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논술 자료함
우습고도 재미있는 “디-워” 논란
* 아래 글들은 최근 심형래 감독이 7년 만에 들고나온 영화"디-워"에 대한 논란을 담았습니다. 각 글들을 읽고 1. 영화비평 어떻게 해야하나? 2. 우리 영화 바로보기의 올바른 태도 3. "디-워"논쟁, 무엇이 옳고 그른가? 에 대해 토론해 봅시다.
1. 진중권 냉정한 비평, 논쟁에 휩싸이는 이유
[100분토론 후기] 진중권 교수의 '디빠에게 고함' / 진중권(angelus) 기자
<디 워> 논란이 뜨겁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9일 방송된 MBC <100분 토론>에서 영화 <디 워>를 비판한 후 네티즌에게 집중 포화를 맞은 문화평론가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에게 <100분 토론> 뒤 일어난 일과 영화 <디 워>에 대한 원고를 청탁했다. 진 교수는 아래 글이 <100분 토론>과 그 뒤에 일어난 일들, 일부 네티즌이 진 교수 블로그에 몰려가 올려놓은 글들에 대한 답변을 포함하고 있다고 밝혔다. <편집자 주>
비평=비판=비난=비방=흥행 망치기?
<디 워> 광팬들, 집단행패 그만해라 글쓴이 : 진중권 (중앙대 교수)
<디 워> 찬성 쪽 패널들이 말을 못했다고 질타를 좀 받는 모양이다. 이건 말재주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적 포지션의 문제다. 어느 누구라도 그 포지션에서는 그 이상 할 수 없다. 나도 그렇게 못할 게다. 심형래 감독의 열광자들은 자기 패널들을 향해 '이렇게 했어야 한다, 저렇게 했어야 한다'고 구구하게 주문을 많이 한다. 하재근씨는 네티즌들이 애써 마련해 준 '총탄'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사과까지 한다. 하씨는 나와 달라서 전쟁터에 나오기에는 너무 착한 사람이다.
사실 하씨와 나는 견해가 많이 다르지 않다. 나는 다수가 조성하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발언의 자유를 빼앗긴 소수를 옹호하려 했고, 하씨는 <디 워>를 비판하는 소수를 존중하고 <디 워>를 보고 감동하는 다수를 이해하면서 두 그룹이 화해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하지만 화해의 전제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는 것. 사과 없는 '화해'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나는 토론을 어정쩡한 타협에서 끝내기보다는 논리적으로 끝장을 보는 쪽을 택해야 했다.
인터넷에서 집단의 품에 묻혀서 까부는 네티즌들은 야무지게도 하씨 말고 자기들이 나왔으면 상황이 달랐을 거라고 믿는 모양이다. 그 허접스러운 논리를 들고 용감하게 방송에 나왔다면, 그날 <100분 토론> 시청률이 거의 '무릎 팍 도사'에 육박했을 게다. 제일 까부는 친구를 대표로 뽑아 한번 내보내보라. 집단 속에선 그렇게 사납던 아이들도 정작 개인으로 만나보면, 그렇게 착할 수가 없다. 우기지도 않고, 싹싹하게 사과도 잘 하고.
애초에 <디 워> 열풍은 논리가 아니라 정서에서 비롯된 것. 논리와 정서는 원래 만날 필요가 없었다. 내 돈 내고 내가 영화 보고, 내가 좋다는 데 뭐가 문제인가? 그럼. 그렇다면 내 돈 내고 내가 영화 보고, 후지다고 말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말아야지.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된다는 게 문제다. 그러니까 이 논쟁은 '논리로는' 애초에 '심빠'들이 이길 수 없는 구조. 틀린 논리는 아무리 많은 수의 머릿속에 담겨 와도 한 큐. 큐질을 머릿수만큼 반복할 필요는 없다.
작품 자체로
방송을 위해 받아본 큐시트에는 정작 작품 자체에 관한 얘기는 별로 없었다. 이래서는 논의가 겉돌 수밖에 없다. 헝클어진 실타래가 있으면, 실마리를 잡아내야 한다. 실 끝을 잘못 선택하면 실타래는 겉잡을 수 없이 엉켜버린다. 반면 제대로 실마리를 잡으면 실타래는 술술 풀린다. 이 논쟁에서 실마리는 바로 작품 자체. 모든 논의가 작품의 질에 대한 평론가들의 언급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대중이 평론가들의 혹평에 분노하는 것은, 작품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 그저 막연히 '작품이 좀 허술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감독의 노력, 컴퓨터그래픽(CG)의 성과, 미국에서 거둘 성공에 비하면 그 정도 결함은 눈감아줘야 한다'는 게 대중의 정서다. 이런 상황에서 논쟁의 승패는 작품의 구조적 결함이 얼마나 심각한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데에 달려 있다.
