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밖에서 말을 거는 시
- 중고생을 위한 시 읽기

선생님들께 권하는 시
|유영미 해오름 평생교육원 전임강사|

「목론(目論)」이라는 단편 만화가 있다. 오세영 님의 단편만화집 『부자의 그림일기』중의 한 편으로, 단편이지만 여러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제목을 우리말로 풀어보면 '보는 것에 대해 말하다' 정도가 될까? 지하철 안을 공간으로 하고 있는 이 만화에는 자신의 겉모습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반면에 내면세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그의 행동거지는 무례하고 이기적이다. 외모 가꾸기와 내면 가꾸기의 극단적 불균형 상태를 보여주는 현대인의 상징이다. 이윽고 한 역에서 지팡이에 의지한 시각장애인이 승차한다. 그를 본 이 무례한 남자는 혀를 쯧쯧 찬다. 제 딴에는 그가 눈이 보이지 않으니 얼마나 안 되었냐는 동정이다.
작품이 끝나는 부분에서 일대 반전이 일어난다. 지하철을 타고 있는 내내 쉴 새 없이 자신의 매무새를 다듬고 또 다듬던 그 남자와 시각장애인이 하차하기 위해 나란히 뒷모습을 보이고 섰다. 시각장애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다. 반면 그 남자의 양복 뒤 자태는 후줄근하고 뒷머리는 까치집이다. 황당한 반전이다. 만화는 이 남자를 내세워 우리가 얼마나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지를 일깨운다. 털고 닦고 꾸미는 우리의 시선이 얼마나 지엽적이고 우리의 호흡이 얼마나 단기적이냐는 것이다. 정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선은 짧다. 오늘 우리의 선택이 1년 후, 10년 후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지하고 무책임하다. 오늘의 단기적 이익이 내일 엄청난 재앙으로 되돌아 올 것에 대해 눈을 감는다.
이 만화는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있게 하는 인간의 가치체계나 내면세계보다 단지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주목하는 우리의 가벼움과 편협성을 지적한다. 또 우리의 놀라울 정도의 근시안과 그 우매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만화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던지는 메시지는 눈으로 보는 것에 대한 한계, 시각에 의존해 바라보기의 한계이다.
만화의 남자는 두 눈을 멀쩡하게 뜬 사람으로서 시각장애인이 보지 못하는 것을 동정한다. 그러나 두 눈을 다 뜨고 있었던 그 남자보다 시각장애인은 더 정갈하게 자신을 단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비적 결과는 무엇 때문일까? 시각장애인은 자신이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남자는 자신은 다 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의 겸손한 자기 한계 인식이 그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도록 해주었을 것이다.
과연 우리가 물리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TV의 9시 뉴스를 '보았기' 때문에 대통령이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오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았다고 믿는다. 오늘 만난 사람의 첫인상이 어떻게 무슨 옷과 무슨 차를 타고 있는지 '보았기' 때문에 그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가 만나는 아이들이 책을 얼마나 읽어왔고 숙제를 얼마나 해 왔으며 수업에 얼마나 열성인지를 '보았기' 때문에 그 아이는 그런 아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들만이 진실은 아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외형이 실체의 본질을 가리기도 한다.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 보면 어느 터키 천문학자가 별을 관측해내었지만 그의 후줄근한 옷 때문에 그의 관측 결과는 무시된다. 애벌레를 볼 때 그 외양으로 인해 절대 그 안에 나비가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꼭 읽을 만한 아름다운 책 『꽃들에게 희망을』을 쓴 트리나 폴리스는 이 책의 서문에서 "자기에게 나비의 존재를 믿게 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고 쓰고 있다. 가시적인 애벌레의 외양을 뛰어넘는 '보기'를 통해 그 너머에 존재하는 비가시적인 나비의 존재를 보고, 자기를 일깨우고, 후원한 이들에게 감사한다는 말일 것이다. 이렇듯 눈으로 보기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모든 것을 눈으로 보기를 통해 판단하고 단정하는 버릇에서 쉽게 놓여나지 못한다.
이런 우리의 고질적인 습성을 반추해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시인과 시가 있다. 양정자 시인의 시집 『아이들의 풀잎노래』. 특히 이 시집은 우리가 만나는 아이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아이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애벌레인 아이들 속에 감추인 나비의 존재를 얼마큼 보고 있는지 성찰하게 하는 시집이다.
이 시집은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1993년에 발간되었고 시인이 20여 년의 교직 생활 중 쓴 시들을 묶었다. 나는 처음 이 시집을 대하고 참 많은 감동을 받았다. 진솔하고 정감 있고, 중학생 아이들의 특성과 삶의 모습들이 너무도 생생하여 시편들을 읽을 때마다 곧 책장 속에서 아이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층계에서 서로 장난질치다 넘어져 발목 뚝 부러진 우리 반 말썽꾸러기 김민호
그애 발 기브스하고 목발 딛고 다니는 한달 동안
우리 반 60여 명 아이들
목발 한 번 안 짚어본 아이들 별로 없네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그애
큰 칼 쓴 듯 풀 다 죽어 꼼짝없이 앉아 있을 때
그 틈을 이용해 쉬는 시간마다 점심시간마다
한쪽 다친 다리 흉내내면서
30도를 오르내리는 그 무더위 땀 뻘뻘 흘리며
1층에서 3층 계단까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서로 먼저 빼앗아 서로 먼저 해보려고 장난질 치다
또다시 똑 부러뜨린 김민호 목발
그애 발목 부러뜨리고도 아직도 시원찮아
이제 그 목발마저 또다시 부러뜨린, 징그러워라
우리 반 정말 못 말리는 사내아이들

