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풀어낸 사형제 폐지의 당위
공지영,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안효근 | 한성여고 교사

우리들의 독서 토론 시간
교사 경력이 20년 가까이 되어 가다 보니 타성에 젖어 정체되는 것이 두려워 매달 한 번씩 마음 맞는 선생님들과 독서토론 시간을 갖고 있는다. 매번 사회과학 서적 위주로 토론을 진행하다 보니 뾰족한 해결책이나 대안도 없이 누적되기만 했던 여러 사회 현안들이 나를 비롯한 토론 참가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우리가 생존하는 사회의 불합리들이 심적 괴로움만 가중시키던 와중에, 일종의 탈출구로서 이번 달에 채택된 책이 공지영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전에도 한 번 읽은 적이 있던 터라 내용 정리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고, 남녀 주인공이 약간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들이라는 것만 빼면 별로 이야깃거리도 없으니, 작가가 의도한 바대로 사형제 폐지의 당위성을 확인하는 선에서 쉽게 토론이 끝날 거라는 애초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엉뚱하게도 발제자가 사형제 존치 쪽의 튼실한 논거를 주섬주섬 챙겨왔기 때문이었다. 세미나실 한 귀퉁이에서 시작된 토론은 금세 한 시간 반을 넘겼고, 뒤이어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도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인 '윤수'의 사형 집행과 여 주인공 '유정'의 사랑 방식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아가 자신의 가족이 괴한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했을 때 과연 사형제 폐지를 옹호할 수 있겠는가하는 극단적인 가정을 전제로 한 질문까지도 오갔다. 때문에 오늘만은 가벼운 이야기로 그동안의 정신적 학대에 대해 일종의 보상을 얻으려던 모두의 기대는 당연히 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짧지만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공지영의 소설이 늘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단숨에 읽혀진다. 공지영은, 흔히 말하는 잘 나가는 작가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어』, 『봉순이 언니』, 『착한 여자』, 『인간에 대한 예의』부터 『즐거운 나의 집』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소설 역정은 내 책장에 고스란히 살아있다. 이제 공지영의 작품 세계는 페미니즘과 운동권의 후일담에서 탈피하여 인기 작가로서의 사회적 책임감을 글 속에 반영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작가의 의도가 집요하게 반영된 탓에 잘 정제된 21세기형 계몽소설로 읽힌다. 작가는 굳이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던 삶의 비극적 다면성을 들이대면서 독자로 하여금 삶을 지탱하는 힘은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사랑과 관용의 힘임을 인정하도록 강요한다. 복수라는 원시성을 극복하고 상생하는 세계를 향해 함께 나아가자고 독자의 손목을 잡아끌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줄거리
소설은 블루 노트라고 불리는 사형수 '정윤수'의 기록을 바탕색으로 하고, 그 위에 화자인 '문유정'의 이야기로 덧칠이 되어 있다.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하여 한때는 유명한 가수로 활동했으며, 지금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교수로 일하고 있는 여주인공 문유정은 훌륭한 집안 배경에다 훌륭한 직업을 가졌음에도 비뚤어진 성격 탓에 집안의 골칫덩어리이다. 세 번째 자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입원실에서 눈을 뜬 그녀에게, 고모인 모니카 수녀가 방문하여, 정신병원 치료를 받는 대신 서울구치소의 사형수를 한 달간 함께 방문할 것을 제안한다.
남자 주인공인 희대의 살인마 정윤수는 흉악한 살인을 했음에도 수사과정은 물론 재판과정에서도 결코 뉘우친 적이 없었던 구제불능의 사형수이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날 때 바로 그날이 생의 마지막 날일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윤수는 세상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만을 곱씹으며 살아간다.
모니카 수녀의 소개로 처음 만났을 때, 너무 다른 성장 배경을 가졌고 삶의 여정조차 너무나 달랐던 윤수와 유정은 뒤틀린 말이나 냉소로 서로를 대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윽고 서로가 너무나 닮아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다. 자살미수로 생긴 유정의 손목 상처와 수갑이 만들어 낸 윤수의 상처는 둘 사이의 마음의 벽을 허무는 계기가 된다. 조금씩 경계심을 없애고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유정과 윤수는 면회실 작은 창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볕과 같이 서서히 마음이 따뜻해진다.
만남이 거듭되면서 두 사람은 지금까지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온, 기억조차 하기 싫은 진실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유정은 사촌오빠에게 강간당한 사실을 집안의 체면 때문에 숨기기에 급급했던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을 담담히 이야기하고, 윤수는 알콜 중독이었던 아버지와 재가한 어머니 사이에서 세상 무엇보다 사랑했던 동생 '은수'를 지켜주지 못한 회한의 상처와,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려진 것에 대한 증오로 인해 혼자서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인생을 끝내고 싶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깊은 수렁처럼 벗어나려고 발버둥칠수록 빨려 들어가는 윤수의 불행한 유년은 평생 그에게 올가미가 되어 그를 놓아주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그 속에서 건져내 주지 않았다. 근친상간의 충격으로 아파하는 유정 역시 가족들은 부정하며 외면했다. 그리하여 윤수와 유정은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전체가 묵인하는 가운데 사형수와, 죽기만을 바라는 여자로 성장한 것이다.
주인공 윤수와 유정은 그렇게 각기 다른 환경에서 성장해 사형수와 교수로 만났지만, 유년시절의 상처로 인해 서로의 영혼은 닮은꼴이다. 그래서 애써 외면해 왔던 심연의 상처를 본능적으로 알아본 것이다. 세상의 끝에서 만난 두 사람은 묻어두었던 진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통해 생의 본질을 되찾아간다. 서로의 상처를 드러내고 상대를 위로하면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삶과, 인간을 믿는 일에 대해서 조금씩 희망을 가지게 된다.
비록 교도소 면회실에서였지만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기에, 두 사람에게 있어서 세상에 태어난 이후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던 그들의 만남의 순간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이었다. 인생의 벼랑에서 어렵게 만날 수 있었던 사랑이었기에 더더욱 두 사람의 '행복한 시간'은 한없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윤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유정은 더 이상 자살 따위를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진실한 사랑을 느끼며 정말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허망하게도 윤수의 사형이 집행된다.

