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교육현장’ 저도 국민학교 다닐 때 참 열심히 외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얼마나 자주 그리고, 땀나게 외었던지 지금도 귀에 쟁쟁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20년도 훌쩍 뛰어넘은 그 시절, 우리들에게 낯익었던 몇 개의 풍경과 소리가 생각나는군요.

검정 교복에  단발머리, 교련복에 빡빡 머리를 밀고 다니던 남학생들,
싸이렌 소리에 일제히 멈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던 사람들의 모습,
아침마다 동네가 떠나가라 울려 퍼지던 새마을 노래 소리......
또 하나! 조회시간마다 귀가 닳도록 스피커에서 나오던 국민교육헌장의 목소리도!
중년을 바라보는 제 나이의 또래의 사람들에게 아마 이런 풍경들은 어느새 추억이 되어 남아 있겠지요.

그런데 제가 이것을 추억으로만 여긴다면 얼마나 무식한 것일까요?
그래서 좀 용기를 내서 제가 아는 선에서 국민교육 헌장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써봅니다. 좀 무식해도 이해해 주세요. 저는 사실 좀 똑똑한 논술 선생님이 되고 싶은데 아직 그릇이 작아 공부만 하고 있거든요. 게다가 저는 다른 선생님들처럼 근거를 가지고 조목조목 말하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해오름의 이 방이 자기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곳이라면 제가 좀 용기를 내서 얘기해도 되겠지요?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게 요.
왜 동전을 보면 양면이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나무가 있으면 숲이 있고 또 숲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나무가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동전을 볼 때 그 한 면만 본다면 그 동전을 다 본 것이 아니지요. 동전은 양면이 있어야 동전이지 어느 한 쪽만 조각되어 있다면 불량주화 많지요? 마찬가지로 나무를 보았다면 숲도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나무의 아름다움에 눈이 부셔 숲이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요?
개인의 기호와 달리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할 때 저는 주관적 관념이나 기호보다 단연 앞서야 하는 게 진실을 보는 눈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진실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바로 이성이란 놈이겠지요. 매의 눈과 같은 냉철한 이성 말입니다.

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70년대는 우리나라는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체제하의 개발 도상국가였지요. 그리고 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한 노동집약적 산업의 발달을 토대로 급격한 발전이 계속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때문에 지배층에서는 국민을 하나로 모아 일사단결체제로 나가기 위한 명분과 훈육이 절실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날마다 우리는 새마을 운동 노래를 부르며 앞마당을 쓸고, 모두 한결같이 경제 역군이 되기 위해 군대식 제복을 입고 주입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는 튀고 창의적인 어른 1명보다는 산술적 GNP를 높이기 위한 다수의 경제역군이 더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자율적이기보다는 획일적이었고 주입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회 각 분야의 의사전달 체제도 상하전달식이었습니다. 나라에서 이것을 하라 하면 국민들은 말없이 해야 했고 왜 그래야하 하는지도 나라에서 친절하게 써서 알려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당시 많은 민초들은 산업역군이 되기 위해 그야말로 개미처럼 일했습니다.(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부터 빈부격차가 커지고 우리나라에 재벌이 더욱 기승을 부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것도 생각해봐야겠지요?)
혹시 우리는 이런 착하고 성실한(?)어른으로 자라기 위해 국민학교 교실에 앉아 국민교육훈장을 달달 외우고 또 외었던 것은 아닐까요? 우수운 얘기지만 무식한 저는 어른이 다 될 무렵까지 국기나 국가처럼 다른 나라에도 국민교육헌장이 모두 있는 줄 알았답니다. 그리고 나서 지금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국민교육헌장은 혹 국민을 정신적으로 훈육하기 위한 고난도의 도구가 아니었을까하는...

물론 국민교육헌장은 문구상으로는 훌륭합니다. 또 누구라도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과 ‘좋은 것’은 다르다고 봅니다. 제가 알기로 좋은 것에 대해서는 근거와 이유를 대어 주장을 할 수 있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긴 이유를 찾고 근거를 대다 보면 공허해 집니다. 저는 글쓰기 선생인지라 글로 예를 들어보고 싶은데요. ‘좋은 것’에 대해서는 왜 좋은지 이유와 근거를 들어 ‘논술문’으로 쓸 수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보다는  생활글(또는 수필)의 형식을 빌렸을 때 그 글의 재미와 감동이 살지 않을까 합니다.


또 하나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어서 좋은 일도 있지만 이런 일도 생긴다고 합니다. 국민들이 ‘깜빡증’ 증세가 있다는 것이지요. 사계절이 수시로 바뀌는 곳에서 살다보니 무엇이든 잘 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경제가 어려울 때는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만들었는지 있고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는 다는 거예요, 경제가 어려우면 경제를 살린 대통령을 그리워하고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치가 우왕좌왕 할 때는 대통령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시절을 그리워 한다나요?
그런데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 분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 교육을 받고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대통령이 되셨습니다. 그리곤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교복을 입히고 머리를 자르고 획일적 교육을 시키며 녹음기처럼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했습니다. 물론 그 헌장을 국민의 단합된 힘과 민족적 자부심을 키워주기 위해 최고의 학자들이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헌장이라도 그것을 어떻게 국민이 느끼도록 하느냐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주입식 암기식으로 막무가내로 외운다고 그것이 그 사람 몸속에 체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70 80년대는 누가 뭐래도 상하행식 정치논리가 만연하던 시대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문구가 좋다고 조사에서 1위로 나왔다고 해서 굉장한 헌장이고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굳이 산술적 통계가 아니더라도 대다수 국민이 마음으로 따르고 존경할 수 있는 대통령이 진정 우리에게 있었나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