-「목발」

그러나 무엇보다 이 시집의 아름다움과 감흥은 양정자 시인이 아이들을 보는 방식과의 만남이다. 그는 아이들을 물리적인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의 눈, 영혼의 눈으로 본다. 그래서 아이들이 드러내는 가시적인 현상에만 머물지 않고 비가시적인 본질에까지 그의 시선이 다다른다.

잎새들로 잎새들로 얼굴 가려 서 있는
너희들 숨어 있는 놀라운 한 나무 한 나무
눈부시구나
젊음의 우레 천둥소리 늘 꽝꽝 울려대며
이글이글 시퍼렇게 꿈 타오르는
녹색 출렁이는 바다, 숲이여
아무도 너희 떠들썩한 자람을 막지 못한다
스스로도 제어 못할 눈먼 힘이 분수처럼 솟구치는
짙푸른 사지 마디마디
자라나는 가려움으로 너희는
한시도 손발을 가만두지 않는다

이겨낼 수 없는 큰 잠
들끓는 본능과 눈뜨인 인식 사이
어린애와 사춘기
장난질과 진지함의 갈등 속에서
미래 장부들의 잔가지가 나날이 굵어진다
캄캄한 시간의 늪 속에서 온뭄을 빠뜨린 채
늘 하늘을 꿈꾸는 너희 높은 이마는
자라남의 번민으로 어둡게 번뜩이고

-「교실에서」중에서

시인은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코밑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 영혼들 속에 내재한 눈부시게 놀라운 나무를 보고 광대한 바다와 또 숲을 본다. 한시도 조용하지 못하는 소란과 법석은 시인에게 젊음의 우레 소리로 들려오고 시퍼렇게 꿈이 타오르는 미래 장부들의 자람으로 인식된다. 마음의 눈으로 상대의 내일을 볼 줄 아는 시인에게 아이들은 천지 분간 없이 뛰고 까부는 존재가 아니라 늘 하늘을 꿈꾸는 높은 이마를 지닌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그러나 교단에 서서 수많은 아이들을 대하면서 왜 속이 터지는 일이 없겠으며, 미운 눈총 보낼 아이가 없겠는가? 「미래의 남편」에 등장하는 칠칠이 준호나 「합창대회」의 돌대가리 유한철 같은 아이들이 때때로 시인의 마음에 파문을 던지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시인의 이런 감정은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다. 칠칠이 준호와 돌대가리 유한철에 대한 시인의 노래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저렇게 누런 코 줄줄 흘리고
손톱 때 새까맣고
숙제도 준비물도 제대로 한번 챙겨본 적 없는
우리 반 칠칠이 준호
지금 어디선가 코 줄줄 흘리고
손톱 때 새까만 채 떠들썩 자라나고 있을
한 칠칠이 여학생 만나
그래도 사내꼭지라고
제 여자 쥐잡듯 잡도리하며 사랑도 해주면서
남편 구실 당당히 해나가겠지

