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책이 있다
 - 아름다운 마을, 헤이리  

황정희ㅣ논술교사


길을 떠나다

무엇인들 저 만큼 가벼워 보일 수 있을까?
하늘에 구름이 그렇다. 아스팔트 열기가 군불 지피는 빈 솥 같이 뜨거워서 하늘 한 번 쳐다보았더니 그곳에 그렇게 구름이 마르고 있었다. 팔을 뻗어 만지면 바스락 부서질 것만 같다. 하늘에서는 무엇이든 곱게 잘 마를 것이다. 그늘도 없고 바람도 맑을 테니까.
아이들과 차를 타고 한낮에 나들이를 간다. 모자 쓰고 가방 메고 나름 차려 입고 들뜬 나들이를 간다. 매미가 지천으로 울어도 낮잠 한 번 늘어지게 자보지 않은 여름 방학. 그 바쁘게 돌아가는 틈바구니에서 모처럼 쪼갠 시간을 만끽하러 가는 길이다. 아이들은 공원 분수대에서 내뿜는 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호들갑스럽게 즐겁기만 하다.
"우리 어디 가요?"
알면서도 묻는다.
"아주 예쁜 서점."
"에이, 서점이면 그냥 서점이지 예쁜 서점이 어딨어요?"
한낮의 한산한 도로 위를 그야말로 질주하듯 내달렸다. 누군가 핸드폰을 열어 요즘 떠도는 가요를 크게 틀었다. 아이들이 언제 이런 노래들을 다 배웠을까? 노래와 함께 차도 같이 들썩거렸다. 멀리 강물이 우릴 보고 웃고 있었다.
"서점 가는데 왜 이렇게 멀리 가요?"
"특별한 서점에 가고 싶으니까."
"아무데나 괜찮아요. 그냥 멀리 멀리 가요 우리."
"그래. 오늘은 우리 멀리 멀리 가보자."


책을 꿈꾸다

책이 좋은 사람들은 어떤 꿈을 꿀까? 어떤 이는 아늑하고 눈이 부시지 않는 방에 나만의 서재를 꾸미는 꿈을 꿀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사람과 맛있는 차와 책이 어우러지는 카페를 꿈 꿀 것이고, 그리고 어떤 이들은 낮은 의자가 편안하게 깔려 있는 책방을 꿈꾸기도 할 것이다. 거창한 꿈이 아니어도 괜찮다. 날파리만 날아다니지 않는다면 작은 그늘도 좋고, 접이식 책꽂이라도 놓을 수 있다면 내 집 식탁이면 어떠랴.
"아, 저는 만화책이 좋아요. 만화책만 봤으면 좋겠어요. 저 오늘 만화책 사면 안 돼요?"
"야, 엄마도 만화책 사는 거 허락 안 하는데 선생님이 허락하시겠냐?"
"난 꼭 사야 되는 책이 있어요. 만일 제가 못 찾으면 선생님이 찾아주셔야 돼요."
"혹시요, 그 서점에 팬시점도 같이 있어요? 살 게 있는데......."
"진짜 내가 사고 싶은 책 아무거나 사도 되는 거죠?"
좁은 차 안에서 실컷 가요를 따라 부르다가말고 할말들이 많아졌다. 들어보니 다들 뭔가를 실컷 벼르고 있는 것 같다. 서점 가는 의도를 아이들이 먼저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딴청을 피우는 아이들이 밉지가 않다.  
  

그곳에 다다르다
 
차에서 내려서자 흙바닥의 뜨거운 열기가 후욱 올라왔다. 주차장 옆으로 저 혼자 올라온 낮은 풀들이 덩그렇다. 저 풀들은 무엇으로 목축이며 이 여름을 견딜까? 밤이 있으나마나해 보이다가도 여름 한낮 그늘도 없이 자라는 수북한 풀들을 보자 밤은 하루도 건너뛰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풀들만 그럴까? 나무도 그렇고 꽃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겠지. 저 풀들은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완전한 그늘을 거느린 밤을 꿈꿀까? 새벽마다 온몸에 전율을 느끼게 하는 이슬을 꿈꿀까? 아니, 그것만으로는 저렇게 꼿꼿하게 설 수 없을 게다. 저들을 저렇게 꼿꼿하게 서게 하는 의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갑자기 아이들의  꿈보다 땅에 뿌리박고 선 풀들의 꿈이 궁금해졌다.
한낮의 헤이리는 그늘도 없다. 입에서 저절로 헉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들의 볼이 금방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아이들은 하릴없이 쫓고 달렸다. 헉 소리를 지르고도 여전히 웃고 소리를 높였다. 여름 한낮에 끄떡없는 건 나무와 풀과 아이들뿐이었다. 그 나머지는 모두 끙끙 앓고 있었다. 아이들의 이마에 금방 땀이 맺혔다.


