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사와 함께 배우는 목공예 교실

한재용 | 맑은샘 공부방 교사
*이 글은 지난 6월부터 7월 14일까지 해오름 평생교육원에서 진행되었던 박준성 선생님의 '목공예 문화사 수업'에 대한 돌아보기 글입니다.

나무에 대한 추억
내가 태어난 집은 나무가 많은 언덕아래 있었다. 서리 내릴 무렵, 할머니는 고욤을 작은 단지에 자근자근 눌러 담아 광에 들여놓으셨다. 겨울이 깊어지면 할머니는 항아리를 열어서 잘 익은 고욤을 한 종지씩 퍼주셨다. 나무에 달렸을 때는 그렇게도 떫더니 쫀득하고 달콤한 맛으로 변한 게 신기했었다. 지금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길이 없는 물앵두나무도 있었다. 열매가 다 익어도 초록의 말간 물앵두 맛은 뭐라 표현할 길이 없다. 특별히 맛있어서가 아니라 맛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봄이 돌아오면 앞산에 환하게 벚나무가 불을 밝힌 듯 훤했다.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오면 그 밝고 훤한 눈부심에 자꾸 바라보게 되던 벚나무에 꽃잎이 지고 버찌가 익을 때면 동네 아이들과 나는 나무 밑에서 시커먼 입을 하고 놀았다.
하루 종일 놀다가 해가 저물어 집에 늦게 돌아가면 꾸중을 들을 까봐 집 앞 호두나무에 몸을 숨기고 집안 눈치를 살폈다. 바쁜 어머니는 '이 눔의 지지배' 어쩌고 하며 부엌을 들락거리신다. 머쓱한 얼굴로 실실 집으로 기듯 들어가면 별로 혼나지도 않는데 지레 나만 겁을 먹고 제발이 저렸던 게다.
앵두나무는 제법 몇 그루 될 만큼 많았는데, 어느 일요일 부모님이 교회가신 틈에 나는 동네 아이들을 불러 앵두잔치를 벌였다. 잎새 뒤에 빨개진 앵두를 따는 재미에, 동무에게 선심을 쓰는 우쭐거림에 그 많은 나무에 달린 앵두를 다 따먹어버렸다. 그 날은 어른들께 많이 혼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 집에서 분가를 하여 아래동네로 이사를 하셨다. 이사 간 사이, 집 우물가에는 커다란 향나무가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 집 샘물을 마실 때마다 물맛이 좋은 이유가 다 이 나무 때문이라며 잘생긴 그 향나무를 칭찬했다. 한 일 년쯤 지났을까 우리에게 집을 판 전 주인이 그 나무만은 판 게 아니라며 일꾼들을 시켜 마당가의 그 큰 나무를 파 가버렸다. 나무는 멀리 가지 않고 그 집 마당가에 심겨졌는데 나는 그 나무가 보고 싶어 자주 그 집 앞으로 가서 그 나무를 자주 지켜보았다. 너무 큰 나무를 옮겨 심은 탓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름다운 그 향나무는 시들시들 초록빛 잎이 누렇게 변하며 말라 죽어버렸다. 나는 내가 앓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그 나무를 파간 그 고약한 할머니가 너무 미웠다. 얼마나 미우냐면 동화에 마귀할머니가 나오면 그 할머니 얼굴이 겹쳐지며 떠올랐을 정도이다. 아버지는 그 샘가에 새 향나무를 심으셨다. 그리고 뒤란에 미루나무 세 그루를 심어주셨다. 첫째 나무는 내 나무, 둘째 나무는 내 바로 밑의 남동생, 그리고 마지막은 막내 동생의 나무였다. 미루나무는 참 잘도 자랐다. 일 년 사이에 어른 한 키도 넘게 자라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먼발치에서도 그 나무가 보여 반가웠다. 나무가 보이면 집에 다 온 것이다. 어른들이 밭일을 나가 텅 빈 집안에  혼자 있어도 나무가 나를 지켜 주는 것 같아 심심하지 않았다. 솥에 있는 고구마를 꺼내먹고 마루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흥얼거렸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 걸려있네~~"
목공예수업에 참석한 사람들의 가슴에도 나무는 푸르게 살아있었다.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고향마을 정자나무로, 시원한 바람을 불어 보내는 숲으로, 어린 가슴을 설레게 하는 과수나무로, 목재가 되어 쓸모 있는 물건을 만들던 기억으로…….
첫 시간 목공 수업은 이렇게 마음에 간직한 나무에 대한 추억을 불러들이며 시작되었다.

