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논술 자료함
행복의 기준 / 법정스님의 강연 녹취록
오늘 날씨도 궂은데 절에 오시느라고 힘들었겠습니다.
양력 4월 20일인 오늘은 곡우(穀雨)입니다. 곡우 무렵에는 비가 많이 내립니다. 곡식에 이로운 비라해서 곡우라고 합니다. 봄 가뭄을 해갈시키고, 이 무렵 비가 안오면 산불이 많습니다. 다행이 요즘 비가 내리니 산불 소식이 없어 좋습니다.
남쪽에서는 햇차를 수확할 것입니다. 그래서 곡우 전에 나오는 차를 비 우자, 앞 전자를 붙여 우전(雨前)이라고 상표를 붙여 팔지만은 곡우 후에 나와도 우전이라고 붙여 파니깐 크게 기대하지 마십시오.
얼었던 땅에 꽃이 피고 잠든 가지에서 새 잎이 펼쳐지는 자연의 놀라운 신비 앞에서 우리는 배울 것이 많습니다. 봄이 와서 꽃이 피지 않고 새 잎도 펼쳐지지 않는다고 한번 가상해보세요. 얼마나 끔찍하겠어요. 미래학자(환경론자) 이야기는 앞으로 멀지 않은 장래에, 지금 우리가 이런 식으로 계속 살아간다면, 봄이 와도 꽃이 피지 않고 잎도 피지 않고 새도 찾아오지 않을거래요. 지금 우리가 하루하루 살고 있는 생활양식이 반환경적이고 반생태적인 쪽으로 가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두렵다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앞으로 석유가 그렇게 매장량이 많지 않다고 그것을 미리 확보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들 자신은 어떤 봄을 맞이하고 있는가? 각자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해마다 봄이 오면 나무와 화목들이 꽃을 피우고 잎을 펼치는데 과연 내 자신 우리들은 어떻게 봄을 맞이하고 있는가?
온통 화장세계. 꽃으로 장식하는 자연을 불교경전에서 ‘화장세계’ 또는 ‘화장찰’이라고 합니다. ‘찰’이란 범어를 그대로 음역한 말인데 세계라는 뜻입니다. 또 ‘연화장’은 꽃으로 된 세상. 그러면 그 안에 사는 우리들 자신도 꽃다운 인생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있기 때문에 봄의 아름다움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지 않다면 이런 환경을 대할 수가 없어요. 살아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건강해서 절에 나올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꽃철에 다시 그 분들을 불러 세운다면 허락받은 세월을 어떻게 보낼지 한번 상상해보세요. 죽었던 사람들을 다시 깨워본다면 하루하루 어떻게 보낼 것인가 미루어 생각해보십시오. 모르긴해도 적어도 오늘 우리처럼 시간을 무가치한 일에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전 서울의 한 대학 연구소에서 현재 우리사회 국민 의식과 가치관에 대한 조사 연구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신문에서 보았지요. ‘당신은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이런 설문이었습니다. 한국인은 이러한 질문에 자신의 행복지수를 100점 만점에 66.5점으로 평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행복지수를 숫자로 나타낸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렇게 조사해본 것입니다. 3주일 동안 스무 살 이상 남녀 1,2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입니다.
그 답을 보면 행복한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건강을 들고 있습니다. 여기에 응답한 사람들은 모두 병원 문턱을 드나들던 사람일거예요. 이것이 70.2%예요.
다음이 경제적 풍요 11.1% 밖에 안됩니다. 배우자와의 사랑 6.5%, 언젠가는 수틀리면 물릴 수 있는 그런 수치에요. 신앙이 5.2%. 또 안정된 직장이 2.8%. 자녀의 성공이 2.6%.
우리의 의식과 가치관이 이런 것입니다. 개인이 모두 다르지만 조사한 수치입니다. 그러면 이 자리에서 내 자신은 100점 만점에 내 행복수치는 몇 점 매겨줄 것인가 한 번 헤아려보십시오.
제가 아는 잡지사에서 지령 400호를 맞아서 '행복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런 주제를 갖고 대담해달라는 요청이 왔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모른 체 할텐데 이 꽃철에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틀리는 일이 아니겠구나 싶어 받아들였습니다.
