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우리 학문의 과제

- 오늘날 학문의 고민과 반성 -186쪽

* 불행한 출발

개화기 이후 학문 연구의 주체적 능력을 상실하고 서양학문에 주도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원인은 일제의 문화제국주의와 이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에 있다. 사회변동에 대한 연구 과제는 학문의 논리로 접목하지 못하고 실학자 최한기의 학문이 계승되지 못하고 단절되었다.

주시경이 국어연구를 통해 근대언어학 이론을 개척하는 등 창의적 이론수립을 위해 공헌했지만 국권상실로 단절되었다. 전통적 선비는 무조건 서구 학문을 배격했고, 신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은 일제 식민통치와 서양학문의 강제적 이식이 어떤 문화적인 조작인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국학파와 양학파는 서로를 배격하고, 대학을 거점으로 할 수 없었던 조선인에게 학문연구란 사실상 허용되지 않았다.

당시 신채호는 근대적이고 민족적인 역사학을 이룩하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주체적 민족정신을 정립하고 새로운 역사관을 수립하여 민족해방 투쟁의 지침을 삼고자 했다. 안확은 민족적 자각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이론과 실천을 연결시켜 근대학문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들의 연구 성과를 논증하고 치밀하게 체계화할 후학이 없었다.

* 분단시대 학문의 고민과 모색

1945년 민족 해방 이후 활발한 연구와 발표가 이루어졌다. 손진태는 신민족주의 사관과 조윤제의 서양의 연구방법을 적절히 수용하면서 민족문화 이론을 수립의 결실이 있었으나, 6.25의 참변이 일어나자 이념 양극화가 격심해지고 지도자적인 학자가 사라지면서 민족학문 연구의 맥은 다시 끊기고 말았다.

반공주의와 군사주의는 한국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세계의 전초기지라는 전제하에 미국판 서양학문의 이론이나 학풍 등이 비판적 검토의 여지를 주지 않고 마구 유입되고, 학문은 오직 서방세계를 통한 수입품을 보편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한국인 교수들의 서양철학 강의는 남의 사상을 전달하는 수준에서 그칠 수 밖에 없으므로스스로 철학적 연구와 창조활동은 불가능하고 대학에서조차 철학의 빈곤이 심각해진다. 박종홍 등 양학에서 얻은 준거를 활용하여 국학의 연구수준을 높이고 우리 사상을 재인식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양학과 국학을 결합시키지 못하고, 논리화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다.

역사학에서는 이병도가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서양 실증주의의 우상만을 섬기며 학자로서의 직무를 유기했다. 국어학에서 이숭녕은 실용적 과제에서 이론적인 문제로 연결하여 우수한 후진을 배출하며 국학의 폐쇄성과 국수주의적 경향을 탈피한 학풍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미국 chatm키의 변형생성이론이 유입되면서 영문과의 어학 전공자들이 국내 어학계의 판도를 지배하게되고, 수입한 이론을 국어학에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우리 학문에 맞는 이론창조의 필요성 마저 흐려지고 말았다.

문학연구에서는 고전문학은 자료와 사실의 실증에만 머물렀고, 현대문학 연구는 무조건 서양의 주의와 이론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만이 능사로 여겼다.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연관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서로 다른 길을 갔다. 김열규는 문학연구에서 서양문학과 우리문학의 관계를 파악하고 우리 스스로 이론을 창조하려는 노력에 적극적이었으나 한계가 있었다.

* 최근의 반성론과 방향 재정립

1980년대에 이르러 서양 학문에 의존하는 풍조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어 우리 학문의 방향 재정립을 요구하고 독자적 발전의 역량을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학문의 방향전환을 요구하는 또 다른 상황변화는 서구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아온 제3세계들의 주체성 확립이라는 보편적 과제와 민족 동질감의 확대이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 전통문화와 기층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민족 주체성을 회복하고 민중의식을 계승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대학가에서는 이식된 학문에 대한 반감과 민족문화 창조의 절실함이 제기되어 학문의 주체성을 되찾고, 실천의 지침이 되는 이론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사학에서 방향전환은 민족사관 확립에 있어 이념 대립이 민족의 차원에서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면서 통일 지향의 역사학을 이룩하는 것이 큰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과의 연결관계 안에서 거시적인 이론이 필요한데 총괄을 주도할 공동의 노력이 부족하여 고립적 역사인식에 머물러 있다.

* 장래를 위한 설계

인문과학에서 공학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모든 영역을 망라한 그대적인 대학은 서양의 모형을 본떠서 마련하였으므로 민족의 시련을 극복하고자하는 움직임에 충분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대학에서 민족사를 설계하는 이론을 마련하기위해서 식민지 지식인의 작태를 청산하고 소극적인 국수주의적 태도도 버려야한다. 국학을 세계학으로 일반화하는 논리를 마련하고 서양의 편견을 시정하여 진정한 세계주의를 이룩하기 위해서 민족 통일은 필수적이다. 원효이래 선조들의 지혜를 되새겨서 적대적 주장을 함께 받아들이고 많은 토론을 거쳐 세계문화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이론 마련에 기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