나뭇가지에서 새가 태어나다.
"이 나무에서 새가 나옵니다."
선생님이 주신 나뭇가지는 Y자형, 굵기는 내 엄지보다 조금 굵다. '새총을 만들라면 모를까 이 나무로 어떻게 새를 빚지?'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가방에서 새를 꺼내 보여주신다.
새는 작고 앙증스러운 크기에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하며 다소곳이 동그란 받침대 위에 앉아있다. "아! 예뻐라". 모두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진다.
새를 깎는 도구는 주변에서 흔히 보는 등산용 주머니칼이다. 큰칼, 작은칼이 있고 병따개 깡통따개도 있고 작은 톱이 달려 있어 신기하다. 난생처음 가져보는 빨간 주머니칼이 썩 마음에 든다.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어느 부분이 새가 될까?' 눈짐작을 해봐도 도통 어디를 깎으면 될지 선뜻 칼을 댈 수가 없다. 선생님의 손놀림을 따라 새를 만들기 시작했다. 머리가 되는 굵은 부분의 양쪽을 깎아 세모로 만든다. 그것을 다시 둥글게 다듬고 앞부분을 깎아내어 새의 부리를 깎아 낸다. 서툰 손길로 이리 저리 다듬어보지만 매끈한 곡선을 찾아낼 수 없다. 머리를 깎으면 목이 뭉툭해지고 뭉툭한 목을 깎아 내면 머리모양이 망가졌다.
전체 윤곽을 먼저 찾아보기로 했다. S자 모양 선 두 개가 조화를 이루도록 곡선을 찾아내며 다듬었다. 검은색 껍질은 새의 몸통이나 날개의 느낌이 나도록 남겨두고 반대편 가지를 깎으니 꼬리를 치켜올린 새의 모습이 드러난다. 밑에 남은 가지는 다리가 되는데 미끈한 다리를 만들기 위해, 힘을 주어 나무의 결을 과감하게 깎아냈다.
목이 좀 긴 편이고 부리모양이 날렵하진 않지만, 가까스로 나의 손에서 매끈한 새 한 마리가 탄생했다. 새 한 마리를 더 만들어오는 것이 숙제다. 새 만드는 재미에 새를 두 마리 더 만들었다. 머리에 온통 새 만드는 생각이 가득 차서 여행길에도 칼을 꺼내 들었더니 옆 사람들이 말린다. 가지가 갈라진 나무를 보기만 하면 그 가지를 뚝 잘라 새를 새기고픈 욕심이 불끈 솟는다. 당구를 배우면 사람의 머리가 공으로 보인다더니 목공을 배우니 길가에 버려진 나무토막이 목공예 꺼리로 보인다.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우주 나무에는 새가 나타나 있고,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면 세 발 달린 까마귀가 나온다. 고대 사람들에게 새는 달과 해와 별을 연결시키는 전령사였다.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는 아들에게 비둘기를 날려보내 새의 부리에 곡식을 담아 보냈다. 이 시기에 새는 곡령이었으며 곡신이었다고 한다. 백제금동향로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다. 새는 왕을 상징한다. 가야토기에는 새 모양 토기가 가장 많다.
새에 대한 신앙은 솟대로 이어져 내려온다. 선생님의 설명은 솟대사진으로 이어졌다. 솟대는 북녘 땅보다는 남쪽 땅에 많이 발견된다. 한해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기원이나 염원을 담아 마을에서 인재가 나기를 바라는 소원들이 솟대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졌다.
이제는 사람들이 솟대를 세우지 않는다. 더 이상 새가 신앙의 대상이 되지 않는 까닭일 게다.

