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된 주장

이와 같이 한국 경제는 불과 몇 명의 대재벌 총수가 정부에 비협조적으로 기업운영을 해도 그 여파가 국민에게 고통을 줄 정도로 재벌에게 볼모로 잡혀 있다. 심하게 말하자면 재벌의 협조 없이는 정권유지도 어려운 형편이다. 이만큼 소수 특정인에게 경제력이 집중되어 있는 실정이다(중략).

한국 경제는 불과 몇 명의 재벌 총수에게 너무 많은 경제력을 집중시켜 두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이들 몇 명의 태도 여하에 따라 국가경제 전체가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명백한 불법행위도 국가경제를 위해 처벌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오히려 정부는 아무런 불이익이 없도록 할테니 기업활동을 잘해 달라고 이들에게 사정해야 하는 형편이 되어 버렸다. 이만큼 국민경제가 이들에게 볼모로 잡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국가경제가 불과 몇 명의 손에 의해 좌우되는 비민주적 경제구조로는 선진국이 되기 어렵다. 선진국이란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져, 모든 일이 국민 모두의 조화로운 합의에 의해 움직여지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불과 몇 명에게 경제적 힘이 집중되어 있는 재벌제도를 하루 속히 선진국형 기업제도로 전환시켜야 한다. 선진국형의 기업제도란 현재 선진국에서 번창하고 있는 대기업들이 그 모형이 될 수 있다. 그 기업들의 가장 중요한 모습은 소유와 지배가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배가 소유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경영은 당연히 소유로부터 분리된다.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선진화를 위한 재벌의 선택-소유·경 영분리』, 고원, 1996, pp. 182~184)


재벌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잘 드러낸 글이다. 재벌에 대한 집중이 지나쳐서 국민경제가 볼모로 잡혀 있다는 지적은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고 보인다. 민주화라는 보편적 개념을 여기에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자연스럽게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주장하게 된다. 이것이 재야와 학계의 일반적 인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식이 기아사태 때 잘 드러났다. 최정표는 심지어 기아그룹의 경우는 소유와 경영이 잘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재벌로 규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국민기업이라는 명칭도 이러한 현실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국민기업은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재벌이 한국 경제를 논의하는 데 그 중심축에 있다는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재벌이 문제라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주장을 올바로 인식하기 위해 몇 가지 상반된 주장을 보기로 하자. 먼저 재벌의 입장을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약칭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의 견해를 보아야 할 것 같다.



이와 같은 연구결과는 지금까지의 경제력 일반집중 억제정책이 객관적인 사실분석보다는 막연한 정서와 예단을 기초로 형성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경제력집중=재벌문제, 재벌=한국 특유의 산업조직이므로 경제력집중 또한 한국 특유의 현상이라는 논리는 객관적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재벌이라는 기업형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지금의 경제력집중 억제논리는 향후 시장구조와 기업행태에 초점을 맞춘 경쟁촉진논리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력집중을 억제해야 한다는 논리는 가설부터가 잘못된 것이며, 열린 경제의 시대환경과도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동안 경제력집중을 과대평가해 온 데에는 한국 경제구조의 기형성을 부각시키려는 학계와 언론의 관행에도 그 원인이 있다. 학계 일부에서는 경제력집중을 한국적 현상으로 당연시하여 체계적인 비교제도분석을 외면하고, 독점논리를 앞세우는 경향이 있었음이 사실이다. 또한 언론은 단편적인 통계조합을 기초로 경제력집중에 대한 일반국민의 우려를 촉진시킨 책임이 있다.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 황인학 저 『경제력집중, 한국적 인식의 문제점』 발간사 중에서, 한국경제연구원, 1997)