서점 앞에 서다

저곳에 과연 책이 있을까? 아이들이 머뭇거렸다. 같이 한참을 기웃거렸다. 도심 속에 있는 서점과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아이들도 나도 낯설다. 문을 앞에 두고도 어디로 들어가느냐고 물어보고 난 뒤 우리끼리 흐흐 하고 웃었다. 간판도 딱히 없다. 이곳은 어디든 다 그렇다. 분명히 사람들이 와 주길 기다리면서도 오면 오고 말면 말고 하는 식이다. 안내 하는 사람도 없고, 호객행위는 더더욱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어느 집이든 사람들로 북적대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텅 빈 곳도 없다. 무엇이 있는 곳인지 잘 보여주지도 않는다. 모두 꽁꽁 숨겨 놓았다. 그리고 꽉 차 있지도 않다. 시골 장터 같이 한보따리 만큼 펼쳐 놓은 게 전부다. 그런데도 없는 게 없어 보이니 참 신기한 곳이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온도차가 극심하다. 아이들이 또 한 번 헉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것도 우습다고 다들 흐흐 하고 또 웃었다. 나무 바닥을 밟는 소리가 뭔가 다른 세계로 통하는 듯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음악소리와 마루 밟는 소리만 낮은 북소리처럼 들렸다. 맞은편 쪽 넓은 방에는 탁자마다 차와 음식을 담을 채비를 마쳐놓고 있었다. 창가에 놓인 접시에서 한낮의 햇살이 쨍 하고 반사되어 튕겨 나왔다. 우리들과 그 햇살만 유일하게 바깥세상에서 묻어 들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햇살 너머로 몇몇 사람들이 앉아 차를 마시며 한낮의 식사를 즐기고 있는 것도 보였다. 그런데 책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무리 둘러 봐도 아직 책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널찍한 마루 끝에 계단 없이 올라가는 이층 통로가 보였다.  가만히 보니 그 비스듬하게 이어진 통로에 책이 길게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언뜻 언뜻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책을 고르다

도심 속의 서점에서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 여기서는 보인다. 참 신기하다. 사람들이 서서 책을 읽고, 천천히 거닐고, 소리 낮추어 속삭이는 모습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여기서는 시간마저 더디게 가는 것 같다.
나보다 앞질러 들어가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급하다. 그래도 잠시뿐 우르르 몰려가던 아이들의 발걸음이 저절로 더디어지더니 발소리도 낮아진다. 아이들이 진지하게 책을 고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그들이 보는 책도 넘겨다본다. 그들의 편안한 얼굴도 본다. 언뜻 그들의 깊은 눈과 마주치자 아이들도 슬며시 책을 집어 든다.  전혀 모르는 책도 들여다본다.
이제 나도 나대로 책을 봐야지. 아, 참 좋다.  이곳은 책이 벽을 가리지 않아서 좋다. 책이 창을 가리지 않아서 좋다. 그리고 책이 빽빽하지 않아서 좋다. 책이 숨을 쉬는 것 같아 좋다.  또 사람이 책에 가려지지 않아서 좋다. 좋은 게 많아서 참 좋다.
아이들이 책을 골랐다.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유유히 책과 한 풍경이 되었다. 책을 고르는 내내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다. 또 아무런 권유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아이들 마음으로 여유롭게 책을 골랐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도 마음 불편해하는 아이가 없었다.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가슴에 책을 끌어안고 나왔다. 시키지 않아도 아이들도 본능적으로 안다. 책은 눈으로 읽지만 가슴으로 가는 것을. 나무 바닥을 지나 큰 유리문을 밀고 나서자 한낮의 햇살이 아직도 거기에 꼼짝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바다를 본다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성산포에서는
한 마리의 소도 빼놓지 않고
바다를 본다
한 마리의 들쥐가
구멍을 빠져나와 다시
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바다를 본다
평생 보고만 사는 내 주제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

