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같이 '범죄-대중문화' 연결짓는 센스?
[이영미 칼럼] 수사관들이여, 당신들은 어찌 그리 잘 아는가 /오마이뉴스
  
끔찍했던 총기난사 사건이 대강 마무리되어가고 있다. 이제 초기의 충격이 조금 가실 만한 이 시점에서, 가슴 한 켠에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던 말을 해야 할 듯하다.

나는 이 사건이 터진 직후, 이러한 사건이 '선임병의 언어폭력 때문'이었다는 군 당국의 발표를 보면서 이런 상상을 했다. 만약 김 일병이 민간이었다면, 민간인 신분의 스무살 젊은 남자가, 별 원한관계도 없는 지인들을 한꺼번에 살해하는 엽기적인 살인사건을 벌였다면, 수사당국은 그 원인을 무엇이라 했을까? '용의자의 성격 탓이었다'고 발표할 것인가?

아마 십중팔구, 폭력적인 인터넷 게임과 영화에 탐닉한 탓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이번 사건 초기에도 김일병이 평소 인터넷 게임을 즐겼다는 발표가 있었지만, 일상적으로 인터넷 게임을 즐길 수 없는 군대라는 환경 탓에 이 이야기가 더이상 발전하지 않는 듯하다.

수사관은 어떻게 알까?

최근 청소년들의 강력범죄의 수사 발표에는,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대중문화 이야기가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 나온다. 부모를 토막살해한 대학생 이은석 사건 때에도 컴퓨터 게임에 탐닉했다고 발표했고, 학교에서 급우를 살해한 중학생 사건 때에도 영화 <친구>를 40번을 봤다고 발표했다. 언론에서 이런 보도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유해한 대중문화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성토한다.

나는 이런 발표를 들을 때마다, 대중예술평론가로서,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대중문화에 대한 자성의 태도를 갖게 되는 한편,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토록 신속하게 범죄와 대중문화와의 연관성을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첫 발표 때 이런 이야기가 나오려면, 용의자가 잡혀왔을 때 수사관이 초장부터 "너 인터넷 게임 좋아하지?", "영화는 뭘 좋아해?"라고 물어봤다는 얘기다. 나는, 끔찍한 살인을 하고 현장에서 잡혀온 용의자가, 자신의 살해동기로 처음부터 게임이나 영화를 지목할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수사관이 작심을 하고 대중문화와의 연관성을 추적했거나, 아니면 미워서 죽여버리고 싶었다는 용의자를 계속 다그쳐 물으면 용의자가 그제서야 '영화에서도 그렇게 죽이던데요'라고 핑계대지 않았을까? 실제로 후에 이은석 사건은, 가족의 문제가 훨씬 더 컸다는 연구가 나오기도 했다.

나의 관심은, 왜 수사관들이 대중문화와의 관련성을 애초부터 상정하고 있었느냐이다. 사실 따지고 보자면 한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기까지의 원인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다기하고 복잡한 것이다.

이번 김일병 사건을 '성격 탓'이라는 애매한 원인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런 때문이다. 남녀가 이혼할 때에도 흔히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성격 차이 때문이라고. 이렇게 복잡하고 다기한 원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두 가지 요인으로 그 문제를 선명하게 규정짓고 싶어한다.

성격 탓? 이렇게 인간의 정신세계에 관한 문제이면서도 매우 포괄적인 이런 설명은 수사당국이 즐겨 쓰는 말이 아니다. 수사당국은 원한이나 치정이나 돈 문제처럼 선명한 이유로 설명하고 싶어 하고, 우리 역시 그것을 원한다.

그런 선명한 설명이 잘 되지 않을 때, 우리는 흔히 머릿속에서 지니고 있던 통념에 기댄다. 예컨대 '대중문화는 청소년에게 유해한 것이다', '군대는 상습적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는 엄마의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같은 통념이 그런 것이다.

그것은 수사당국만이 아니라 용의자 자신도 그렇다. 자신의 행동의 다기한 원인들을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이들 역시 남들 앞에서 뭔가 이유 같은 이유를 대야 할 때에는, 학습된 통념을 털어놓게 된다. 김일병이 '선임자들의 언어폭력 때문'이라고 진술한 것도 그런 것이다.

