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살림 글살림

이선희 | 해오름 평생교육원 전임강사

연재순서 그대로
내 더듬이로 탐색해보는 세상 이야기 (6)

함께 살아요_권영상

작은 연못을
들여다보아요.

물풀섶에
물방개, 장구애비,
조롱조롱
개구리밥.

그리고
더 깊은 곳에
하늘과 구름.
함께 살기에 비좁지만
비좁아도 비좁은 대로
함께 살아요.
하늘과 구름.

이 작은 연못 속에
함께 살아요.

아이들과 환경
수업을 시작할 때마다 시를 읽거나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이거나 선생님들이거나 마음열기로 이렇게 수업을 시작합니다. “왜 논술 시간에 노래를 불러요?” 처음 하는 사람들은 으레 한 마디씩 물어봅니다. 하지만 내 머리가 ‘이걸 왜 하지?’ 하는 이유를 알기 전에 내 마음이 먼저 따스해져 옵니다. 편안해지고 고요해집니다. 이제껏 나를 다그치던 바쁜 시간들, 복잡한 일들을 내려놓고 수업에 집중할 마음을 가집니다. “지금, 이 자리에” 가만히 나를 침잠시킬 준비를 합니다.
아이들하고 수업을 하다보면 늘 바쁜 아이들이 있습니다. “선생님, 몇 시까지 끝내주세요. 이다음에 다른 수업 가야해요.” 하고 보채는 아이들은 지금 수업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영 어설프게 있다가 갑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참 마음이 안 됐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쳐버리면 다시는 어디서 잡을 수 없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가 사는 자연 환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보는 풍경을 다시 보기 힘듭니다. 제가 어릴 때 자라며 보던 풍경은 서로 어우러져 있는 한가롭고 평화로운 풍경이었습니다. 봄이면 냉이며 제비꽃들이 제 자리를 찾듯이 추운 겨울 이기고 피어났고, 가을이면 길마다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피어났습니다. 누가 가꾸지 않아도 잘 자랐고, 사람들 또한 저희들끼리 자라며 꽃피는 들판에 따로 손대며 살지 않았습니다. 개구리뒷다리를 먹고, 메뚜기를 볶아서 도시락 반찬에 싸가고, 아이들 손에 여치며 방아깨비가 장난감이 되었을지언정 그래도 작은 생명들을 아끼며 함께 살았습니다. 함께 산다는 것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해도 그저 같이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꽃들도 마치 사람의 손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정원을 꾸미고, 나무도 가지를 베어내가며 키웁니다.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아기자기하게 꾸미지만 자연 그대로의 모습만은 못합니다. 그나마 사람들이라도 꾸미면 나을 텐데, 도시는 건물 숲에 가려져 점점 황막해져갑니다.  
앞에 시에 나오는 작은 연못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살고 있는 작은 생명들, 그것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맑은 물,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하늘, 물이 하늘인지 하늘이 물인지 알 수 없는 그 풍경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경건하게 해 줍니다.  작은 풀밭을 들여다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민들레 하나가 자라기까지, 콩 한 알이 여물기까지 잎마다 고이는 반짝이는 햇빛, 모든 걸 촉촉하게 해주는 물, 제 자리를 잡아주고 양분을 내어주는 흙, 한 숨 한 숨 들이쉬고 내쉬게 해주는 공기, 그 밖에 수많은 것들이 한데 어울려져 있습니다.
저랑 만나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가운데 한 학교는 매년 방학이면 꼭 환경 글짓기를 해오라고 합니다. 책을 정해주고 해오라고 할 때도 있고, 고학년이 되면 좀 자유롭게 글을 써오라고 하기도 합니다. 6학년 졸업할 때까지 12편의 환경에 관한 글을 써야 하는데, 이쯤 되면 환경에 대해서는 박사가 되어야 할 텐데 아이들 표정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니, 또?”하는 지겨운 표정들입니다. 환경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고, 또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살 미래에는 환경 문제가 가장 큰 코드가 될 텐데 아이들은 영 마뜩치 못해 합니다.

“‘환경’하면 뭐가 제일 먼저 생각나니?”
“환경오염이요.”
“환경오염이 뭔데?”
“환경이 더러워지는 거요.”
“환경이 왜 더러워지는데?”
“자동차 배기가스랑 공장의 굴뚝, 합성 세제, 쓰레기…… 때문에요.”
“그럼 오염 말고 뭐가 생각나지?”
“자연 보호요.”
“자연을 보호하기 전엔 무얼 먼저 해야 할까?”
“…….”

