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논술 자료함
오늘의 대중 앞에 소환된 그날의 민중
시간의 힘은 무섭다. 결코 잊혀질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들도 현재성을 상실하면 균질한 과거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경험한 이에게는 너무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고통과 실감의 순간들은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세대들의 감각 속에서 의미와 개념으로 전환되어버린다. 모든 현재는 과거가 될 운명을 거부할 수 없기에 조금이라도 앞서 태어난 이들은 자신이 경험한 어떤 것들이 사장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발버둥쳐야만 한다. 과거를 어떻게 현재로 소환할 것인가, 역사를 어떻게 지금-여기와 관련시킬 것인가의 문제는 기억을 갖고 있는 자들, 지울 수 없는 사건을 몸속에 각인하고 있는 이들의 소명이다. 기억을 어떤 방식으로 서술할 것인가는 지금 이 자리에 어떻게 서 있을 것인가와 긴밀하게 연관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꽃잎>이 광주 금남로에 피를 뿌렸던 원혼을 어린 소녀의 몸을 통해 은유적으로 살려내며 지식인적 사유와 죄의식을 이야기한 영화였다면, <화려한 휴가>는 좀더 직접적이고 대중적인 코드로 현재와 접속하려고 한다. 이 영화가 광주에 다가가려고 했던 그 길 위에서 이성욱의 글(<씨네21> 611호)처럼, 대중의 죄의식이 자본을 위해 소비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과연 형식의 대중성은 언제나 위험한 것인가. 그런 의문에서 이 글은 시작한다.
지적인 성찰을 피해 도청에 이르는 길
<화려한 휴가>의 기본적인 설정은 <태극기를 휘날리며>와 상당히 유사하다. 의좋은 두 형제가 있고, 큰형은 실질적 가장으로 동생의 보호자임을 자처한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형제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여인이 있다.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나약하고 불쌍했던 어머니는, <화려한 휴가>에서는 혈연적인 연결은 아니나 심정적으로 모든 이의 어머니상처럼 작용하는 눈먼 어머니 나문희로 대체된다. 6·25와 5·18 이전 두 가족의 낯간지러울 정도로 화목하고 끈끈한 유대감이 전시되지만 이러한 풍경은 깨지기 위한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어떠한 정서적 공명도 자아내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은 비극적인 사건이 없었으면 언젠가 도달할지도 모르는 (실제로는 도달 불가능하지만, 도달할 수 있다는 환상을 자극하는) 가상이며 주인공으로 하여금 훼손된 과거를 회복하기 위한 어떤 희생도 불사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김지훈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그날의 금남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이끈 것은 독재 정권의 폭력적인 정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기보다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누군가에게 자행된 실제적 폭력에 대한 거부반응 때문이었을 것이다. 택시운전기사 민우(김상경)는 신애(이요원)와의 첫 데이트를 방해하는, 극장 안으로 파고든 최루가스나 눈앞에서 시민을 폭행하는 공수부대의 모습을 목도하고도 어떤 저항감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빠른 달음박질로 피해 달아나야 할 상황일 뿐, 저항정신을 자아내는 충격적인 광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 시대에 폭력은 일상화되어 있었고, 민중에게 그런 모습은 고통스럽지만 감내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감내와 순응이 저항으로 전화되기 위해서는 좀더 강렬하고, 직접적인 상실의 경험이 필요하다. 진우(이준기)는 절친한 친구의 죽음 때문에 거리로 나왔고, 진우를 만류하던 민우가 총을 잡게 된 것은 진우를 잃음으로써 동생의 상실감을 스스로 체감하게 되었기 때이다. 이런 정서의 연쇄 반응, 슬픔의 도미노가 숨죽이던 민중을 폭력에 대항하여 일어서게 만든다.