토론이 시작되자 곧바로 작품 자체로 덤벼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 매듭만 풀면 나머지 논점은 저절로 다 풀리게 되어 있다. 상대편에서는 이를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긴, 예상을 했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워낙 작품 자체에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격하는 쪽은 마침 전공이 미학이라 애초에 무장의 수준이 다르다. 거기에 성깔도 그다지 온순한 편이 못 된다.
'싸가지'에 관하여
"논리는 옳다, 그런데 '싸가지'가 없다." 반응은 대충 이렇게 요약된다. 내가 인간성마저 좋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태도까지 점잖았다면, 그나마 끓어오르는 분노를 배출할 통로마저 막혀 임상의학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사태가 벌어졌을 게다. 이는 재정 악화를 낳고, 다시 의료보험 개혁 요구로 이어질 것이며, 그럼 유시민씨가 부랴부랴 보건복지부로 복귀하여 2007년 대선 구도에까지 영향을 끼쳤을 게다(애국 두뇌에게는 이게 농담이라는 것까지 일일이 다 말해줘야 한다).
'꼭지가 돌았다'는 말을 트집 잡는 모양이다. 나는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감독에 대한 네티즌들의 사이버 폭력에 꼭지가 돌아야 한다고 믿는다. 왜? 언젠가 대중의 폭력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짓은 하면 안 된다. <100분 토론>에 나간 것도 <디 워>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행패 부리는 짓 좀 그만 하라'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EBS 개고기 토론과 MBC <디 워> 토론을 비교해 보면, 내 태도가 다름을 알 수 있을 게다. 개고기 토론에서 상대는 사회적으로 소수다. 극우파가 아닌 한, 소수자는 함부로 몰아치면 안 된다. 반면 <디 워> 토론의 상대는 사회적으로 다수이고, 상당수는 수적인 우세로 소수의 입을 가로막고 있다. 당연히 태도가 다를 수밖에. 나는 이런 게 민주시민의 진정한 '싸가지'라 믿는다.
평론가의 임무
대중의 환호를 등에 업고 설치는 것은 검객이 아니라 양아치나 할 짓이다. 물론 이럴 때 슬쩍 대중의 감정에 편승하면 여러 모로 얻는 게 많다는 것을 내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먹물 노릇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이 들어야 할 얘기를 하는 것. 그게 먹물의 임무이고, 먹물의 윤리다. 평론가라는 이름의 먹물도 마찬가지다. 평론가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축복만 하는 예식장의 주례가 아니다.
평론은 예술적 소통에서 피드백 시스템에 해당한다. 하다못해 신발을 하나 만들어도 출시 전에 철저하게 검사한다. 그래야 시장에 나가 흠을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나라도 아니고 영화의 본고장인 할리우드에, 심지어 그것도 블록버스터로 승부를 걸겠다는 영화가 검사조차 안 받겠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제품의 질이 떨어진다는 검사 결과를 없앤다고 제품의 질이 좋아지는가?
우리 사회의 평론에 대한 관념을 보자. '비평=비판=비난=비방=흥행 망치기', 그리하여 급기야는 '매국행위.' 더 가관은 트집을 잡기 위해 늘어놓는 궤변이다. 그 논리를 들어보면, 호모 사피엔스의 두뇌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수준으로 퇴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1. 나는 <디 워>를 감동적으로 보았다.
2. 근데 너는 왜 작품이 후지다고 하냐?
3. 그것은 나를 우습게 보는 거다.
4. 500만 관객을 무시하는 오만이다.
5. 그러므로 모 감독은 사과하라.
6. 여러분, 대국민 사과 요구 서명합시다.
7. 이것은 전쟁이다. 충무로를 타격하라, 평론가를 타도하라.
놀라운 것은, 이런 일이 정신병동의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중의 혁명?
