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밖 교실, 미술관 수업 어떻게 할까
- 간송 미술관 교과서 속 국보전

하정숙 글샘공부방 논술교사

글쓰기를 지도하는 선생님이라면 수업을 하실 때 공간에서 느끼는 제약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실 때가 많으실 것입니다. 좋은 교육이라면 아이들과 직접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공부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늘 그러한 교육을 추구하기가 어렵습니다.
큰 맘 먹고 아이들과 박물관 나들이라도 가려면 아이들 지도와 관람 등 문제꺼리가 많은데 여기, 저의 특별학습 경험을 소개합니다. 여름방학 때 아이들과 특별 수업을 준비하시는 선생님들이 계신다면 이러한 방법이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이들과 미술관 가기 - 간송미술관

얼마 전 저희 동네에 있는 간송미술관에서 큰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간송미술관은 다른 미술관과는 참 다른 곳입니다. 먼저, 숲 속에 있는 듯 한 미술관입니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건물이라 요즈음 미술관과는 작은 이층집입니다. 예스러운 느낌과 자연스러움이 편안함을 주는 공간입니다.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입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신 간송 전형필 선생님은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민족혼을 지키는 방법으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을 우리나라 고미술품을 사는데 투자하셨습니다. 남은 것은 이 간송미술관의 문화재들이고 이 소중한 미술품들은 봄에 한번, 가을에 한번 무료 전시회로 개방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간송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간송미술관에서 가지고 있는 국보급 문화재들을 많이 전시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하나 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진 훈민정음 원본, 여러 불상, 고려청자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숨을 멎게 하는 예술혼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이 잘 관람해 줄까 입니다. 좋은 관람이란 많은 것 전부를 다 보게 하지 않고 하나라도 자세히 보게 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는 그 방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직접 해보신 선생님이나 부모님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를 오래 보려 해도 뒤에 줄 서 있는 사람들에 밀려 그렇게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또한 한 장소를 여러 번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말입니다. 또한 그 전시품 안에 들어 있는 이야기를 모르면 아이들은 그냥 휘휘 지나가고서 “다 봤어요.” 라고 합니다. 이번 간송 미술관 수업 때도 부모님과 함께 온 아이들은 긴 줄과 더위 속에서 무의미하게 유리 속 문화재들을 잠깐씩 스쳐볼 뿐이었습니다.
먼저 선생님이 관람할 장소에 미리 가서 관람을 하고 아이들에게 어떤 작품을 집중적으로 보게 할 것인가를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안내책자를 하나 사셔서 꼼꼼히 읽어보시면 더욱 좋습니다.
박물관에 가기 전에 아이들과 그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시회 특징, 인물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공부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먼저 그것들을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관람코스에 맞추어서 봐야할 전시품에 관한 관람 포인트를 퀴즈 형태로 만들어 놓으면 좋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문제를 풀면서 작품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 간송미술관 관람에서 우리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워크지입니다. 미술관내에서 그 워크지를 본 많은 분들이 이 워크지를 얻을 수 있냐고 여쭈어 보셔서 많이 나눠드렸습니다.

간송 미술관 특별 수업 -교과서 속 국보전

간송 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입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님은 일제시대에 많은 미술품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기 재산을 다 들여서 지켜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는 간송 선생님의 노력으로 우리 조상들의 뛰어난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술관에서 지킬 예절
1. 큰 소리로 말하지 않기
2. 뛰어 다니지 않기
3. 유리에 기대지 않기
4. 여러 사람에게 방해되는 행동 하지 않기

♠ 마당에 있는 탑의 이름을 써 보세요.

이 탑은 일본 사람이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인천 항구에 실어다 놓은 것을 간송 전형필 선생님이 다시 사다가 이 자리에 세워 놓으신 국보입니다. 지금도 일본에는 우리나라 석탑이 많이 가 있습니다.

