사실인 까닭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출간 후 30년간 100만 부가 넘게 팔렸고, 240쇄를 돌파했으며, 지금도 한해 5만 부씩 팔리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초유의 기록임은 이미 많은 지면을 통해서 소개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굳이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작가인 조세희 선생은 그 기록이 “부끄러운 기록”이라고 말한 바 있음은 기억해야 한다. 그건 작가로서 내놓기에 부족한 작품이 너무 많이 읽힌대서 나온 부끄러움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끄러움’의 정체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그렇게 많이 읽히는 풍토, 그러나 30년간 변한 것이 없는 사회에서 느끼는 실망감, 그걸 책망하고 있는 작가적 양심에 의한 것이 아닐까.
좋은 책이라면, 책을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태도를 올바로 바꾸게 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특히 문학은 당대의 현실을 가장 투명하게 반사하는 거울이다. 문학이 비추고 있는 서사가 우리가 사는 현실과 겹침을 느낄 때, 문학이 현실을 반사하는 방식이 어떠하나에 따라, 우리는 웃거나 울거나 화내거나 두려워한다. 그 반사의 각이 첨예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이면의 진실을 본다. 그런 이유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은 우리의 30년은 어땠는지 반문할 수밖에 없다. 알다시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한국근대문학에서 가장 날 선 방식으로 사회를 비추었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에둘러야 했던 ‘서울시 낙원구 행복동’의 비극은 이제 와선 전설적 우화가 되었고, 그 대립의 세계 속에서 가난한 한 개인(또는 한 핏줄)은 철저하게 불행할 수밖에 없음을 각인시켜주었다. 그것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우리에게 던진 문학적 계고장(戒告狀:행정상의 의무 이행을 재촉하는 내용을 담은 문서)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능한 방식을 동원하여 그에 처절히 반응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묻는 것이 실로 외람된 일인가.

2000년에 쓰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신판 해설에서 평론가 우찬제 선생은 ‘난장이 신화’ 20년의 문제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문제 삼은 난장이의 현실, 그 불행과 질곡의 문제성이 여전히 유효한 정치경제적 문제틀이며, 그것이 이 소설의 불행한 생명력이라 언급했다. 그러나 그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에워싼 대립적 세계관의 견고함을 다소간 과소평가했고, 대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문학적 광휘에 집중했다. 다시 말해 구판의 해설에 비해 신판의 해설은 충분히 차지지 못했다. 이는 제법 상징적인 일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출간된 20년 후를 즈음해서 우리는 이 소설의 문학성에 골몰한 탓에, 본래 작품이 점하고 있던 문제적 현실성에 대해선 덜 고민하게 되었다. 아니면 덜 절박해 졌던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중고교생의 필독서가 되면서, 우리는 이 소설을 이전보다 더 많이 읽었다. 더 분석적으로 읽었다. 그러나 그만큼 처절하게 읽은 것은 아니다. 난장이의 우화는 어느새 관념적인 신화가 되었고, 뫼비우스 띠의 상징성은 시험문제가 되었다. 그 시험문제의 정답을 안다고 해서, 정말로 탈구조적인 인식으로 세상을 파악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해석의 대상이 된 이후 어느새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현실과 우리의 현실 사이엔 괴리가 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한껏 느슨해졌던 때에, 2009년 새해 벽두 용산에서 6명의 ‘난장이’가 발화(發火)하자 우리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엔 은유도 없었고, 우화도 없었다. 망루, 신나와 화염병, 그리고 거센 불길을 더 북돋았던 물대포. 이 이물적인 것들이 뒤엉켜 타오르는 걸 넋 놓고 보았다. 저 거대하게 참혹한 부조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도 우리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누구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떠올렸던 건 사실이다. 우리가 아직도 ‘난장이’임을 재인식하는 건 그렇게나 비극적이고도, 뼈저린 일이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새로 읽기

