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등 22기 제6강 비판적 사유하기 / 정리 김정겸
2005년 10월 13일 나무날    강의 : 박형만 선생님


   오늘 제6강 주제는 ‘통합적 사고하기--역사의식 가지기/비판적 사유하기’이다.

배움 알갱이  
‘엔트로피 세계관’을 통해 우리의 삶(도시사회/24시간 사회)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와 요소를 뒤집어 봄으로써 현대사회의 위험을 자각하고 비판적 시각과 사유를 키워 나가도록 안내된 수업이었다.

엔트로피란?
엔트로피는 물리학적 개념으로 90년대 초, 현대문명의 위기를 진단하는 도구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하여, 이후 문명위기론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핵심 용어가 되었다. 간단히 풀이하자면 열역학에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엔트로피 증대의 법칙 두 가지가 있는데, 에너지 보존의 법칙(열역학 제1법칙)이란 에너지는 형태만 바뀔 뿐 사라지지 않고 지구에 남아 있게 되며, 이와 연결되어 엔트로피 증대의 법칙(열역학 제2법칙)은 사용되지 않은 상태의 순수에너지가 폐기물로 바뀜으로써 더 이상 사용될 수 없는 에너지, 즉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는 이론이다.

위험사회
  파키스탄의 지진으로 수만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비롯하여 끔찍한 사건들을 보면, 우리나라는 위험의 사각지대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위기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 실감하지 못하는 위기 불감증 상태에 빠져 있으며, 발등의 불처럼 개인적으로 다가올 때만 겨우 위험을 알아챌 뿐이다. ‘절망 속의 희망’에서 김종철 교수(확인해 보니, 이 분은 1947년 생으로, 내게는 하늘처럼 높은 선배님인데, 우리와 같은 세대의 동명이인으로 착각했다)는 세계화라는 미국의 패권적 전략과 미국적 문명을 비판하고 자립적, 자치적 삶이 될 농촌공동체 중심의 지역문화를 권유하고 있다.    
  미국은 90년대 걸프전과 이라크 전에서 우라늄 총탄(한뼘 크기)을 사용했는데, 이는 핵 쓰레기를 군수업체에 보내 만든 총탄으로 탱크 한 대를 너끈히 공격할 만한 무기였다. 우라늄탄에 오염된 주민 90퍼센트가 방사능에 피폭 당했고 그들의 2세는 선천적 백혈병 환자로 태어나 3년 이내에 죽어갔다. 이러한 재앙을 막고자 이라크에서는 오염지역 주민들이 결혼을 하지 않았고 결혼하더라도 자녀를 생산하지 않는 현상이 벌어졌다.

  우리나라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진 비무장지대에서는 적진을 넘겨다보기 위해 가을에 소이탄으로 불을 질러 버림으로써 생태계를 파괴하는데, 사람이 접근하지 않아 동물이 살아갈 수 있을 뿐 황폐화되고 있다. 한국전쟁 때 맥아더는 북한지역에 소이탄 3천만 톤을 쏟아 부어버림으로써 불바다를 만들어 혼란과 교란을 틈타 공격했다. 베트남전에서 미군은 고엽제라는 제초제를 밀림에 대량으로 뿌려 생태계를 파괴하였고 50년 동안 그 잔류가 남아 인체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으며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군도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고 그들의 2세까지도 피해를 받아왔다.

엔트로피 이론이 함의하는 것
  평화로운 세계에 살고 있다고 여기지만 위험상황이 점점 확대되어 전면적으로 우리 삶에 다가오고 있다. 이것을 해결하고 진단하는 원리가 엔트로피다. 그럼, 현대문명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에 대해 알아보자. 역으로 무엇이 없으면 사회가 균열되고 무너지는가를 생각하고 말해보자. 이에 대해 샘들은 “전기, 반도체, 미디어, 온라인(컴퓨터), 교통체계(엔진, 동력기의 발달), 에너지(석탄, 석유--브라질의 경우, 에너지의 40퍼센트를 사탕수수 기름으로 이용한다)”라고 답했다. 또 과학기술 문명은 혜택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더 많은 문제를 만들어 냈는데, 이러한 과학기술 문명의 양면성에 대해 짚어보자.