재벌에 대한 일반의 부정적 인식이 확실한 근거에 의거한 논리적 결정이 아님은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이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합리적 논쟁에 근거한 합리적 결론과 합리적 정책시행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전경련은 이렇게 오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인식을 불식시키고자 노력하는 기관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자신들의 이해를 넓히고자 노력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너무 무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좌승희는 합리론자이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이미 금융제도에 대한 연구를 비롯하여 많은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 평소 소신 있는 시장경제론을 피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이유로 한국경제연구원장에 발탁되었을 것이다. 재벌에 대한 경제력집중 억제논리를 경쟁촉진논리로 대체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도 크게 무리가 없다. 그러나 대부분 합리적인 한국경제연구원 소속 연구원의 주장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그들은 결코 재벌의 부정적인 면을 지적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면은 애써 지나쳐 버리는 그들의 모습은 안스럽기까지 하다.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재벌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연구원이다. 소속 연구원이 재벌을 옹호하는 논리만 개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재벌에게 이익을 침해당할 가능성이 있는 쪽에서 재벌을 비판하는 논리를 개발해 낸다면 적절한 균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통상 민주사회에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문제는 재벌의 막강한 금권력을 상대할 만한 조직이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이다. 소비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변변한 연구소도 없다.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변변한 연구소도 없다. 중소기업연구원의 규모나 조직은 한국경제연구원에 비할 바가 아니다. 국가정책을 개발하는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재벌을 담당하는 연구원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경련은 한국경제연구원만 가지고도 모자라서 최근에는 이른바 자유기업센터라는 것을 설립했다. 균형잡힌 논리를 찾기는 매우 어려워진 것 같다.





아무리 `사이비 카리스마"를 덧씌워도 세습에 내재한 본질적 약점을 피할 도리가 없다. 그것은 다름아닌 천재냐 둔재냐 하는 `유전자의 우연한 조합과 배열"에 해당 집단의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다는 비합리성이다. 세습체제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위기의 근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재벌이 공정거래법의 족쇄를 풀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마치 머리는 작고 몸집만 큰 공룡의 발목을 풀어 놓아 초원을 마구 헤집고 다닐 수 있는 `무법천지"를 만들어 달라는 말처럼 들린다.

결론적으로 비유하자면 이렇다. 촌지와 전과목 고액과외로 대학생(중진국)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일류 학자(선진국)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재벌이 스스로의 문제점을 통감하고 `세습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느 재일 언론인의 말마따나 우리 재벌은 `죄벌(罪閥)"이란 원죄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다.

(박성호 변호사, 「공정거래법이 걸림돌?」 한겨레신문, 1997. 5. 14)

재벌을 규제하는 공정거래법의 족쇄를 풀어 달라는 재벌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일반인들에게는 마치 세습왕조처럼 보이는 재벌이 마구 헤집고 돌아다닐 수 있는 무법천지를 만들어 달라는 것과 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최근에도 삼성그룹이 무리하게 재산을 상속하기 위해 전환사채를 발행했다가 소액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로 참여연대라는 재야단체에게 고소당한 적이 있었다. 과연 한국 최고의 재벌이라고 자부하는 그들이 총수 2세로의 재산상속을 위해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하기는 재벌 2세가 납부한 상속세 액수와 나중에 그들이 소유하는 재산을 비교하면, 불법적 상속이 관행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이러한 불법적 상속의 관행이 뒤바뀌지 않는 한 재벌을 합리적으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세습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심지어 세습이 큰 문제라는 주장에도 동조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재벌문제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벌의 불법행위도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검찰과 국세청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이고 현행법의 적용문제일 뿐이다. 논리적으로 재벌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이 책의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 다만 재미삼아 재벌에 관한 여러 가지 주장을 보고자 하는 제2장의 취지에는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인용해 보았다.

성직자들 모두가 깨끗한 사람은 아니다. 교육자들 모두가 청렴한 것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모든 기업가들이 보통사람의 상식이나 기대를 만족시켜 주기를 바랄 수는 없다.

어떤 집단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소수는 늘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성직자나 교육자사회에서 이따금 발생하는 불미스러운 일을 갖고 전체 성직자나 교육자사회를 매도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일부 기업인들의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갖고 기업가 전체를 도매값으로 비난할 수도 없는 일이다.

최근 들어 한보그룹사건에서 불거져 나온 각종 부패사건들, 게다가 사업확장 끝에 휘청거리는 일부 대기업들의 문제를 두고 이론이 분분하다. 책임의 소재를 묻는 사람들 누구도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없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 책임을 재벌이라 부르는 대기업들에게 화살을 돌린다. 노동계와 사회단체에 몸담고 있는 일부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경제난의 주범이 대기업이라고 목소리를 드높인다. 그들은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그럴 듯한 논리나 증거를 들이대는데, 필자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냥 정경유착이니 부정부패와 같은 다소 추상적인 구호를 내세운 다음에 이 모든 문제는 당신들 때문이라는 투의 주장이 주를 이루고 있다(중략).