그렇다면 나에게 새는 무엇일까? 데미안을 읽을 무렵, 새는 알을 까고 나오는 몸부림이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지만, 괜시리 마음이 시리고 아프거나 잠이 오지 않으면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는 구절을 일기장에 적고 또 적으며 공감했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멋진 구절이 있는 스위프트의 갈매기 조나단을 읽으며 새로운 목마름을 느끼기도 했었지…. 대학교 때 한 선배는 황제 펭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생동안 단 하나의 알을 낳는다는 황제 펭귄,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찾아 헤매게 만들어준 말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 사십을 넘는 동안 더 이상 새를 떠올리지도 않았으며 삶의 지지부진한  자리에서 내게 맡겨진 수많은 짐들에 짓눌려 불평만 하고 살아온 터였다.

다시 새를 생각한다.
깨질듯이 아프거나 높이 날고픈 욕망은 사라지고 이제 하루하루 새롭게 시작하는 새날이 감사하니 아침이면 들려오는 새의 노래에 감사할 따름이다.  
새날을 노래하라 새여.

못생긴 장승
어린 나에게 장승은 두려움이었다. 고향마을 입구에 미륵이 있었고 그 옆에 장승이 있었다. 마을 중앙에 성황당도 있었는데 색색의 깃발이 새끼줄에 매달려 있는 그 공간은 감히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 금기의 공간이었다. 일제의 문화말살, 해방이후 근대화 정책에 장승에 대한 신앙은 미신이요, 뿌리뽑아야 할 악습이 되었다. 우리 문화를 다시 살리려는 작은 움직임에 힘입어 장승은 대학의 축제에서 부활했고 지금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국 도처에서 상업용 목적으로 쓰여지거나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으로 다시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선생님이 사진으로 보여주신 장승은 하나도 닮은꼴이 없으며 거칠고 못생기기 그지없었다. 그 중 나를 닮은 장승이 눈에 들어왔는데 퉁방울 눈에 들창코가 영판 내 얼굴인지라 사진 옆에 서니 한바탕 웃음꽃이 벌어졌다. 뛰어난 솜씨가 없어도 그냥 툭툭 다듬어서 해마다 새로운 장승을 세우던 그 사람들도 장승을 보며 그때마다 이렇게 웃었을까? 못생긴 장승 하나 깎는 것도 괜찮은 일인 것 같아 만만한 생각이 들었다.

깎을 장승은 30센티미터가 조금 안 되는 나뭇가지에 나무껍질을 벗겨 모양을 내는 장승이다. 주머니칼로 꼭꼭 눌러 새김을 내면 껍질이 벗겨져 나무의 하얀 속살과 진한 껍질이 대조를 이루며 무늬가 생긴다. 전통 문양을 새기기도 하고 꽃 한 송이를 새겨 넣은 동료도 있다.

과제는 웃고 있는 장승을 새기기. 칼을 이용하여 나무를 깊이 파내면 장승의 코와 입이 윤곽을 드러내는 조금 더 어려운 작업이다. 선생님이 나누어주신 나무에서 생강향이 난다. 공부방 아이들 앞에서 나무를 만지니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냄새를 맡으며 신기해한다.
"우리도 장승 깎아 볼래요."
"나무가 있어야 하는데?"
"산에 가서 구하면 되잖아요."
"빨리 가요."
아이들의 성화에 밀려 톱을 들고 산에 올라갔다. 그러나 마땅한 나무가 없다. 모기에 물려가며 산을 뒤졌으나 옹이가 많은 소나무가지 몇 개밖에 없다.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지 마른 단풍나무가 눈에 띄었다. 나무가 촘촘히 심겨져 있으니 밑에 있는 가지는 햇빛을 보지 못해 마른 것 같았다. 기쁘게 나무를 잘라 아이들 수만큼 잘랐다. 장승을 만들만큼 나무를 자르고 나니 새를 만들 가지도 서 너 개는 나온다. 이번에는 주머니칼이 있어야하는데 아쉬운 대로 부엌칼, 과일 깎는 칼을 다 들고 나온다. 그래,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  하는 거야. 이것을 본 1학년 아이들도 해보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이놈들에게 칼을 다루게 하기엔 조금 무리다 싶다. 급한 대로 아이들에게 밖에 나가 돌이나 시멘트벽에 대고 갈아보라고 시켰더니 밖으로 나가 한참 소식이 없다.
한 아이는 갈기를 포기했고 두 아이는 나름대로 열심히 갈아 나무의 지름을 반이나 갈아와 제법 입모양이 난다. 아이들은 그것을 들고 만족한 표정이다. 그 뒤로 틈만 나면 나뭇가지를 들고 들어와 공부방을 어지럽힌다. 조금 귀찮은 생각이 들지만 나 역시 나무토막을 자꾸 주워 들이는 판국이니 뭐라고 할 수도 없다.
장승을 깎고 나니 그 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던 장승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온다. 장승을 만나면 마치 오랜 동무를 만난 듯 반갑다. 계곡을 찾아가는데 길옆에 장승이 서있다. 반가움에 소리쳤다. "애들아 장승 봐라. 멋지지 않니?"