일부 언론에서는 '대중지성' 운운하며 상황을 '대중 대 평론가'의 싸움으로 몰고 갔다. '대중지성'이 뭔지나 알고 떠드는 걸까? 평론가 중 그 누구도 자기가 권하는 영화가 언제나 대중의 사랑을 받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매트릭스 I>처럼 대중성과 작품성이 일치하는 영화도 있고, <디 워>처럼 작품성은 없는데 대중성만 있는 영화도 있고, <블레이드 러너>처럼 작품성은 있는데 대중성이 없는 영화가 있는 거다.
이번 사태가 평론가에 대한 대중의 반란, 디지털 민주주의 혁명이란다. 영구가 한 말이 아니다. 언론에서 떠드는 말이다. 작품성이 뛰어나면 대개 대중성은 떨어진다. 가령 백남준 비디오 아트 전시장은 텅텅 비어도, 동네 앞 비디오 가게는 늘 북적인다. 나 역시 가끔 후진 영화를 재미있게 보지만, 그렇다고 그게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평론가들을 향해 이 대중적 취향을 미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민주주의라고 우기지도 않는다.
"가르치려 들지 말라"고도 한다. 누가 가르치려 들었다는 걸까? 그렇게 말하는 바보에게는 이렇게 대꾸하겠다. '평론가가 할 일 없냐. 너 같은 분을 수업료도 안 받고 가르치려 들게. 아니, 아무리 수업료를 많이 내도, 배움에 대한 욕구도 없고, 이해할 머리도 없어 아무리 얘기해도 못 알아듣는 돌 머리는 애초에 제자로 받아주지 않으니, 그 문제에 관해서는 하나도 걱정할 것 없어요.'
평론의 역할
무식하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평론은 크게 (1) 영화 구조에 대한 분석, (2) 그 영화의 영화사적 의미, (3) 종합적 평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앞의 둘이 기술적(descriptive) 부분이라면, 세 번째는 평가적(evaluative) 측면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토론에서 내가 제시했던 <디 워>의 허술한 서사구조에 대한 지적은 첫 번째에 해당한다. <디 워>의 CG 이미저리에 대한 분석은 시간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할 수가 없었다.
둘째는 가령 이런 거다. <라쇼몽>은 사건을 보는 여러 관점을 병행 진행하는 비선형적 서사, <메멘토>는 시간을 되돌리는 역행카논의 서사를 보여준다. <스타워즈>는 최초로 영화에 CG를 도입했고, <쥬라기 공원>은 최초로 실사와 CG의 구별을 없앴으며, <아이스 에이지>는 최초로 털 달린 포유동물을 시뮬레이션 해냈다. 이는 전에 없던 시도다. 그럼 <디 워>는? 'CG를 한국 기술로 최초로 해냈다.' 한국에서는 통하겠지만, 할리우드와 경쟁하겠다는 영화의 성과로 꼽기는 좀 뭐하지 않은가?
대중을 분개시킨 평론가들의 언급은 (3)에 속한다. 뭔가 찾아봤더니 대부분 짤막한 열자 평이다. 글자 열 개로 (1)과 (2)를 다 담을 수는 없고, 그것으로 담을 수 있는 것은 오직 (3)뿐이다. 그러자 왜 성의 있게 비평을 안 하느냐고 따진다. 시장에 나오는 모든 영화를 어떻게 다 자세히 평한단 말인가? 평론가에게 성의 있는 비평을 받아내려면, 일단 영화에 말할 건더기가 있어야 한다. <디 워>에 어디 그런 게 있던가?
게다가 자세히 비평하면 뭐하는가? <100분 토론>에서 이미 서사 구조의 결함, 그것과 미숙한 연기의 관계, 플롯과 CG의 어색한 결합 등 일일이 다 지적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어디 소용이 있던가? 다음날 신문에는 어차피 이런 기사만 실릴 텐데.
"<디 워>는 비평할 가치조차 없다”, 진중권 막말, 일파만파
진중권, <디 워> 보고 "꼭지가 돌았다"
이 글의 내용도 이렇게 요약하지 않을까?
"<디 워> 관객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진중권 폭언, 일파만파
"<디 워> 보면 바보, 돌 머리", 진중권 막말, 언제까지 계속되나
재미있다. 대한민국에 살아서 좋은 거 한 가지. 도대체 심심할 틈이 없다는 것이다.