과거는 늘 빠르게 잊혀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경제난의 주범으로 대기업들을 몰아붙이는 일은 오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다시 일기 시작하는 `대기업 후려치기"를 듣게 되면 몇 년 전의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이라 사람들은 벌써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일이 불과 몇 년 전에 이 땅에서 있었다. `대기업 때리기"는 1993년 이른바 `총체적 난국론"과 함께 맹렬하게 전개된다.

경쟁력하락의 책임을 대기업의 부동산투기로 몰아붙이던 시절이 있었다. 제조업은 선이고, 서비스업은 악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던 시절이 있었다. 문어발식 확장은 악이고, 전문화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당시에 만들어졌던 규제가 어떤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호텔업 규제, 그리고 레저와 유통업에 대한 참여금지는 호텔객실비를 턱없이 오르게 하고 말았다. 레저나 위락시설을 즐기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 사람이 늘자, 정부는 급기야 관광산업 지원책이란 것을 내놓게 된다.

특정 집단을 지목하여 속죄양으로 삼는 것은 인간의 뿌리깊은 본능이다. 이를 두고 인류학자들은 `희생양의식"이라 부른다.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이나 히틀러의 유태인 박해 역시 희생양의식의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한 사회에서 무엇인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들은 일종의 스트레스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공격하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평정을 찾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고 아무나 희생양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희생양은 대다수의 사회구성원들과 명확히 구분되어야 하고, 소수이어야 하고, 만만해야 하며, 박해할 만한 그럴 듯한 정황증거가 있어야 한다. 재벌이라 불리는 집단은 이런 조건을 어느 정도 충족시킨다. 그래서 경제난이 발생할 때마다 도마에 오르게 되는데 문제는 그 비용이다.

그러나 필자는 『갈등하는 본능』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사회문제는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희생양을 처단함으로써 화풀이를 할 수 있는 것도 분명하다. 문제는 그 비용의 크기이다. 원시사회처럼 단순한 사회라면,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쉽게 감시할 수 있는 사회라면 희생양의식은 큰 비용 없이 사회적 긴장을 해소해 준다. 그러나 복잡한 사회에서 희생의식의 비용은 시장기능 전체의 왜곡을 가져오기 때문에 측정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공병호 자유기업센터 소장, 「경제난과 속죄양」, 한국일보 1997. 6. 4)

공병호는 재벌옹호론자 중 가장 열성적인 첨병이다.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에서 근무하며, 가장 적극적으로 재벌을 옹호하는 논리를 펴 왔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전경련이 설립한 자유기업센터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재벌을 옹호하는 그의 활동무대를 넓혀 주고자 자유기업센터를 설립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공병호는 노력파다. 그 스스로도 그렇게 자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누구라도 그가 저술한 책의 목록을 보면 그의 노력을 쉽게 알 수 있다. 거의 매년 1권 이상의 책을 저술하고, 그 밖에도 각종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하는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가를 가히 알 수 있다. 그 모든 글이 재벌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글이다. 그가 얼마나 사명감을 지니고 노력하는지 이해할 만하다.

공병호는 날카롭다. 이른바 재벌을 비판하는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자신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논리를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최근 그는 인간의 본능을 자주 논한다. 재벌에 대한 비판을 희생양의식으로 비유하는 앞의 글도 최근 그의 글이 보이는 경향을 대변한다. 재벌의 비판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는 간접적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원래 반시장주의자로 태어났다고도 할 수 있다”¹○1) 공병호, 『시장경제란 무엇인가』, 한국경제연구원, 1996, p. 27. 는 대목에 이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이제 자신의 논리에 빠져 자신에 반하는 주장은 모두 본능적인 주장일 뿐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는 느낌마저 든다.