오늘은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행복에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환경에서 살기 때문에 어떤 기준을 가지고 행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행복은 어떤 의미에서는 주관가치입니다. 내 자신이 행복한 일이 다른 삶에게는 행복하지 않는 일이 될 수 있기에 행복의 기준이 무엇인가 보다는 그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각자 자기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 헤아려보십시오. 행복은 문을 두드리면서 찾아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안에서 우러나오고 배어나옵니다. 꽃향기처럼 은은히 배어나와요. 그러므로 자신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저 자신의 행복 비결을 공개해 드릴께요. 지난 입춘날, 입춘이면 꽃시장에 매화분이 나와요. 매화분을 구할까 싶어 아는 가게에 나갔더니 매화분이 아직 안나왔더라구요. 돌아서기가 안되어서 바이오렛 화분을 하나 샀어요. 단돈 천오백원에 화분 중에 가장 작은 화분이에요. 나는 바이오렛이면 오랑캐꽃 즉 제비꽃인즐 알았더니, 잎이 아주 탐스러운 꽃이 세 송이 피었는데 그것이 내 눈길을 끌어서 그걸 천오백원 주고 사왔어요. 아침 저녁으로 일과끝에 물도 주고 보살피고 두런두런 밤새 잘 잤느냐고 안부도 전하고 이렇게 넉 달 가까히 데리고 살았는데 그 화분을 대할 때마다 내 가슴이 따뜻해지더라고요. 4월 초에 같은 화분을 하나 더 샀어요. 나야 성미가 괴팍해서 홀로 떨어져 살기를 좋아하지만 화분은 홀로 있는게 적적하고 외로울 것 같아서 지 친구를 하나 더 데리고 왔다고 같이 곁에 놓았더니 이때부터 시샘을 하듯이 아주 무럭무럭 자라요. 화초를 길러본 분은 알겠지만 물보다는 하이폰엑스 비료에 물을 희석해주면 화초들이 아주 좋아합니다. 잎에는 그냥 물을 뿌려야지 하이폰엑스를 섞인 물을 주면 잎이 변색되요. 얼룩이 집니다. 꽃을 보살펴주면 내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그러면 무엇이 넉넉해지더라구요. 이것도 하나의 행복의 비결이 될 것입니다.
행복이라고 뭐 거창하고 큰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십억원 짜리 재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사소한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행복을 캐낼 수 있습니다.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밤중에 저가 기침을 해요. 누워있으면 계속 기침이 나기에 일단 앉아서 주섬주섬 흩어진 것을 정리하고 있으면 기침이 말끔히 가십니다. 이때 낮에보다도 새벽보다도 한밤중에 좌선하고 있으면 아주 정신이 맑아져요. 별도 한밤중에 아주 영롱합니다. 그렇듯이 우리들 정신상태도 한밤중에 또렷해지거든요. 이 때에 촛불을 켜고 - 저가 사는 곳은 한 보름 전에 얼음이 풀렸어요 - 얼음이 깨지는 개울물에 귀를 맡기고 있으면 맑고 투명한 그 자리가 정토요, 극락세계요, 별천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맑고 투명한 자리가 극락정토요, 별천지라는 것을 거듭 확인합니다. 이 밖에 더 바랄 것 없어요. 적어도 그 순간만은 둘레의 모든 것에 감사하고 고마워합니다.
한밤중에 깨워준 기침보살에게도 고마운 생각이 들어요. 옛사람들이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는 교훈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가끔 차를 좋아하시는 분은 그런걸 느낄 것입니다. 일 마치고 차 한 잔 마실까하고 물 떠다가 끓이고 차도구라도 내놓고 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저 뿐만 아니라 산중에 사는 사람들은 다 느끼겠지만, 내가 이 산중에 살면서 차 맛을 몰랐다면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이런 생각을 거듭거듭 하게 됩니다. 향기로운 차 한 잔을 통해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행복을 더 큰 데서 구하지 마세요. 아주 조그맣고 사소한 단돈 1,500원을 통해서 사람은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변고가 되었건 상황이 되었건 거부하지말고 그것을 받으세요. 받아드리면서 좋은 쪽으로 해석해요. 그런 상황이 오히려 고마워질 때가 있어요.
이와 같은 행복이 어디서 옵니까? 사소한 이런 일상을 누리면서 마음을 따뜻하게 가꿀 때마다 마음이 충만해져요.
자연계의 꽃이나 잎은 그런다고 치고 인간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랑과 신의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랑이란 부드럽고 따뜻하게 이웃과 나누는 일이지요. 사랑이란 남녀간에 짓고 까불고 갈라지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이웃과 나누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신의란 무엇입니까? 자기가 한 말대로 사는 것이지요. 자기가 한 말에 책임지는 것이 사람이지요. 믿을 신(信) 자(字)는 사람 인(人) 변에 말씀 언(言)한 것입니다. 사람의 말이 곧 믿음이요. 예전에는 문서가 따로 없었습니다. 말이 곧 믿음이었습니다. 집 문서건 등기 문서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자가 나오면서 위조 사기, 횡령이란 것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백인들이 미국의 원주민인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많은 문서를 약속했어요. 인디언들은 원래 말로써 신용거래를 했습니다. 백인들이 사기하고 거짓하여 인디언들을 한쪽으로 몰아서 멸종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대륙에서만이 아닙니다. 카-드, 뭐 이런 것에 사람의 말을 믿지 못하고 문서로 이루어진 부정이 많지 않습니까. 사람의 말이 곧 믿음이에요. 배신이란 믿음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인간의 가장 추악한 일은 믿음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이 사랑에 있다면 추악한 점은 약속을 저버리는, 즉 자기의 말을 스스로 저버리는 데에 있습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고 스스로 손해와 상처를 입히는 것이 바로 배신입니다. 그래서 배신자는 선량한 인간의 대열에서 제외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해요. 사람만이 책임을 집니다. 동물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그 책임을 통해서 순간순간 하루하루 인간이 형성되어갑니다.