CG의 진전, 영화의 후퇴
어떤 평론가가 <디 워>의 서사구조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배우들의 연기가 어색했을 뿐이라고 말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배우들의 연기가 어색해서 목걸이 한 방에 부라퀴 군단이 다 날아가고, 배우들의 연기가 어색해서 선한 이무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배우들의 연기가 어색해서 FBI 요원이 약 먹고 동료에게 총을 쐈다는 얘기다. 대중의 분위기가 평론의 수준까지 떨어뜨리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영화가 혼자 발달하는 게 아니다. 영화가 발달한 나라는 평론도 고도로 발달해 있고, 평론의 토대가 되는 인문학적 담론도 풍성하고, 괜찮은 영화를 보아내는 감식안을 갖춘 일반 관객의 층도 두껍다. 이게 바로 좋은 영화가 나오는 인프라다. 전문적 평론가의 높은 식견과 수준 있는 관객의 높은 기대라는 검증을 통과한 영화라면, 세계 어느 곳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드러난 우리의 영화 인프라의 꼴을 보라.
사실 충무로의 영화언어는 지난 십여 년 동안 엄청나게 발달했다. 각종 국제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가 상을 타는 것을 보는 것은 이제 흔한 일. 전도연을 비롯한 여러 배우들의 수상으로 한국 영화의 연기능력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디 워>에 그동안 한국 영화가 이룬 성취가 조금이라도 반영되어 있던가? 충무로 탓하는 것과 별도로 그 성취를 조금이라도 따라가려 했다면, 영화가 이렇게까지 나오지는 않았을 게다.
서사에 관하여
'디빠'들의 주장에 따르면 어느 시민논객이 내 꼭지를 돌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녀에게 꼭지가 돈 기억이 안 난다(방송이 끝난 후 그녀는 내가 쓴 책을 들고 와서 사인을 받아갔다). 내 꼭지를 돌린 것은, 영화에 대해 평도 못하게 하는 분위기, 소수에게 사이버 폭력을 가하는 집단의 행태였다. '꼭지가 돌아 <디 워>에 대한 평을 썼다'는 게 평론은 냉정해야 한다는 말과 모순된다는 얘기도 있다. 꼭지가 돌았기에 <디 워>에 대해서는 더욱 더 냉정하게 글을 썼다.
<300>에서 나는 "서사보다는 CG가 더 중요한 영화"라고 말했다. <300>의 CG는 마약과 비슷한 환각성이 있다. 그녀의 지적은 '그런데 왜 <디 워>에는 같은 기준을 적용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거기에 대한 답은 이미 내가 1주일 전에 써서 <씨네21>에 보낸 글 속에 들어 있다. "장르 영화는 웬만하면 근사한 CG만 갖고도 서사의 빈곤을 가릴 수 있다. 사실 <트랜스포머>의 경우에도 서사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그것도 서사가 웬만할 때의 일. <디 워>의 서사는 CG의 화려함으로 수습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섰다."
<300>에는 서사가 있다. 왜? 그것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사건이며, 플루타르크가 기록한 텍스트가 있으며, 그 드라마틱한 측면 때문에 서양예술에서 여러 번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항복 권유-레오니다스의 거절-전쟁을 금하는 신탁-호위병 300명만 데리고 출병-에피알테스의 간청-레오니다스의 거절-에피알테스의 배반-300용사의 전멸-그리스 연합군의 결성.' 발단부터 결말까지 철저히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디 워>는 할리우드 괴수 영화와 비교해야 한단다. 괴수 영화에서는 괴물이 주인공이란다. 그럼 <킹콩>을 예로 들어 보자. 이 거대한 괴수에게는 감성이 있다. 그래서 관객은 그의 최후를 안타까워하게 된다. 부라퀴는 어떤가? 그에게서 감성이 느껴지던가? 또 <킹콩>에서는 인간과 괴수가 애정에 가까운 감정의 교류를 보여준다. 반면 <디 워>에서는 둘 다 사람이면서 90분 내내 사랑조차 제대로 못 한다. 이런, 얘기, 더 해야 하는가?
<트랜스포머>에 대해서는 "서사가 미흡하지만 CG가 훌륭하다"고 하면서 <디 워>에 대해서는 "CG는 훌륭한데 서사가 미흡하다"고 말하는 평론가의 이중 잣대(?)를 지적하는 논리도 있다. 아둔한 머리에는 이 두 문장이 모순으로 보이겠지만, 논리적으로 두 문장은 모순이 아니다. 왜? <트랜스포머>는 CG나 플롯 모두 <디 워>보다 낫기 때문이다. 정 못 믿겠으면, 나중에 '디빠'들의 유일한 기준인 그 잘난 흥행성적으로 직접 확인해 보라.