공병호는 지나치다는 느낌이 든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자유기업센터의 사업을 보면 그런 일면이 보인다. 자유기업센터는 `자유주의 이념에 대한 연구의 활성화와 현실적인 구현을 위해" 대학교수의 연구지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재벌에서 지원하는 연구의 일환이겠거니 하는 정도로 생각하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들이 규정한 자유주의에 맞춰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을 이미 마련해 놓고, 자신들의 입장과 다르거나 자신들의 관심사항이 아니면 채택하지 않았다. 연구지원사업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하는 홍보사업으로 보였다. 개인적으로 전경련이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전경련의 자금을 어떻게 쓰는가는 전적으로 그들의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에서 일방적인 연구만을 촉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노조원이 낸 노동조합비로 세워진, 노조원의 권익을 주장하는 연구소가 빨리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재벌은 이토록 자신들의 주장을 전파하기 위해 엄청난 자금을 써 가며 온갖 노력을 다하도록 허용하고, 노조원의 권익을 신장하기 위한 조치를 아직도 허용하지 않는 처사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한 전경련의 행태에 비추어 전경련을 해산하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재벌로 인해 온 나라가 위기를 겪고 있는 이 때 전경련은 아예 한 술 더 떠 빛바랜 깃발을 처들고 시장경제의 적을 없애야 한다는 미명 아래 기득권 확장에 나선 것이 아닌가. 휘하 사장을 머슴으로 취급하는 것도 그런데 이제 국민을 우습게 보겠다는 것인가. 구시대에 누려 왔던 기득권에 집착하는 대신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세계적 초일류기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전략과 정책수립에 매진하는 자세를 보여 줘도 응어리진 국민감정이 풀릴지 의문이 드는 이 때, 너무 심하지 않은가.

전경련은 자진해산하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 재벌의 노사관계 전담기구로 발족한 경총도 없애야 한다. 새 시대를 위한 체제정비, 특히 경제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체제정비는 재계와 경제계를 대표하는 단체를 정비하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시발점은 전경련이 돼야 한다. 전경련은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카루스의 역설을 생각하자. 이카루스는 인조날개로 하늘을 날다가 너무 태양에 다가갔기 때문에, 날개를 붙인 밀랍이 녹아 바다에 떨어져 죽은 그리스신화의 주인공이다. 방자함을 깨닫기 위해 목숨을 잃어야 했다. 가장 소중한 재산이 파멸에 이르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 준다.

(조태훈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전경련의 빛바랜 깃발」, 한겨레신문,1997. 5. 18)

한국에서 재벌에 대한 비판을 가장 열심히 해 대는 사람은 대학교수이다. 사실 그들이 없다면 재벌에 대한 비판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한국의 노동자가 합리적인 주장을 펴기는 쉽지 않은 환경이다. 그러나 전경련은 막강하다. 그들은 쉽게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다. 공병호식 논리에 빠진 사람에게 대학교수는 좋은 표적이 된다.



시중에 개각설이 나돌 때마다 목욕과 이발을 하고 전화통 앞에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다. 옷도 검은 양복 정장을 입고서. 청와대에서 연락이 오면 곧 바로 뛰어갈 준비를 한 셈이다. 지금도 그런 설레는 마음을 품고 전화통 옆에 앉아 있을 인사가 적지 않을 것이다. 외출 때는 반드시 핸드폰을 갖고서.

이들 가운데 경제학자가 많을 것이다. 유명대학 경제학교수나 국책 경제연구소 책임자급이라면 한 번쯤 입각(入閣)에 대한 꿈을 꾸게 마련이다. 분필가루 마시며 학생들을 가르치다 하루 아침에 장관이나 경제수석으로 발탁되는 동료교수들을 익히 봐 왔기 때문이다.

권력층에 줄을 대고 있는 경제학자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를 짜 내는 수가 많다. 먼저 현 경제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할 것이다. 그런 다음 듣기에 그럴듯한 대안(代案)을 제시할 것이다. “단시일 내에 불경기, 외채, 무역적자를 해결할 수 있는 이런저런 정책이 있다”고 호언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 경제를 잘 모르는 권력자는 귀가 솔깃할 것 아닌가.

