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논술 자료함
칼럼[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식인종과 강아지 기르기 / 오귀환 콘텐츠 큐레이터
2005.10.07 08:00
추석 연휴 때 우연히 위성채널에서 잡힌 <로빈슨 크루소>의 한마디 대사가 강렬하게 가슴을 때렸다. 프랑스식으로 각색한 영화는 이렇게 프랑스적인 화두를 하나 던지고 있다.
“우리는 사랑하니까 그 사람을 먹는 거야. 그의 영혼을, 그의 모든 것을 우리 안에 간직하고 싶어서….”
오랫동안 혼자 생존해온 서양식 자아의 모델인 로빈슨 크루소에게 사람을 잡아먹는 초절정 야만인 이웃 ‘이타와’는 말한다. 봐! 너는 나를 살린다며 총을 쏴서 내 부족 세명을 죽였어! 하나를 살린다면서 셋을 죽인 거야. 그게 정당방위일까? 나? 물론 내가 우리 부족에 잡혀가면 포로로 잡혀갔었으니까 부족의 계율에 따라 죽이겠지. 그리고 먹겠지. 그래도 나 이타와는 순응할 작정이었거든. 모두가 언젠가 죽을 텐데 너희 식으로 땅속에 파묻어버리는 것만 문명이라고? 그러는 너희는 포로로 잡은 사람에게 사슬을 채우고 때리고 노예로 부려먹는다며? 어느 게 더 인간적인 문명이지? 넌, 날 완전히 망쳐버리고 말았어!
얼마 전부터 집에서 강아지를 한 마리를 키우게 됐다. 물론 나의 자의로 시작한 일은 아니다. 세상에는 그런 게 많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하는 때가 더 많은 게 인생이다. 그리 생각하는 인생이 이리 견생을 하나 맞닥뜨려야 했다. 이제 4개월여 된 이 견생은 이름만큼은 당당하다. ‘무후’, 저 유명한 측천무후의 줄인 말 무후인 것이다. 당연히 암컷이다. 그 이름도 내가 짓지는 않았다. 중국산 시추라서 그리 크지도 않고, 지나치게 작지도 않고… 좀 게으르고 좀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고… 무엇보다 뗑그란 그 눈이 사람을 죽여서… 라고 이 견생을 고르신 사람은 말씀하셨다.
이전까지 나는 이른바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의 지론을 얼마만큼은 굳게 지지하고 있었다.
“이것 봐. 우리 한국에서는 서양과 달리 개를 두 종류로 나눠. 구(狗)가 있고, 견(犬)이 있어. 황구, 백구라고 그러잖아? 소설 <황구의 비명>이라는 것도 있잖아?… 그런 구를 먹는 거야. 그와 달리 애완견! 그게 견이야. 그런 견은 먹지 않지. 그러니까 구목장이라고 그러지. 견목장이라고는 하지 않아….”
농경사회에서 뜨거운 여름 고된 노동을 해야 했던 선조들이 여름을 나기 위해, 그러니까 큰 틀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를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불과 40∼50년 전만 해도 우리 민족은 소나 돼지보다도 개고기를 가장 많이 먹었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분은 이런 논지를 편다. “아, 고기가 지천인데 굳이 개고기까지 합법화할 필요가 있느냐. 그거 말고도 얼마나 고기를 많이 먹고 있는가? 기본적으로 지구생태를 위해서라도 더이상 육식을 늘리는 것은 좋지 않아… 제발 인간들이여, 개라도 좀 먹지 말아 보자.”
그런 분들의 논쟁과 상관없이 나는 매일 아침 먹을 걸 달라고 낑낑거리는 소리에 무후에게 ‘먹을 것’을 준다. 무후를 고른 사람은 요즘 지방에 장기 출타 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녁 때 약속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 배고파서 낑낑거리고 있을 측천무후를 생각하면? 죽어라 하고 달려가야 한다. 한번은 원주에 갔다가 무후 밥 한끼 주기 위해 다시 일산까지 달려갔다 원주로 온 적도 있다. 또 아파트에서 개를 기르는 건 얼마나 힘든지! 아직도 똥 오줌을 가리지 못한 채 무시로 집안 곳곳에 퍼지르는 큰 것과 작은 것을 치우다보면 대략 하루 평균 한 시간은 잡아먹는 것 같다. 이리 닦고 저리 치우고… 연실 비누칠해 손을 닦아야 하니…. 그런 인생을 고맙게 여겨서인지 아니면 단지 자신의 먹을 것과 고독에 관한 문제 때문인지…. 이 견생은 놀랄 만한 짓거리를 쉬지 않고 해댄다. 아파트 문을 잠그고 돌아설 때면 안에서 서글피 우는 소리를 낸다. 연애하다가 헤어진 어떤 여성도 나한테 그리한 것 같지 않게스리…. 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그러다가 집에 도착해 키조작을 한 뒤 문을 열면 어김없이 바로 앞에서 꼬리를 쳐대고 있다. 1kg 남짓한 ‘고깃덩어리’가 어쩌면 그리도 인간과 똑같을 수 있는지….
강아지를 키우며 확실하게 배운 건 하나다. 인간은 경험하기 전까지는 항상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것이 옳고, 나만 똑똑하다는 식으로…. 요즘의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그런 것만 같다. 인간이 인간을 먹은 기간이 그렇지 않은 기간보다 무지무지 긴데도 말이다. 영화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이타와를 양자로 삼아 문명사회로 함께 간다. 전혀 다른 두 문명이, 생명이 그렇게 커뮤니케이션을 해가고 있었다.