-「미래의 남편」전문

선생인 시인의 눈에 준호는 수많은 학생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더욱이 이 아이는 지저분하며 학생의 본분에도 충실치 못한 '칠칠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가 어른이 되어 사랑을 하고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면 그는 그만그만한 많은 학생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한 여자에게 세상에서 둘도 없는 존재가 될 것을 떠올린다. 시인은 자신의 학생들을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칠칠한 학생이라는 추상체로서가 아니라 유일하고 고유한 존재들로서 만나려 노력한다. 학생이라는 사회적 분류, 우등생이나 모범생이라는 기준에서 자유로운 시인은 '돌대가리' 유한철도 그래서 이토록 어여쁘게 보인다. 가시(可視)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선이 다다르는 곳. "혼과 혼이 만나는"(「교실에서」) 그곳에 인간에 대한 이해와 경외감, 사랑이 있다.

아무리 공부시켜보려 해도 운명적으로
공부 안 되는 아이들이 학급마다 몇몇 있지
방과 후 시험 삼아 한 시간 내내 붙들어 놓고
student 한 단어만 연방 외우게 해도 도무지 그 한 단어마저 외워 쓰지 못하는
1학년 20반 천하 장난꾸러기, 돌대가리 유한철
합창대회인 오늘
맨 앞줄에 서서 노래 부르는 걸 보니
한시도 가만두지 못하는 팔다리
제법 의젓이 모은 채
제가 부르는 저 노래
슈베르트 곡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는지
그 아름다운 가사 다 외우고 감정까지 넣어
고개 연방 끄덕끄덕 거리며
그 작은 몸 물결치네
입 뻐끔뻐끔 벌려대는
숭어새끼 같은
저 어여쁜 어린것

-「합창대회」

이 시들의 준호나 한철이는 시인에게 꽃과 같은 존재가 되었고 노래가 되었다. 이 아이들은 특별히 사회나 교사, 부모의 기대치를 만족시켜줘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의 가치는 그 자체에 내재해 있다. 물질 숭배적이고 계량적이며 편협한 자기중심적 시선을 거둘 때 상대의 빛깔과 향기를 발견하게 되고 상대는 그저 몸짓이 아닌 꽃과 같은 찬란한 존재로 내게 다가선다. 그리고 자기 또한 타자에게 그러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된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처럼 말이다.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우리 모두는 살아가는 존재감과 존중감이 필요하다. 사회 속에서 의미 있는 일을 성취하고 싶고 타인들 속에서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를 열망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오늘도 '의미 있는 일'을 위해 생애를 불태우며 사회에서 인정받기를 원한다. 나를 유일무이한 의미로 받아들여 줄 존재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좌절과 낙담이 되돌아오는 경우가 더 흔하다. 왜일까? 나만이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이룰 것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것에 먼저 응해주면 되지 않을까?
양정자 시인은 "버려진 어떤 아이"의 바람에 먼저 반응함으로써 몸짓에 불과했던 아이가 꽃으로 발견되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그리고 자신도 아이에게 몸짓에서 꽃으로 재발견된다.