그런 류의 정책대안은 대체로 강력한 통제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정부가 민간부문에 입김을 미쳐 골칫거리를 한 칼에 해결하겠다는 발상이다(중략).

경제는 몇천만 명 국민들의 무수한 행위에 의해 움직인다. 이를 몇 사람의 발상으로 좌지우지하겠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정부개입을 강화하면 반짝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가 곪을 가능성이 더 높다. 생필품가격을 일정 기간 묶고, 공무원 봉급을 동결하는 것과 같은 명백한 가격규제가 나중에 완만한 인상을 인정했을 때보다 훨씬 큰 피해를 가져온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시장경제원리를 좇아야 번영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는 공병호 박사는 “신경제 100일계획은 그야말로 통제감을 원하는 정치인들의 수요에 부응하여 통제감을 상품화하는 데 성공한 지식인의 전형적인 사례”라며 “새롭게 포장된 통제감을 파는 지식인들이 나서고 이를 사는 정치인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다(중략).

입각을 꿈꾸고 있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 경제의 고질을 단시일 내에 치료하겠다는 환상을 갖지 말라고. 정부가 은행이나 기업에 입김을 미쳐 경제를 `획기적"으로 살리겠다고 무리하게 나서서는 안 된다고. 대선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업을 쥐어짜는 시도는 포기하라고. 이런 경고를 무시하면 한국의 미래는 잿빛이 될 것이라고.

(고승철 경향신문 산업부동산팀장, 「경제각료께」, 경향신문, 1997. 2. 23)

신경제 100일계획에 대한 평가는 조금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를 회상해 보면 당시 많은 학자는 안정화정책을 취하라고 권했다. 이미 1992년도 후반기에 불황의 골을 지나 회복기에 들어섰다는 평가에 근거한 권고였다. 반면 전경련을 비롯한 재계는 줄기차게 급속한 경기확장정책을 요구했다. 신경제팀은 재계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그 이후 학자의 목소리는 점차 사라져 갔다고 기억한다.

필자가 속한 집단을 비난하는 것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무리 객관적이라도 독자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대학교수를 변호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저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용납된다면 대학교수 집단은 우리 사회에서 별스런 집단이라고 생각한다는 정도이다. 아마 오랫동안 스승을 숭앙해 온 전통이 이제는 전문가집단에 지나지 않는 많은 교수를 필요 이상으로 대접해 온 것 같다. 그들이 발탁되어 정책을 맡게 되면, 자연 실무경험이 부족한 탓에 시행착오를 많이 하게 된다. 대학교수라고 출세에 눈먼 사람이 없을 리는 없으니, 개각 때만 되면 튀어 보려 한다는 지적도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알려진 대학교수도 많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집단은 단연 군과 재벌이었다. 이들의 힘은 너무 커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다. 다행히 최근 군의 고삐는 어느 정도 잡혔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재벌은 고삐가 잡히기는커녕 나날이 위세를 더해 가고 있다.

대표적 사례는 삼성재벌의 승용차시장 진출이다. 양식 있는 상공관료들의 일관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던 통상산업부 수뇌부는 마침내 김대통령의 끝내기 신호 하나로 승용차시장 진출을 허용해 버렸다(중략).

삼성의 승용차시장 진출은 자동차시장을 뒤흔들어 놓을 뿐 아니라, 재계판도까지 바꿀 수 있는 커다란 사건이다. 동시에 이 사건은 우리들에게 재벌이 마음만 먹으면 안 되는 것이 없음을 여실히 보여 주기도 했다(중략).

이제 우리 나라는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분립국가라는 것은 옛말이고(넓은 의미의) 정부, 재벌, 언론의 신삼권분립시대가 도래한 느낌이다. 그리고 과거에 입법부와 사법부가 행정부의 시녀노릇을 했다면, 지금은 재벌이 정부와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벌이 정부를 장악하다시피 한 것은 오래 된 일이다. 그들은 위로는 대통령으로부터, 아래로는 촉망받는 하위관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중략).

힘이 한 군데 몰리면 권력의 분산과 견제와 균형을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조금 늦은 감은 있으나, 지금이라도 경제적, 나아가서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해서 `재벌개편위원회"(가칭)를 만들어 나라의 균형을 잡을 것을 긴급제안한다.

