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에게 희망을
                                -나비 이야기

        이 책을 토론하며 저는 내내 예수의 부활을 생각했습니다. 종교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진 않지만 제 속의 큰 부분이기에 그냥 편하게 드러내고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이해해 주세요.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의 부활 부분이 없다면 기독교라는 종교가 존재 할 수 없었으리라고 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삶의 완성이고 신앙의 끝입니다. 희망이 없는 종교를 누가 믿겠습니까.
        많은 책과 스승들에게서 우리는 이상과 행복을 배웠고 마땅히 그 방향으로 살아야 바람직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당에선 예수의 부활과 우리가 부활할 것을 진정 믿느냐고 물어 봅니다. 정답은 ‘예.’지요.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고 기본적인 교리이기에 건성으로 대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지만 정말 믿느냐고 물어보면 제게는 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의 부활 이전에 예수는 무덤에서 죽음이 되어 지내야만 했던 과정이 있었습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된 후의 세상은 시간도 단계도 초월한 아름다운 세상이겠지만 그 전에 고치의 상태는 철저하게 시간의 지배를 받는 인내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예수는 모든 걸 알고 있었기에 즉 의심하지 않고 부활을 기다렸기에 그 무덤의 시간을 견디며 때를 기다렸겠지요. 하지만 애벌레는 정말 나비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까? 고치 속에서 울면서 확신하지 못하고 혼돈 속에서 괴로워한 적 은 없었을까? 사람들은 현대에 있어서 순교란 조선 말기 우리 조상들처럼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서의 순교라고 말들 합니다.  종교와 사상의 자유가 모두 보장되어 있지만 사실은 물질의 논리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세상에 살기에 그런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은 물신을 거부하는 삶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입니다. 또 물질이 지배하는 삶에서 부활에 이르는 과정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당연하고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백프로의 확신이 없습니다. 확신도 없는데 고치가 된다는 건 너무나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첫째 나비의 행복을 미루고 그 밑의 단계, 고치 속에서도 나름대로 행복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나비가 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만 설사 안된다 하더라도 나비로 가는 길은 다른 길보다 행복했다, 그리고 고치로서도 행복한 점은 있었다는 말을 그렇게 살아본 사람이 자세히 좀 이야기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조금은 용기를 내어 그 길을 들여다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약한 소시만의 모습인지 나약한 지식인지 저도 알지만 이게 제 솔직한 마음 입니다. 찬 물에 발을 넣기 전에 주섬주섬 먼저 걸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그런 약한 사람이 곧 저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