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교수들의 '학문의 자유'를 개탄함

[정윤수 칼럼] 진정 짜고치는 고스톱판임을 모르는가 /오마이뉴스


고교 2학년 때 일이다. 돌이켜보면 작은 '추억'이지만 그때는 매우 참담했다. 중간고사가 끝난 뒤, 모처럼의 여유였으므로 문예 동아리의 독서 토론회가 열렸다. 김승옥이었던가 아니면 이청준? 아무튼 빛나는 단편을 읽고 서로 토론을 하는 즐거운 시간. 그러나 문제는 그 장소가 '학교'였다는 점이었다. 카페나 빵집이나 교회나 뒷동산이었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텐데 '학생들이 학교에서 책을 읽다니', 큰 일 날 일이었고 실제로 큰 일이 났다.

중간 고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며칠 동안 야간자율 학습도 없었는데 그래서 교실이 텅 비어 있었고, 문예 동아리의 열 댓 명은 과자와 음료수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모처럼 책을 읽으며(그것도 짧은 소설을) 저녁 한나절을 보낼 뿐이었는데, 교감 선생님이 들이닥쳤다. 아니 들이닥쳤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상황. 교감 선생님 뒤에는 교련 선생님이 커다란 몽둥이와 함께 들어오셨는데, 정말 그 어마어마한 몽둥이가 선생님을 데리고 온 것 같은 착시 현상마저 느낄 정도로 압도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뭉둥이 세례.

이유는 달리 없었다. 그 무렵이 전두환 통치 시절이라서 학생들이 밤에 모이는 것을 초동 진압한 것일까. 그것은 아니었다. 난세와 청소년의 미래를 고려할 정도로 사려깊은 학교는 아니었다. 오로지 이유는 단 하나. 교련 선생님의 몽둥이 세례 속에서 교감 선생님이 초동 진압의 이유를 분명하게 밝혔다.

"도대체 학생들이 학교에서 책이나 읽고 노닥거리다니 이래서 어디 대학이라도 가겠어?"

학생들이 학교에서 책을 읽으면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야 하는 기이한 시절, 그 찰과상으로 나와 내 친구들은 학칙의 규제를 받았다. 그럼에도 친구들 중에는 한 둘이 서울대를 가기도 하고, 몇몇은 서울소재 대학을 갔으며, 또 몇몇은 음악 다방 DJ로 출판사 허드렛일꾼으로, 또 인천의 노동판으로 가기도 했다.

참담한 추억
그로부터 무엇이 얼마나 바뀌었는가.

오늘 아침 일찍 배달된 신문은 연거푸 정부와 서울대의 일합을 중계하고 있다. 분석과 논평과 사설이 줄을 잇고 있으나 오히려 실질적인 위력은 신문 사이의 전단지들이다. '대치동 명강사', '서울대 직행', '2008 본고사형 논술 철저 대비', '초등 4학년이면 늦는다' 등등.

거시적 교육 담론의 논쟁은 마주 달리는 기차의 형국이고, 미시적인 일상의 교육은 심리적 강박과 혼란이 가중되는 판이다. 이 논쟁에서도 가당찮은 헛말들이 들리는데, 학력 콤플렉스니 패자 콤플렉스니 하는 어리석은 말들은 굳이 언급할 필요성도 못 느끼는 바이거니와, 새삼 지난 시절의 이른바 '엘리트 교육'이 그 인성과 감수성의 측면에서 얼마나 이기적이며 동시에 파괴적이었는가를 명백하게 보여줄 따름이다.

이번 논쟁의 총괄과 그 세목에 대하여 많은 보도가 있었고 논평이 있었으므로 반복하지 않겠다. 두루 검토가 필요한 사항이건대 다만 '논술'에 대한 부연은 필요하겠다.

논술이 '쓰기'이지만 작문이 아니고, 그것이 '국문과'나 '사회학과'의 일이 아니라 학문 전체의 일임은 자명한 사실이며, 동시에 분류 학문의 좁은 틀이 아니라 통합적인 사고와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원론으로서 충분히 값지다. 그리고 실은 이 지점에서 모든 논쟁은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요컨대 왜 논술 시험을 보는가.