우리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그렸던 문제적 현실로부터 멀어진 까닭이 오독(誤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극단적 비유와 동화적 우화가 넘쳤던 이 소설은 30년간 꾸준히 해체조립되어 왔고, 모호한 장막은 걷혔다. 오히려 비유와 상징의 체계가 너무 명백해 졌다는 게 탈이었다. 명백함은 오히려 비현실성을 나았다. 이토록 명백하게 이분법적인 사회라니! 문학이 지나치게 문학적이게 되면 오히려 현실적 호소력을 잃게 된다는 역설.
그러나 이번 정권을 맞아 민주주의를 쟁취했다는 우리의 가열찼던 구호가 실로 허구 였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걸 깨닫고 나니 그간 애써 외면했던 부조리가 다시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비정규직, 뉴타운 재개발, 철거민, 부의 편중……. ‘집’과 ‘밥벌이’의 문제가 한국사회에 여전히 유효한 논쟁거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면에 도사린 구조적 결함 또는 폭력을 재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니, 30년 전으로부터 우리는 전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여전히 난장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다시 읽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단순히 다시 읽기가 아니다. 굳이 명명하자면 새롭게 읽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독법이 기존의 독법을 답습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기존의 비평적 토대 위로 출발하겠지만 불필요하다면 잘라내고, 필요하다면 덧붙일 것이다.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창조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현실과 소설적 현실에 존재하는 간극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더 민감하게 반응할 거라 다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크고 깊게 반성할 거라 맹세하는 것이다. 읽고 난 다음은? 알 수 없다. 다만 그때는 우리가 좀 더 단단하기를 바랄 뿐.


『난쏘공』과 함께 읽어야 할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 갈라파고스

『탐욕의 시대』
장 지글러 / 갈라파고스

…오늘날 인류가 처한 비참함의 정도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시대에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참담하다. 5세 미만의 어린아이들 중에서 1천만 명 이상이 해마다 영양 결핍이나 각종 전염병, 오염된 식수,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이들 중에서 50퍼센트는 지구에서 가장 가난한 6개국에서 발생한다. 희생자들의 90퍼센트가 남반구 국가들의 42퍼센트에 집중되어 있다.
- 장 지글러, 『탐욕의 시대』, 35쪽

…지구는 현재보다 두 배나 많은 인구도 먹여 살릴 수 있어. 오늘날 세계 인구는 60억 정도(세계 인구는 2006년 2월 26일 현재 65억 명을 넘어섰다.)되지. 하지만 1984년 FAO의 평가에 따르면, 당시 농업생산력을 기준으로 계산하여 지구는 120억의 인구를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거였어.
-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37쪽

 

세계적 빈곤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보면 당연하게도 일정한 거리감을 느낀다. 장 지글러가 증언하고 있는 빈곤의 정도도 다분히 경제학적 수치만으로 느껴짐은 어쩔 수 없다. 1천만 명의 목숨이라는 것도, 거대한 ‘숫자’에 묻혀 ‘목숨’에는 눈길이 가지 않는다. 이러한 거리두기가 일종의 자기방어장치임은 분명하다. 잠깐 동정하기란 쉽다. 하지만 공감으로 나아가진 않는다. 지구상에 지점한 물리적 환경이 엄연히 다르다는 안심은 값싼 동정의 방식으로 세계적 빈곤의 문제를 다루게 만든다. 하지만 장 지글러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는 “출생의 우연이라는 수수께끼는 죽음만큼이나 신비롭”다며, 자신은 “어째서 잘 먹고, 가진 권리도 많고, (...) 비교적 자유로운 백인으로 태어났는”데 “어째서 뱃속에 기생충이 우글거리는 콜롬비아의 광부는 그런 행운을 누르지 못했”는가 묻는다. 궁극적으론 이런 물음이다. “그들은 그렇게 사는데, 나는 왜 편안하게 살 수 있는가?” 비단 시스템의 얘기가 아니다. 이건 일종의 불가항력적인 우연을 말한다. 나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지만, 사실은 사소한 행운이 작동한 탓이고, 어쩌면 콜롬비아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단 말이 된다. 나와 콜롬비아 광부를 가로지르는 차이란 사소한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 그렇다면 그들의 빈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다소 불편해 질 수 있을까? 그리하여, 만약 동정이 인다면 그것은 동질감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난쏘공』의 중간자적 존재인 선애와 윤호가 느끼는 동정이 그런 종류가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장 지글러는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세계화가 불러 일으킨 구조적인 불합리와 그 폭력성을 고발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그 나열된 사례를 읽는 것만으로 전지구적으로 병들어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러니까 ‘탄생의 우연’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상징성을 갖는다. 그걸 인식하는 순간 제3세계의 빈곤은 물리적 공간을 넘어 우리를 작렬한다.