지식인 주인공을 최대한 배제한 <화려한 휴가>에도 정부와 민중의 대립에 대해 직접적으로 발화하며 비판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인물은 존재하는데, 그것은 시민군의 대장인 박흥수(안성기)와 김 신부(송재호)다. 전역 장교인 박흥수는 민중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것은 ‘진정한 군인’의 태도가 아니라며, 대항전선을 형성하는 구심점이 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진정한 군인’이 과연 무엇인가는 매우 추상적이며 모호하므로, 그것은 그저 눈앞에 펼쳐진 폭력을 부정하는 것에 그칠 뿐 군대/정부의 작동방식 그 자체에 대한 근원적 반성이라고 보기 힘들다. 김 신부는 정신적 지원자의 역할을 하며 외신의 보도를 시민군에게 전달해주면서 독려하지만 그의 비판적 발언은 독백이나 탄식에 가깝다. 이 작품이 켄 로치의 혁명영화들과 차별성을 이루는 지점은 이 두 인물의 역할을 좀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전남도청의 지하실에서 시민군은 미군의 개입에 대해 두 인물의 분리된 견해를 잠시 맞이하지만 그것은 어떤 토론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일주일 뒤의 종말이라는 박흥수의 논리에 쉽게 손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분명 당대에 민주주의 수호자로 표상된 미국의 이중성과 당시의 정부의 지배논리를 어떤 방식으로 돌파해야 할 것인가라는 전망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계기를 차단한다. 아마도 그러한 전망이 존재했더라면 영화에서 그날의 광주가 더 많은 현재성을 획득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날의 도청은 무고한 민중의 집단 장례터가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여기를 위한 무엇이 될 수 있는지까지 말할 수 있는 사유의 장소로 형상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규정되지 않은, 형성되는 주체로서의 대중
이처럼 <화려한 휴가>는 5·18의 혁명성의 실체를 지적 논의를 통해 형상화하는 길을 피해나간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정서적 반응을 최대화하면서 그것을 관객에게 그대로 이양한다. 그것을 위해 금남로를 물들인 선혈을 보여주는 데 인색하지 않으며, 공수부대가(폭력의 근원이 누구였는지를 애매하게 암시하며 악의 화신처럼 형상화된 공수부대의 대장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비극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관객이 영화 외적인 지식을 통해 메워 넣지 않으면 안 된다)자행한 폭력을 극적으로 제시한다. 비극의 근원을 극렬하게 파헤치기보다 비극에 처한 인물의 상황만을 최고조로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비극적이기보다 멜로드라마틱하다. 비극은 주인공이 표상하는 정의가 실현 불가능함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필연성을 통해 제시하지만, 멜로드라마는 지적, 심리학적 필연성보다 그들이 처한 상태의 비장미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는 보는 이에게 견고한 사유를 촉구하지 않고 정서적 동화를 자아낸다. 이러한 효과는 바로 대중성과 쉽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이 장르가 갖고 있는 양날의 칼이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사회를 지배하는 보편적 논리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 논리로 인해 파생되는 삶의 폭력성을 과잉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지적성찰이 가득한 영화들은 현상에 거리를 두고 비판적 자의식을 통해 분석해내지만, 그 과정에서 대중과의 호흡을 잊어버리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멜로드라마는 말랑말랑한 외피를 통해 대중의 정서 속으로 깊이 침투하고 현실의 균열된 지점들을 드러낸다. <화려한 휴가>는 80년대를 지배했던 폭력적인 정치의 핵심으로 다가서지는 않지만, 그것의 외현을 대중이 가장 소화하기 쉬운 형태로 제시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주요 캐릭터 가운데 유일한 여성인 신애이다. 그녀는 이미 과거 속의 혁명에 참가할 수 없는 현재의 관객이 정서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동화될 수 있는 인물이다. 간호사인 신애는 총을 잡는 대신 총에 맞고 쓰러진 시민들을 치료하는 역할을 한다. 앰뷸런스를 타고 총격전의 한가운데로 침투한 그녀는 사람을 살리러 갔다가 죽이고 마는 아이러니한 체험 속에서 분열된 자아를 경험한다. 