논술은 지난 산업화 시대의 교육, 그러니까 잘게 나뉘어진 분류 학문의 틀에서 흡사 통조림이나 붕어빵처럼 찍어내는 암기 위주의 교육으로는 이 복잡하고 다양한 세계를 이해하기 어렵고 또한 능동적으로 살아가기도 어려운 상황의 반영이다. 정치와 환경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법과 생태, 공학과 인간, 경제와 문화, 과학과 인권이(그리고 이 모든 것의 다양한 조합들이) 서로 다른 영역의 치외법권이 아님은 오늘의 자명한 현실이다. 이미 고 1 때부터 문과/이과를 분리하여 자기 미래를 결정해야 했던 지난날의 '분과 학문'은 개인에게나 사회 전체에나 조금의 능동적 교육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판단이 논술이라는 실험으로 나타난 것이다.

일부의 우려대로 이것이 다시 '국영수' 실력을 좀더 치밀하게 확인하기 위한 시험으로 변질된다면, 이는 그 대학의 이른바 '학문의 자유'는 지켜질 지 몰라도 세상의 모든 것이 복잡하게 뒤얽히는 '국경없는' 미래에 아이들을 그저 방치하는 격이며, 그 흔하디 흔한 '경쟁력'조차 확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논술은 '국산사자음미실'을 뒤섞거나 그 위계를 강화 혹은 재구성하는 기능적 요소가 아니라 전혀 별개의 영역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논술이 글 잘 쓰는 학생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닌 것처럼, 영어나 수학의 재능을 선별하기 위한 '스파링 파트너' 역시 아니다.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논술의 중요성, 그것의 미래 교육적 가치가 너무나 크다. 논술은 세상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돕는 것이며 그 성찰의 깊이를 위하여 다양한 책을 읽고 토론할 수 있는 교육적 계기를 부여하는, 그야말로 미래의 아이들과 교육을 위한 안전핀이다.

논술은 죄가 없다

이 안전핀을 제거하려는 어떤 시도도 실패해야 한다. 이를테면 서울대의 각 전공 교수 20여 명이 참여했다는 '권장 도서 100권'. 필독도서추천위원회를 구성하여 200권을 선정했다는 연세대의 '필독 도서', 중앙도서관에서 목록을 작성했다고 하는 고려대 '권장 도서 목록'을 보라. 그 필독과 권장의 권위적 무게 속에서 과연 수많은 고전들이 어떻게 교육적으로 널리 읽히며 저마다의 토론과 성찰의 계기가 될 것인가.

지금처럼 서울대와 몇몇 대학이 '학문의 자유'라는 쉐도우 복싱을 하면서 본고사 혐의가 짙은 2008 논술 시험안을 밀어부친다면, 그야말로 위의 '권장과 필독' 도서들은 아주 거창한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으며, 그 고전의 저자들은 자신의 이름과 명저로 '학문의 자유'를 운운하는 교수들에 대하여 통탄해 마지 않을 것이다.

어느 대학교 철학과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4학년 기말 고사를 냈는데 그중 상당수가 입사 시험 공부로 토익에 열중하느라 플라톤의 '플'자도 읽어보지 않았다. 한글로 번역한 플라톤의 어느 대목을 읽고 자기 생각을 쓰라는 주문에 대하여 취업준비로 바쁜 학생들은 난감해했다. 그래서 교수는 비애의 묘안을 짜냈다. 영문으로 된 플라톤의 글을 주면서 번역하라는 시험을 다시 내고 학생들은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플라톤을 번역했다. 결과적으로 교수는 철학과 졸업생들에게 플라톤을 번역하라는 문제를 낸 것이며, 학생들은 플라톤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지만 영문 번역만큼은 어느 정도 해낸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처지를 십분 이해한 이 묘안이 이제 2008년 논술 시험으로 통하여 전국민이 짜고 치는 고스톱을 벌일 신세가 된 것이다. 동서양 고전을 선정하고 필독하고 권장해도 그것이 모두 알리바이임은 누구나 아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 고전의 어느 대목을 영어로 출제하고 이를 번역한 후에야 자기 생각을 쓸 수 있게 한다면 누구라도 고전을 읽는 대신 영어 공부를 하는 게 나은 것이다.