정답: 고려삼층석탑

그림 감상 - 1층에서

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 장승업
-세 사람이 나이를 묻다
견본색채, 143x69cm,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을 살펴보세요. 이곳은 어떤 곳인가요? 과일도 보이는데 어떤 과일인지 맞춰보세요. 세 사람이 서로 나이를 묻고 있는데 서로 묻고 대답하는 것을 대화글로 표현해 보세요. 서로 몇 살이라고 했을까요? 이야기를 꾸며 보세요.

태훈: “당신은 몇 살이오?”
“나는 70살입니다.”
“그럼, 당신은 몇 살이오?”
“나는 73살입니다.”
“여보슈, 당신은 몇 살이오?”
“저는 82살입니다.”

선우: “이보쇼, 당신은 몇 살이오?”
“나는 89살이요. 당신은요?”
“나는 99살이요.”
“그럼 당신은요?”
“나는 100살이요.”

자웅장추, 변상벽
암수탉이 병아리를 거느리다

고양이와 닭을 무척 잘 그려서 ‘변 고양이, 변 닭’이라는 별명을 가지셨던 유명한 화가 변상벽의 그림입니다. 암탉과 수탉의 생김새를 자세히 표현해 보세요.

태훈: 암탉은 벼슬이 작고 부리가 약간 둥글다. 그리고 깃털은 여러 방향으로 퍼져 있다.수탉은 벼슬이 크고 진한 빨강색이다. 그리고 부리는 약간 휘어 있고 뾰족하다. 또 꼬리의 깃털은 두 방향으로 나뉘어 있고 그 아래에 있는 깃털은 사방으로 퍼져 있다.

선우: 수탉은 생긴 모습이 화려하고 무섭다. 암탉은 산비둘기 같이 검은 색의 점이 있는 것 같다. 병아리에게 먹을 것을 준다.

수진: 수탉은 화려하고 암탉은 표범 무늬이다.

병아리는 모두 몇 마리인가요?  
이 그림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지어보세요.

태훈: 암탉과 수탉이 병아리들을 데리고 먹이를 찾으러 갔다. 암탉은 병아리들에게 지렁이를 잡아준다. 그리고 지렁이를 먹은 병아리들은 수탉과 함께 즐겁게 논다.

조선 시대 선비나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면 가까운 친구끼리 돌려보면서 그림에 대한 평을 그림에 써 주었습니다. 위의 한자를 해석해 보면 “흰털 검은 뼈로 홀로 무리 중에 우뚝하니, 비록 기질은 남아 있다. 한의원에 가서 방법을 듣고 신묘한 약을 다려야겠으나, 아마 인삼과 백출과 함께 해야 맛있겠지?” 라고 썼답니다. 저 닭을 보고 삼계탕이 생각났나 봐요.

정선이 그린 풍악내산총람을 찾아 봅시다.
어떤 산을 그린 그림인가요? 이 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난 산입니다.
봉우리의 개수를 세어 보세요. 모두 몇 개일까요? (어려울 걸)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을 아이들이 어떻게 볼까 궁리하다 금강산의 특징인 기암절벽을 그린 정선의 마음을 헤아려 아이들에게 봉우리를 세어보게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세보고 세보면서 어쩔 수 없이 그림을 구석 구석 들여다보았습니다. 삼 백개라고 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세었는데 선생님이 “금강산 찾아가자 ○○○○봉!”하자 아이들은 속았다는 표정으로 “일만 이천봉”이라고 하였습니다.

<만폭동>이라는 그림이 두 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렸는지 써 보고, 두 개의 만폭동 중 여러분은 어떤 그림이 더 마음에 드는지 비교해 보세요. 어떤 면에서 더욱 마음에 드나요?

태훈: 그린사람: 정선이 그린 만폭동, 봉우리들이 멋있어서 그리고 폭포를 보면 왠지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수진: 정선이 그린 만폭동
선우: 심사정:산봉우리가 많다.
정선: 봉우리가 적다.

마상청앵, 김홍도
-말 위에서 (           )소리를 듣다

이 그림을 보고 새를 찾아보세요. 어떤 새 같은가요? 새는 어떤 울음소리를 내고 있나요? 흉내말로 표현해 보세요.  