 

『슬럼, 지구를 뒤덮다』
마이크 데이비스 / 돌베개

…가난한 주택소유자, 스쿼터, 세입자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적 진압이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로 이루어진 것은 단연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남한의 수도권에서 무려 72만 명이 원래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한 가톨릭 NGO는 남한이야말로 “강제퇴거가 가장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이루어지는 나라, 남아공보다 나을 것이 없는 나라”라고 했을 정도다.
- 마이크 데이비스, 『슬럼, 지구를 뒤덮다』, 142쪽

 

이 책이 담고 있는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이지만, 우리에겐 특별한 기억이다. 그리고 “남아공보다 나을 것이 없는” 행태가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걸 감안하자면 그 기억은 현재진행형이다. 도시화를 빌미로 재개발의 손길은 서울 곳곳을 주물럭거리고, 도시 중산층은 마치 그것이 세례인양 자신의 땅에도 미치길 기도하고 찬양한다. 가진 것이 없는 세입자는 또 다른 빈민지구를 찾아 떠난다. 타의에 의해 그들은 도시의 유목민이 된다. 그들의 ‘낙원구 행복동’은 어디인가?
서울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과 같은 대규모 빈민지구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럼이 결국 주거의 문제임을 감안할 때, 서울은 마치 거대한 슬럼을 연상케 한다. 서울에 주거와 가난의 문제가 얼마나 만연한지는 강남에 가보면 안다. 그곳에 얼마나 많은 고시원과 김밥집이 있는지 헤아려 보는 것으로 강남이 지닌 화려한 이미지가 얼마나 허황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곳도 이미 부와 가난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한데 뒤섞인 곳이다. 그 착종한 경계가 모호한데 어떻게 구분 놓을 것인가. 서울은 이미 하나의 거대한 슬럼일 뿐이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슬럼의 비참한 상황을 묘사하면서, 슬럼의 빈민이 비참함에 내몰릴 수 밖에 없는 도시화의 구조를 낱낱이 파헤친다. 슬럼의 대립구도로서 언급되는 금융자본, 부패 권력, 중간계급의 배신. “도시가 슬럼화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도시가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유하기 때문”이라는 진실.

 

『권력의 병리학』
폴 파머 / 후마니타스

“…죽은 우리 사람들, 홍역, 백일해, 뎅기열, 콜레라. 티푸스, 단핵세포증, 파상풍, 폐렴, 말라리아, 그리고 수많은 장염과 폐질환 등의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자연사’한 이들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지 않을까? 죽은 우리 사람들, 죽은 수많은 자들, 민주적으로 죽은 자들, 그 누구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슬픔 때문에 죽은 자들, 그 죽은 자들, 죽은 우리 사람들이, 아무도 그 수조차 세어주지 않는 가운데, 아무도 ‘이제 그만!’이라 말해주지 않는 가운데 그렇게 죽어갔기 때문에, 만약 그랬다면 적어도 그들의 죽음에 어떤 의미라도 있었을 것을. 아무도 그들, 늘 죽어 있던 자들, 그러나 이제는 살기 위해 또다시 죽어가는 그들에게 그 누구도 찾아 주지 않았던 그 의미가…”
- 폴 파머, 『권력의 병리학』, 154쪽

 

가난한 자들의 먹고(『탐욕의 시대』), 사는(『슬럼, 지구를 덮다』) 문제에 대해 살펴보았으므로, 이젠 죽음의 문제다. 그들은 어떻게 죽는가. 그들은 왜 더 많이 병들어 죽는가.
어떻 게보면 질병은 자연스럽다. 혹독한 자연환경일수록 질병은 더 자연스럽게 찾아 온다. 그렇지만 그 질병으로 인해 죽어야 자연스러운 건 아니다. 오늘 같은 첨단 의학기술을 갖춘 사회라면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하지만 자본권력이 여기에 개입한다. 실로 치료는 기회의 문제가 되며, 그렇다면 그 기회가 균등하게 보장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정치경제적 문제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분한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이들에게 권력은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더 비용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아니, 필요하다면 그들을 격리 수용하는 것으로 더 간단히 질병을 통제하려 한다.
그러니까 건강과 생명의 문제가 순전히 생물학적 요인이나 의료제도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저변의 다양한 정치경제사회적 요인에 의해 건강의 문제가 취급된다. 섣부르게 윤리적 책임을 묻는 목소리에는 ‘법’과 ‘질서’의 논리가 작동한다. 왜 그것이 폭력이 아닌가?
마이크 데이비스는 책의 후기에 사회정의의 측면에서 고취된 인권운동을 요청하면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의미심장한 시구를 음미한다. 옮겨보자면,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를 예상해 본 자라면 누구나 한 부류의 사람들이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 베푸는 온정에 의지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핍박받는 자들이 핍박받는 자들에게 베푸는 온정은 없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다.”
이것을 『난쏘공』의 방식으로 옮겨보자면 이렇다. 거인이 난장이에게 온정 베풀 거라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난장이가 난장이에게 베푸는 온정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 동질감에서 우러난 화합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