이것은 5·18의 시민군이 총격전을 통해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했던 것을 비난하는 설익은 비폭력주의가 그날의 시민들에게 불가능했음을 설득하는 대목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음을 폭력을 통해 시위했다기보다 그것 외에는 자신의 혹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 불가능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이 그 과정에서 겪었을 심리적 혼란상을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녀가 도청을 빠져 나와 지프차를 위에서 불 꺼진 광주 시내를 돌며 ‘우리를 기억해주세요’라고 외치는 것은 실상 이 영화의 주제이자,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당시의 광주에서 도청의 시민군과 집안에서 숨죽이고 있는 이들은 그들과 우리로 분리될 수 없는 심정적 상태였을 것이니 말이다. 그녀가 확성기를 통해 말을 거는 이들은 6·25나 광주나 동일한 비극적 역사라며 무차별적 과거로 몰아넣는, 인식의 어두움 상태에 있는 오늘날의 관객인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혼란 속에서 대중의 힘을 처음 보았던 구스타프 르 봉은 그들이 가진 방향성없는 힘과 감성본위의 태도에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감정의 충동질에 의해 움직이는 군중을 폄하하며 대중이란 무지로 똘똘 뭉쳐진 거대한 타자로 규정했던 그도 그들 안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큰 힘이 도사리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대중이란 언제나 동일한 정서에 반응하고 무자각적 행동을 양산해내는 확고불변한 대상이 아니라 매번 다른 방향성을 갖고 운동하며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는 집단 주체이다. 그러므로 대중적 양식을 차용하고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한다는 것 그 자체가 <화려한 휴가>의 치명적 약점이라고 보아서는 곤란하다. 이 영화가 대중의 시선을 어디로 향하게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 작품은 ‘5·18의 광주와 죽음을 각오하고 그들이 지켜내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매우 충실하며 대중을 자극할 수 있는 영화적 장치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물론 해석을 포기하고 기억을 선택한 이 영화가 의의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5·18’의 민중을 전면적, 직접적으로 제시한 첫 영화라는 영화사에서의 위치적 특수성 때문이며 이런 면죄부는 이 작품까지만 유효하다. 한국관객은 앞으로 더 많은 광주를, 80년대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을 만나야만 한다.
출전: 씨네21 2007년8월9일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시간의 힘은 무섭다. 결코 잊혀질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들도 현재성을 상실하면 균질한 과거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경험한 이에게는 너무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고통과 실감의 순간들은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세대들의 감각 속에서 의미와 개념으로 전환되어버린다. 모든 현재는 과거가 될 운명을 거부할 수 없기에 조금이라도 앞서 태어난 이들은 자신이 경험한 어떤 것들이 사장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발버둥쳐야만 한다. 과거를 어떻게 현재로 소환할 것인가, 역사를 어떻게 지금-여기와 관련시킬 것인가의 문제는 기억을 갖고 있는 자들, 지울 수 없는 사건을 몸속에 각인하고 있는 이들의 소명이다. 기억을 어떤 방식으로 서술할 것인가는 지금 이 자리에 어떻게 서 있을 것인가와 긴밀하게 연관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꽃잎>이 광주 금남로에 피를 뿌렸던 원혼을 어린 소녀의 몸을 통해 은유적으로 살려내며 지식인적 사유와 죄의식을 이야기한 영화였다면, <화려한 휴가>는 좀더 직접적이고 대중적인 코드로 현재와 접속하려고 한다. 이 영화가 광주에 다가가려고 했던 그 길 위에서 이성욱의 글(<씨네21> 611호)처럼, 대중의 죄의식이 자본을 위해 소비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과연 형식의 대중성은 언제나 위험한 것인가. 그런 의문에서 이 글은 시작한다.