태훈: 꾀꼬리가 꾀꼴 꾀꼴 우는 것 같다.
선우: 꾀꼬리 “꾀꼴~ 꾀꼴”
수진: 꾀꼴 꾀꼴

이 선비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태훈: 저 새 소리를 듣고 싶어서 집에서 기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 같다.
선우: ‘저 새는 목소리가 참 곱다!“
수진: 참 아름답다, 표정으로 봐서 신기하다.


조선시대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찾아보세요. 그린 사람과 그림 이름을 적어보세요. 그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요? 머리에서 발끝까지 자세히 표현해 보세요.  여러분은 이 여인에게 어떤 느낌이 드나요?

태훈: 그린 사람: 신윤복
느낌:옷을 참 곱게 입고 있고 머리 묶은 게 좀 웃기다.
선우: 미인도 , 주름 치마를 입고, 치마를 살짝 걷고 있다. 머리에 가발 같은 걸 쓰고, 좀 슬퍼보인다. 부끄러운 것 같다.
수진: 머리는 땋아서 올려서 기생 머리와 비슷하고, 표정은 우울해 보이고, 옷은 아주 약간 허름해 보인다. 옷을 보아도 기생과 비슷해 보인다. 하얀 버선을 신은 것 같다. 내 생각으로는 별로 안 예쁜 것 같다.


여러분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려 보세요. 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 써 보세요.(밖에 나와서)

태훈: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 부모님이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나에게 가장 친절하게 대해 주시니까 마음이 아름답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우리들(동생하고 나)이 봐도 우리를 낳아주신 분이니까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 엄마는 다른 사람들(엄마 친구들)이 예쁘다고 한 적이 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엄마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한다.

선우:엄마

수진:엄마는 고아원에 가서 일을 돕는 마음이 아름다운 것 같고, 얼굴이 아름답다.

2층에서 - 국보 찾기

일본에 살던 영국인 개츠비라는 사람은 우리나라 고려도자기를 많이 모았는데 일본이 전쟁이 질 것을 알고 모두 간송 전형필 선생님께 팔았다고 해요. 전형필 선생님은 당장 일본으로 가서 이 문화재를 사왔다고 하는데 재산을 아주 많이 팔아야 했대요. 2층에 있는 푸른색 도자기들이 영국인 개츠비에게 사들인 도자기랍니다.

불상들이 여러 개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유입되는 초기에 호신용으로 만들어진 불상인데 가야 시대의 불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 불상을 보면 얼굴의 생김 모습으로 가야인의 모습을 짐작하며 의상 등을 보아 그 당시의 의상, 관을 짐작할 수 있는데 찾아보세요.
(불상은 앉아서 관람해 보세요.)

아래의 국보를 찾아보고 그 이름을 적어 보세요. 어떤 무늬가 새겨져 있는지도 살펴보세요. 느낌도 적어 보세요.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癸未銘金銅三尊佛立像)
국보 72호

6세기(500년 정도)에 백제 지역에서 출토되었다고 해요. 우리나라 불상의 시작이라고 하는 때에 만들어졌고 몸에 지니고 다니던 불상이래요.

태훈: 연꽃모양 광배와 선모양 무늬가 있다.
선우: 바람무늬, 연꽃 무늬, 절에 온 것 같다. 마음이 편안해 진다.
수진: 되게 작고 부처님이 인정이 많게 생기셨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68호

일본인에게 그 당시에 2만원에 산 고려자기입니다. 그 당시에 큰 집 한 채가 천원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돈을 주고 샀는지 알겠지요? 생김새를 살펴보고 어떤 느낌이 드는지 적어보세요.

태훈: 동그라미 안에 학 무늬
선우: 하늘을 나는 학무늬, 하늘을 보는 기분과 너무 화려하다.
수진: 굉장히 광이 나고 비싸 보인다. 학무늬 소나무

청화백자 양각진사채 난초국화 무늬병
국보 294호

이 도자기와 다른 도자기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자세히 보세요.