-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시집 중에서


나무 그늘에 둘러 앉아 십년도 더 된 시집을 펼쳐놓고 아이들과 읽었다. 아이들이 잠깐 바다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책도 사람같이 그냥 가만히 두어도 늙나 봐. 십년도 넘게 가만히 있기만 했는데 이렇게 낡았잖아."
"그런데 그 책은 왜 갖고 오셨어요?"
"옛날 생각이 나서. 이 책도 예전에 어딘가에 가서 오늘처럼 산 거거든."
"시가 너무 어려워요."
"나도 그래. 지금 조금 이해하기도 하고."
"그때 그럼 그걸 왜 사셨어요?"
"왜, 왜 샀냐고?……"
아이들은 늘 어른이 버벅거리는 모습을 즐기고 싶어한다. 한바탕 웃음이 높은 나뭇가지를 뚫고 어디론가 흩어졌다.
"예전에 책을 사면 앞장 여백에 늘 글을 남기는 버릇이 있었어. 그런데 그 버릇 때문에 묵은 책을 도무지 버릴 수가 없었어. 언제부터 있던 책인지도 모르고 있다가도 그 글을 읽고 나면 생각이 떠오르거든. 지금 읽어봐도 내가 누구를 만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느껴져."
아이들은 어른들이 엄청난 비밀을 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비밀 같지도 않은 비밀을 말이다. 그래도 짐짓 비밀스럽게 읽어주어야지. 그늘을 길게 매단 나무들도 실눈을 뜨고 내려다 보는 듯 했다.
 
친구를 막 보냈다.
입석으로 떠났다.
그 책을 펴볼 수 있을까?
눈이라도 내려준다면 근사할 것 같다.
긴 연휴 뒤에 몰려드는 피로.
좀 자야 할 것 같다.
그 친구는 참 쉽게 사랑을 할 줄 안다.
귀가 유난히 작은 그 남자에게 그 친구는 너무 집착하는 게 아닐까?
 - 얘, 그 남자 귀가 참 작더라.
    너희 엄마가 허락하실까?
    어머, 얘 얘! 정신 좀 차려 봐.-
                                  93. 1. 3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아이들이 나를 보고 씨익 웃어서 더욱 그랬다. 정말 비밀을 들켜버린 게 아닐까? 또 버벅거린다. 버벅거림이 아이들을 이렇게 즐겁게 할 줄이야. 오늘은 순전히 나 때문에 여러 번 웃는다. 덩달아 큰 나무들도 저들끼리 웃는지 시원한 바람이 일었다.
나도 뭐라도 써 봐야지. 아이들이 새로 산 책을 열었다.
"아까워요. 아까워서 못 쓰겠어요."
"틀리면 어떡해요? 지우개로 지워도 자국이 남잖아요."
"엄마한테 혼나면 어쩌지?"
"니네 엄마는 그런 것도 혼내냐?"

궁금하다. 바다를 그리워하던 성산포의 시인은 지금도 그러할까? 그 때의 내 그리운 친구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나는 어쩌다 추억의 페이지를 열어서 이렇듯 여름 한낮 생각에 잠기게 된 걸까.
아이들도 나와 같이 먼 데 하늘을 바라본다. 바싹 마른 구름이 어디론가 다 흩어지고 없다. 텅텅 비었다. 문득 구름이 그립다.  한낮의 해님은 거칠 대로 거칠다. 땅을 딛고 선 것들은 저마다 혼신을 다해 그늘을 만들고, 강물은 열심히 물분자를 하늘로 날려 보내고 있겠지.
아이들이 저마다 새로 산 책에 글을 적어 넣는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더니 결국 마음을 모아서 쓰기 시작한다. 마음이 다 글이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솔직하게 마음을 담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한두 줄이 되던지, 서너 줄이 되던지 아이들의 의지대로 글을 써 내려 갔다.


돌아오는 길   

대형서점 때문에 동네 책방들이 귀해졌다. 간혹 있는 책방도 제일 좋은 자리는 참고서와 문제집이 차지한다. 세상에 쏟아지는 것은 책이고, 그 책들을 모두 구비하기에는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그러니까 사다리를 써야 될 만큼 높은 서가로 빙 둘러쳤다. 그런 곳에 가면 책 볼 맛이 안 난다. 바로 어제 나온 신간도 쑥 뽑아줄 만큼 신속하다 해도 한가지다.
동네마다 책방들이 바뀌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꽃집처럼 변해도 좋겠고, 박물관처럼 변해도 좋겠고, 전통찻집처럼 변해도 좋을 것 같다. 꽃집에서 꽃을 느끼고, 찻집에서 차 맛을 느끼는 것처럼 책도 그런 느낌이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