(정운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재벌개편기구 만들자」, 한겨레신문,1995. 12. 12)

정운찬은 한국의 대표적 중견 경제학자이다. 자연 그의 견해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무게가 실리게 마련이다. 그런 그가 재벌개편기구를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에서 주류경제학을 대표하는 중견학자의 발언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절박한 심정을 반영하는 것이리라.2) 최근 그는 이러한 글을 모아 『한국경제 죽어야 산다』라는 책을 펴냈다. 그가 한국 경제의 상황에 대해 얼마나 절박감을 느끼는가를 잘 나타내고 있다. 누구라도 한 번쯤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재벌을 옹호하는 측은 이러한 견해가 올바르게 평가받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공병호가 가만 있을 리 없다. 그의 주장을 들어 보자.

특히 명문대학이나 일류신문에서 높은 직위에 있는 지식인이거나,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대중에게 지명도를 가진 사람일수록 대중들이 그들의 지식이나 정보를 구매할 가능성이 높다. 상품의 브랜드를 사는 것처럼 대중들은 지식이나 정보도 브랜드를 보고 구입하게 된다(중략).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식인들 역시 시장경제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대중들과 거의 차이가 없다. 일반인들이 시장경제에 대해서 가장 신뢰할 만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해 주리라고 믿는 사람들은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은 각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들이거나 국책연구소나 기업연구소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그들의 사고체계가 만들어져 왔는가를 살펴보면 경제학 학위를 소유한 사람들이 가진 시장에 관한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 이 땅에서의 경제학교육은 거의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설령 국내에서 학위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스승들 대부분이 미국에서 학위를 한 사람이라면, 미국에서 경제학 학위과정을 취득한 사람들이 겪어 온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대부분이 이른바 신고전학파 경제학으로 무장되어 있고, 수학과 계량적인 분석에 상당히 익숙해 있는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지나치게 분파주의(sectionalism)에 빠져 있다. 학문발전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전문화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지나친 경제학의 전문화는 원래 경제학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잊어버리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뿐만 아니라 학위하는 동안에 형성된 시장경제 자체에 대한 기계적인 사고의 틀을 재조정할 만한 여유가 없다.

뿐만 아니라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기본적 원리인 자유와 책임, 그리고 사적 재산권의 의미, 경쟁과 가격 등 다양한 개념에 대해서 그 깊은 의미와 현실과의 관계에 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모두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제는 개선될 기미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장경제를 이해하는 데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을 것으로 믿어지는 경제학자들이 이 정도라면, `오피니언 리더"라 불리는 지식인들이 어느 정도 정확하게 시장경제를 이해하고 있는지는 정말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공병호, 『시장경제란 무엇인가』, 한국경제연구원, pp. 174~175)

자신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경제학자가 미국에서 교육받았음에도 이제 자신을 제외하고는 시장경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오만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면 시장경제를 이해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시장경제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는 주장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주장은 우리 학문의 발전에 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학자들은 전부 미국경제학을 배워 왔으니, 이제 한국적 경제학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지금까지도 종종 있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잘못임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경제학은 보편적 원리이며, 한국적 경제학은 그 소재를 달리할 뿐이지, 새로울 것이 없음은 자명하다. 때로는 너무 우리 현실을 등한시하고 있다는 건설적 비판이 잘못된 한국적 경제학이라는 주장과 혼동되는 현실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하여 미국에서 배우지 못하고 온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경제학을 배우는 일이 의미 있는 것은 현재 미국이 경제학을 포함한 대부분의 학문에서 가장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물질적 풍요가 그것을 뒷받침하고, 다시 이러한 연구가 물질적 풍요의 토대가 된다. 연구인력의 규모가 미미한 우리로서는 미국에서 공부해 오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큰 시장에 가야 많은 상품 중에서 좋은 것을 고를 수 있는 이치와 같다. 아직 국내에서 배우거나 연구하기 쉽지 않은 분야가 많다. 우리 학문은 아직도 일천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가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은 시장경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은 진정 이해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한국 학자가 그렇다면 그들에게 경제학을 가르친 대부분의 미국 학자도 시장경제를 모른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런 대로 봐 줄 수 있다. 최소한 논쟁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의 무조건적인 비난에 가까운 발언은 진정 우려할 만하다.