어디, 로또복권들 삽니까?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은 행복할까요?
세상에 절대 공것은 없습니다. 그런 데에 속지 마십시오. 명심하십시오. 횡재를 만나면 반드시 그 보상으로 횡액을 당합니다. 행복은 결코 불로소득에 있지 않습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은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써야할지 밤잠이 오겠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모든 친구나 친지들이 당첨금을 노리는 도둑으로 보일 꺼예요. 그런 사람들은 돈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해요. 그런 투기... 정부에서 이런 걸 조장하곤 하는데 나쁜 놈들이에요. 선량한 국민들에게 잔뜩 바람을 불러일으켜 가지고 허황하고 한탄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인생이 투기일 수 있습니까. 그런데 속지 마십시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30년 전 가까이 되는 일인데 어떤 스님이 산신각에 열심히 기도를 했다가 어쨌든 복권에 당첨되어 은사스님에게 차도 사드리고 그 자신도 차를 사서 폼을 재고 다녔는데 그 후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퇴속해서 택시기사 노릇을 하고 있다네요. 그것이 공것이 아니예요. 중이 할 짓 없어 기도해가지고 그런 짓 합니까? 얼마 전에 비구니 스님도 복권에 당첨도 됐다죠. 그 비구니도 시집갈려고 할 거예요. 지참금을 마련했을 거예요.
수행자는 그런 곳에 팔려서는 안됩니다. 신앙생활하는 신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생각이 나면 돈 만원 우습게 생각하지 마시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세요. 그것은 확실한 거예요. 나누는 일이기 때문에 그 결과 열매는 확실한 것입니다. 복권 사는 건 결과가 없어요. 괜히 허황한 생각만 부풀어오르는 것이지...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실 때 멀리서 찾아온 한 나그네가 부처님께 이렇게 물었어요. “사람들은 더 없는 행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더 없는 행복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이 때에 부처님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가까히 하지 말며 어진 사람과 가까히 지내며 존경할만한 사람을 존경하라.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초발심 자경문에 보면 맨 처음에 ‘수원리악우(須遠離惡友)하고 친근현선(親近賢善)하야’ 이런 것이 나옵니다. 나쁜 벗은 멀리하고 어질고 착한 사람을 가까이 하라는 교훈이지요. 어리석은 사람과 가까히 하면 내 자신도 모르게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친구의 영향이란 안개에 옷 젖듯이 자신도 모르게 젖게됩니다. 존경할 만한 사람을 존경하면 자신이 향상됩니다.
분수에 알맞은 곳에 살고 일찍이 덕행을 쌓고 바른 원을 세워라.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니라.
장소가 되었건 집이 되었건 가재도구가 되건 분수에 알맞게 살라는 것입니다. 덕을 닦으라는 것이고 원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원은 삶의 목표이고 희망입니다. 원을 세운 사람은 어떤 상황에 부딛치더라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원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흔들립니다. 부처님과 보살은 무슨 힘으로 그렇게 된 줄 아십니까? 원의 힘으로 부처와 보살이 된 것입니다. 중생은 원을 세우지 않기 때문에 업의 놀음에 휩쓸리지 않습니까. 똑같은 불성을 지녔으면서도 불보살과 중생이 다른 것은 한쪽은 큰 원을 세웠기에 자기 자신을 확대하고 키워왔고 한쪽은 똑같은 불성을 지녔으면서도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업에 이끌려 하루하루 중생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고 보살피라. 일에 질서가 있어 더 혼란스럽지 않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니라.
당연한 소리인데 왜 이런 것 경전에 나옵니까. 이렇게 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귀찮다고 해서 양로원이나 관광지에 갖다 내버리고 하는 일이 가끔 있지 않습니까. 또 부모가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해서, 죽으려면 저 자신만 죽지 왜 자식까지 데리고 동반자살을 합니까. 별개의 인격인데... 물었던 사람이 남자이기에 부모와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지 만약 여자가 물었다면 부모와 남편을 사람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묻는 사람에 따라 답이 그렇게 다릅니다.
존경과 겸손과 만족과 감사와 때로는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니라.
