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릅나무



김 영동님의 ‘훈’ 연주에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며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느릅나무의 모습은 인생살이의 모습과 흡사하다.

늦가을의 쓸쓸함으로 시작하여 초겨울, 앙상한 나뭇가지에 눈을 뒤집어쓴 모습, 겨울의 새벽하늘, 해가 떠오르는 겨울 아침, 고요한 한밤중 생명의 기운을 온몸으로 빨아들이며 촉촉하게 젖어드는 대지, 달빛 속에서 앙상하게 발가벗은 몸을 드러내더니 마침내는 한여름 화창한 날의 푸르른 느릅나무로 거듭났다.

사실, 난 가을을 봄으로 착각하면서 봄이 저렇게 쓸쓸할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봄으로 시작할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보았기에... 그래서인지 푸르른 느릅나무가 마지막 페이지였음을 알았을 때, 순간 혼동 스러웠다. 작가는 왜 봄부터 시작하지 않았을까...

늦가을은 인생을 견주어 봤을 때, 황혼기이며, 겨울은 죽음의 시기이자 탄생을 위한 준비기이다. 봄은 영. 유아기로 싹을 틔우는 시기, 여름은 인생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청춘...... 영혼과 육체가 성숙해지고 패기와 열정으로 가득 차있는 시기라 할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건 아닐까...

나무는 풍성하게 다가올 여름을 위해 가을 들판의 쓸쓸함과 겨울의 황량함을 친구 하나 없이 혼자서 버티어냈다. 사실, 태양과 달, 눈, 대지...자연이라는 친구가 함께 있지 않았느냐고, 따라서 나무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나무를 살게 하는 필수요건이며, 내가 살아가는 주변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싱그러운 햇살이며, 나를 숨쉬게 하는 공기, 물, 별... 또한 나의 가족과 친구들... 이들은 나를 늘 살아있게 하는 필수요건 이었다. 새삼 고마움을 느끼며 감사케 한다. 하지만, 나는 살아 꿈틀거리는 모든 것에 본능적으로 내재해 있는 ‘생명’에 대한 ‘의지력’에 중점을 두고 싶다. 생명이 살아 있게 하는 토대... 그 위에  살고자 하는 보이지 않는 ‘의지력’을 보고 싶다. 이것은  삶을 더욱 풍성케 하고, 빛을 발하게 해주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그저  자연현상에 몸을 맡기고 있는 듯 해 보이나 실상은  ‘생명’에 대한 ‘의지력’이 자연 현상의 온갖 악조건을 극복하게 했고 결국은  풍성한 나무로 거듭나게 했다.

좌절의 뒤편엔 희망이 있고, 죽음은 다른 측면에서 탄생을 의미하듯, 이 모든 것이 따로따로 있는 듯 하나 순환 고리처럼 얽혀있으며 공존한다. 이것은 나에게 좌절을 끝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충고해 주는 듯하다. 좌절은 희망의 다른 모습이며, 인생의 가을과 겨울은 저물어감과 죽음을 의미하지만,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기에 쓸쓸해하거나 두려움에 몸을 떨 필요가 없다고 속삭여주는 듯 하다. 저자가 가을로 시작하여 여름으로 끝을 장식한 건 그런 의미가 아닐 듯싶다. 우리에게 희망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나무의 강한 생명력과 삶에 대한 두려움을 담대함으로 떨쳐버릴 수 있는 꿋꿋함을 배우고 싶다. 나무는 인생살이에서 말없이 행함으로 보여주는 내 삶의  ‘멘토’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지만, 저는 그런 나무의 생명력을 배우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