수만 쪽에 달할 수백 권의 고전을 언제 다 읽을 것이냐, 그 대신 영어 수학만 잘하면 논술의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고스톱인데 입시의 균형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 지 '학문의 자유'를 운운하는 서울대 교수들이 정말 모른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영어 수학만 잘하면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고스톱판

솔직히 논술은 죄가 없다. 오히려 논술은 전근대적 교육과 미래의 교육 사이에서 진지한 실험과 모색의 안전핀이었다. 지난 수년 동안의 논술 문제를 보라.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그나마 논술이 있어서 오늘과 우리의 미래의 세계에 대한 다양한 고민과 성찰이 있을 수 있었다.

서울대도 그동안 상당히 의미있는 문제를 출제한 바 있다. 지난 98년도 서울대의 논술 문제는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에서 출제되었다. 이 작품에 대하여 '사회주의 폐쇄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는 사전 지식이 있을 수 있다. 이를 근거로 꽤 많은 학생들이 서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시된 지문을 바탕으로 문제를 되짚어보면 '정보 독점과 조작의 폐해'가 핵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조지 오웰과 <동물 농장>에 의하여 주입된 어떤 관념이 아니라 지문을 꼼꼼히 읽고 해독하여 이를 자신의 세계관으로 재해석하는 능력이 관건인 것이다. 이를 굳이 영어로 출제하고 어려운 문장과 낯선 단어의 미로 속에서 수준급의 독해력을 점검하는 것은 논술과 관련없는 일이다.

순진한 발상이지만 정말 많은 글을 읽고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며 이로써 스스로 깊은 생각을 가지면 능히 써낼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능력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지식과 감성인 것이다.

얼마 전의 보도에 따르면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입사 시험을 너끈히 통과한 신입사원들이 한글의 단어와 문장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 말 우리 글'을 살리자는 취지에서만이 아니라 안타까울 정도로 뒤떨어지는 표현과 경박한 사고야말로 전근대적 주입식 교육의 폐해 아니던가.

분류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이 아니라 자신과 세상을 두루 성찰하고 이 세계의 급격한 변화를 제대로 읽고 보다 의미 있는 삶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지식과 감성의 계발이라는 측면에서 '인문성의 회복'은 중차대한 과제이거니와 이 사회적 목표의 실현을 위한 안전핀으로서 논술이 기능하건대, 이를 국영수 실력을 채점하는 기묘한 방식으로 왜곡된다면 우리의 교육과 아이들의 미래는 살인적인 경쟁의 냉혹한 시장판이 되고 말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우창 선생은 이십여 년 전의 어느 칼럼에서 다음의 요지로 토로한 바 있다. "서울대 수석을 차지한 학생이 '공부하느라고 책을 못 읽었다, 이제 합격했으니 많은 책을 읽고 싶다'고 말한다. 이렇게 책을 읽지 않은 학생이 수석을 차지하는 교육은 통탄할 일이다."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그로부터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필독에 권장 도서까지 있으니 몇 권 읽어 보려고 하면 '그건 어른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이니 너희들은 빨리 학원에 가라'고 재촉하는 현실 아닌가. 2008년 논술 시험이 권장도서 단 한 권 읽지 않아도 영어 잘 하고 수학 잘 하면 다 풀 수 있고 또 사실은 그런 능력을 채점하는 것이니 아예 책 읽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할 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학생들은 학교에서 책을 읽다가 혼찌검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학생이 영어며 수학으로 세칭 명문대에 우루루 몰려가는 병리적인 기현상이 보다 강화될 지 모른다.

이런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서울대 교수들의 '학문의 자유'는 지켜질 지 몰라도 어린 학생들의 책 읽을 권리, 깊은 문장에 사로잡혀 있다가 문득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는 권리, 그렇게 다양한 사상과 의견을 두루 접하며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권리, 요컨대 주입식의 통조림이 아니라 싱싱한 과즙을 발산하며 창의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자유와 상상의 권리는 박탈 당할지 모른다.

그것이 서울대의 미래일 수는 있으나 이 세계의 참된 미래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