유심히 들어보세요. 존경할 대상이 없다는 것은 인생이 황량합니다. 현재의 인간이든 역사적인 인물이든 간에 존경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자기의 삶에 목표가 되어 자신에게 크게 영향을 끼칩니다. 또 겸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세를 생각할 때... 오만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만족할 줄 알아야합니다. 현대인들은 무엇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늘 갈증상태이지요. 자기 분수를 모르기 때문에 그 일이 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무엇을 가지고도 감사할 줄 몰라요.
세상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걱정 근심이 없어 마음이 편안한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걱정근심이 업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이 서 있지 않으면 언제나 걱정근심이 따릅니다.
결론적으로 이와 같은 일을 한다면 어떤 일이 닥쳐도 좌절하지 않고 어느 곳에서나 행복할 수 있다. 부처님의 결론입니다.
초기 경전인 숫타나파타에 보면 행복론이 있습니다. 거기서 추린 것입니다. 제가 법화경이나 화엄경 이런 경전을 이야기하지 않고 숫타니파타와 법구경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이 부처님 육성이 배어있는 근본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경집입니다. 이 법문은 현학적이지 않기 때문에 누구든지 읽고 들으면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법구경에 보면 진정한 행복의 장이 있습니다.
원한을 품은 사람 속에 있으면서도
원한을 버리고 즐겁게 살자.
고뇌하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고뇌에서 벗어나 즐겁게 살자.
탐욕스런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탐욕에 벗어나 즐겁게 살자.
원한과 고뇌 탐욕 이것들은 우리들의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우리들의 상황입니다. 거기에 물들지 않고 즐겁게 살자는 것입니다. 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승리는 원한을 낳고
패하는 자는 괴로움에 신음을 한다.
마음에 고요를 얻은 사람은
승리와 패배를 버리고 즐겁게 산다.
이것이 중도의 가르침입니다.
정치는 화해의 기술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해당사자들이 이해관계에 얽혀서 서로 다투고 싸우는 것을 화해시키는 기술. 이것은 고도로 세련된 기술이지요. 피해당사자들은 이를 갈면서 원한을 지니게 됩니다. 반드시 또 다른 원한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원한을 주고 받으면서 되풀이 되고 세상은 조용한 날이 없이 아수라장이지요. 늘 싸우지요.
다시 법구경
건강은 가장 큰 이익이고 만족은 가장 큰 재산이다.
믿고 의지함은 가장 귀한 친구고,
얽힘에서 벗어남은 가장 큰 안락이다.
건강은 육체적인 건강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도 같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멀쩡하면서도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동시에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적은 것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알면 넉넉한 사람이고 남이 갖지 않은 않는 많은 것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모른다면 그는 늘 가난한 사람입니다. 믿고 의지할 곳이 있다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맞이하고 받아들이고 보내느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갈라집니다. 그 시간을 아주 유용하고 창조적이고 이웃에 덕을 나누면서 사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말짱한 육신을 가지고도 무가치하게 하루하루 인생을 탕진하며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적지 않습니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묵은 생각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원한의 생각에 갇혀서 두고두고 스스로 피해를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슴에 멍이 들고 가시가 돋치게 되요.
꽃들을 보세요. 오늘 핀 꽃은 어제 핀 꽃이 아닙니다. 금년에 핀 꽃은 작년에 피었던 그 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새 모습입니다. 우리 몸 가운데 세포는 늘 존재하지 않는대요. 세포는 늘 죽고 새로 생성이 된대요. 그런데 우리 생각만 늘 굳어있어 이미 지나간 과거를 가지고 거기에 매어 있기 때문에 그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불행하게 됩니다. 한 생각 크게 돌이켜서 따뜻하고 향기로운 본래의 자기 가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듭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만나요. 내일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만약 지금 지니고 있는 불행한 응어리를 풀어버리지 않으면 내생에까지 연장이 됩니다. 오늘로써 청산해야 됩니다. 한 생각 돌이키면 됩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 어떤 물건도 본래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마음이 씨앗이 되어 나를 괴롭히려고 부자유스럽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것을 털어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집회를 갖습니까? 무엇인가 새로워지기 위해서, 의미있는 인생을 누리기 위해서 서로 만나 주고 받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죠. 똑같은 되풀이, 그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삶입니다. 나무들 보세요. 새로운 잎들이 파릇파릇 피지 않습니까? 그것은 어제의 나무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환경속에서 우리들 자신도 자기 기량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새롭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묵은 수렁에 갇혀서 자기 자신을 순간순간 무가치한 일로 죽이지 마세요. 살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루하루 삶이 꽃처럼 새롭게 피어납니다. 새잎이 피어나는 초여름 이 좋은 시절에 각자의 꽃과 잎을 피우면서 두루 행복하기를 빌면서 제 말씀을 이만 마치겠습니다.