아이들은 환경을 환경오염과 혼동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실제로 환경오염을 줄일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을까요? 엄마한테 합성 세제 쓰지 말라고 하고, 아빠한테 자동차 덜 타라고 하고, 또, 또……. 우리 아이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소중한 곳인지 알지도 못한 채, 자신들은 더럽히지 않은 환경을 보호해야 하고, 오염으로부터 건져내야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어떤 꽃들이 피고, 어떤 나무가 있으며, 어떤 새들이 와서 지저귀는지 눈여겨보고 귀 기울여볼 새도 없이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환경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은 너무 불공평한 일이 아닐까요?
아이들하고 환경 수업을 하는 일은 우선 가만히 앉아서 책상 앞에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제 발로 구석구석 돌아다녀 보고, 내가 사는 터에 어떤 생명들이 같이 사는지 우선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 생명들이 어떤 존재가치를 지니는지,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사는 터의 생명들
환경이라고 해서 자연 환경만을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새 학년이 되면 열심히 썼던 가정환경 조사서도 환경이고, 우리 시대의 사회적 환경도 환경 안에 들어갑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자연 환경과 사회 환경을 나누어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성과 감성이 인간 사고의 두 축을 이루듯 자연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은 인간 성장 배경의 두 축을 이룹니다. 사회적 환경은 냉철한 눈과 따뜻한 가슴으로 같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자연 환경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연은 사람보다 먼저 태어났고, 사람을 감싸며, 죽을 때까지 사람을 품어주는 곳입니다. 자연 앞에서 사람은 가장 순수해지고 겸허해집니다. 검푸른 바다에서 힘차게 떠오르는 일출의 기운, 하루를 마치고 마지막 빛까지 온 몸을 다 태우는 저녁노을, 끝없이 넘실대며 하얗게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 순식간에 온 세상을 흰 빛으로 다 덮어버리는 함박눈……. 자연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대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연들은 지금 도시에서 사는 나와는 너무 멀리 있습니다. 이렇게 특별한 모습이 아니더라도 자연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식물들이 다  죽은 것 같이 보이는 겨울이 지나 봄이면 파릇파릇 고개 내미는 새싹들, 보도블럭 사이로 힘차게 나온 명아주풀, 괭이풀이며 여뀌, 세모래 덩굴이며 환삼덩굴들. 그 밖에도 이름 모르는 생명들이 저마다 제 힘을 가지고 피고 지고 있습니다. 제 삶의 터에 사는 생명들에게 눈길을 돌릴 줄 아는 것, 그것이 자연에 대한, 환경에 대한 관심의 시작입니다.
『가로수 밑에 꽃다지가 피었어요』(이태수 글·그림 / 우리교육)는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어딘가엔 다 있음직한 자연의 모습을 세밀화로 잔잔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송보송 솜털이 나있는 아기 얼굴 같이 도톰한 꽃다지, 노랑 꽃, 하양 꽃, 보라 꽃 새색시 마냥 살포시 고개 숙인 제비꽃, 푸르스름한 연한 꽃잎에 이름이 무색한 개불알풀, 하트 모양의 열매로 달랑달랑 딸랑이 놀이를 하는 냉이, 우리가 눈길을 주기 전에도 홀로 꿋꿋이 피어 봄의 한 부분을 완성하는 풀꽃들이 있습니다.
