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의 소변기 <샘>이 예술이냐 아니냐 에 대한 답답한 마음에 진중권씨의 <미학오디세이 2권 >뒤샹 편을 읽어 보았습니다.

진중권씨는 예술을 정의 내리려 하지 말라고 결론 짓더군요. 예술은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고 정의 내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술은 이런 거야 라고 정의 내리는 그 순간 그런 정의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것은 예술의 세계에서 쫒겨 나게 되고, 그것은 예술 세계를 닫힌 세계로 만들며, 새로운 예술적 실험에 대해 억압 기재화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뒤샹의 소변기는 당연히 예술이 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소변기가 예술이 되나요? 그건 아니지요. 예술이 되는 소재는 제한이 없지만 예술로 인정 받는 것은 예술계 - 화가, 평론가 등등 - 의 인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예술계의 인정은 어떻게 내려 질까요?

그것은 예술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 전재 조건입니다. 즉, 우리가 흔히 예술이라고 생각해온 기존의 예술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에 중심을 두었다면 현대 예술은 '코드'가 주된 예술의 기준이 된다고 합니다. 새로이 등장한 예술이 지닌 어떤 '코드'를 예술계가 인정하게 되면 그것은 곧 예술로 인정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뒤샹의 소변기도 그런 점에서 예술에 대한 새로운 '코드'를 표현했기에 예술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처음 뒤샹의 소변기는 전시회에서 커튼이 쳐진 체 아무에게도 공개되지 않았고 예술계의 인정도 못받았다고 합니다. 다만 뒤샹이 너무도 유명한 거물이라 대접 차원에서 전시회에 비록 커튼 뒤이기는 하지만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라더군요.

뒤샹은 '다다이즘'의 핵심 맴버로 활동했으며, 이 학파는 모든 것의 부정, 뒤엎기, 새로운 세계 창출을 목표로 하는 1900년대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움직임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뒤샹의 공로로 인해 초현실주의는 꽃을 피웠고, 우리나라의 예술 흐름 또한 이런 추세임을 조금 전 <KBS 문화가 산책>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소재는 더욱 다양해지고, 예술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코드를 담은 작품 전시회가 주된 흐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 예술의 주된 기준은 코드이며, 뒤샹이 살던 시대에는 예술을 코드로 보는 관습이 아직 생겨나지 않아 예술로 인정 받지 못했지만 현대에 와서 코드로서 예술의 진위를 판단하게 되면서 뒤샹의 소변기는 당당히 예술로 인정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실제로 뒤샹의 1917년 작품 <샘>을 표현했던 소변기는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어디 쓰레기통에 쳐 박혔을지도 모르지요. "이게 무슨 예술이야? 라는 푸념과 함께 말입니다 - 우리가 사진으로 보는 작품은 뒤에 뒤샹이 몇 개를 더 만든 것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하긴 수 천 개인들 못 만들겠습니까?)  

코드를 읽어 내야 하다니, 현대 예술 세계가 더욱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