오늘 날씨도 궂은데 절에 오시느라고 힘들었겠습니다.
양력 4월 20일인 오늘은 곡우(穀雨)입니다. 곡우 무렵에는 비가 많이 내립니다. 곡식에 이로운 비라해서 곡우라고 합니다. 봄 가뭄을 해갈시키고, 이 무렵 비가 안오면 산불이 많습니다. 다행이 요즘 비가 내리니 산불 소식이 없어 좋습니다.
남쪽에서는 햇차를 수확할 것입니다. 그래서 곡우 전에 나오는 차를 비 우자, 앞 전자를 붙여 우전(雨前)이라고 상표를 붙여 팔지만은 곡우 후에 나와도 우전이라고 붙여 파니깐 크게 기대하지 마십시오.
얼었던 땅에 꽃이 피고 잠든 가지에서 새 잎이 펼쳐지는 자연의 놀라운 신비 앞에서 우리는 배울 것이 많습니다. 봄이 와서 꽃이 피지 않고 새 잎도 펼쳐지지 않는다고 한번 가상해보세요. 얼마나 끔찍하겠어요. 미래학자(환경론자) 이야기는 앞으로 멀지 않은 장래에, 지금 우리가 이런 식으로 계속 살아간다면, 봄이 와도 꽃이 피지 않고 잎도 피지 않고 새도 찾아오지 않을거래요. 지금 우리가 하루하루 살고 있는 생활양식이 반환경적이고 반생태적인 쪽으로 가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두렵다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앞으로 석유가 그렇게 매장량이 많지 않다고 그것을 미리 확보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들 자신은 어떤 봄을 맞이하고 있는가? 각자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해마다 봄이 오면 나무와 화목들이 꽃을 피우고 잎을 펼치는데 과연 내 자신 우리들은 어떻게 봄을 맞이하고 있는가?
온통 화장세계. 꽃으로 장식하는 자연을 불교경전에서 ‘화장세계’ 또는 ‘화장찰’이라고 합니다. ‘찰’이란 범어를 그대로 음역한 말인데 세계라는 뜻입니다. 또 ‘연화장’은 꽃으로 된 세상. 그러면 그 안에 사는 우리들 자신도 꽃다운 인생이 되어야 됩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있기 때문에 봄의 아름다움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지 않다면 이런 환경을 대할 수가 없어요. 살아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건강해서 절에 나올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꽃철에 다시 그 분들을 불러 세운다면 허락받은 세월을 어떻게 보낼지 한번 상상해보세요. 죽었던 사람들을 다시 깨워본다면 하루하루 어떻게 보낼 것인가 미루어 생각해보십시오. 모르긴해도 적어도 오늘 우리처럼 시간을 무가치한 일에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전 서울의 한 대학 연구소에서 현재 우리사회 국민 의식과 가치관에 대한 조사 연구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신문에서 보았지요. ‘당신은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이런 설문이었습니다. 한국인은 이러한 질문에 자신의 행복지수를 100점 만점에 66.5점으로 평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행복지수를 숫자로 나타낸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렇게 조사해본 것입니다. 3주일 동안 스무 살 이상 남녀 1,2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입니다.
그 답을 보면 행복한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건강을 들고 있습니다. 여기에 응답한 사람들은 모두 병원 문턱을 드나들던 사람일거예요. 이것이 70.2%예요.
다음이 경제적 풍요 11.1% 밖에 안됩니다. 배우자와의 사랑 6.5%, 언젠가는 수틀리면 물릴 수 있는 그런 수치에요. 신앙이 5.2%. 또 안정된 직장이 2.8%. 자녀의 성공이 2.6%.
우리의 의식과 가치관이 이런 것입니다. 개인이 모두 다르지만 조사한 수치입니다. 그러면 이 자리에서 내 자신은 100점 만점에 내 행복수치는 몇 점 매겨줄 것인가 한 번 헤아려보십시오.
제가 아는 잡지사에서 지령 400호를 맞아서 '행복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런 주제를 갖고 대담해달라는 요청이 왔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모른 체 할텐데 이 꽃철에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틀리는 일이 아니겠구나 싶어 받아들였습니다.