이런 통념은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니면서도 개연성은 있기 때문에 이런 이유는 대중들을 납득시키기 쉽다. 그러나 수많은 요인 중 늘 이런 식으로 지목되는 것은 참으로 억울하기 그지없다. 막말로, 만만하니까 동네북 취급을 받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동네북

청소년 문제를 대중문화 탓으로 돌리는 것은 꼭 최근의 현상이 아니다. 1972년 1월 31일 저녁 때 12세 어린이가 목을 매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사건 발생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2월 1일자 신문부터 이 아이의 자살이 만화를 흉내 내어 벌어진 사건으로 규정했다. 만화에서는 죽었다가도 살아나는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이후 정부의 대대적인 만화 단속으로 이어져 69명의 작가가 고발되고 58개 만화출판사 중 절반가량의 등록 취소되었다.

그런데 정말 이 아이의 자살이 만화 때문일까? 설사 그것이 요인 중의 하나일지라도, 그렇다고 그 만화가 문제가 있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따져 보자. 영화 <친구>를 40번 보고 친구를 살해했다는 중학생의 예를 생각해 보자. 보통 사람들은 <친구>를 한 번 보면 그만이다. 그것을 무려 40번이나 봤다는 것부터 범상하지 않은 것이다. 즉 그 아이는 급우에 대한 강렬한 살해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그 영화를 40번씩이나 볼 수 있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영화 <친구>는 과연 문제가 있는 작품인가? 만약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훌륭한 사람이 나와서 훌륭한 행동만 하는 작품을 제외한 어떤 작품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만약 영화 <친구>가 흥행성적도 낮고 평론가의 평가도 좋지 않은 작품이었다면, 아이들만 보는 영화였다면, 게다가 한국영화가 우리의 문화산업의 중추라는 인식이 있던 시대가 아니었다면, 영화는 영락없이 동네북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영화 <친구>는 우리나라의 여론주도층인 중장년 남성들이 '필 팍팍 받으면서' 본 영화였다.

그러나 만화나 컴퓨터 게임은 다르다. 여론주도층인 어른들의 취향이 아니다. 어른들은 자신들과 다른 취향을 지닌 청소년들의 못마땅하다. 취향의 차이가 가치평가로 이어져, 그것들이 좋지 않다는 통념으로 정착한다. 그리고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들은 동네북이나 마녀가 되는 것이다.

영화 <친구>와 인터넷 게임의 차이

생각해 보라. 김일병이 컴퓨터 게임을 즐겼다고? 지금 우리나라 남자 청소년치고 컴퓨터 게임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인터넷 게임이 그것의 원인이라고 지목될 만한 것인가 말이다.

이런 가정을 해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바다에 투신자살을 했다고 하자. 그는 소설가 최인훈을 즐겨 읽었고 특히 <광장>을 좋아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그의 투신자살이 <광장> 때문이고, 그러므로 <광장>이 그를 투신자살로 몰고 간 유해한 작품이었다고 규정할 수 있는가? <데미안>을 안고 자살하는 소녀들 때문에 헤세 소설을 유해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가 말이다.

<광장>에 대해서는 할 수 없는 말을, 우리는 영화나 만화나 컴퓨터 게임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고 그렇게 믿어버린다. 본격소설은 고상하고 가치 있는 것이며, 대중예술은 재미는 있지만 무가치하거나 유해한 것이라는 통념이 강고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정신세계의 문제를 들추지 않고, 매우 명확하고 가시적인 몇몇 이유로 쉽게 설명해버리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몇몇 마녀나 동네북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단순한 판단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은 개운해질는지 모르지만, 결국 그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제대로 가리고 치유하는 노력을 하지 않게 만든다. 나는 오히려 이 사건을 보면서, 컴퓨터 게임도 하지 않고 산전수전 다 겪은 40대 중년 여자인 나조차 가끔은, 특정인이나 세상 전체에 견딜 수 없는 살의를 느끼는 때가 있음을 자각한다. 이런 것이 꼭 나뿐만의 현상이 아닐진대, 이것은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