관심으로 돌본다면 버려진 어떤 아인들
몰라보게 변하지 않으리오
머리 길고 손톱 때 새까맣고
이빨도 안 닦고 다니는
해장국 파느라 늘 바쁜 그 엄마를 대신해
내가 눈여겨보기 시작한
1학년 14반 게을백이 김장호
영어시간마다 김장호씨 김장호씨 불러주면
수줍어 얼굴이 붉어지면서 큰 입 헤벌쭉 벌어지네
더러웠던 모습 어느새 저렇게 변했나
머리 손톱 짧게 깎고
이제 이빨도 티밥처럼 하얗게 빛나는
날로 멋있어가는 김장호씨
시간 중 영어시험 보면 30, 40점 맞던 아이가 80, 90점 맞을 때도 있네
신기해서 거둔 답안지 자세히 살펴보면
제가 쓴 성명 석자 옆에 '씨'자 하나 더 붙어 있네
얼마나 그 존칭이 좋았으면 그랬을까
하루하루 달라지는 그애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그 반 수업이 설레임에 가득 차네
흙 속에 감춰졌던 보석처럼 날로 빛나는
그애랑 시간마다 남몰래 눈맞추면서

-「김장호씨」

가을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오는 이 계절에 시집을 열고 나의 '보는' 습성을 반추해 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 내가 만나는 한 아이 한 아이를 떠올려 보리라. 나는 그 애들 속에 감추인 '나비'의 존재를 얼마나 확신하는지. 무엇으로도 대치되지 않고 무엇으로도 견줄 수 없는 그 꽃들만의 빛깔과 향기를 얼마나 발견했는지.
나도 타인들에게 특별한 존재로 기억되고 싶지만, 시인처럼 타인들을 특별한 존재로 품어보리라. 그러면 그들이 내게 와서 꽃이 되고 나도 그들에게 꽃으로 발견되지 않을까? 이 청량한 바람에 나의 혼탁한 시선이 맑게 씻기어져 아이들을, 내 가족을, 내 이웃을, 나에게 상처 주고 내가 상처 준 이들을 부디 발견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시와 함께 일상 속에서 살아가기

|오영임 논술교사|

1. 지루한 일상 바라보기
아이들에게 일과를 물어보면 대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 날이 그 날인 일상을 보내고 있다. 학업에 치이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이라고 해도 그건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고 당연한 일일까? 세상에는 슈퍼맨보다 맥가이버 같은 사람이 더 많고 맥가이버보다는 순돌이 아빠 같은 사람이 더 많다. 이렇다하게 내세울 것 없는, 말 그대로 평범한 소시민들로 하루하루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기에도 분주하다. 그래서 소시민들의 일상이란 여기저기서 푸대접받는 소재가 되고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이 당사자들에게는 얼마나 무게가 있으며 삶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 생각해본다면 가볍게만 볼 수 없는 일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상의 태반이 그 부류에 속해 있다. 물론 일상이라는 건 싱겁고 지루해서 재미나 흥미를 느끼기가 힘들다. 허구한 날 다니는 길에 늘 보는 얼굴들에 매일 듣는 소리까지 새로울 게 없으니 맥 빠진다. 그렇다면 사는 동안 뛸 듯이 기쁘고 하늘을 나는 듯 행복한 순간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또 그런 날들 만을 위하여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어쩌면 우리는 우리와 동떨어진 것들, 이질적인 것들에서 즐거움을 찾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에 비해, 정작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에 대해서 지루하고 똑같다는 것 말고 무엇을 발견한 적이 있을까? 무언가를 긍정하고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것이 꼭 세세하게 분석하고 통찰한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린 아이들의 경우, 많은 사람을 만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어른들의 세계보다 단조로운 아이들의 일상을 기발하도록 재미있게 그려내는 걸 종종 발견하곤 한다. 그것은 아마도 아이들이 정직하고 꾸밈없는 시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만 볼 줄 알아도 매일매일은 새롭고 다채로운 일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은 아직 지루함이나 변화 없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 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보통 지루함, 따분함을 알게 되는 것은 십대의 나이부터이다. 지루함과 권태로움을 느끼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비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삶에서 애써 그런 정서를 지우려고 하는 마음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일 테니까…. 여기 변화가 없는 지루함을 경험하는 동시에 일상을 솔직하게 바라보고 이를 통해 묘한 통쾌함을 주는 시가 하나 있다.