대학교수와 언론이 나라를 망치는 원흉으로 비교되는 것은 그들의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그 막강한 영향력을 잘못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교수들이 상아탑 속에 몸을 감추고 있는 한, 그들이 안개를 먹고 구름똥을 싸든 말든, 현실진단이 비현실적 이상주의에 흐르든 말든, 적어도 나라를 망친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상당수의 대학교수들은 좋게 말해 현실참여를 열망하고 있으며, 나쁘게 말하면 권력지향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했다. 또 한편으로 우리 사회는 대학교수라는 신분에 대해 일종의 환상을 아직도 지니고 있다. 전문가이며 동시에 지성인일 것으로 지목하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항상 경청해야 할 대상일 뿐 아니라, 나아가 아예 그들에게 현실운영을 맡기자고까지 한다. 교수 출신 국무총리, 교수 출신 국회의원, 교수 출신 시장·도지사가 그래서 속출하고 있다.

대학교수들의 이런 현실참여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이론, 주장에 문제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오해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그들이 배워 오고, 가르치고 있는 이론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전개된 서양의 상황을 토대로 한 것들이다. 극언하면 100년 전에 통하던 이론이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사회도 달라졌고, 나라의 내용도 달라졌다. 그 때의 이론으로는 오늘의 이 현실을 분석하고 가치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대학교수들은 100년 전의 이론으로 100년 뒤의 현실을 재단하려 들고 있다. 더 슬픈 것은 그들의 잣대에 맞지 않는다 하여 오늘의 이 현실을 몽땅 부정하려 하는 것이며, 대안 없이 송두리째 뒤엎어야 한다고 부채질하는 것이다. 또 더욱 겁나는 것은 이런 주장이 대중적 호응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중략).

이런 대학교수와 언론의 밥이 바로 기업이다. 기업 중에서도 재벌이 이들의 포식할 줄 모르는 밥, 공격대상이 되고 있다. 사실 거두절미하고 재벌의 존재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를 전국민에게 물어 본다면 아마도 절대다수가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런 국민감정 때문에 대학교수와 언론은 마음놓고 재벌을 공격할 수 있다. 공격할 재료가 부족하지도 않다. 권력을 공격할 때처럼 위험을 각오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재벌을 공격함으로써 정의추구자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은 결코 재벌을 비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재벌을 조지는 일은 매우 위험한 짓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선동가의 황당한 말장난보다는, 또 집안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바깥세계에 있으며, 그 바깥세계 적과의 경쟁에서 지금 우리가 일패도지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안타까움을 말하려 하는 것뿐인 것이다(중략).

그래서 기업을 조지는 언동에는 기업에게 그런 질책을 받아 마땅한 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현실대로 받아들일 줄 모르는 환상과 증오라는 시대정신의 질환이 곁들어져 있다. 이것이 위기인 것이다. 경제위기의 근원일 뿐 아니라 함께 모여 사는 가치기준의 위기이기도 하다.

(정태성 매일경제신문 상업고문, 『기업의 적_왜 위기인가』, 한국경제연구원, 1996)

이 책을 쓰기 위해 참고자료를 준비하던 중 대학교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꽤 넓게 퍼져 있음을 알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위의 글은 그 전형적인 모습이다. “100년 전의 이론으로 100년 뒤의 현실을 재단하려 들고,” 그 “잣대에 맞지 않는다 하여 오늘의 이 현실을 몽땅 부정하려” 하며 아무런 “대안 없이 송두리째 뒤엎어야 한다고 부채질”이나 해 대는 대학교수, 만일 그렇다면 이는 실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나친 비난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무튼 자괴감을 금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한국경제연구원이 이런 책을 발간하는 저의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가공할 재벌의 위력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외국인의 글을 소개한다. 자기가 펴는 주장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외국인의 시각을 인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우리의 행태 중 하나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러 한국인의 견해를 소개했으므로, 하나쯤 외국기사를 인용하는 것도 괜찮으리라 생각한다. 1995년도의 기사인데 오늘 우리의 현실을 섬뜩할 만큼 정확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기울일 만하다 하겠다. 주간지의 기자가 이렇게 격조 있는 경제시평을 할 수 있는 사실이 부럽기만 하다.

