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언제나-언제나> 시에 플랫 붙습니다. *높은 도 표시입니다.

1. 하얀 목련나무 아래서(라라 도*시라솔 파파도)
2. 분홍 복사나무 아래서
3. 노란 개나리 꽃 옆에서

*후렴
너는 곱~게 웃고 있구나(라라 도*시 라파 솔라솔)
친구야~ 아름다워~(파미파 파솔파라)
꽃처럼 환하게 빛나렴(시시시 라라라 도*라솔)
언제나-언제나-언제나(파미파 파미파 파미파

오늘은 저번주에 노래로만 배운 '언제나-언제나-언제나'를 리코더로 불었습니다.

저학년에게는 밝고 경쾌한 노래가, 고학년의 정서에는 그리움이 어울려서 이 노래는 고학년에게 가르치면 좋아한다고 하네요.

리코더는 관악기인데, 관악기는 높은 의식을 나타내며 소리가 하늘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또한 흔히 예식 장소에 많이 쓰이는 것도 관악기이죠. 영적인, 정신적인 세계를 나타내며 머리가 맑아진다고 합니다.
그에 반해 타악기는 땅으로부터 소리가 오며, 몸의 리듬에 맡겨 조금 원초적인 악기라고 할 수 있답니다.

아이들을 집중시킬 때는 작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소리가 가장 좋다고 합니다. 큰 소리는 아이들을 잠시 조용히 시킬 뿐, 집중시키지는 못하지요. 교육은 사람의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이지 소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래 중에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란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의 의미는 바로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죠. 펄벅의 '자라지 않는 아이'란 책을 보면, 펄벅이 집적 자신의 자폐아를 키운 얘기가 담겨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장애아이지만,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아이이겠죠.

다함께 종이 뒷면에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선생님과 이유를 써서 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 이름과 멋있는 이유들이 쏟아져 나왔죠. 하지만 이런 걸 하는 이유는 단지 인기투표를 위해서가 아닌, 모두가 제각기 아름답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였죠. 우리들은 이런 것을 할 때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더라도 잘 추스릴 수 있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주 조그만 것에도 상처를 받고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있는 아이들은 오히려 막 떠드는 아이보다 더욱 관심을 받고 싶어 합니다. "나도 여기 피어 있어요."라고 조용히 외치며...... 이런 아이에게는 쉽게 눈길이 가지 않게 되는데, 교사는 이런 아이들에게도 눈길을 줘야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아이들일수록 주목을 받지 않으면 쉽게 좌절 합니다. 교사는 이런 아이들도 함께 신경을 써주며 균형을 맞춰줄 수 있어야 합니다.

평상시에 어떤 사람의 멋에 대해 마음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과 직접 글로 표현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글로 써 봄으로써 그 사람의 진정한 멋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이죠. 아이들을 가르칠 때, 모듬 수업일 때는 몇 명 안되므로 모두 다 아름다운 이유를 쓰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의 잣대로 아이들을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나의 잣대'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요? 우리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차별하고 배척하곤 합니다. 우린 평상시에 너무 차이와 차별을 혼동합니다. 다르다와 틀리다에 대해 생각그물로 정리하며 확실히 선을 그어 보았습니다. 대부분 모든 것이 '틀리다'가 아닌 '다르다'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통 '다르다'를 '틀리다'라고 생각하고 삽니다. 이렇게 생각그물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며 다시 한 번 '틀리다'가 아닌 '다르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차이는 사실 인간이 농사를 지면서 잉여 생산물이 생기며 시작되었지만, 그 전까지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오면서 차이는 두드러지게 심해지기 시작했죠.
우리의 존재의 의미는 타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있지 않으면,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과연 나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다르다'라는 것을 인정하며 사는 것은 왜 이리 힘이 들까요?

월간 우리교육에서 나온 "우리가 다시 그려요" 비디오 안에 들어 있는 에니메이션 '너만 먹니?'를 보았습니다.
살이 뚱뚱하게 찐 부자가 절벽 벼랑끝에서 혼자 식사를 합니다. 이 절벽 벼랑끝은 여러 의미를 갖습니다. 최고의 자리, 많은 것을 소유, 높은 위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자는 혼자 식사를 합니다. 단절을 의미하죠. 바로 남의 것을 빼앗아 스스로를 소외시켰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자는 남과 나누지 못하여 스스로 파멸의 길을 가곤 말죠.

수업의 마지막으로 포르멘을 그려봤습니다. 처음엔 일직선이던 우리 삶에 점차 굴곡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과 나, 서로에게 주는 영향들이 커져 어느새 선은 만나게 됩니다. 그러다 점점 서로에게 밀려들어가고 나중에는 거의 겹쳐지고 맙니다. 이 포르멘 그림은 결국 우리 모두 근본은 같은 뿌리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름을 인식하고 다름을 자꾸만 이야기 하는 이유는 결국 우린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더불어 살아야하고 함께 나눠야 합니다. 분리를 하는 이유는 차별을 하기 위함이 아닌, 통합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것을 그림을 그림으로써 자꾸 느껴보게 하는 멋진 포르멘 그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