하품
김기택

다 본 스포츠 신문을 다시 훑어보는
무료한 얼굴이 잠시 긴장하더니
갑자기 가쁜 숨이 몰아친다
콧김과 입김이 심상치 않더니
코와 입과 턱에 근육이 돋더니
입이 공기를 크게 베어 물며 열린다
턱뼈에 무게를 싣고
느리지만 힘차게 벌어지는 입
얼굴의 중앙을 한껏 밀어 올린 정점에서
입은 숨을 멈추고 잠시 정지해 있다
포효하는 지루한 침묵
나태 속의 짧은 긴장
수축된 안면 근육에 밀려 반쯤 닫혀진 눈에
눈을 치켜 뜬 지하철 승객들이 보인다
치켜 뜬 눈 속에 목젖과 목구멍이 비친다
얼른 입을 닫아야 할 텐데
둥근 공기의 힘에 밀려 닫히지 않는다
질긴 고기로 단련된 이빨도
공기 한줌의 완력에 밀려 할 일이 없다
다물려 할수록 커지는 입 속으로
무덥고 탁한 것들이 거세게 빨려온다
입을 찢듯이 벌려 제 일 다 보고 나서
공기는 슬며시 입에서 빠져나온다
얼굴 주위에서 파리처럼 날던 권태는
입이 닫히자 기다렸다는 듯
얼굴로 몰려와 덕지덕지 앉는다
눈은 더 빨갛게 충혈되어 있다
좌우로 빠르게 눈동자를 움직여
검은자위로 흰자위를 닦아 보지만
붉은 실핏줄만 더 선명해질 뿐이다
이렇게 소화 안 되는 공기는 처음이야
입맛을 쩝쩝 다시며
얼굴은 무료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지하철 어둡고 어지러운 공기로 채워진 뱃속은
불만족스러운 듯 그르렁거리고
목젖은 딸꾹질처럼 맵다
덩치와 폐활량에 비해 턱없이 작은 콧구멍이
수상하다는 듯 다시 두 구멍을 벌름거린다

지하철에서 하품하는 남자의 모습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고단함을 본다. 진부하고 범상한 일상의 한 때를 포착하여 무미건조하면서도 정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하품이란 지루하고 피곤한 일상의 표현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온다. 상투적이고 원색적인 스포츠 신문에서 가볍고 단순한 재미를 찾고자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핏발선 눈이 그의 고단함을 보여준다. 일상은 흔하다. 공기처럼 흔하다. 그 공기가 '질긴 고기에 단련된 이빨'을 밀어 올려 꼼짝 못하게 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루한 일상을 던져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꿈을 꾼다.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덮고 자던 이불을 걷어차고 어제와 전혀 다른 하루를 살려고 마음만 먹으면 다 될 것처럼 생각하지만 일상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게 쌓여가는 먼지나 조금씩 몸에 익어 결국 습관이 되어 버리는 작은 행동으로 이루어져 생각보다 힘이 세다. 관성에 몸을 맡길 때는 편하게 느껴지던 것들이 일상에서 탈출하려 하면 발목을 붙잡고 늘어진다. 그러니 '덩치와 폐활량에 비해 턱없이 작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듯 소망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월급봉투나 부스럭거리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표현들이 실제 일상의 모습보다 재미있고 해학적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감상도 위로라면 위로일 것이다. 이렇게 쓰인 시를 보면서 무릎을 치며 공감하듯, 우리도 일상을 주제로 짤막하고 평범한 시를 써보면 어떨까.