수진:색이 백자이고 술병으로 되어 있다.
선우:색도 다르고 주둥이가 길다.
태훈:위쪽 구멍이 길고 입구가 작다.

이 도자기는 특이하게도 양각무늬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나라 도자기에는 보기 힘든 다양한 색으로 채색되었다는 것도 특징입니다.

영국인 갯츠비에게 사온 고려자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귀족들의 애완동물로 보이는 도자기를 찾아보고 그 쓰임새를 도자기의 생김새를 보면서 찾아보세요.

고려시대 상상의 동물을 형상화한 도자기를 찾아보세요. 그 동물을 닮은 실제 동물의 생김새와 다른 점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그 도자기의 쓰임새는 무엇인가요?

야묘도추, 김득신
세로 22.5cm, 가로 27.2cm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고 이 그림 속의 소동을 재미있는 글로 표현해 보세요.

태훈: 어느날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어떤 집에 들어와 병아리 한 마리를 입에 물고 도망치고 있었다. 그걸 본 닭은 자기 새끼를 구하려고 고양이를 쫓았다. 그리고 다른 병아리들은 놀라서 도망쳤다.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그 집 아저씨가 막대기로 고양이를 잡으려고 하다 그만 물병을 치면서 넘어졌다. 물병이 쓰러지는 소리를 듣고 그 아저씨의 부인이 말했다.
“옷 버릴라, 조심하세요.”
조금 있다 아저씨의 옷을 다 버렸다. 하지만 병아리는 무사히 구할 수 있었다.

선우: “아니, 이 놈의 고양이가!”
고양이가 병아리를 잡아 먹으려고 하자 집 주인인 아저씨가 호통을 치고 있다. 고양이는 도망간다. 닭도 화가 났다.

가운데 신윤복의 그림집을 보며

주유철강, 신윤복

조선 중기 양반들과 기생들의 놀이 모습이 잘 드러나는 풍속도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옷이나 차림새를 살펴보세요. 그리고 그 당시 양반들의 놀이모습이 어땠는지 살펴보세요.

훈민정음 해례본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지정된 ‘훈민정음’을 찾아보세요. 세종대왕님이 한글을 만들고 한글이 어떻게 쓰이는지 설명해 놓은 책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한 권 밖에 없는 소중한 책입니다. 그 당시에 천 원에 나온 것을 간송 전형필 선생님이 만 천원을 주고 사오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미술품은 우리 역사를 느끼게 하는 소중한 미술품입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님은 큰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마구 파괴하고 빼앗아가는 일본에게 대항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다 투자해 외국까지 가서 우리나라 문화재를 사왔습니다. 6.25가 일어났을 때도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간송미술관의 문화재들을 다 가져가려는 것을 여러 사람이 꾀를 써서 막아냈지만 중공군이 들어오면서 다시 피난을 가야했지요. 중요한 국보들은 가지고 갔지만 수 만권의 책, 그림은 두고 가야 했습니다. 피난에서 돌아오니 수 만권의 책들은 창호지가 되거나, 피를 닦는 휴지로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도둑을 맞기도 했고 어떤 때는 불쏘시개가 되어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구요. 그것을 본 간송 전형필 선생님은 무척이나 마음이 아프셨지요. 이런 어려움을 거치고서 지켜낸 문화재들이 우리가 오늘 관람한 미술품입니다.

많은 미술품 중 여러분이 가장 기억에 남거나 좋았던 전시품은 어떤 것이었나요?

태훈: 청자기린형향로,
선우: 미인도, 야묘도추
수진: ?

오늘 알게 된 화가의 이름을 써 보세요. 이 화가들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들입니다.

정선, 김홍도, 김득신

간송 미술관 관람 느낌을 정리해 봅시다.