당당한 위선과 초라한 순수

할렘은 이를테면 뉴욕시와 도심지에서 돈을 벌며 사는 부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고발이다. 할렘의 유곽과 윤락녀들과 마약중독자들과 기타 모든 것들은 파크 애비뉴의 의젓하고 세련된 가식 속에서 무수히 행해지는 이혼과 음행의 거울이요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하느님의 평가이다. - 토마스 머튼
-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공지영, / 푸른숲 / 2005) 6쪽)

작가는 우리가 단지 악을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당한 재판관의 자리에 올라앉은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다. 까맣게 잊고 있던 일상적인 잔혹함, 망각했거나 대면하기 두려워했던 타인의 고통스런 삶의 편린을 풀어놓으며, 여전히 사형제가 존재하는 이 사회에 대한 수치심과 합법적 살인에 대한 문제의식 모두가 사라진 시대를 반성하게 한다.

느끼지 못하는 것보다 사악한 것은 한 가지뿐이지. 그건 당신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거야.
- 같은 책, 17쪽

그게 남이든 자기 자신이든 아프려면 바라봐야 하고, 느껴야 하고, 이해해야 했다. 그러고 보면 깨달음이 바탕이 되는 진정한 삶은 연민 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연민은 이해 없이 존재하지 않고, 이해는 관심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관심이다. 정말 몰랐다고, 말한 큰 오빠는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모른다, 라는 말은 어쩌면 면죄의 말이 아니라, 사랑의 반대말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정의의 반대말이기도 하고 연민의 반대말이기도 하고 이해의 반대말이기도 하며 인간들이 서로 가져야 할 연대의식의 반대말이기도 한 것이다.       - 같은 책, 248쪽

