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중등논술 22기 김정겸입니다.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마 그림이 안 그려지실 테지요?
그렇게 된 건 선생님과 우리 샘들 사이에선 당연하다고 봅니다.
지난 시간에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그러셨지요.
이 한겨울에 슬리퍼를 신고 다닌다고 다들 뭐란다고 말입니다.
첫눈에도 선생님은 소탈하다 못해 털털해 보였어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남에게 곁을 허하지 않고 탈탈 털어내듯
타인과 거리를 두려는 태도 혹은 성향이 보입니다.
글 쓰는 방식처럼 사람을 대한다고 여겨지기도 했는데,
아마도 선생님에게 배움이 있기 전에 선생님의 글을 더 먼저
더 많이 읽었던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 참, 선생님은 이런 글 따위 관심이 없을 거야 싶은데도  
떠들려니 좀 우습습니다. 그런데 내 수작은 이렇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과 나의 배움이 행여 어긋지지나 않았을까
확인하고 싶은 마음 탓에 생각을 찍어내기로 한 건데 말입니다.
글이나 혹은 말을 통해 안에서 밖으로 생각을
제대로 내보내는 일이 좀처럼 수월한 일이 아니니
엉뚱해지지 않을까 저어되긴 합니다.      

먼저 선생님한테 많은 것을 배웠음에도 수고하셨다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한테 배우는 내내 재수생처럼 실패한 그간의 공부를
되작거리며 진지하게 학습에 몰두했지만
선생님의 다변 속에 익사한 형국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이 거의 일방적으로 하역하듯 쏟아낸 묵직한 지식들을
받아 안고 힘겨웠던 데에는 그 지식을 올곧이 받아들일 만한
요령도 재량도 부실한 내 자신이 문제였지요.
첨엔 음, 논술 한가운데로 쏠려 들어가는군 싶어 다소 흥분했고
하지만 갈수록 소용의 거처도 모르는 채 속기사처럼 받아 적은
내용을 내 머릿속으로 옮겨놓지 못하고 낑낑거렸으며,
이쯤해서 선생님한테 나도 총을 한방 맞아야 했습니다.
‘그냥’ 학습을 했으니 마땅히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소유 방식의 학습’이었던 거지요.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선생님은 한방 근사하게 쏘았습니다.
지난 일주일 명언집보다 더 진도가 안 나가는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서 내 행복점수를 내느라 고심했고  
당연한 결과겠지만 무한한 제로에 가까울 밖에 없었음에도
‘사랑의 이름으로’에 후한 점수를 주고 여유작작했습니다.
선생님은 짐짓 놀리듯 행복은 나열될 수 없고
하나만 있어도 행복하고 하나만 빠져도 불행한 법이며
더군다나 그 사랑조차도 ‘가짜’ 아니냐고 되물었지요.    
행복항목 낱낱은 뜻 없고 굳이 의미를 찾자고
대든다면 불행의 근원이라는 식의 풀이였는데,
일주일 내내, 수업 시간 내내 골머리를 짜내 만든 행복의 항목과
점수를 들여다본 선생님이 이게 무슨 성이냐고 우리의 행복한
모래성을 가차 없이 부셔버리는 바람에 난 아주 놀랐던 겁니다.  
지금껏 해온 것이 쓰잘때기 없는 짓이 되어 버렸고
‘똥개 훈련시키듯’ 했으니 허탈하고 억울하고 뭐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몸소 체험시키려고 그랬겠지, 마음을 달리 먹고 보니
비로소 다시 원점에 돌아와선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간 논술을 공부하는 내내 확신했다고 여기는 순간 텅 비어 버리고
앞으로 한발 나갔지 싶은 찰나에 뒤가 켕기고 했는데,  
저번 시간에는 이러한 논술에 대한 나의 의구심을 지질러 버리듯
선생님이 던진 마지막 말을 주문 외듯 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행동을 규정하는 구조를 직시해라.”
“모든 건 연관되어 있다.”
“사소한 것에 관심을 기울여라.”
“극단적인 판단과 확실한 판단을 구별하라. 진리란 잠정적인 것이다.”
이 말조차도 속박이 아니냐 다시 의구심이 들지만
이러한 방편에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진리는 뜬구름'일 거라고 믿음을 키우겠습니다.  
  
선생님,
그간 선생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짐작 안 가지만
어린 제자들과는 달리 늙은 학생들은 어떤지를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으실 테니까
잘 헤아려서 더 깊은 가르침을 주셔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겨울바람이 차가우니까 슬리퍼 말고 따뜻한 겨울 신을
신는다면 잠깐이지만 발도 좋아라하고 보는 이도 좋아할 터인데
주제 넘는가요. 음...
암튼 몸 건강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