태훈: 미술관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무지하게 더웠다. 하지만 학습지를 다 풀고 나니 마음이 뿌듯하다. 그리고 오늘 미술관 관람으로 정선이라는 화가를 알게 되었다. 또 옛날에도 물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많은 그림 문화재와 금, 은으로 만들어진 문화재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우: 간송미술관에 와 보니까 다른 때보다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래도 미술품과 문화재를 보고 나니까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도 좋았다. 그 중에서도 2층의 청자상감운학문매병과 청화백자 양각진사체 난초국화 무늬병이 인상 깊었다.정말 아름답다. 부드러운 곡선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 같다. 정말 오늘은 재미있었다.
수진: 저번에도 온 기억이 있다. 내가 저번에 본 것을 다시 한 번 보았다. 한 번 또 보니 조금 이해가 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그림은 야묘도추다. 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가는 그림이다. 왠지 모르게 내 마음에 자리 잡았다. 그 때 아저씨는 화를 내고 있었으나 아줌마는 좋아하는 것 같다. 다음으로 기억 남는 것은 원숭이 연적이다. 너무 귀엽게 생겼다. 내 애완동물이었으면 좋겠다. 간송미술관은 참 좋은 것 같다. 옛날 김홍도 그림, 여러 가지 등의 미술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다음번에는 좀 더 미세하게 관찰을 해봐야겠다.

아이들과 박물관, 미술관 나들이 하기

조금만 신경 써서 인터넷 검색을 하고 정보를 찾으면 학생들과 함께 가볼 만한 저렴한 전시회, 장소들이 많습니다.
서대문 자연사 박물관에는 자원봉사로 설명해 주시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미리 예약하고 가면 선생님의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서대문 자연사 박물관에서 자체적으로 판매하는 관람 노트가 있습니다. 그 곳의 문제를 풀면서 설명을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은 관람을 할 수 있습니다.
서울 시립 미술관에 가실 때는 단체 도슨트 설명을 예약하면 담당 도슨트가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 줍니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 가실 때에는 미리 역사 선생님을 구해서 설명을 도와달라고 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며 설명을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친구들을 위해 위의 워크지처럼 선생님이 미리 준비한 퀴즈 형태나 생각 쓰기, 또는 따라 그리기 등의 숙제를 내 주면 아이들이 스스로 돌아다니며 관람할 수 있습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조용해야 하므로 이것을 아이들이 지키기 또한 어렵습니다. 다 끝난 후 시간을 내어 신나게 놀게 해주면 아이들은 즐거운 추억으로 미술관, 혹은 박물관 수업을 기억하게 됩니다.

**참고자료

[역사속의 라이벌] 김홍도 VS 신윤복

조선 후기는 변혁기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지배층 내부에서도 반성의 기운이 일어 건국이념이던 성리학에 대해 비판이 제기됐다. 실학의 맹아가 싹텄다. 관직 남용과 양반층 몰락으로 신분 체계가 와해하면서 서민지주가 나왔고, 거상(巨商)도 출현했다.
화단에도 새로운 기운이 돌았다.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은 서민 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과감히 화폭에 담아냈다. 두 화가는 서민의 생활상을 다루면서도 소재나 표현기법이 판이할 뿐 아니라 삶의 궤적도 극명하게 대비됐다.  