지적인 성찰을 피해 도청에 이르는 길
<화려한 휴가>의 기본적인 설정은 <태극기를 휘날리며>와 상당히 유사하다. 의좋은 두 형제가 있고, 큰형은 실질적 가장으로 동생의 보호자임을 자처한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형제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여인이 있다.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나약하고 불쌍했던 어머니는, <화려한 휴가>에서는 혈연적인 연결은 아니나 심정적으로 모든 이의 어머니상처럼 작용하는 눈먼 어머니 나문희로 대체된다. 6·25와 5·18 이전 두 가족의 낯간지러울 정도로 화목하고 끈끈한 유대감이 전시되지만 이러한 풍경은 깨지기 위한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어떠한 정서적 공명도 자아내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은 비극적인 사건이 없었으면 언젠가 도달할지도 모르는 (실제로는 도달 불가능하지만, 도달할 수 있다는 환상을 자극하는) 가상이며 주인공으로 하여금 훼손된 과거를 회복하기 위한 어떤 희생도 불사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김지훈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그날의 금남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이끈 것은 독재 정권의 폭력적인 정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기보다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누군가에게 자행된 실제적 폭력에 대한 거부반응 때문이었을 것이다. 택시운전기사 민우(김상경)는 신애(이요원)와의 첫 데이트를 방해하는, 극장 안으로 파고든 최루가스나 눈앞에서 시민을 폭행하는 공수부대의 모습을 목도하고도 어떤 저항감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빠른 달음박질로 피해 달아나야 할 상황일 뿐, 저항정신을 자아내는 충격적인 광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 시대에 폭력은 일상화되어 있었고, 민중에게 그런 모습은 고통스럽지만 감내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보통 사람들의 감내와 순응이 저항으로 전화되기 위해서는 좀더 강렬하고, 직접적인 상실의 경험이 필요하다. 진우(이준기)는 절친한 친구의 죽음 때문에 거리로 나왔고, 진우를 만류하던 민우가 총을 잡게 된 것은 진우를 잃음으로써 동생의 상실감을 스스로 체감하게 되었기 때이다. 이런 정서의 연쇄 반응, 슬픔의 도미노가 숨죽이던 민중을 폭력에 대항하여 일어서게 만든다.
지식인 주인공을 최대한 배제한 <화려한 휴가>에도 정부와 민중의 대립에 대해 직접적으로 발화하며 비판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인물은 존재하는데, 그것은 시민군의 대장인 박흥수(안성기)와 김 신부(송재호)다. 전역 장교인 박흥수는 민중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것은 ‘진정한 군인’의 태도가 아니라며, 대항전선을 형성하는 구심점이 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진정한 군인’이 과연 무엇인가는 매우 추상적이며 모호하므로, 그것은 그저 눈앞에 펼쳐진 폭력을 부정하는 것에 그칠 뿐 군대/정부의 작동방식 그 자체에 대한 근원적 반성이라고 보기 힘들다. 김 신부는 정신적 지원자의 역할을 하며 외신의 보도를 시민군에게 전달해주면서 독려하지만 그의 비판적 발언은 독백이나 탄식에 가깝다. 이 작품이 켄 로치의 혁명영화들과 차별성을 이루는 지점은 이 두 인물의 역할을 좀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전남도청의 지하실에서 시민군은 미군의 개입에 대해 두 인물의 분리된 견해를 잠시 맞이하지만 그것은 어떤 토론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일주일 뒤의 종말이라는 박흥수의 논리에 쉽게 손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분명 당대에 민주주의 수호자로 표상된 미국의 이중성과 당시의 정부의 지배논리를 어떤 방식으로 돌파해야 할 것인가라는 전망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계기를 차단한다. 아마도 그러한 전망이 존재했더라면 영화에서 그날의 광주가 더 많은 현재성을 획득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날의 도청은 무고한 민중의 집단 장례터가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여기를 위한 무엇이 될 수 있는지까지 말할 수 있는 사유의 장소로 형상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규정되지 않은, 형성되는 주체로서의 대중
