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논술 자료함
총리님, 중학교 학기말 시험 한번 보시죠 / 박인성(소설가)
스스로 묶은 것을 스스로 푸는 것을 ‘결자해지’라고 하던가요? 유난히도 춥고, 유난히도 어지러운 이 겨울, 국무총리님, 중학교 기말고사 한번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수행평가도 한번 받아보시고요.
저도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한다는 말, <대치동 엄마들은 직업을 갖지 않는다> 같은 책이 나오고 팔리는 이유 등을 말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엄청난 ‘시험증후군’에 괴로워한다는 것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흔한 말로 돈 없고 배운 것 없는 부모들이 아이들 교육에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지도 이번에야 체험했습니다.
학부모 처지를 진하게 느껴보려고 중학교 1학년의 학기말 고사를 한번 같이 보기로 하였습니다. 우선은 시험 과목이나 범위가 장난이 아니더군요. 거기에 ‘수행평가’까지 보태어지니 정말 감당이 안 되더군요. 예를 좀 들어볼까요.
음악 시험에 ‘정간보’라는 것이 틀림없이 나오겠더군요. 정간보?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습니다. 찾아보니 정간보(井間譜)더군요. 그러니까 우물 정자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셈이지요. 이것이 유량(有量) 악보라는 것도 한자를 알아야만 제대로 알 수 있고요. 그 다음엔 또 황, 태, 중 이런 한자가 나오고…. 예상 문제를 맞히기 위해선 2시간의 투자가 필요했습니다.
음악감상 문제를 풀기 위해선 녹음을 해야 하더군요.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 베토벤의 운명 1악장,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 ‘코끼리’… 인터넷에 있기라도 하면 다행인데 없는 것은 시디를 구입해서 예상 범위를 녹음해야겠더군요. 그러니까 녹음기에 인터넷에서 한 부분, 시디에서 한 부분 하는 식으로요. 그 녹음을 반복해서 들어야 하고…, 꼬박 부모가 하루는 투자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부 강남의 학원에서는 이런 수고를 일일이 하여, 학생들에게 보내 준다고, 경험 있는 선배가 말하더군요.
이렇게 해서 겨우 예상 문제 몇 개를 준비했습니다. 과학을 한번 볼까요. ‘혈액의 순환과정’을 알려면 조직세포, 물질교환, 폐정맥, 대동맥, 혈압의 세기, 판막, 탄력성…, 끝도 없이 나오죠. 물론 달달 외우는 방법도 있겠지요. 하지만 요즘 교육이 지향한다는 ‘이해’를 하기 위해선, 신체 모형이 필요하고 연이어 나오는 한자어를 깨쳐야만 합니다. 이 정도는 약과지요. 이른바 ‘수행점수’를 따기 위해선 무슨 과학관 같은 곳을 견학하고, 그 결과를 보고서로 써야 하는데 점수를 1점이라도 더 얻게 하려면 부모가 일일이 지도해 주어야 합니다.
영어를 예로 들어 볼까요. 영어 좀 한다는 저도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교과서, 참고서, 문제집. 역시 두 손 들었습니다. 이런 부모의 수고를 덜기 위해 학원이란 게 있다, 라고 하시거나,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 라고 말씀하시려거든 직접 한번 해보시길 권합니다.
예를 들자면 끝도 한도 없을 듯합니다. 결국 부모나 친정어머니, 장인어른 등등이 동원되어 아이를 태우고, 끌고서 학원이다, 과학관이다, 체험학습장이다, 봉사단체다 찾아다닐 수밖에 없더군요. 말이 나왔으니 ‘봉사’에 대해 결론부터 말해 볼까요. ‘봉사 점수’를 따기 위해선 정말 물불 안 가려야겠더군요. 데리고 가고, 같이 하고, 확인서 받고… 이런 걸 스스로 보면서, 또 부모 손에 이끌려 다니면서 아이들은 ‘봉사’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요? 일리가 있으신 말씀입니다만, 선천적으로 봉사 정신이 배어 있지 않는 한, 그리고 점수에 연연하지 않는 한 제 말이 맞을 겁니다.
제 전공(?)이 소설이고 국어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역시 제가 참패했습니다. 저도 이해 못할 부분이 많은 소설을 읽고, 생각하고, 감상문 쓰고… 아이가 어떻게 제대로 해내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스스로 잘하고, 여전히 ‘개천에서 용 나온다’고요?
참고서 한두 권만 잘 활용해도 이른바 좋다는 학교에 진학하던 시절이 있기는 했던 것 같습니다. 국무총리님 시절이 그렇지 않았나요? 이 나라 많은 부모들이 나름대로 입시지옥을 거쳤습니다.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부모까지 덩달아 지옥을 거쳐야만 합니다. 어렵게 사회에 발디뎌서 어렵게 견뎌내고 있는데, 나이 사오십에 ‘부모의 입시지옥’이라니. 수많은 가정이 중산층에서조차 탈락해가고 있는데,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모아 지옥 돌파 작전에 쏟아야 하다니요. 매일같이 이민을 생각하고, 쓴 소주 삼키며 기러기 아빠가 될 것을 각오해야 하다니요.
정작 걱정되는 것은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막상 소원하던 대학에 진학한 이후입니다. 파김치 되어 어학연수 가고, 입사준비 하고… 물론 그중에서 이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갈 동량들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만명을 능가하는 한명이 탄생하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대다수 ‘나머지’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스스로 묶은 것을 스스로 푸는 것을 ‘결자해지’라고 하던가요? 유난히도 춥고, 유난히도 어지러운 이 겨울, 국무총리님, 중학교 기말고사 한번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수행평가도 한번 받아보시고요.