현대문명을 지탱하게 하는 도구들
  소통과 협력을 극대화시키는 도로교통과 통신, 그리고 도시의 발달(현재 우리나라 순수 농어민은 8퍼센트, 도시인구는 90퍼센트로 농촌이 사라졌다)에서, 먼저 도로와 통신의 밑바탕인 과학기술은 군사적 목적에서 발달했다. 대부분 문명의 이기는 전쟁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져 대중화되어 퍼졌다. 이를테면 80년대 첩보전에서 사용되었던 핸드폰이 그러하며, 이러한 대중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도 007이 되었다.

상수도와 하수도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요소로 상수도와 하수도가 있다. 새마을 운동 때 상수도가 설치되고 우물과 펌프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현재 서울의 지하수는 200퍼센트 오염상태다(라돈 등 발암물질이 기준치 200배 이상이란다). 하수도를 통해 체계적인 물 관리를 함으로써 무방비 상태의 전염병을 근원적으로 해결했고 선진국에서는 말라리아나 콜레라 같은 전염병은 완전히 사라졌다.

전기에너지 빛과 그림자
  문명의 핵심에 자리 잡은 전기적 장치는 동력원으로서 석유와 석탄이 사용된다. 플라스틱 제품 역시 석유로 만든다. 전기적 장치의 대표인 컴퓨터는 국가기능 수행 및 정보, 금융, 병원 등의 종합적 전산망에 이용된다. 99년 Y2K 바이러스로 골머리를 앓았던 사례에서 보듯, 바이러스로 다운이 되었을 경우엔 모든 기능이 정지되거나 위험에 빠지게 되는데, (우리나라 전국전산망을 만든 회사는 삼성 SDI/SDS이다) 예컨대 금융전산망이 망가지면 모든 정보가 파괴되어 위기를 빚는다.
  특히 전기로 환상적인 가전제품이 출현했다. 세탁기의 출현은 겨울 강 얼음을 깨고 빨래하는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안동모시는 북한에 자동화 기계를 보내 직조되고 있다. 기계장치로 대체된 전자동화 시스템은 가혹한 노동과 위험한 일에서 사람을 해방시켰으나 일자리를 빼앗아갔다. 이 과정은 인간의 의식에 치명적인 변화를 부른다. 즉 자기 힘으로 해야 할 것을 기계로 대체함으로써 인간의 능력이 제한되고 소멸되어 점차 무능력자로 변한다. 어린 시절부터 (예로서 완제품 장난감) 편의를 누리다 점차 그것에 길들여지고 힘겨운 일을 겪지 않았을 때는 훗날 어려움에 맞닥뜨려 무력해진다. 그리하여 점차 의지력이 약화되고 버티는 힘이 사라져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지 못하는, 작은 존재로 위축된다.  
  전깃불에 의해 밤까지 노동에 시달려야 하며 수면부족으로 신경질과 불만, 짜증, 불안감이 생기고 (고대에는 배부르면 자고 피곤해도 자고 어두워지면 자고 놀다가 자고 하염없이 잠만 잤다. 중세는 촛불은 귀족만 사용했을 뿐이고 다들 해뜨면 일어나고 해지면 잤다. 우리도 광솔과 호야등으로 불을 켰을 때까지만 해도 어두워지면 잤다.) 요즘 아이들은 게임에 빠져 정신적으로 피폐해진다. 전기라는 인공의 빛은 파장 시스템이 달라 동물/곤충이 버티지 못하는데, 처음엔 가재가 사라지고 다음엔 반딧불이 없어지면서 생태계가 급격하게 파괴되었다. 골프와 고속철도 역시도 심각한 생태파계의 범인이다.

  이때껏 살펴보았듯, 과학기술문명은 생태계를 왜곡, 파괴할 뿐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만든다. 이러한 인간의 문명은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파괴가 동시에 일어나면서 엄청난 쓰레기의 증가라는 엔트로피를 낳는다.