칼 손질하기
새와 장승은 주머니칼을 이용해 만들었으나 다음 작품은 조각도를 이용해 만드는 시간이다.  조각도를 사용하기에 앞서 선생님은 조각도를 손질하는 법을 한 차시에 걸쳐 알려 주셨다.  평도는 엄지와 중지로 손잡이를 잡은 다음 검지로 칼날을 지그시 누르며 앞뒤로 수평을 유지하며 사포에 갈아야 한다. 먼저 180방이나 200방으로 갈고, 날이 다 갈아지면 1000번 짜리 사포로 다듬어야 한다. 평도는 넓은 면을 깎아 내는 데 사용하니까 날의 한쪽이 치우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 환도는 파내거나 곡선을 깎아내는 칼인데 칼날의 양쪽 끝을 잡고 굴리면서 고르게 갈아낸다. 창칼(인도)은 모서리를 끊어 내거나 세밀한 부분을 표현하는 칼이다. 날이 수평을 이루도록 갈아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날을 살펴가며 칼을 가는데 도통 잘 갈아진 건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된다.  칼 갈기가 이토록 어려우면 조각 더 할 수 있을까? 칼 갈기가 목공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칼 손질이 안 되면 어디 가서 선생님께 목공예를 배웠노라고 말하지 말라는 말씀에 기가 죽는다. 칼을 일컬어 가장 순수하다고 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칼의 순수함? 이제까지 칼은 베이기 쉬운 물건쯤으로 생각하고 살았는데 순수함이라니…. 목공을 하면서 그 말이 가슴에 닿는다. 칼을 가지고 무엇인가 만들기 위해 칼질을 한다.  칼은 긋지 않은 어떤 선도 정확히 칼을 들이댄 만큼만 흔적을 남긴다. 칼. 베이기 쉬운, 그러나 아름다운 순수함, 솔직함. 그래서 두렵다. 칼을 가는 것은 순수함을 벼리는 과정이다. 아직도 내 칼날은 형편없이 무디지만 차츰 그 예리함을 찾아내겠지.