출전: 한겨레 2005년 12월22일 '왜냐면'에 실린 글
스스로 묶은 것을 스스로 푸는 것을 ‘결자해지’라고 하던가요? 유난히도 춥고, 유난히도 어지러운 이 겨울, 국무총리님, 중학교 기말고사 한번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수행평가도 한번 받아보시고요.
저도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한다는 말, <대치동 엄마들은 직업을 갖지 않는다> 같은 책이 나오고 팔리는 이유 등을 말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엄청난 ‘시험증후군’에 괴로워한다는 것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흔한 말로 돈 없고 배운 것 없는 부모들이 아이들 교육에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지도 이번에야 체험했습니다.
학부모 처지를 진하게 느껴보려고 중학교 1학년의 학기말 고사를 한번 같이 보기로 하였습니다. 우선은 시험 과목이나 범위가 장난이 아니더군요. 거기에 ‘수행평가’까지 보태어지니 정말 감당이 안 되더군요. 예를 좀 들어볼까요.
음악 시험에 ‘정간보’라는 것이 틀림없이 나오겠더군요. 정간보?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습니다. 찾아보니 정간보(井間譜)더군요. 그러니까 우물 정자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셈이지요. 이것이 유량(有量) 악보라는 것도 한자를 알아야만 제대로 알 수 있고요. 그 다음엔 또 황, 태, 중 이런 한자가 나오고…. 예상 문제를 맞히기 위해선 2시간의 투자가 필요했습니다.
음악감상 문제를 풀기 위해선 녹음을 해야 하더군요.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 베토벤의 운명 1악장,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 ‘코끼리’… 인터넷에 있기라도 하면 다행인데 없는 것은 시디를 구입해서 예상 범위를 녹음해야겠더군요. 그러니까 녹음기에 인터넷에서 한 부분, 시디에서 한 부분 하는 식으로요. 그 녹음을 반복해서 들어야 하고…, 꼬박 부모가 하루는 투자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부 강남의 학원에서는 이런 수고를 일일이 하여, 학생들에게 보내 준다고, 경험 있는 선배가 말하더군요.
이렇게 해서 겨우 예상 문제 몇 개를 준비했습니다. 과학을 한번 볼까요. ‘혈액의 순환과정’을 알려면 조직세포, 물질교환, 폐정맥, 대동맥, 혈압의 세기, 판막, 탄력성…, 끝도 없이 나오죠. 물론 달달 외우는 방법도 있겠지요. 하지만 요즘 교육이 지향한다는 ‘이해’를 하기 위해선, 신체 모형이 필요하고 연이어 나오는 한자어를 깨쳐야만 합니다. 이 정도는 약과지요. 이른바 ‘수행점수’를 따기 위해선 무슨 과학관 같은 곳을 견학하고, 그 결과를 보고서로 써야 하는데 점수를 1점이라도 더 얻게 하려면 부모가 일일이 지도해 주어야 합니다.
영어를 예로 들어 볼까요. 영어 좀 한다는 저도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교과서, 참고서, 문제집. 역시 두 손 들었습니다. 이런 부모의 수고를 덜기 위해 학원이란 게 있다, 라고 하시거나,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 라고 말씀하시려거든 직접 한번 해보시길 권합니다.
예를 들자면 끝도 한도 없을 듯합니다. 결국 부모나 친정어머니, 장인어른 등등이 동원되어 아이를 태우고, 끌고서 학원이다, 과학관이다, 체험학습장이다, 봉사단체다 찾아다닐 수밖에 없더군요. 말이 나왔으니 ‘봉사’에 대해 결론부터 말해 볼까요. ‘봉사 점수’를 따기 위해선 정말 물불 안 가려야겠더군요. 데리고 가고, 같이 하고, 확인서 받고… 이런 걸 스스로 보면서, 또 부모 손에 이끌려 다니면서 아이들은 ‘봉사’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요?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요? 일리가 있으신 말씀입니다만, 선천적으로 봉사 정신이 배어 있지 않는 한, 그리고 점수에 연연하지 않는 한 제 말이 맞을 겁니다.
제 전공(?)이 소설이고 국어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역시 제가 참패했습니다. 저도 이해 못할 부분이 많은 소설을 읽고, 생각하고, 감상문 쓰고… 아이가 어떻게 제대로 해내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스스로 잘하고, 여전히 ‘개천에서 용 나온다’고요?
참고서 한두 권만 잘 활용해도 이른바 좋다는 학교에 진학하던 시절이 있기는 했던 것 같습니다. 국무총리님 시절이 그렇지 않았나요? 이 나라 많은 부모들이 나름대로 입시지옥을 거쳤습니다.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부모까지 덩달아 지옥을 거쳐야만 합니다. 어렵게 사회에 발디뎌서 어렵게 견뎌내고 있는데, 나이 사오십에 ‘부모의 입시지옥’이라니. 수많은 가정이 중산층에서조차 탈락해가고 있는데,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모아 지옥 돌파 작전에 쏟아야 하다니요. 매일같이 이민을 생각하고, 쓴 소주 삼키며 기러기 아빠가 될 것을 각오해야 하다니요.
정작 걱정되는 것은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막상 소원하던 대학에 진학한 이후입니다. 파김치 되어 어학연수 가고, 입사준비 하고… 물론 그중에서 이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갈 동량들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만명을 능가하는 한명이 탄생하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대다수 ‘나머지’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
스스로 묶은 것을 스스로 푸는 것을 ‘결자해지’라고 하던가요? 유난히도 춥고, 유난히도 어지러운 이 겨울, 국무총리님, 중학교 기말고사 한번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수행평가도 한번 받아보시고요.
출전: 한겨레 2005년 12월22일 '왜냐면'에 실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