단편 애니메이션 ‘식욕’

  자, 단편영화 ‘식욕’을 감상하고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는지 캐어보자.
  주인공은 전화를 받으면서 뭔가 먹는다. 비서가 나타나 5시라는 걸 알려주자 주인공은 퇴근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자동차를 탄다. 거리를 가다 자판기에서 뭔가 사먹는다. 레스토랑에서 돼지, 닭 등등 고기음식을 잔뜩 시켜서 먹는다. 여자도 집에 데려와 계속 먹는다. 이제 입이 두 개로 네 개로 점점 늘어나더니 온몸이 다 입이 되었다가 기계(포크레인 손)로 변해서 탁자까지 먹어치운다. 흉악하게 변한 비대한 몸을 소파에 누여 잠을 청하지만 배가 부글거려 약을 먹고 눕는다. 몸이 붕 떠서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밑바닥에 떨어지고 나서 사방에 굶주린 자들이 둘러싸고 쳐다본다. 굶주린 자들이 몰려와 주인공을 뜯어먹는다.

  이 작품을 보고 어떤 말 혹은 어구가 떠오르는지 말해보자.

  “탐욕, 쓰레기와 괴물, 과욕, 많이 먹지 말아야지...”

  이 영화는 첫날 배운 뫼비우스 띠로 주인공의 9 to 5의 삶(화이트 칼라, 가진자, 대기업, 지배계층, 제국주의)과 굶주린 자의 7 to 11의 삶(노동자, 못가진자, 개인(중소기업), 피지배계층, 제3세계)을 연결하여 두 삶의 차이를 밝혀보자.

  우리나라 재벌은 독점을 통해 초기업, 비대한 기업으로, 이는 비도덕적 행위이며 재산의 정당성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삼성 노동자의 60퍼센트가 비정규직으로 연봉 1200만원인데 견주어 이사진은 28억, 최고 56억을 받고 있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착취하고 중소기업은 개인을 착취하는 종속구조를 이루고 있다. 즉 9 to 5의 독점적 삶은 7 to 11의 착취당하는 삶을 당연시 여겨야 유지될 수 있는 삶이다. 이런 구조는 미국의 제국적 속성과 정복의 야욕으로 제3세계권이 유린되는 현실에서도 읽을 수 있다.

  주인공의 삶은 소비하는 기계로 전락한 현대인의 모습, 노동자의 착취로 부를 축적한 삶,  한없이 추락해서 굶주린 자들이 모인 곳에 떨어지는 장면에서 엿볼 수 있듯 계층 간의 분리 혹은 고립, 도시공간에서 벌어지는 가진 자의 횡포, 육식이라는 식습관으로 의식과 육체도 변하는 삶이다. 마지막 고기를 먹지 않으면 생이 슬퍼지는 지경까지 이른 우리의 식습관을 엔트로피 시각으로 살펴보았다. 200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일천만 서울 인구가 하루에 소 1800마리를 소비한다.

  육식과 엔트로피
  지상 낙원으로 알려진 아프리카 소말리아는 19세기 프랑스가 지배하여 20세기에 이 나라의 80퍼센트를 사막으로 만들었다. 프랑스인은 이곳 밀림을 밀고 방목을 위한 목초지를 만들고 옥수수를 재배하여 소를 키웠는데 소말리아인들은 극도의 기아 속에서도 눈뜨고 먹지 못했다. 결국 유럽을 먹이기 위해 아프리카가 사막으로 황폐화되었다.

  육식은 이제 전세계로 보편화되었다. 중국의 경우 농사를 지으므로 소를 신성시했고 불교와 유교의 영향 등으로 먹지 않았으나 지금은 소고기를 수입한다. (중국인은 책상 빼고 네 다리 있는 것은 다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육식을 좋아하는데 특히 개고기를 가장 좋아한다. 주은래가 처칠을 영국으로 방문하고 선물로 받은 명견을 먹고 처칠의 답방 때 그 사실을 말해서 두 나라의 외교가 어긋났다는 일화가 있었다.) 이렇듯 중국이 육식을 밝히게 되면서 중앙아시아와 몽골지역이 사막화하고 황사현상이 심해졌다. 소는 무거운 동물이어서 그 무게로 인해 땅이 꺼지고 세상에서 가장 많이 먹는 동물답게 인간의 곡식을 먹어치우고 목초지의 토양을 황폐하게 만들고 소똥 가스로 오존층을 파괴한다.