남자는 살인을 저지르고, 여자는 스스로를 살해하려고 자살미수를 행한다. 각각 미치는 계기는 다르지만 미치기에 충분한 성장 환경이 존재하고 제 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든 삶의 과정이 존재했다는 점은 둘에게 공통되고 있다. 둘 다 인생의 벼랑에 이르렀다는 점도 동일하다.
이야기는 유정의 시점에서 전개되고 있다. 왜냐하면 윤수는 죽어야 할 운명이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유정의 시점을 택한 것은 작가 입장에서는 리얼리티와 개연성을 높이는 장치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연애담을 보자. 유정과 윤수는 냉소와 무관심에서 시작하여 연정에 가까운 감정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거기에는 키스도 없고, 섹스도 없으며, 오직 정신적인 교류만이 존재한다. 만남의 장소가 교도소라는 특수한 공간인데다, 남자가 사형수라는 설정상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같은 사랑방식은 이 소설의 플롯을 떠받치는 충실한 기둥이 되고 있다. 교도소라고 하는 같은 장소에서 둘은 같은 시간대에 정기적으로 만난다. 남녀가 만나는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겠지만 이 정도 특수한 상황은 참 드문 경우이다. 아무튼 둘은 계속적으로 만나면서 거리를 좁혀간다. 육체적 접촉은 일체 배제된 채 오로지 정신적으로만 가까워지는 것이다.
알다시피 두뇌의 구조상 인간의 감성 활동은 이성을 능가하도록 되어 있다. 이유 없이 어떤 상대에게 사랑이나 친밀감을 느끼는 감성 활동은 통제가 불가능하다. 또한 사고와 행동을 통한 우리의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틀을 구성한 작가의 의도는 이성적 판단이나 논리적 귀결을 통해 독자를 이해시키고 설복시키려 함이 아니다. 저자가 노리는 것은 발견의 충격과 깨달음의 기쁨임이 명확해진다. 다른 자아를 입어봄으로써 좁고 편향된 시야를 벗어나 본연의 자아를 형성하고 성숙의 잠재력을 체감해 보라는 것이다. 무관심과 냉소는 우월한 지식의 결과가 아니라 이해력 결핍의 명백한 징후이기 때문이다.
윤수의 사형 집행이 다가오고 있다고 하는 점은 작가의 의도를 절실하게 전하게 하는 장치이다. 사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은 유정과 윤수의 배후에 늘 음습하게 도사리고 있어서 사는 것에 처음으로 의미를 찾게 된 두 사람 모두를 절박하게 만든다. 시간이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압박감은 남녀주인공들 못지 않게 독자에게도 똑같이 유효하다. 작가는 이제 독자와 더불어, 사형제 폐지에 대한 표준적 변론서를 쓰고 있는 것이다. 물질적 사고방식이 횡행하는 사회에 인도적 사고방식을 도입할 필요, 오판가능성이 상존하기에 상식의 차원에서도 사형은 불가하다는 당위, 사형제의 존치만이 사회의 안녕과 평화를 가져온다는 무지에 대한 반론, 잔인한 범죄성만을 강조하는 일방적인 여론에 대한 반발, 무엇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잔학성 등을 '유정'을 통해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부정적인 타자를 설정하는 목적은 그 되비침으로써 자신을 성스럽게 만들기 위함임을 누구보다 먼저 인식한 저자는, 이론적이고 당위적인 변명과 모면을 모색하는 간사한 평균인들을 위해 그 잔머리를 뒤흔드는 조롱의 올무를 쳐 놓은 것이다.