숟가락을 만들다
숟가락은 벚나무를 깎아서 만든다. 이제 본격적인 칼질에 들어간다. 나무는 큰 것과 작은 것 두 개인데 나무를 반으로 갈라 윷 모양이다. 처음에는 크기가 작은 나무로 찻숟가락을 만든다. 숟가락 모양을 나무에 그려 윤곽을 잡아놓고 머리 부분을 세모로 깎아내고 다시 둥글게 만들어 속을 파낸다. 속을 다 파내면 긴 손잡이 부분을 깎아낸다. 손잡이를 먼저 하지 않는 이유는 손잡이를 먼저 만들어 놓고 머리를 다듬으면 자칫 부러지기 쉬운 까닭이다. 선생님은 깎는 단계별로 본보기를 만들어 오셨기에 차근차근 따라하니 예쁜 수저가 나온다. 숟가락 밑 부분이 올록볼록한 것은 굵은 사포를 이용해 부드럽게 다듬었다. 이참에 집에 사용할 수저를 다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난다. 과제는 큰 수저를 완성해 오는 거다. 이제 제법 목공을 하는 재미가 솔솔 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수저의 머리 부분을 파는데 커다란 옹이가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옹이는 나무의 결도 이리저리 나있고 단단하기가 돌덩이 같았다. 끙끙거리며 옹이를 파내려 가는 데 이번에는 옹이가 세 갈래로 갈라져 틈이 벌어져 있었다. 이것을 파야하나? 파지 말아야하나? 만약에 팠는데 여전히 틈이 있다면? 갈라진 수저를 어디에 쓴단 말인가? 아이고 모르겠다. 수저 깎던 것을 집어치워 버렸다.
그러나, 식구들이 잠든 사이에 다시 수저 깎던 것을 집어 들었다. 나무에 있는 옹이가 아무리 단단해도 칼 만하랴. 서너 시간을 파니 다행히 나무의 바닥까지 갈라져 있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둥근 부분을 마무리지으려는데, 남아있던 옹이의 한 부분이 톡 튀어나가면서 바닥한쪽이 움푹 패여 버렸다. 전체 수저모양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아이고 데이고 힘들다….' 나무 수저를 내 손으로 장만하리란 야무진 꿈을 접고 시장에서 나무수저 다섯 벌을 샀다. 나무에 있는 옹이는 왜 생길까?
나무에는 새 가지를 내보낸 자리에 옹이가 들어있다. 혹시나 상처가 생긴 자리에도 옹이는 들어있다. 옹이는 나무보다 더 단단하다. 사람살이도 이런 것 아닐까? 아이들이 앓고 나면 한 뼘 부쩍 자라듯이 어려움을 만나면 더 단단해 지라고, 내 자리를 내어 주어 새로운 생명이 자랄 자리를 마련해주라고, 속이 갈라져 아플지라도 그렇게 하라고 아픔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내가 지닌 해묵은 상처에는 어떤 단단함이 배어 있을까? 작은 나무토막에 있는 옹이를 깎아 내고 반쯤 도사가 되어 가는 것 같다. 나무에게 또 배웠다.

뱃노래를 부르며 배를 만들다.
배를 만들기에 앞서 선생님은 백두대간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기위해 일본 학자가 14개월만에 만들었다는 우리나라 지도. 백두대간을 산맥으로 나눈 것은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한 구분이었다고 한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길 또한 산을 넘지 않으니 관악산에서 북한산을 강을 건너지 않고도 갈 수 있다고 하셨다. 우리 겨레가 물길을 따라 삶을 이어가는 그 시절에 물을 건너게 한 수많은 배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울주군에 있는 암각화에도, 조선시대의 풍속화에도 그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그런 설명을 들으며 나는 자유로운 배 모양을 떠올렸으나 선생님은 두 개의 종지모양이 붙어있는 배 모양을 만들라고 하셨다. 배를 만들 재료는 '마디카'라는 수입나무인데 나무의 결이 부드러워 벚나무 옹이에 혼쭐이 난 나에게는 싱겁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무의 양쪽 끝을 날씬하게  다듬고 배 안쪽을 둥글게 파내며 모양을 다듬는 과정이다.
지난 시간, 배를 만드는 시간에 부를 뱃노래를 한 자락씩 준비해오라 하시더니 노래를 부르라 하신다. 누군가 노래를 시작한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간다~~" 가슴속에서 노래가 치솟아 오른다. "그 누가 탄 배일까 외로운 저배 그 누굴 기다리는 여윈 손길인가 아무도 없어라 텅 빈 이 바닷가 물결은 사납게 출렁거리는데 바람아 쳐라. 물결아 일어라. 내 작은 조각배 띄워 볼란다. 바람아 쳐라. 물결아 일어라. 내 작은 조각배 띄워 볼란다." 잊고 있던 노래다. 배를 만들며 이 노래가 떠올랐다. 앞이 막막할 때 부르던 노래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답답함에 한잔 마시고 고래고래 소리 질러 부르던 노래다. 사실 그렇게 불러야 하는데 강의실에서 소리를 죽여 가며 불렀다.
그 다음날 나는 앓아누웠다. 아픈 시절 부르던 노래가 아픔을 불러낸 까닭인가? 10시간 가까이 수저를 깎아낸 고됨이었을까? 겨우겨우 일상을 유지하며 잠을 자고 또 자고, 바쁜 일상에서 목공예에 대한 욕심을 부렸음을 인정하며, 하고 싶은 일을 참지 못하는 자신을 들여다보며 앓았다. 앓지 않으면 쉴 줄도 모르는 바보 같은 나를 스스로 꾸짖으며 쉬었다.
엽서꽂이와 촛대
한 뼘 정도 되는 나무를 받았다. 나무는 '마디카'. 엽서 꽂이는 꾸민 듯 안 꾸민 모습으로 만들어야 한다. 엽서꽂이에 들어가는 문양이 화려하면 엽서로 향하는 시선을 엽서꽂이로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문양을 너무 선명하게 새겨서 사포로 많이 갈아야 했다. 그림자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선이 지워질 때까지 갈았다. 고운 사포로 마무리를 하고 엽서가 들어갈 자리에 톱으로 칼집을 내면 엽서꽂이가 완성된다. 아이들과 산에서 풀잎 장식을 한 뒤 찍은 사진을 넣고 보니, 자연 속에서 찍은 사진과 엽서꽂이가 잘 어울린다. 새 조각과 엽서를 한곳에 놓으니 보기 좋다. 다음, 촛대를 만들었다. 배를 만들던 나무와 같은 크기의 나무인데 선생님이 가지고 오신 촛대는 꽃잎을 닮았다. 나무에서 어떻게 저런 고운 선이 나올까? 나는 아직 다다르지 못하겠다. 사진을 보며 모양을 흉내내기에 급급할 뿐.