  ‘식욕’의 주인공은, 현대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육식 시스템에 자동적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육질을 연하게 하기 위해 연화제를 사용하고, 몸을 돌릴 수 없을 지경으로 꽉 짜인 틀에 가두고, 꼬리를 잘라 파리를 잡는 등 꼬리 운동을 시키지 않으며, 뿔을 레이저로 지져 버려서 뿔로 들이 박는 운동을 하지 못하게 하여, 고통으로 괴로워 앞발을 긁어대어 발굽이 닳아져 없다. 이런 고통과 스트레스 속에서 살다가 처참하게 죽는 과정에서 독이 품게 된다. 소고기 먹기는 곧 이러한 소의 수성, 독을 함께 먹는 것과 같아, 참을성이 없고 과격하고 불안정하며 편식이 심한 성격을 낳는다. 또한 주류독감에서 보듯 곡물 수입 등 음식을 통해 새로운 질병이 퍼지고 있다.

  냉장고 이론
  그럼 엔트로피를 멈추게 혹은 지연시키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네트로피(저엔트로피)다. 이는 ‘냉장고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즉 전기 코드를 연결하면 처음엔 많은 양의 전기가 돌아가지만 전기가 계속 공급되면 일정하게 유지된다. 지구는 한정된 세계( 폐쇄체계, 닫힌 체계)이므로 순수한 에너지를 다 사용하면 사용하지 못하는 에너지, 즉 엔트로피로 바뀌므로 순수에너지는 고갈하고 사용하지 못하는 에너지는 과잉 쓰레기로 남게 된다. 하지만 바람, 햇빛, 조력(바닷물) 같은 자연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면 저엔트로피를 유지할 수 있다. ‘오래된 미래’의 라다크에서 네트로피를 배울 수 있다. 라다크는 공동 노동, 공동 분배를 바탕으로 한 소박한 원시공동체의 삶이었다가 문명이 개입함으로써 파괴되었다가 다시 회복되어 가는 중이다. 그들은 벽 자체에 햇빛을 모아 저장, 보관하도록 되어 난방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에너지 사용을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인 6퍼센트가 전 세계 에너지의 40%를 사용하고 중국, 일본에 이어 한국이 4등이라고 한다. 찜질방의 한달 석유 소비량은 중소기업 한달 소비량과 맞먹는다고 하는데, 우리가 찜질방이며 온천을 좋아하는 순간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역군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삼갈 것을 귀띔 받았다.
  
시간에 쫓겨 미처 끝내지 못한 애석함을 덜면서, 샘들은 두 걸음에 나오는 고엔트로피의 요인과 저엔트로피의 방안을 정리해서 반드시 올려놓을 것이며, 의문난 점, 궁금한 점 등을 올리면 우리의 자상하신 박형만 샘께서 성의껏 답을 보내주신다고 하셨으니, 우리 샘들, 이 참에 엔트로피 완존히 끝내 줍시다.

***** 다음 주 과제 *****
참, 다음 주 과제는 첫째 ‘노래하는 나무’를 읽어 오되, 197쪽 꼼꼼히 살필 것. 둘째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동물해방, 육식의 종말, 패스트푸드의 제국, 오래된 미래 중 택일하여 서평 써오기.


  2005년 10월 14일 쇠날,

  이제 정리를 마감해야겠다.

  이번 정리는 순전히 박현아 샘 식의 정리를 흉내내 보았는데, 실수다.
내 힘에는 붙이는 일이다.
부디 엉성한 행간 사이를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샘들의 지력으로 다시 걸러 보시길...
끝으로 이번 수업에서 유미정 샘이 유일하게 아리랑 곡선을 만들어 왔다.
샘의 설명을 들으면서 과제 못한 샘들이 반성했다.
하지만 ‘시간 넉넉히 주마’고 박형만 샘이 말했고 우리 샘들도 ‘꼭 하겠소’ 했다.
오늘은 용인에 사시는 한복희 샘의 무리가 안 왔는데, 혹 과제 때문이었다면 좀 억울했겠다.
하지만 샘들이 억울하지 않게 마지막으로 박형만 샘이 샘의 입술로 들려준 샘의 스토리를 읊어놓겠다.