2. 그늘 속 바라보기

가벼운 안녕
윤제림

제 가는 길이 맞느냐 묻고 싶은 듯
길복판에 멈춰 섰다가,
아주 가기는 싫은 듯 은행잎 단풍잎 함께
차에도 밟혔다가 구둣발에도 눌렸다가,
아무나 붙잡고 달려보다가
엎어졌다가, 뒹굴다가
납작해졌다가, 봉긋해졌다가
집나온 강아지모양 쭈뼛거리다가
부르르르 떨다가
결심한 듯 차고 일어나는
검은 비닐 봉다리.
가벼운 안녕

검은 비닐 봉다리가 스산한 가을 거리를 뒹군다. 봉다리와 그 봉다리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헛헛함이 서려있다. 거리에 나풀나풀 나뒹구는 비닐봉지는 어딘지 초라한 느낌을 준다. 어떤 물건이든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 있으면 흔하고 하찮은 것이 된다. 이 시에서는 단지 거리에 버려져 있는 검은 비닐봉지의 모습만을 묘사하고 있지만 무척 인간적인 느낌과 함께 초라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진다. 눌리다, 달려보다가 엎어졌다, 쭈뼛거리다, 부르르르 떨다와 같은 동사는 꼭 사람이 하는 몸짓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살면서 누구나 나 혼자만 슬프고 누추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처음 그런 기분을 느낀 것은 학창시절 나쁜 성적을 받고서 자존심이 심히 상해있던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성숙한 어른이건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아이이건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것은 대개 아주 사소한 일들에서인 것 같다. 그래서 이런 경험은 평생을 두고 계속된다. 거리의 노숙자나 구걸하는 거렁뱅이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이 나와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시멘트 길바닥에 신문지 한 장 깔로 앉아있는 추레한 차림의 노인네는 나물을 늘어놓고 오가는 행인들을 올려다본다. 주름진 그 얼굴과 오그라드는 뒷모습에서 측은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굽은 육신으로 동산 만하게 폐지가 쌓인 리어카를 끌고 가는 노인의 모습을 보며 저것이 내 미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솔직히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따뜻한 연민의 마음을 가지기 이전에, 가난과 도태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잘 생각해보면 그 정도의 가난을 경험해보지 않았을 테지만 소외와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소외와 초라함은 실제 경험했을 때 또 그만큼 힘겨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또한 더 나빠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상황 자체에 너무 빠져 있어 넓게 보지 못하는 조급한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에 '결심한 듯 차고 일어나는 가벼운 안녕'이라고 한 것 같다. 시련을 털어내고 일어나는 것은 많은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그렇게 일어선 후에는 가볍게 다음 발 결음을 내딛어야 한다. 경험하고 인내하고 털어버리고, 때로는 잊어버리고…. 그 다음번에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시작하는 것, 그래서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래서 너는 시를 쓴다?
유치환

서울 상도동 산번지를 나는 안다
그 근처엔 내 딸년이 사는 곳

들은 대로 상도동행 뻐스를 타고 한강 인도교를 지나 영등포 가도를 곧장 가다가 왼편으로 꺾어지는 데서 세 번째 정류소에 내려 그 정류소 바로 앞골목 언덕빼기 길을 길바닥에 가마니거적을 깔고 옆에서 우는 갓난아기를 구박하고 앉아 있는 한 중년사나이 곁을 지나 올라가니 막바지 상도동 K 교회당 앞에 낡은 판자로 엉성히 둘러 가리운 뜰 안에 몇 가구가 사는지 그 한편 마루 앞 내 셋째딸년의 되는 대로 걸쳐 입은 뒷모습

- 이 새끼 또 밥 달라고 성화할 테냐 죽여버린다
- 엄마 다시는 밥 안 달라께 살려줘

그 상도동 산번지 어디에서 한 굶주린 젊은 어미가 밥 달라고 보채는 어린 것을 독기에 받쳐 목을 졸라 죽였다고

- 이 새끼 또 밥 달라고 성화할 테냐 죽여버린다
- 엄마 다시는 밥 안 달라께 살려줘

그러나 그것은 내 딸자식이요 손주가 아니라서 너는 오늘도 아무런 죄스럼이나 노여움 없이 삼시 세끼를 챙겨 먹고서 양복바지에 줄을 세워 입고는 모자를 얹고 나설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는 어쩌면 네가 말할 수 없이 값지다고 믿는 예술이나 인생을 골똘히 생각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 순간에도 굶주림에 개같이 지쳐 늘어진 무수한 인간들이 제 새끼를 목 졸라 죽일 만큼 독기에 질린 인간들이 그리고도 한마디 항변조차 있을 수 없이 꺼져가는 한겨레라는 이름의 인간들이 영락없이 무수히 무수히 있을 텐데도 그 숫자나마 너는 파적거리로라도 염두에 올려본 적이 있는가