살짝 미친짓
어느 날, 초 받침대 만들 나무를 찾으러 산에 올라갔다. 단풍나무 마른 가지를 찾아내어 톱질을 하는데 산에 운동하는 사람들이 먼발치에서 나를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쳐다보는 눈길이 따가워 나는 "지금 나 때문에 그러세요?" 하고 물었다. 한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되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나무를 자르면 안 되는데 내가 자르니까 화를 내는 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는 다시 소리 질렀다. "지금 이 나무 가지는 병이 들었어요. 마른 가지를 잘라내면 나무가 잘 자라거든요." 그러나 상대방은 더 성이 나서 소리친다. "아 그런데 왜 당신이 그 나무를 잘라요. 구청이나 동사무소에서 하게 놓아둘 일이지." 사람들은 자꾸 모여들었고 나는 범법자가 되어 그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모양새가 되었다. 병든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도 되는지 안 되는지에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다. 단지 관의 허락 없이 나무를 자른다는 사실에 주목할 뿐이었다.
얼굴이 벌개 진 나는 사람들의 눈총을 뒤로하고 주섬주섬 나뭇가지를 챙겨 산을 내려왔다. '내가 정녕 나무에 미친것은 아닌가?'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살짝 미치면 인생이 즐겁다고 했던가? 장마가 지나 마을 행사에 쓸 나무를 구하러 다시 산에 올랐다. 미루나무 잘린 가지와 참나무 가지를 주워 내려오는데 따라갔던 어린이가 종알종알 떠든다.
"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참 많이도 만드네. 나무, 도장, 새, 장승…"
"정말 그러네!" 하고 맞장구를 치며 내려오는 길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세상에 있는 모든 나무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구나.'
'이 아이의 마음속에도 시들지 않는 푸른 나무 한 그루쯤 자라겠구나!'

심화과정을 기다리며
함께 목공예수업을 받는 동료 선생님은 나이 들어 할 일을 찾았노라 기뻐하셨다. 나는 내 손에 믿음이 생겼다고나 할까? 무슨 일을 해도 서툴고 둔감한 손이었는데 목공에서는 남에게 드러내어 보여주기엔 부끄럽지만, 나 혼자 보며 즐길만한 것들을 만들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가을에는 연꽃문양을 새길 거라고 하셨다. 가을을 기다릴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가르침과 배움이란 자아와 자아가 만나는 과정이라는 걸 온전히 느끼게 해 주신 박준성 선생님, 문화사를 곁들여주신 부분도 좋았지만 물질에도 정신이 깃드는 것인지, 모두 일곱 번의 수업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손을 놀리는 참 기쁨을 누렸습니다. 여름 내내 건강하시고 가을에 기쁜 얼굴로 만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