프랑켄슈타인 경제(Frankenstein Economy)

박대통령 서거 후 경제정책을 책임진 엘리트 관료들은 (중략) 국가개입의 전통과 집중화된 산업조직이라는 박대통령 시대의 유산은 그대로 이어받았다. 정부개입과 정부의 보험자역할이 도덕적 이완의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정부는 1980년대 이래 정부개입을 줄이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있으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한국 정부가 산업에 개입하는 습관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는 항공, 통신, 자동차 등 여러 산업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1970년대의 중화학 드라이브 이래 20여 년이 경과한 지금까지 이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개입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정부개입이 자기지속성을 갖는 현상은 관료들 또한 보통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갖고 행사하려는 성향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더욱 깊은 이유가 있다면 박대통령 시절 산업정책적 정부개입의 전통이 이어지면서, 민간 대기업들이 책임을 회피하면서 성장하는 데 지나치게 익숙하게 되어 버린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한국 민간기업들의 투자계획에서 신중함이란 없다. 만약 정부가 기업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방치한다면 지나친 투자붐이 우려될 정도이다. 한국 기업들은 정부가 투자를 허락하기만 하면 전혀 주저하지 않고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은 정부가 제재를 가할 때에만 투자를 자제한다는 것이 한국 경제의 분명한 격언인 듯하다. 박대통령이 가르친 행태가 그가 사망한 지 15년 이후에도 한국 경제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박대통령의 유산은 또 있다. 거대기업 위주의 전략을 동원한 결과 이들의 사업이 잘못되었을 때 정부가 나서서 구조해야 한다는 묵시적인 약속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경제력집중은 심화되었고, 재벌가족들이 기업을 소유함에 따라 부에 대한 적개심이 형성되었다. 재벌의 규모는 경쟁을 저해하기도 한다. 재벌의 계열사들은 아무리 잘못 경영되더라도 재벌의 특성을 이용하여 재벌이 아닌 경쟁자를 이길 수 있었다. 재벌은 깊은 주머니를 이용해서 몇 년간 적자를 보더라도 견딜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진보적인 경제학자들까지 정부개입을 주장하게 된다. 한국의 공정거래법을 기초한 전문가들이 재벌규제를 도입하려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1970년대의 정부개입이 재벌문제를 야기했듯이, 1980년대 이래 재벌규제를 위한 정부개입도 재벌의 지배력을 극복하지 못한 채 소망스럽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재벌에 관한 가장 큰 우려는 재벌이 한국 경제의 안정성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막대한 부채로 성장했던만큼 취약하며, 약간의 슬럼프만 겪더라도 부실화되기 쉽다. 큰 재벌이 도산하면 금융시스템이 무너지고, 성장은 둔화되며, 더 큰 도산사태를 야기할 수 있다. 1985년 국제그룹이 붕괴했을 때 정부는 다른 재벌을 구제하느라 대규모 특혜대출을 공급해야만 했다. 최근 덕산이나 유원건설의 부도에 대하여 정부는 시장에 맡긴다고 하지만, 만약 경제성장이 더욱 둔화되면서 재벌의 부도사태가 이어진다면 정부는 구제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규모 재벌의 붕괴가 한국의 금융시스템 안정성을 위협하는 한 정부는 재벌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바로 이 점 때문에 한국 정부는 개입을 중단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묵시적인 보장은 오히려 재벌로 하여금 더욱 무분별하게 투자하도록 장려하는 효과를 갖고 있다. 결국 재벌은 더욱 커지고 그들의 붕괴가능성은 더욱 큰 위험이 된다. 박대통령은 `길들일 수 없는 괴물"을 창조한 것이다.

(Economist, `A Survey of South Korea" 중 발췌 요약, 1995. 6. 3,유승민, 『나누면서 커간다』, pp. 84~86에서 재인용)

〈후 기〉

이는 너무도 섬뜩한 예언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지금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지원받고 있다. 물론 많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재벌이 그 중추적인 원인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미 오래전부터 경고가 있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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