오늘은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행복에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환경에서 살기 때문에 어떤 기준을 가지고 행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행복은 어떤 의미에서는 주관가치입니다. 내 자신이 행복한 일이 다른 삶에게는 행복하지 않는 일이 될 수 있기에 행복의 기준이 무엇인가 보다는 그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각자 자기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 헤아려보십시오. 행복은 문을 두드리면서 찾아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안에서 우러나오고 배어나옵니다. 꽃향기처럼 은은히 배어나와요. 그러므로 자신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저 자신의 행복 비결을 공개해 드릴께요. 지난 입춘날, 입춘이면 꽃시장에 매화분이 나와요. 매화분을 구할까 싶어 아는 가게에 나갔더니 매화분이 아직 안나왔더라구요. 돌아서기가 안되어서 바이오렛 화분을 하나 샀어요. 단돈 천오백원에 화분 중에 가장 작은 화분이에요. 나는 바이오렛이면 오랑캐꽃 즉 제비꽃인즐 알았더니, 잎이 아주 탐스러운 꽃이 세 송이 피었는데 그것이 내 눈길을 끌어서 그걸 천오백원 주고 사왔어요. 아침 저녁으로 일과끝에 물도 주고 보살피고 두런두런 밤새 잘 잤느냐고 안부도 전하고 이렇게 넉 달 가까히 데리고 살았는데 그 화분을 대할 때마다 내 가슴이 따뜻해지더라고요. 4월 초에 같은 화분을 하나 더 샀어요. 나야 성미가 괴팍해서 홀로 떨어져 살기를 좋아하지만 화분은 홀로 있는게 적적하고 외로울 것 같아서 지 친구를 하나 더 데리고 왔다고 같이 곁에 놓았더니 이때부터 시샘을 하듯이 아주 무럭무럭 자라요. 화초를 길러본 분은 알겠지만 물보다는 하이폰엑스 비료에 물을 희석해주면 화초들이 아주 좋아합니다. 잎에는 그냥 물을 뿌려야지 하이폰엑스를 섞인 물을 주면 잎이 변색되요. 얼룩이 집니다. 꽃을 보살펴주면 내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그러면 무엇이 넉넉해지더라구요. 이것도 하나의 행복의 비결이 될 것입니다.
행복이라고 뭐 거창하고 큰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십억원 짜리 재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사소한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행복을 캐낼 수 있습니다.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밤중에 저가 기침을 해요. 누워있으면 계속 기침이 나기에 일단 앉아서 주섬주섬 흩어진 것을 정리하고 있으면 기침이 말끔히 가십니다. 이때 낮에보다도 새벽보다도 한밤중에 좌선하고 있으면 아주 정신이 맑아져요. 별도 한밤중에 아주 영롱합니다. 그렇듯이 우리들 정신상태도 한밤중에 또렷해지거든요. 이 때에 촛불을 켜고 - 저가 사는 곳은 한 보름 전에 얼음이 풀렸어요 - 얼음이 깨지는 개울물에 귀를 맡기고 있으면 맑고 투명한 그 자리가 정토요, 극락세계요, 별천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맑고 투명한 자리가 극락정토요, 별천지라는 것을 거듭 확인합니다. 이 밖에 더 바랄 것 없어요. 적어도 그 순간만은 둘레의 모든 것에 감사하고 고마워합니다.
한밤중에 깨워준 기침보살에게도 고마운 생각이 들어요. 옛사람들이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는 교훈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가끔 차를 좋아하시는 분은 그런걸 느낄 것입니다. 일 마치고 차 한 잔 마실까하고 물 떠다가 끓이고 차도구라도 내놓고 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저 뿐만 아니라 산중에 사는 사람들은 다 느끼겠지만, 내가 이 산중에 살면서 차 맛을 몰랐다면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이런 생각을 거듭거듭 하게 됩니다. 향기로운 차 한 잔을 통해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행복을 더 큰 데서 구하지 마세요. 아주 조그맣고 사소한 단돈 1,500원을 통해서 사람은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변고가 되었건 상황이 되었건 거부하지말고 그것을 받으세요. 받아드리면서 좋은 쪽으로 해석해요. 그런 상황이 오히려 고마워질 때가 있어요.
이와 같은 행복이 어디서 옵니까? 사소한 이런 일상을 누리면서 마음을 따뜻하게 가꿀 때마다 마음이 충만해져요.
자연계의 꽃이나 잎은 그런다고 치고 인간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랑과 신의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랑이란 부드럽고 따뜻하게 이웃과 나누는 일이지요. 사랑이란 남녀간에 짓고 까불고 갈라지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이웃과 나누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신의란 무엇입니까? 자기가 한 말대로 사는 것이지요. 자기가 한 말에 책임지는 것이 사람이지요. 믿을 신(信) 자(字)는 사람 인(人) 변에 말씀 언(言)한 것입니다. 사람의 말이 곧 믿음이요. 예전에는 문서가 따로 없었습니다. 말이 곧 믿음이었습니다. 집 문서건 등기 문서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자가 나오면서 위조 사기, 횡령이란 것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백인들이 미국의 원주민인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많은 문서를 약속했어요. 인디언들은 원래 말로써 신용거래를 했습니다. 백인들이 사기하고 거짓하여 인디언들을 한쪽으로 몰아서 멸종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대륙에서만이 아닙니다. 카-드, 뭐 이런 것에 사람의 말을 믿지 못하고 문서로 이루어진 부정이 많지 않습니까. 사람의 말이 곧 믿음이에요. 배신이란 믿음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인간의 가장 추악한 일은 믿음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이 사랑에 있다면 추악한 점은 약속을 저버리는, 즉 자기의 말을 스스로 저버리는 데에 있습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고 스스로 손해와 상처를 입히는 것이 바로 배신입니다. 그래서 배신자는 선량한 인간의 대열에서 제외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해요. 사람만이 책임을 집니다. 동물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그 책임을 통해서 순간순간 하루하루 인간이 형성되어갑니다.