   마니샘이 들려 준 이야기

   그는 경북 안동에서도 한참을 들어가는 시골 출신이다. 촌꼬맹이 때부터 두 다리로 산을 서너 개 넘으며 학교엘 다녀, 다리 힘이 엄청 쎄졌다. 4학년 때 안동으로 전학 와서는 그 학교아이들을 까맣게 젖히고 달렸고 이어 온갖 경기를 휩쓸었다. 중학교 때 소년체전에 달리기 선수로 출전했다. 비록 군대 가서 행군 때 픽픽 나가떨어지는 동지들을 업고 가야 했고, 설악산 등반 때는 배낭을 죄다 둘러메야 하는 불상사(?)를 겪기는 했지만, 그러니까 그의 몸적 인내력은 정신적 힘을 키워 주는 뿌리가 되었다.    

  그도 누구나처럼 고등학교 시절을 미몽의 시대로 보냈다.
저 혼자 큰 것마냥 부모를 우습게 여기거나 슬슬 무시했고, 온 세상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으스댔으며,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고 덤볐고, 사랑하는 감정에 치여 유치찬란해지기도 했다. 그 시절도 잠깐 어지러운 꿈으로 끝나고 80년대에 이오덕 선생님과 함께 글쓰기 운동을 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며 찬찬히 성찰해 갔다. 글 쓰는 일은 곧 자신의 삶에서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가리는 일에 다름 아니며, ‘날 항상 진실 속에 세워둘 수 있는가’를 묻는 작업이었다. 글쓰기의 의미, 글쓰기의 효과, 글쓰기의 믿음을 얻고 난 후 그는 교육적 의미가 큰 논술로 접어들었다.

  공자는 ‘서른에는 가려서 사귀어라’고 말씀하셨다. 이때가 되면 자기만의 코드로 관계와 우정을 맺게 되는데 곧 진정성을 볼 수 있는 힘이 갖추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만 먹는다고 그런 힘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수와 허점투성이의 자신을 발견하고 부족한 점을 찾아냈을 때 아, 이제 뭘 해야 하는지를 알아 자신을 뿌듯하게 만들고 나서야 생기는 법이다. 논술은 내면바닥에 있는 진정성을 끌어올리는 공부인데, 진정성만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에 다가갈 수 있는 힘이 되며, 그러려면 끝없이 자신을 섬세하게 살피고 내 안과 밖을 연결해 가며 자신을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여타 글쓰기와 달리 논술은 아이를 가르치는 교육적 의미가 크므로 논술을 가르치는 사람은 먼저 진정성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논술에 대한 그의 태도는 보석처럼 빛난다.  

  요즘 아이들은 지식까지도 쇼핑의 방식으로 얻으려 하는데, 필요한 만큼 돈으로 학원을 쇼핑하고 학습을 쇼핑하고 선생을 쇼핑한다. 쇼핑한 선생한테 지식을 받아 채우고 다시 다른 누군가를 되풀이 찾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불안한 쇼핑 중독자가 될 수밖에 없다. 지식은 판매의 대상일 수 없으며 더군다나 선생은 절대 쇼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아낼 때 아이는 비로소 그 느낌을 발전시킬 수 있다. 자기 안에 있는 천사의 마음을 좋아하려고 애쓰고 자기 안의 악마성에 고민하는 논지사 밑에서 아이는 진정과 감동을 전염 받게 되며 자신의 악마를 경계하고 천사를 따르려 한다. 논술은 돈이 오가는 형식을 빌미로 인간과 지식이 거래되는 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절대 그럴 수 없다. 이렇듯 논술에 대한 그의 선언은 칼날만큼 단호하다. &nb! sp;  

  예수가 우리의 의식을 좌우하는 이유는, 극도의 고행과 수행이라는 극기의 과정을 통해 내 안의 수성과 악마성을 거둬 내고 마침내 진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40일이라는 극기의 시간 속에서 인간의 욕망을 응축시켜 최소한의 삶으로 제한하고 영의 문제에 매달릴 때 ‘나란 존재가 무엇이며, 무얼 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묻게 되며 십자가에 자신을 내맡겨도 전혀 두렵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 예수의 이러한 진정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를 따르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노력하게 만든다. 인간이 지닌 신성과 악마 중 신성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는 곧 진리의 문제이다. 그래서 논술을 마주한 그의 진정은 차라리 종교적이다.

  자, 거듭나기 위해선 먼저 깨져야 한다. 자기를 정면으로 만나보는 일이 그 시작이다. 내 안의 진리 샘을 그냥 말려 버릴 셈인가. 그러면 안 된다고 그가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