죽여야 한다고 법이 결정한 인간이 죽을까봐 링거를 놓았다는 사실이 나중에야 희극처럼 느껴졌다.
- 같은 책, 139쪽
    
유정을 만나기 전까지 윤수는 그저 조용히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해 유정의 고모인 모니카 수녀를 만나기 전까지 윤수의 사형을 기다리는 세상은 합리성을 가장한 위선 속에서 매우 평안했다.
그런데 모니카 수녀는 초라하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윤수를 구원하려고 한다. 물론 그녀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종교의 힘이다.

예수도 사형수였으니까. 그리고 그때 국민투표를 했대도 예수는 사형 당했을 것이었다. 군중들이 성난 목소리로 죽이시오, 십자가에 매다시오,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만일 예수가 교수형을 당했다면 이천년 동안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동그란 밧줄을 목에 걸고 다니고 동그란 밧줄을 교회 지붕에 올렸을 것이며 목이 대롱대롱 매달린 예수의 형상을 교회에 걸어놓았을 것이었다.      
- 같은 책, 265쪽

고통에 대한 감정이입, 복수를 자제하고 새로운 연대로 나아가는 행위, 그것이 용서이고 그 용서의 의미는 종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나 현실에서 용서의 공공성은 퇴색했다. 매너리즘에 빠진 종교의 범주 안에서 용서는 사사로운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되었다. 교리가 공동체적 삶의 지렛대가 되지 못하고, 교회당 안에 갇힌 사언어가 된 것은 현실의 공공영역에서의 의무적 실천의 필요가 없어진 탓이다. 개인 단위로 분화된 종교적 가치는 이제 취사선택이 가능한 옵션이 되어 버렸다.
이쯤 되면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가 죄인임을 읽게 된다. 사형의 본질은 복수임을 일갈할 때는 가슴의 응어리를 뽑아 내는듯한 시적 응집력이, 윤수의 블루 노트를 통해 범죄자에 대한 일방적 폄훼를 스스로 거두어들이도록 은근히 설득할 때는 거리를 두고 반추하는 수필적 관찰이, 장기 기증으로 동공이 비어버린 윤수의 시체와 스탠드 지붕을 얹는 공사를 통해 비를 맞으며 형을 기다리던 은수를 떠올리게 만드는 구도적 배치를 인지할 때는 가슴 속으로 뜨거운 입김을 쉼 없이 쏟아내는 소설적 장광이 느껴진다. 작가는 자신의 입으로 윤수를 말하지만 사실은 윤수의 입을 통해 자신을 말하고 있다. 유정의 눈빛과 모니카 수녀의 손길과 '이주임'의 미소는 온전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작가의 육신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한 발자국의 다가섬이라고 조용히, 그러나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위선을 행한다는 것은 적어도 선한 게 뭔지 감은 잡고 있는 거야. 깊은 내면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보여지는 것만큼 훌륭하지 못하다는 걸 알아.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위악을 떠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남에게 악한 짓을 하면서 실은 자기네들이 어느 정도는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위악을 떠는 그 순간에도 남들이 실은 자기들의 속마음이 착하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래. 그 사람들은 실은 위선자들보다 더 교만하고 더 가엾어. 그것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아무 기준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남들은 남들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 같은 책, 158∼159쪽

그러나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는 사형제 앞에서, 위선적일지언정 인간의 존엄성을 논하며 반대하는 이는 당당할 수 있으나, 피해자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순수함을 드러냄은 다소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일상에서 접하는 저급한, 혹은 저열한 인간들에 끝없이 분노하고 일말의 용서도 가당치 않다고 여기던 독자들이 인간의 폭력성이 가장 극도로 현실화된,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그래서 범인을 죽여서라도 보상을 기대하게 되는 흉포한 범죄 앞에서, 이성적·감성적으로 냉철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위선이 아닐까?
우리들의 독서 토론 말미에 나와 우리 모두를 곤혹에 빠뜨린 질문 하나.
'독자 제위, 당신의 17살 먹은 딸이 흉포한 살인마에게 47군데쯤 칼에 찔려 무참히 살해당했다면 그 범인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 논술꺼리 제시문은 여기서 생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