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전장호 | 누리하제 전임강사

학습목표
1. 역사의 왜곡이란 무엇이고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본다.
2. 역사탐구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역사왜곡이란 무엇인가
과거의 발자취는 그것을 기록해 놓은 문자를 통하여, 때로는 그 시대의 유물이나 흔적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과거 인간의 삶에 대하여 유추하고 과거의 사건들에서 의미를 찾는다. 예전에 있었던 일들은 고고학, 금석학, 연대학 등 과학을 통하여 객관적 사실이 되기도 하고 기록으로 전해져 사실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과거의 일들이 모두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가 그 사건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역사적 사건이 된다.
그렇다면 역사를 왜곡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1592년에 일본과 조선의 전쟁이 일어났다.
1919년에 일본이 대한제국을 합병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1392년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다.

이러한 사실들이 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 왜곡일까. 실제로 존재했던 과거의 일들을 부정하는 것을 역사의 왜곡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1592년에 일본은 명나라와 전쟁을 하기 위하여 조선을 거쳐갔다.
1919년에 일본은 대한제국의 근대화와 동아시아의 번영을 위하여 조선과 통합했다.
1950년에 남한의 공산화를 위하여 북조선이 남침하였다. 또는 1950년 한국전쟁은 인민해방전쟁 이었다.
1392년에 무능하고 부패한 고려를 개혁하기 위해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위와 같은 역사적 기술들은 앞서의 기술들과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사실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일본의 타 국가에 대한 침략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한국과 북한이 전쟁에 대한 서로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또 고려왕조를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조선건국의 당위성을 찾기 위해, 그 사건의 주체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여 재해석한 것이다. 물론 이와 반대되는 해석도 있다. 일본을 제국주의 침략세력으로, 이성계를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사대주의자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렇게 상이한 해석은 서로 주류로 인정받기 위해 치열하게 대립한다. 여기에서 승자는 지금 이 시대에서 독보적이며 또한 배타적인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해석이 주류가 되어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영웅사관, 민족사관, 민중사관등 역사를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역사서는 이러한 관점들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역사가의 생각이라고 한다. 앞의 사례들도 각각의 관점에서 과거의 사실들을 해석한 역사적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의 왜곡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사실을 부정한다거나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로서 역사적 사실을 변형할 때 또는 부정할 때 나타난다. 무엇보다 이러한 왜곡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해석과 관점에 대해 배타적이고 권위적인 기준으로 군림하려는 목적으로 등장할 때이다. 즉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단일한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역사의 왜곡이며 그것을 절대화시키려는 것이 역사의 왜곡인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왜곡은 왜 나타나는 것인가?

역사는 정체성을 확인하고픈 욕망이다.

아메바 시민위원회 위원장님께

존경하는 위원장님
제게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를 위원장님께 해결해 주십사 하는 요청을 드리기 위해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20초 전 제 바로 위 조상인 M45YY 아메바에서 분열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제 조상 아메바가 두 부분으로 나뉘었기 때문에 분열되었습니다. 5초 전 분열된 '다른' 쪽이 혈통 독점권을 주장할 수 있으며 그래서 M45YY라는 이름을 자신이 사용하고 싶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저는 제 권리를 완전히 인정해 줄 위원회를 결정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서명자 M45YY

위의 글에 나오는 아메바 M45YY는 무엇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인정해 달라는 위원회에 판결을 요청하였을까. 불과 2시간 여 후면 또다시 분열하여 새로운 아메바로 변화하면서도 아메바가 자신의 이름을 찾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역사를 확인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으며 무엇을 하고 살았었는지, 자신의 부모는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입양된 아이가 자신의 부모를 찾고 자신의 고향을 찾고자 하는 것 역시 자신의 역사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며 바로 자신의 역사를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나는 어디서부터 왔으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향해 가는지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과거를 아는 것은 현재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알아 가는 것과 같다. 나의 부모는 어떻게 살아왔으며 지나온 일들이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나를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현재의 나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 바로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정체성 확인의 과정은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것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으로 확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집단, 또는 공동체의 역사이다.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출발하였는가, 어떠한 삶의 기반을 공유하고 있는가를 탐구하는 것, 즉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내고 현재의 상태를 조명하고자 우리의 역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처럼 역사는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며 역사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정체성을 분명히 확립하고픈 욕망인 것이다.