어디, 로또복권들 삽니까?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은 행복할까요?
세상에 절대 공것은 없습니다. 그런 데에 속지 마십시오. 명심하십시오. 횡재를 만나면 반드시 그 보상으로 횡액을 당합니다. 행복은 결코 불로소득에 있지 않습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은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써야할지 밤잠이 오겠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모든 친구나 친지들이 당첨금을 노리는 도둑으로 보일 꺼예요. 그런 사람들은 돈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해요. 그런 투기... 정부에서 이런 걸 조장하곤 하는데 나쁜 놈들이에요. 선량한 국민들에게 잔뜩 바람을 불러일으켜 가지고 허황하고 한탄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인생이 투기일 수 있습니까. 그런데 속지 마십시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30년 전 가까이 되는 일인데 어떤 스님이 산신각에 열심히 기도를 했다가 어쨌든 복권에 당첨되어 은사스님에게 차도 사드리고 그 자신도 차를 사서 폼을 재고 다녔는데 그 후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퇴속해서 택시기사 노릇을 하고 있다네요. 그것이 공것이 아니예요. 중이 할 짓 없어 기도해가지고 그런 짓 합니까? 얼마 전에 비구니 스님도 복권에 당첨도 됐다죠. 그 비구니도 시집갈려고 할 거예요. 지참금을 마련했을 거예요.
수행자는 그런 곳에 팔려서는 안됩니다. 신앙생활하는 신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생각이 나면 돈 만원 우습게 생각하지 마시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세요. 그것은 확실한 거예요. 나누는 일이기 때문에 그 결과 열매는 확실한 것입니다. 복권 사는 건 결과가 없어요. 괜히 허황한 생각만 부풀어오르는 것이지...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실 때 멀리서 찾아온 한 나그네가 부처님께 이렇게 물었어요. “사람들은 더 없는 행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더 없는 행복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이 때에 부처님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가까히 하지 말며 어진 사람과 가까히 지내며 존경할만한 사람을 존경하라.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초발심 자경문에 보면 맨 처음에 ‘수원리악우(須遠離惡友)하고 친근현선(親近賢善)하야’ 이런 것이 나옵니다. 나쁜 벗은 멀리하고 어질고 착한 사람을 가까이 하라는 교훈이지요. 어리석은 사람과 가까히 하면 내 자신도 모르게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친구의 영향이란 안개에 옷 젖듯이 자신도 모르게 젖게됩니다. 존경할 만한 사람을 존경하면 자신이 향상됩니다.
분수에 알맞은 곳에 살고 일찍이 덕행을 쌓고 바른 원을 세워라.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니라.
장소가 되었건 집이 되었건 가재도구가 되건 분수에 알맞게 살라는 것입니다. 덕을 닦으라는 것이고 원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원은 삶의 목표이고 희망입니다. 원을 세운 사람은 어떤 상황에 부딛치더라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원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흔들립니다. 부처님과 보살은 무슨 힘으로 그렇게 된 줄 아십니까? 원의 힘으로 부처와 보살이 된 것입니다. 중생은 원을 세우지 않기 때문에 업의 놀음에 휩쓸리지 않습니까. 똑같은 불성을 지녔으면서도 불보살과 중생이 다른 것은 한쪽은 큰 원을 세웠기에 자기 자신을 확대하고 키워왔고 한쪽은 똑같은 불성을 지녔으면서도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업에 이끌려 하루하루 중생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고 보살피라. 일에 질서가 있어 더 혼란스럽지 않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니라.
당연한 소리인데 왜 이런 것 경전에 나옵니까. 이렇게 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귀찮다고 해서 양로원이나 관광지에 갖다 내버리고 하는 일이 가끔 있지 않습니까. 또 부모가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해서, 죽으려면 저 자신만 죽지 왜 자식까지 데리고 동반자살을 합니까. 별개의 인격인데... 물었던 사람이 남자이기에 부모와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지 만약 여자가 물었다면 부모와 남편을 사람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묻는 사람에 따라 답이 그렇게 다릅니다.
존경과 겸손과 만족과 감사와 때로는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니라.