아침이면 학교 가기에 바빠서, 오후면 학원 가기에 바빠서 아이들은 자기 사는 터에 눈길 한 번 주기가 힘듭니다. 길가에 난 풀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쓸데없는 짓하며 꾸물거린다고 야단맞는다고 한 아이의 말이 생각납니다. 내가 사는 곳에 어떤 생명들이 함께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멀리 자연을 찾아 떠나기만 한다면 그 또한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요?
자연을 보호하기 전에, 환경을 지키기 전에 아이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연을 즐기는 일입니다. 즐기기 위해 들여다보고, 같이 놀아야 합니다. 도감에서 토끼풀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집 앞 화단에서 네잎 클로버를 찾고, 토끼풀꽃을 따서 화관도 만들고 목걸이도 만들어 놀며 즐기는 일이 먼저입니다. 어떤 아이는 더럽다고 손도 안 대지만, 어떤 아이는 권정생 선생님의 『하느님의 눈물』에 나오는 돌이 토끼 마냥 꽃 하나 따면서도 못내 미안해하며 망설입니다. 아이들마다 어찌 그리도 다 다른지……. 그 아이는 자연은 자신을 즐기는 사람에게 그 정도는 성큼 너그러이 내어줄 정도로 품이 크고, 또 자연의 자식인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고 이야기해주면 안심을 합니다.
해오름살림학교 아이들이 벌써 십 년 넘어 들공부를 가고 있는데, 우리 아이들이 자연을 대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배추 애벌레를 관찰해 보고 싶으면 배추잎째 따서 잘 보다가 다시 배추밭에 되돌려 줍니다. 맨손으로 개구리를 만지는 것은 냉혈 동물인 개구리의 몸에 화상을 입히는 일이라는 걸 알고 모르는 친구가 함부로 만지면 꼭 이야기해줍니다. 꼭 어디 뚝 떨어진 전원을 찾아가서가 아니라 자기 집 주변에 어떤 풀꽃이 살고, 어떤 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어떤 곤충이 있는지 관심을 갖고 찾아봅니다. 엄마들이 농담으로 우리 아이들이 자라서 죄다 생태학자들이 되겠다고 할 정도로 자연을 사랑합니다.
『오소리네 꽃밭』처럼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꽃은 또 얼마나 소중한가요? 오소리 아줌마는 바람에 날려가서 우연히 본 학교 마당의 꽃밭보다 내가 살고 있는 산이 자연 상태 그대로의 아름답고 소중한 꽃밭임을 깨닫게 되지요.
콩알 하나에 무엇이 들었을까를 알려면 아이들은 먼저 콩 하나를 심어보고, 싹이 나는 것을 보고, 잎이 피어나고, 줄기를 이루며, 꽃이 피어 열매 맺는 과정을 직접 몸을 경험해 봐야 합니다. 이 책이 암만 좋은 책이어도 이론만 가지고는 공부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씨앗에서 씨앗으로 다시 돌아오는 봄부터 가을까지의 시간을 두고 아이들이 죽은 것 같은 씨앗을 심어 열매 맺고 거두는 일까지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과 환경에 대해 공부할 때 지식적인 접근으로 바로 들어가기 쉽습니다. 『최열 아저씨의 환경이야기』나 『하나뿐인 지구』는 자연파괴나 환경오염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책으로 바로 수업을 하기 전에 아이들하고 환경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질 것인가를 바로 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택의 기로
『숲의 사나이 소바즈』(제니퍼 달랭플 글·그림 / 이경혜 옮김 / 물구나무)는 자연에 대해 본질적인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그림책입니다.
넓은 숲에 둘러싸인 성에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은 깔끔하고, 예의 바르고, 부지런했고, 동생인 소바즈(야만인이라는 뜻)는 숲을 좋아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형에게는 성을, 동생에게는 숲을 남기셨습니다. 홀로 숲에 들어간 소바즈는 스스로 오두막을 짓고, 겨울을 날 먹이를 구하고, 진짜 숲의 사나이가 되어 잘 살아가고, 요정같이 나타난 숲의 처녀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전쟁이 일어나 성에 폭탄이 떨어져 빈털터리가 된 형 식구가 찾아왔습니다. 형은 숲의 나무들을 팔아서 돈을 많이 벌라고 하지만 동생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소바즈의 아내는 이야기합니다.