이처럼 <화려한 휴가>는 5·18의 혁명성의 실체를 지적 논의를 통해 형상화하는 길을 피해나간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정서적 반응을 최대화하면서 그것을 관객에게 그대로 이양한다. 그것을 위해 금남로를 물들인 선혈을 보여주는 데 인색하지 않으며, 공수부대가(폭력의 근원이 누구였는지를 애매하게 암시하며 악의 화신처럼 형상화된 공수부대의 대장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비극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관객이 영화 외적인 지식을 통해 메워 넣지 않으면 안 된다)자행한 폭력을 극적으로 제시한다. 비극의 근원을 극렬하게 파헤치기보다 비극에 처한 인물의 상황만을 최고조로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비극적이기보다 멜로드라마틱하다. 비극은 주인공이 표상하는 정의가 실현 불가능함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필연성을 통해 제시하지만, 멜로드라마는 지적, 심리학적 필연성보다 그들이 처한 상태의 비장미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는 보는 이에게 견고한 사유를 촉구하지 않고 정서적 동화를 자아낸다. 이러한 효과는 바로 대중성과 쉽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이 장르가 갖고 있는 양날의 칼이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사회를 지배하는 보편적 논리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 논리로 인해 파생되는 삶의 폭력성을 과잉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지적성찰이 가득한 영화들은 현상에 거리를 두고 비판적 자의식을 통해 분석해내지만, 그 과정에서 대중과의 호흡을 잊어버리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멜로드라마는 말랑말랑한 외피를 통해 대중의 정서 속으로 깊이 침투하고 현실의 균열된 지점들을 드러낸다. <화려한 휴가>는 80년대를 지배했던 폭력적인 정치의 핵심으로 다가서지는 않지만, 그것의 외현을 대중이 가장 소화하기 쉬운 형태로 제시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주요 캐릭터 가운데 유일한 여성인 신애이다. 그녀는 이미 과거 속의 혁명에 참가할 수 없는 현재의 관객이 정서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동화될 수 있는 인물이다. 간호사인 신애는 총을 잡는 대신 총에 맞고 쓰러진 시민들을 치료하는 역할을 한다. 앰뷸런스를 타고 총격전의 한가운데로 침투한 그녀는 사람을 살리러 갔다가 죽이고 마는 아이러니한 체험 속에서 분열된 자아를 경험한다. 이것은 5·18의 시민군이 총격전을 통해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했던 것을 비난하는 설익은 비폭력주의가 그날의 시민들에게 불가능했음을 설득하는 대목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음을 폭력을 통해 시위했다기보다 그것 외에는 자신의 혹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 불가능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이 그 과정에서 겪었을 심리적 혼란상을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녀가 도청을 빠져 나와 지프차를 위에서 불 꺼진 광주 시내를 돌며 ‘우리를 기억해주세요’라고 외치는 것은 실상 이 영화의 주제이자,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당시의 광주에서 도청의 시민군과 집안에서 숨죽이고 있는 이들은 그들과 우리로 분리될 수 없는 심정적 상태였을 것이니 말이다. 그녀가 확성기를 통해 말을 거는 이들은 6·25나 광주나 동일한 비극적 역사라며 무차별적 과거로 몰아넣는, 인식의 어두움 상태에 있는 오늘날의 관객인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혼란 속에서 대중의 힘을 처음 보았던 구스타프 르 봉은 그들이 가진 방향성없는 힘과 감성본위의 태도에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감정의 충동질에 의해 움직이는 군중을 폄하하며 대중이란 무지로 똘똘 뭉쳐진 거대한 타자로 규정했던 그도 그들 안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큰 힘이 도사리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대중이란 언제나 동일한 정서에 반응하고 무자각적 행동을 양산해내는 확고불변한 대상이 아니라 매번 다른 방향성을 갖고 운동하며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는 집단 주체이다. 그러므로 대중적 양식을 차용하고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한다는 것 그 자체가 <화려한 휴가>의 치명적 약점이라고 보아서는 곤란하다. 이 영화가 대중의 시선을 어디로 향하게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 작품은 ‘5·18의 광주와 죽음을 각오하고 그들이 지켜내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매우 충실하며 대중을 자극할 수 있는 영화적 장치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물론 해석을 포기하고 기억을 선택한 이 영화가 의의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5·18’의 민중을 전면적, 직접적으로 제시한 첫 영화라는 영화사에서의 위치적 특수성 때문이며 이런 면죄부는 이 작품까지만 유효하다. 한국관객은 앞으로 더 많은 광주를, 80년대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을 만나야만 한다.
출전: 씨네21 2007년8월9일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