그러나 한편으로 끼니는 끼니대로 얼마나 배불리 먹고도 연희가 있어야 되고 사교가 있어야 되고 잔치가 있어야 되고…그래서 진수성찬이 만판으로 남아 돌아가듯이 국가도 있어야 되고 대통령도 있어야 되고 반공도 있어야 되고 그 우스운 자유 평등도 문화도 있어야만 되는 것

- 이 새끼 또 밥 달라고 성화할 테냐 죽여버린다
- 엄마 다시는 밥 안 달라께 살려줘

그러므로 사실은 엄숙하다 어떤 국가도 대통령도 그 무엇도 도시 너희들의 것은 아닌 것
그 국가가 그 대통령이 그 질서가 그 자유 평등 그 문화 그 밖에 그 무수한 어마스런 권위의 명칭들이 먼 후일 에덴 동산 같은 꽃밭사회를 이룩해놓을 그날까지 오직 너희들은 쓰레기로 자중해야 하느니

그래서 지금도 너의 귓속엔
- 이 새끼 또 밥 달라고 성화할 테냐 죽여버린다
- 엄마 다시는 밥 안 달라께 살려줘, 고
저 가엾은 애걸과 발악의 비명들이 소리소리 울려 들리는데도 거룩하게도 너는 詩랍시고 문학이랍시고 이 따위를 태연히 앉아 쓴다는 말인가

'러브 하우스'나 '긴급출동 SOS'를 보며 그래도 나는 이만하면 살만하다고 생각한다. 엽기적인 사건이나 충격적인 사고를 보며 끌끌끌 혀나 차고 만다. 소시민은 겁이 많다. 그리고 스스로 그렇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신의 주변을 깊이 관찰하거나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고찰하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행동'을 해야 하는 생각이 들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연민에 마음이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가족만큼은 보란 듯 잘살았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그 소망을 치사하게 느낀다.
사람들에게는 나약한 자신에 대한 실망과 부끄러움이 있다. 세상에 대해 모르고 그만큼 나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할 때에는 세상을 향한 분노가 크지만, 나이가 들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수록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커져 간다. 아마도 이런 감정을 느끼는 아이는 남들보다 조금 성숙하거나 포부가 큰 아이일 가능성이 많다. 그만큼 자의식도 빨리 자라고 삶에 대한 욕구도 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이를 볼 때면 그 젊은 열정을 지켜주고 키워주고 싶은 마음 보다는 나도 모르게 걱정이 앞선다. 우선 나 스스로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고 앞으로 아이가 겪게 될 자괴감이나 무기력함까지 감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겪을 자신에 대한 실망이나 부끄러움은 누군가 책임져 줄 수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안다. 개중에는 정말로 자신의 이상대로 살아가게 될 아이도 있을 테고 현실적으로 무력한 스스로를 깨닫는 아이도 있을 터이다. 다만 그것이 각자의 그릇에 맞는 자연스런 삶이길 바라고,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양심을 건강하게 지킬 수 있다면 좋겠다.

3. 소통과 회복의 길 찾기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이 진 명

나는 나무에 묶여 있었다. 숲은 검고 짐승의 울음 뜨거웠다. 마을은 불빛 한 점 내비치지 않았다. 어서 빠져나가야 한다. 몸을 뒤틀며 나무를 밀어댔지만 세상 모르고 잠들었던 새 떨어져내려 어쩔 줄 몰라 퍼드득인다. 발들에 깃털이 떨어진다. 오, 놀라워라. 보드랍고 따뜻해. 가여워라. 내가 그랬구나. 어서 다시 잠들거라. 착한 아기. 나는 나를 나무에 묶어 놓은 자가 누구인지 생각지 않으련다. 작은 새 놀란 숨소리 가라앉는 것 지키며 나도 그만 잠들고 싶구나.