숲을 팔다니, 숲은 우리 것이 아닌걸요, 숲은 나무와 새들, 동물들의 것이에요. 숲은 꽃들과 이끼와 열매들의 것이에요. 숲은 산책하는 사람과 시인과 야만인의 것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숲은 배고픈 자의 것이고, 숲의 열매와 짐승들을 먹을 줄 아는 자의 것이에요.
숲은 숲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의 것이에요.    

소바즈의 아버지는 소바즈가 숲을 사랑하기에 반드시 숲을 지켜내고 살려 낼 것이라 믿고, 또, 숲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찾아낼 것이라고 믿었다는 아버지의 편지 한 통이 나중에서야 배달됩니다. 소바즈의 아들에게 이제 숲은 더욱 더 아름답고, 신비롭고, 너그러워 보입니다. 숲과 하나가 되어, 숲의 리듬에 맞춰 숨쉬기 위해 아이는 더 깊이 모험을 떠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형은 물질문명의 상징인 성에 애착을 갖지만 전쟁은 그것을 무참하게 파괴해 버립니다. 형은 자신을 받아준 동생에게 숲의 나무를 팔아 돈을 만들라고 합니다. 하지만 소바즈에겐 숲속의 통나무 집 한 채와 숲에서 얻는 양식, 숲이 주는 평화가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연을 파괴하여 물질문명을 얻지만 결국 우리가 파괴하는 것은 우리의 평화의 터이고, 다른 생명의 목숨의 터라는 것을 우리 또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질문명은 결국 또 다른 물질문명에 의해 파괴되고 맙니다. 더 힘센 문명, 더 부유한 문명은 그렇지 않은 문명들을 멸망시킵니다. 마치 인간이 무수한 생명의 종들을 멸종시키듯이. 하지만 그 끝은 결국 폐허밖에 없을 것입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왜 월든 호숫가에 가서 자연과 더불어 살며 우리에게 『월든』이란 책을 남겼을까요? 모두 다 그처럼 자연 속에 들어가서 살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연과 문명사회에서 진정으로 우리가 선택하며 살아야할 가치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어서였을까요?

선택의 실천
1992년 브라질 리우에서 열린 유엔 환경회의에서 캐나다의 한 초등학생(12세)이 세상의 모든 어버이들께 연설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버이들께

안녕하세요. 저는 세번 컬리스 스즈키입니다. 저는 애초(ECHO-환경을  지키는 어린이 조직)의 대표로 여기에 왔습니다.
저희들은 열두 살에서 열세 살 사이의 캐나다 아이들로서 무언가 변화에 기여하려는 그룹인데, 바네사 수티, 모건 가이슬러, 미셜 퀴크, 그리고 제가 회원이에요. 어른들께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거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 6천 마일을 여행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저희 스스로 모금했답니다.
어떤 의제를 따로 숨겨 놓은 것은 없어요. 다만 저는 저의 미래를 위해 싸우고 있답니다. 제 장래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선거에서 진다든지 증권 시장에서 얼마쯤 잃는다든지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저는 앞으로 올 모든 세대들을 위해 여기에 섰습니다. 저는 세계 전역의 굶주리는 아이들을 대신하여 여기에 섰습니다. 저는 이 행성 위에서 죽어 가고 있는 수많은 동물들을 위해 여기에 섰습니다. 우리는 이제 말하지 않고는 그냥 있을 수 없게 되었거든요.
저는 오존층의 구멍 때문에 햇빛 속으로 나가기가 두렵습니다. 공기 속에 무슨 화학 물질이 들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숨쉬기가 두렵습니다. 저는 아빠와 함께 벤쿠버에서 낚시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바로 몇 해 전에 암에 걸린 물고기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날마다 동식물이 사라지고 있다는, 그들이 영원히 소멸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야생 동물들의 무리를 보고 싶었고, 새들과 나비들로 가득 찬 정글과 열대 숲을 보기를 꿈꿨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엄마가 되었을 때 우리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그런 것들이 과연 존재하고 있기나 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소소한 것에 대해서 제 나이 때 걱정해 보셨습니까? 이 모든 것이 실제로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데도, 우리는 마치 충분한 시간과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아이일 뿐이고, 따라서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과연 해결책을 가지고 계신지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오존층에 난 구멍을 수리하는 방법, 죽은 강으로 연어를 되돌아오게 할 방법, 사라져 버린 동물을 되살려 놓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미 사막이 된 곳을 푸른 숲으로 되살려 놓을 능력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고칠 방법을 모른다면, 제발 그만 망가뜨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정부의 대표로, 기업가로, 기자나 정치가로 여기에 와 계실 겁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그 이전에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와 자매,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이며, 그리고 여러분 모두 누군가의 자녀입니다.
저는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우리가 모두 50억 명으로 된 가족, 아니 3천만 종으로 된 한 가족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공기, 물, 흙을 나누어 가지고 있으며, 정부와 국경이 감히 그것을 변경하지는 못할 겁니다.
저는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우리가 모두 하나이며,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하나의 세계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사고 버리고, 또 사고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잃고 싶어 하지 않고, 나누어 갖기를 두려워합니다.
저는 이틀 전 여기 브라질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살고 있는 몇몇 아이들과 얼마동안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중 한 아이가 우리에게 말하더군요. “내가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만약 내가 부자라면 나는 모든 거리의 아이들에게 음식과 옷과 약과 집, 그리고 사랑과 애정을 주겠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거리의 아이가 기꺼이 나누겠다고 하는데,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우리는 어째서 그토록 인색할까요? 저는 이 아이들이 제 또래라는 사실을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어디서 태어났는가 하는 사실이 굉장한 차이를 만든다는 것, 저도 리우의 빈민가 파벨라스에 살고 있는 저 아이들 중 하나일 수 있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소말리아에서 굶주려 죽어 가는 한 어린이일 수도 있었고, 중동의 전쟁 희생자, 또는 인도의 거지일 수도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전쟁에 쓰이는 모든 돈이 빈곤을 해결하고, 환경적 해답을 발견하는 데 쓰인다면, 이 지구가 얼마나 멋진 곳으로 바뀔지 알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유치원에서도, 어른들은 우리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어른들은 우리가 서로 싸우지 말고, 절약하고, 서로서로를 존중하고, 청결히 하고, 다른 생물들을 해치지 말고, 더불어 나누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어째서 여러분 어른들은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한, 바로 그런 행동을 하십니까?
여러분이 이 회의에 참석하고 계신 이유가 무엇이며, 누구를 위해서 이런 회의를 열고 있는지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의 아이들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앞으로 어떤 세계에서 자라날지 결정하고 계신 겁니다. “모든 일이 잘 될 거야. 우리는 최선을 다하는 중이고,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을 거야.”라고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안심시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그런 말을 우리에게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입니다. 도대체 우리 어린아이들이 여러분이 하고 있는 회의의 우선순위에 올라 있기나 합니까?
저희 아빠는 항상 말씀하십니다. “너의 말이 아니라, 행동이 진짜 너를 만든단다.” 하지만 여러분의 행동은 밤마다 저를 울게 합니다. 여러분은 항상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제발 여러분의 행동이 여러분의 말과 일치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십시오.
- 「어느 소녀의 연설」,『‘대중매체 읽고 쓰고 생각하기』 중에서