무엇이 역사를 왜곡하는가 - 역사에 대한 배타와 소유
앞서 역사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그것은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온전하게 밝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우리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고 어떠한 의미인지를 찾아가는 작업이다. 그것이 역사 탐구의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역사의 왜곡이나 역사적 관점의 대립을 마주하게 된다.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인가.
집단 또는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통하여 현재의 '나'를 확인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특성과 우월성을 찾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와 너, 우리와 우리 아님을 구분하게 되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불완전성을 채워가려 한다. 따라서 우리와 다른 공동체를 구분하고 서로 배타적인 존재가 되며 우리만의 무엇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는 타인을 왜곡하게 만든다. '우리는 선하고 저들은 악한존재' '우리의 삶의 방식은 문명이고 저들의 것은 미개하다'는 식의 접근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는 자신, 우리의 기준과 가치관으로 타인을 평가절하하고 우리의 우월감을 드러나게 한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타인을 부정하고 말살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타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타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박탈하는 형태의 왜곡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 환경에 대해 혼란을 겪는다.
'나는 강남에 산다',  '한국축구가 승리하면 나의 영광'이라고 인식하는 것과 같이 마치 특정지역의 특성이 자신의 특성으로 전이된다고 믿는 것이나 특정한 사건의 의미가 온전히 자신을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경우가 발생한다. 실제 나는 부자가 아니지만 부촌 지역에 살고 있는 나는 뭔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기도 하고, 스포츠 경기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운동선수가 선전할 때 마치 나의 일인 양 착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의 자신에 대한 불확신과 불안감에서 출발한다. 과거 누렸던 영화나 자신이 속한 집단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현재의 불안과 불만족을 회피하는 것이다.
이러한 왜곡들은 뒤틀린 정체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현재의 우리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의 미래는 어디로 향해 가야하는가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특별하게 선택받은 사람들이고 타자보다 우월하며, 우리의 가치관은 무조건 정당하고 올바르다는 사실을 확인 받고자 한다. 더욱이 다른 집단에서 '우리'에 대해 비판할 때 나와 '우리'의 정체성에 위협을 느껴, 집단적인 방어기재를 광적으로 발휘하기도 한다.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그에 맞서는 한국의 태도, 고대사에 대한 논쟁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중국이나 우리는 서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을 수도, 우리가 역사를 왜곡하고 있을 수도 있다.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는 서로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로가 잘못된 방식으로 정체성 확립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소수민족 내지는 타민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서 중화민족의 우월함을 세우려는 것이다. 하기에 타민족의 존재는 말살되어야 하고 주변민족의 문화는 평가절하 되어야 한다.
한국은 어떠한가? 중국의 작업을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분노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천인공노할 역사도둑질로 간주하고 연일 중국비난하기로 정신이 없다. 또한 그동안 교과서에서조차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고구려사와 고대사에 대해 언론과 학계, 정치권까지 나서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 바쁘다. 마치 우리의 정체성이 도둑질이라도 당한 것처럼 그래서 분노하지 않으면, 고구려사에 대하여 무지하면 국민이 아닌 것처럼 몰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고구려를 비롯한 고대사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문제가 많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언론과 매체에서 떠들어대는 고대사는 화려했던 시대, 광활한 만주를 지배했던 시대, 중국의 영토까지 점령하여 주변국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시대로만 묘사하고 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나 문화, 그리고 가치관을 발견하여 그들의 일상적인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탐구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고대사를 주제로 하는 드라마에서도 전쟁을 통해 정복하고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만이 그려진다. 당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우리를 자랑스럽게 하는 과거의 영화만이 존재하는 고대사이다.