누구였을까. 낮고도 느린 목소리. 은은한 향내에 싸여. 고요하게 사라지는 흰 옷자락. 부드러운 노래 남기는. 누구였을까. 이 한밤중에.

새는 잠들었구나. 나는 방금 어디에서 놓여난 듯하다. 어디를 갔다온 것일까. 한기까지 더해 이렇게 묶여 있는데, 꿈을 꿨을까. 그 눈동자 맑은 샘물은. 샘물에 엎드려 막 한 모금 떠 마셨을 때, 그 이상한 전언. 용서. 아, 그럼. 내가 그 말을 선명히 기억해 내는 순간 나는 나무기둥에서 천천히 풀려지고 있었다. 새들이 잠에서 깨며 깃을 치기 시작했다. 숲은 새벽빛을 깨닫고 일어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얼굴 없던 분노여. 사자처럼 포효하던 분노여. 산맥을 넘어 질주하던 증오여. 세상에서 가장 큰 눈을 한 공포여. 강물도 목을 죄던 어둠이여. 허옇고 허옇다던 절망이여. 내 너에게로 가노라. 질기고도 억센 밧줄을 풀고. 발등에 깃털을 얹고 꽃을 들고. 돌아가거라. 부드러이 가라앉거라. 풀밭을 눕히는 순결한 바람이 되어. 바람을 물들이는 하늘빛 오랜 영혼이 되어.

심각하게 이마에 주름을 세우고 산다고 해서, 모든 일에 진지하게 산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삶이 진실하고 충만하다고는 할 수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너무 쉽게 잊혀지는 사실이다.
나는 내가 만나는 아이들이 너무 심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 나이에 맞게 오늘을 더 생생하게 살기를 바란다. 오늘은 수없이 많은 날들 중의 하나지만 결국 인생에서는 단 하루뿐인 오늘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어제도 다가올 내일도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오늘뿐인데 그 오늘도 내일이라는 시간에 저당 잡혀 빠듯하게 살아진다. 나는 그것이 못내 아쉽다.
"……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내게 상처를 준 선생들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소수의 예외적인 선생을 제외하고, 그들은 정말로 소중한 것을 내게서 빼앗아가 버렸다. 그들은 인간을 가축으로 개조하는 일을 질리지도 않게 열심히 수행하는 '지겨움'의 상징이었다.
그런 상황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오히려 옛날보다 더 심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건, 선생이나 형사라는 권력의 앞잡이는 힘이 세다. 그들은 두들겨 패보아야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우리 쪽이다.
유일한 복수 방법은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싸움이다. 나는 그 싸움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지겨운 사람들에게 나의 웃음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싸움을, 나는 죽을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 무라카미 류, 『69』중에서-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가기만 할 게 아니라면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색이라고 이름을 붙이든 고찰이라고 하든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완벽해질 필요는 없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적어도 자신을 믿을 수 있기만 해도 훌륭한 모습이 아닐까. 우리 주변의 아이들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보다는 인정을 얻음으로써만 사랑받는 일, 자신의 행동과 생각에 책임을 질 줄 알기보다는 책임에 대한 부담과 죄책감을 먼저 배운다. 자연스런 욕구, 의지와 같은 것보다 보상과 인정을 먼저 경험하기 때문이다. 학교교사가 아닌 단지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독서지도자로서 그 오래된 아이들의 관습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인지…. 생각이 깊은 아이, 지금까지 좌절이 별로 없었던 아이일수록 자신의 완벽한 모습에 대한 기대가 크다.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돋보이지 못하면 의기소침해지는 모습이 진심으로 안쓰럽다. 그렇지만 삶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안다. 그런 아이들에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나부터 이점을 인정하고 스스로 유쾌한 사람이 되는 일 같다. 그래서 아이들 삶의 아주 작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동안 심각하지 않게 웃을 수 있었으면 한다. 능력이 뛰어난 아이이건, 말귀가 어두운 아이이건,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이건,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이건…행복하고 유쾌해지는 데는 조건이 필요 없음을 느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