유심히 들어보세요. 존경할 대상이 없다는 것은 인생이 황량합니다. 현재의 인간이든 역사적인 인물이든 간에 존경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자기의 삶에 목표가 되어 자신에게 크게 영향을 끼칩니다. 또 겸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세를 생각할 때... 오만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만족할 줄 알아야합니다. 현대인들은 무엇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늘 갈증상태이지요. 자기 분수를 모르기 때문에 그 일이 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무엇을 가지고도 감사할 줄 몰라요.
세상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걱정 근심이 없어 마음이 편안한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걱정근심이 업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이 서 있지 않으면 언제나 걱정근심이 따릅니다.
결론적으로 이와 같은 일을 한다면 어떤 일이 닥쳐도 좌절하지 않고 어느 곳에서나 행복할 수 있다. 부처님의 결론입니다.
초기 경전인 숫타나파타에 보면 행복론이 있습니다. 거기서 추린 것입니다. 제가 법화경이나 화엄경 이런 경전을 이야기하지 않고 숫타니파타와 법구경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이 부처님 육성이 배어있는 근본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경집입니다. 이 법문은 현학적이지 않기 때문에 누구든지 읽고 들으면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법구경에 보면 진정한 행복의 장이 있습니다.
원한을 품은 사람 속에 있으면서도
원한을 버리고 즐겁게 살자.
고뇌하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고뇌에서 벗어나 즐겁게 살자.
탐욕스런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탐욕에 벗어나 즐겁게 살자.
원한과 고뇌 탐욕 이것들은 우리들의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우리들의 상황입니다. 거기에 물들지 않고 즐겁게 살자는 것입니다. 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승리는 원한을 낳고
패하는 자는 괴로움에 신음을 한다.
마음에 고요를 얻은 사람은
승리와 패배를 버리고 즐겁게 산다.
이것이 중도의 가르침입니다.
정치는 화해의 기술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해당사자들이 이해관계에 얽혀서 서로 다투고 싸우는 것을 화해시키는 기술. 이것은 고도로 세련된 기술이지요. 피해당사자들은 이를 갈면서 원한을 지니게 됩니다. 반드시 또 다른 원한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원한을 주고 받으면서 되풀이 되고 세상은 조용한 날이 없이 아수라장이지요. 늘 싸우지요.
다시 법구경
건강은 가장 큰 이익이고 만족은 가장 큰 재산이다.
믿고 의지함은 가장 귀한 친구고,
얽힘에서 벗어남은 가장 큰 안락이다.
건강은 육체적인 건강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도 같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멀쩡하면서도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동시에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적은 것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알면 넉넉한 사람이고 남이 갖지 않은 않는 많은 것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모른다면 그는 늘 가난한 사람입니다. 믿고 의지할 곳이 있다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맞이하고 받아들이고 보내느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갈라집니다. 그 시간을 아주 유용하고 창조적이고 이웃에 덕을 나누면서 사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말짱한 육신을 가지고도 무가치하게 하루하루 인생을 탕진하며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적지 않습니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묵은 생각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원한의 생각에 갇혀서 두고두고 스스로 피해를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슴에 멍이 들고 가시가 돋치게 되요.
꽃들을 보세요. 오늘 핀 꽃은 어제 핀 꽃이 아닙니다. 금년에 핀 꽃은 작년에 피었던 그 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새 모습입니다. 우리 몸 가운데 세포는 늘 존재하지 않는대요. 세포는 늘 죽고 새로 생성이 된대요. 그런데 우리 생각만 늘 굳어있어 이미 지나간 과거를 가지고 거기에 매어 있기 때문에 그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불행하게 됩니다. 한 생각 크게 돌이켜서 따뜻하고 향기로운 본래의 자기 가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듭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만나요. 내일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만약 지금 지니고 있는 불행한 응어리를 풀어버리지 않으면 내생에까지 연장이 됩니다. 오늘로써 청산해야 됩니다. 한 생각 돌이키면 됩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 어떤 물건도 본래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마음이 씨앗이 되어 나를 괴롭히려고 부자유스럽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것을 털어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집회를 갖습니까? 무엇인가 새로워지기 위해서, 의미있는 인생을 누리기 위해서 서로 만나 주고 받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죠. 똑같은 되풀이, 그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삶입니다. 나무들 보세요. 새로운 잎들이 파릇파릇 피지 않습니까? 그것은 어제의 나무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환경속에서 우리들 자신도 자기 기량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새롭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묵은 수렁에 갇혀서 자기 자신을 순간순간 무가치한 일로 죽이지 마세요. 살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루하루 삶이 꽃처럼 새롭게 피어납니다. 새잎이 피어나는 초여름 이 좋은 시절에 각자의 꽃과 잎을 피우면서 두루 행복하기를 빌면서 제 말씀을 이만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