김홍도

우선 출신을 꼽을 수 있다. 김홍도는 영조 36년(1760) 김해 김씨 김진창의 증손으로 태어났으나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 것으로 보아 몰락한 양반의 후예로 여겨진다.
그가 그림에 입문한 건 궁중화원 김응환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김응환은 김홍도의 후배이자 제자였던 김득신의 작은 아버지다. 김홍도 보다 18살이 많던 김응환이 왕명으로 금강산에 들어가 〈내외금강도〉를 그려 바친 일이 있다. 당시 김홍도는 김응환에게 사사 중이어서 같이 금강산에 들어갔고 거기서 산수화의 기초를 배웠으리라 짐작한다. 30세가 되어선 김응환 대신 일본의 지도를 그려 정조에게 바치기도 했다. 김응환이 왕명으로 일본의 지도를 그리러 가던 중 부산에서 병이 들어 48세에 죽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윤복은 자연스럽게 화원이 됐다. 화원 가문 출신이어서다. 그의 아버지 고령 신씨 신한평은 물론 삼촌도 화원이었다. 고모 역시 화원의 문벌인 양천 허씨에게 출가했다. 신한평의 증조부도 화원 이었다. 가문의 전통 덕분에 신윤복은 일찍이 그림에 눈을 떴지만 당대에 실력은 크게 인정받지 못한 듯하다. 영조 34년(1758)에 출생 했으니 김홍도보다 2살 가량 위다. 조정에서는 신윤복보다 김홍도를 높이 평가했다. 〈정조실록〉에는 “정조 5년(1781) 신축 8월 26일에 화원 한종유·신한평·김홍도를 시켜 어진(御眞)을 각각 한 본씩 모사케 했다”란 기록이 있다. 1781 년이면 김홍도의 나이 21세다. 그 나이에 벌써 궁중에 들어가 그림 을 그렸는 데 비해 신윤복은 여기에 끼지 못하고 대신 그의 아버지 신한평이 참여하고 있다. 아버지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는지 아니면 실력이 모자랐는지 단언하기 어렵지만 김홍도보다 명성이 덜했던 건 분명하다.
김홍도는 이른 나이에 궁중에 들어가 왕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남다른 사랑을 보여줬던 정조와는 인연이 깊다. 그의 나이 11세 때 영 조 세손이던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인지 김 홍도가 그림을 관장하던 관청인 도화서 화원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 것도 정조가 왕위에 오른 직후다.

<부모은중경>

김홍도는 정조에게 일본의 지도를 그려 바친 뒤 충청도 연풍현감(현 충북 괴산군 연풍면)으로 임명됐다. 재임 중 정조의 명으로 수원 용주사의 〈삼세여래불탱화〉를 그렸고, 용주사에서 간행된 〈부모은중경〉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용주사를 중창했으며 거기에서 부모의 은혜가 귀중하다는 내용의 〈부모은중경〉을 펴냈다. 김홍도의 재능은 정조의 총애를 만나 날개를 단 셈이다.
김홍도와 달리 신윤복은 권력이나 조정의 그늘에서 벗어나 서민들 속에서 살았다. 그가 조정에서 벼슬을 했거나 도화서 소속의 관원이 었다면 그 흔적이 남아 있을 텐데 그의 생활이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이 거의 없다. 이는 그가 권력이나 조정 근처에 있지 않고 일반 서민들 속에서 생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들은 이같은 추론을 가능케 한다. 김홍도처럼 왕명에 의해 그린 그림이나 조정과 관련된 그림이 전혀 없다.

<군선도>

김홍도는 신선도와 산수화, 풍속도를 많이 그렸다. 17세 때 작품으로 알려진 〈신선도대병〉, 20세 때 그렸다는 〈선동취적도〉와 낙관이 없는 〈군선도〉 등의 작품에서 보듯이 신선을 그림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신선 같은 생활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풍모와도 관련이 있다. 그는 풍모가 아름답고 기상이 크고 넓어 사람들이 그를 신선 중 신선이라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자신의 실제적인 모습처럼 신선 같은 생활을 꿈꾸고 이를 그림으로 표현한 셈이다.
그의 생활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보다 38년이 나 아래인 조희룡이 쓴 〈호산외사〉에 따르면, 김홍도는 너무 가난해 조석으로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다. 하루는 시장에 나온 매화 화분을 보고 매우 사고 싶었으나 호주머니가 비어 있었다. 얼른 집에서 그림을 들고 나와 3,000냥에 팔아 2,000냥으로 화분을 샀고 남은 돈 200냥은 땔나무와 식량을 구입했다. 나머지 800냥으로는 친구들을 불러 술잔치를 벌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를 ‘매화음(梅花飮)’ 이라 불렀다. 생계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매화를 사기위해 그림을 팔고 나머지 돈으로는 즉석에서 술잔치를 벌인 그의 호방했던 생활을 잘 엿볼 수 있다. 가히 신선의 경지라 아니할 수 없다.