2005.10.07 08:00
추석 연휴 때 우연히 위성채널에서 잡힌 <로빈슨 크루소>의 한마디 대사가 강렬하게 가슴을 때렸다. 프랑스식으로 각색한 영화는 이렇게 프랑스적인 화두를 하나 던지고 있다.
“우리는 사랑하니까 그 사람을 먹는 거야. 그의 영혼을, 그의 모든 것을 우리 안에 간직하고 싶어서….”
오랫동안 혼자 생존해온 서양식 자아의 모델인 로빈슨 크루소에게 사람을 잡아먹는 초절정 야만인 이웃 ‘이타와’는 말한다. 봐! 너는 나를 살린다며 총을 쏴서 내 부족 세명을 죽였어! 하나를 살린다면서 셋을 죽인 거야. 그게 정당방위일까? 나? 물론 내가 우리 부족에 잡혀가면 포로로 잡혀갔었으니까 부족의 계율에 따라 죽이겠지. 그리고 먹겠지. 그래도 나 이타와는 순응할 작정이었거든. 모두가 언젠가 죽을 텐데 너희 식으로 땅속에 파묻어버리는 것만 문명이라고? 그러는 너희는 포로로 잡은 사람에게 사슬을 채우고 때리고 노예로 부려먹는다며? 어느 게 더 인간적인 문명이지? 넌, 날 완전히 망쳐버리고 말았어!
얼마 전부터 집에서 강아지를 한 마리를 키우게 됐다. 물론 나의 자의로 시작한 일은 아니다. 세상에는 그런 게 많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하는 때가 더 많은 게 인생이다. 그리 생각하는 인생이 이리 견생을 하나 맞닥뜨려야 했다. 이제 4개월여 된 이 견생은 이름만큼은 당당하다. ‘무후’, 저 유명한 측천무후의 줄인 말 무후인 것이다. 당연히 암컷이다. 그 이름도 내가 짓지는 않았다. 중국산 시추라서 그리 크지도 않고, 지나치게 작지도 않고… 좀 게으르고 좀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고… 무엇보다 뗑그란 그 눈이 사람을 죽여서… 라고 이 견생을 고르신 사람은 말씀하셨다.
이전까지 나는 이른바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의 지론을 얼마만큼은 굳게 지지하고 있었다.
“이것 봐. 우리 한국에서는 서양과 달리 개를 두 종류로 나눠. 구(狗)가 있고, 견(犬)이 있어. 황구, 백구라고 그러잖아? 소설 <황구의 비명>이라는 것도 있잖아?… 그런 구를 먹는 거야. 그와 달리 애완견! 그게 견이야. 그런 견은 먹지 않지. 그러니까 구목장이라고 그러지. 견목장이라고는 하지 않아….”
농경사회에서 뜨거운 여름 고된 노동을 해야 했던 선조들이 여름을 나기 위해, 그러니까 큰 틀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를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불과 40∼50년 전만 해도 우리 민족은 소나 돼지보다도 개고기를 가장 많이 먹었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분은 이런 논지를 편다. “아, 고기가 지천인데 굳이 개고기까지 합법화할 필요가 있느냐. 그거 말고도 얼마나 고기를 많이 먹고 있는가? 기본적으로 지구생태를 위해서라도 더이상 육식을 늘리는 것은 좋지 않아… 제발 인간들이여, 개라도 좀 먹지 말아 보자.”
그런 분들의 논쟁과 상관없이 나는 매일 아침 먹을 걸 달라고 낑낑거리는 소리에 무후에게 ‘먹을 것’을 준다. 무후를 고른 사람은 요즘 지방에 장기 출타 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녁 때 약속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 배고파서 낑낑거리고 있을 측천무후를 생각하면? 죽어라 하고 달려가야 한다. 한번은 원주에 갔다가 무후 밥 한끼 주기 위해 다시 일산까지 달려갔다 원주로 온 적도 있다. 또 아파트에서 개를 기르는 건 얼마나 힘든지! 아직도 똥 오줌을 가리지 못한 채 무시로 집안 곳곳에 퍼지르는 큰 것과 작은 것을 치우다보면 대략 하루 평균 한 시간은 잡아먹는 것 같다. 이리 닦고 저리 치우고… 연실 비누칠해 손을 닦아야 하니…. 그런 인생을 고맙게 여겨서인지 아니면 단지 자신의 먹을 것과 고독에 관한 문제 때문인지…. 이 견생은 놀랄 만한 짓거리를 쉬지 않고 해댄다. 아파트 문을 잠그고 돌아설 때면 안에서 서글피 우는 소리를 낸다. 연애하다가 헤어진 어떤 여성도 나한테 그리한 것 같지 않게스리…. 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그러다가 집에 도착해 키조작을 한 뒤 문을 열면 어김없이 바로 앞에서 꼬리를 쳐대고 있다. 1kg 남짓한 ‘고깃덩어리’가 어쩌면 그리도 인간과 똑같을 수 있는지….
강아지를 키우며 확실하게 배운 건 하나다. 인간은 경험하기 전까지는 항상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것이 옳고, 나만 똑똑하다는 식으로…. 요즘의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그런 것만 같다. 인간이 인간을 먹은 기간이 그렇지 않은 기간보다 무지무지 긴데도 말이다. 영화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이타와를 양자로 삼아 문명사회로 함께 간다. 전혀 다른 두 문명이, 생명이 그렇게 커뮤니케이션을 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