누가 역사를 왜곡하는가 - 역사 이데올로기
사람들은 개인적인 것이든 외부에서 오는 것이든 불안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막연한 불안감을 벗어나 현실적인 문제에 직접 부딪히면서 해결방안을 모색하여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들은 그 실체를 제대로 경험해보지도 못한 채 단지 두려움만으로 힘들어하며, 환상이나 감상적인 회상에 빠져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현 사회체제에 대한 불만이나 생존의 압박에서 오는 사회적 불안, 국가 정체성의 탈각이나 민족정체성의 소멸은 현 기득권 층에게 더 없는 위협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국가나 지배층은 대중의 약한 고리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극복하는데, 그 한 축이 역사의 왜곡이다. 국가와 지배층은 언론과 매체, 때로는 전문가를 통하여 이러한 의식을 대중심리 깊숙한 곳에 자리잡게 한다. 중국의 역사 세우기 작업에 대한 맹목적인 비난,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기에 급급한 안일한 역사관, 앞 다투어 방영되는 고대사를 주재로 한 드라마열풍과 '우리고대사 바로알기'류의 다큐방송들…. 우리의 삶이나 진짜 정체성과는 상관없이 우리 주변을 포위하는 것들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역사는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된다. 역사는 때로는 특정한 이들의 소유가 되기도 한다. 역사를 소유하려고 하는 이들은 치밀하고 체계적인 과정을 거쳐 하나의 역사관을 완성한다. 그렇게 서술된 역사는 현재의 보편 타당한 진리가 되고, 이 진리가 제외시킨 사실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여기서 부조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진리가 다시 수정되기까지는 또 다시 긴 세월이 흘러야 한다.

미래의 설계를 통한 과거와 현재의 관계 맺기
역사 탐구는 정체성을 확인하고 확립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것은 단지 나의 과거를 밝힘으로서 현재의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미래를 지향하느냐에 따라 과거의 의미가 새롭게 발견되고 현재의 정체성 또한 달라진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기획 없이, 규정된 기존의 사실에 우리를 가두게 되면 역사는 진보할 수가 없다. 새롭게 발견되는 의미가 없는 역사, 과거의 오류를 반복하는 역사, 반성할 줄 모르는 역사는 죽은 역사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의 삶을 반성적으로 들여다보게 하는 역사,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는 역사가 존재하는가 이다. 그렇지 않은 단일성의 역사, 배타성의 역사는 그것을 서술하는 주류에 의해 이데올로기가 될 수밖에 없으며, 타자를 배척함으로써 생기는 정체성은 계속하여 새로운 적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고구려사는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고 무수한 고구려 인들이 살았던 삶의 축적이다. 그것이 중국 땅의 역사이건, 한반도의 역사이건 철저히 객관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어느 민족의 역사인지 우리가 왜 따지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현재 국제 정세에서 패권을 잡는 데 유리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일인가? 역사 상 수많았던 전쟁과 권력 투쟁, 그 과정에서 고통 받았던 민초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역사학자들이라면 지금과 같은 소모적인 논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왜 지금까지 한국과 중국은 특정 영토에 대해서 서로 집착하고 있는지 그 근본 원인을 탐구해야 하지 않을까? 오래 전부터 계속 되어온 두 나라 사이의 반목이 현재 우리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이를 통해 지금 이곳의 두 나라 사람들이 사유해야 할 지점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 이와 같은 작업은 먼저 역사를 탐구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미 유럽에서는 유럽 내 개별 국가를 유럽 대륙으로 묶어 공통의 역사를 서술하고, 이를 교과서에도 반영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작업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유럽을 넘어 다른 대륙까지 포함하는 '인류의 역사'라고 한다. 이는 1, 2차 세계 대전의 비참함을 겪은 유럽인들이 역사를 깊이 반성한 끝에 나온 역사적 상상력이었다. 이렇게 인류가 지향해야 할 바를 각자가, 때로는 공동으로 찾아가는 것이 역사를 탐구하는 목적일 것이다.
이렇듯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과거, 현재, 미래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구성된다. 즉 과거와 현재의 총합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의 모습에 따라 의미를 달리하는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