<쌍치도> - 김홍도

김홍도는 산수화도 많이 남겼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묘사 하는 ‘진경산수’를 즐겨 그렸다. 신선 같은 마음으로 자연을 관조한 그는 남종화와 북종화의 절충적인 양식을 구사했다. 남화의 탈속 적인 고담(枯淡)한 채색과 상쾌한 북화적인 여운이 깃든 선의 묘미가 있다. 진경산수의 개척은 이미 겸재 정선에 의해 개척된 바 있지만 김홍도는 그 위에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그의 화풍은 이인문, 김득신 등에게 자극을 줬다.

<대장간> - 김홍도

하지만 그의 그림 가운데 백미는 풍속화다. 그는 서민들의 건전한 생활과 풍속을 화폭에 담았다. 그의 풍속화에는 서민생활의 구수한 해학과 점잖은 풍자가 곁들여져 있다.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풍속 화첩〉은 그의 작품세계를 잘 보여준다. 특히 사농공상(士農工商)을 동시에 담아낸 〈사민도〉에는 변화를 열망하는 시대정신이 생생히 담겨 있다.
김홍도는 운염기법이란 독특한 화법을 즐겨 사용했다. 운염기법은 입체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채색의 농담으로 형체의 원근과 고저를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고대 인도의 아잔타 동굴 벽화에 쓰인 뒤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당시 중국에서는 북경의 성당이나 교회의 벽화에 많이 사용됐다. 이 기법을 활용한 그림은 수원 용주사 대웅전에 남아 있는 〈삼세여래후불탱화〉다. 석가여래와 약사여래, 아미타여래 등을 중앙에 놓고 그 둘레에 가섭과 아난존자, 10보 살, 10대 제자, 사천왕, 동자 등을 배치했다. 이 기법은 단원을 끝으로 전승되지 않았다.
신윤복도 참신한 색채감각이 돋보이는 산수화를 그렸지만 재기가 번 뜩이는 건 풍속화다. 풍속화의 대상이나 내용은 김홍도와 전혀 다르다. 한량과 기생을 중심으로 한 남녀간 애정과 낭만을 주로 다뤘다. 탈속적인 인격을 표현하는 정형산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경지를 개 척한 셈이다.

<여인도>

그의 대표작으로는 전통적인 조선 여인의 모습을 담아낸 〈여인도〉 와 가야금 타는 여인을 그린 〈탄금도〉가 꼽힌다. 뱃놀이를 하면서 여인을 희롱하는 장면을 묘사한 〈주중희녀〉, 주모와 수작하는 남정 네들을 그린 〈주막〉, 단오날 물가에서 목욕하는 여인들과 이를 훔쳐보는 남자들을 담아낸 〈단오일수변희희〉, 무당이 굿하는 장면이 담긴 〈무녀〉 등도 걸작으로 평가된다.

<단오도>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건 그림 속 등장인물에 자기를 꼭 포함시 켰다는 점이다. 등장인물 가운데 주변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이 가 바로 신윤복 자신이다. 장난기 섞인 에로티시즘을 즐겼다고 할 수도 있고, 세상을 관조하는 풍자적인 의미를 담아냈다고 여길 수 있겠다.
에로티시즘을 더욱 극적으로 묘사한 작품들도 있다. 야밤에 젊은 남녀가 담모퉁이에서 밀회하는 장면을 그린 〈야삼경〉, 기녀들의 진한 이야기를 기방 아래층의 대들보에서 엿듣고 있는 사내를 그린 〈농숙〉 등이 그것이다.
이는 당시 신분체제의 와해와 함께 사치와 향락 풍조가 만연해가던 사회 분위기를 비판적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다. 허세와 위선에 찌든 양반들의 모습보다는 서민들의 진솔한 삶이 더 가치가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비판정신이 강해서인지 신윤복은 조정에 나가 관직생활을 하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생활은 기성 화풍과 전혀 다른 새로운 화풍을 낳았다. 독창적인 화풍 때문에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말도 전해지는 걸 보면 그가 관직에 얼마나 초연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신윤복 가문은 그를 끝으로 화원 가문으로서의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김갑동 / 대전대 인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