벌써 14년 전의 일인데, 열두 살의 세번 컬리스 스즈키라는 아이는 참 대단합니다. 세번은 앞으로 올 모든 세대들을 위해, 세계 전역의 굶주리는 아이들을 대신하여, 이 행성 위에서 죽어 가고 있는 수많은 동물들을 위해 연설을 한다고 했습니다. 세번은 분노하고 있지만, 눈멀어 있지는 않고. 두려워하고 있지만, 자기가 어떻게 느끼는지 세상에 말하는 것을 망설이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른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것도 그렇고,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눈여겨보며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똑똑하고 대견하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 아이가 말하는 것 하나하나가 우리 인류가 같이 풀어나가야 할 문제이기에 더욱 그렇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가장 대단한 것은 바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자신이 할 수 있는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너의 말이 아니라, 행동이 진짜 너를 만든단다.”
전남 장성에 가면 축령산의 편백나무 숲이 유명한데, 그곳은 국내 최대의 인공 휴양림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작고한 육림가 임종국씨가 50년 넘어 자신의 집과 논밭을 팔아 편백나무를 심었는데, 마치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처럼 그는 자신에게 남은 것은 없지만 후대 사람들에게 돈과 맞바꿀 수 없는 훌륭한 미래 자연을 선사한 것입니다.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고 한 대니 서는 대학에 들어가는 대신 자신이 내세운 청소년 환경 운동에 전념하고 실천에 옮깁니다. 행동으로 옮기기에 어마어마하고 큰 실천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 무엇인지 먼저 찾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들에게 환경 문제는 지식으로 아는 데 그칠 문제가 아닙니다. 6년 동안 12번 환경 글짓기를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아는 바를 실천에 옮기는 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행동에 옮기는 일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어른들이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과 자기 몸으로 하는 행동에 대해 책임감을 가질 때, 그리고 그것이 일치하도록 노력할 때, 아이들은 비로소 이 세상이 좋은 곳이라고, 믿을 만한 곳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세상 속에서, 세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선택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아이들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좋은 환경을 미래의 자기 아이들에게도 남겨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