"하면 된다"?
토론 마지막에 내가 했던 말은 "<디 워>, 한국 영화의 희망인가?"라는 토론 제목과 관련되어 있다. 자신을 '대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그 말을 "독일, 프랑스도 못하니 한국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진중권 부라퀴는 '사대주의' 부라퀴라고 떠들고 다닌다. 이 규모에 대한 동경. 거대함에 대한 열망. 그들이야말로 영화에서 오로지 커다란 덩치만을 사모하는, 글자 그대로의 사대(大)주의자가 아닐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영화 한 편에 2000억원 이상을 쓰기도 한다. <디 워>와 비교가 안 된다. 충무로에서 무리 없이 동원하는 자본의 규모는 편당 100억원 정도. 편당 300억원씩 들여 영화를 만들어 수출하다가는 자칫 충무로 바닥 전체가 파산한다. 그렇기 때문에 <디 워>의 전략은 한국 영화의 일반적 모델이 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하면 된다"는 전두환 철학으로 <디 워>의 깃발 아래 충무로 타도에 나설 일이 아니다.
제작비가 상상을 초월하는 만큼 할리우드 영화도 자국 시장만으로는 제작비 뽑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시장을 겨냥해 영화를 만든다. 하지만 미국 영화가 전 세계를 시장으로 삼는 것은, 영어가 사실상 세계 공용어이고 미국 문화가 이미 전 세계의 대중문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디 워>에서 배우의 대사가 어색한 것은 한국어 대본을 영어로 직역했기 때문이다. 미국 시장을 점령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미국과 한국의 감성의 간극을 거기서 볼 수 있다.
CG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할리우드에는 그밖에도 최고의 영화미학, 고도의 평론수준, 발달한 관객문화가 있다. 한국 영화에는 그런 인프라도 아직 부족하다. 심 감독에게 "겸손하라"고 말한 어느 감독의 말에 대중은 "주제 파악하라"고 대꾸한다. 그 말은 심형래의 인격에 관한 언급이 아니다. '조지 루카스나 스티븐 스필버그를 따라잡겠다'며 언어의 인플레이션을 남발하지 말라는 얘기다. 약속은 적게 할수록 더 많이 지킬 수 있는 법이니까.
비평과 흥행의 관계
평론가가 '좋은 작품이다', 혹은 '나쁜 작품이다'라고 말할 때, 반드시 그 영화를 봐야 하거나 혹은 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영화를 볼 때 참고하라는 것이다. 내 경우에도 그냥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에는 웬만하면 영화 평론가들이 권하는 영화는 안 본다. 반면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영감을 얻기 위해서나, 혹은 특정한 사람과 같이 영화를 볼 때는 평론가들이 권하는 작품 중에서 골라서 본다.
대중은 충무로의 사주를 받은 평론가들이 <디 워>의 흥행을 막기 위해 악평을 한다고 생각한다. 기자들도 이런 어리석음에 기꺼이 동참한다. "<디 워> 500만 돌파, 관객 입심이 평론가들보다 세다." 평론이 어디 대중과 전문가 사이에 관객 수로 승부를 내는 입심 전쟁인가? 평론이 관객 수의 함수를 구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걸까? "평가는 우리가 한다." 누가 하지 말하고 했나? 당신들도 하는 평가, 평론가들도 하게 좀 내버려두라는 얘기다.
대단히 허탈하겠지만 평론가들은 영화의 흥행에 전혀 이해가 걸려있지 않다. <디 워>를 비판하러 나가던 그날도 나는 강의를 듣는 수강생들에게 "꼭 보라"고 권했다. 영화가 훌륭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너무나 허술해서 영화에서 미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하는 좋은 기회라고 믿어서다. 정말 대형 스크린 위에서 이렇게 서사가 허술한 영화를 다시 보기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살아서 핼리혜성 볼 기회만큼이나 희귀하다. 이런 귀한 기회를 어떻게 놓칠 수 있단 말인가?
비평과 흥행 사이에는 별 인과관계도 없다. 기사를 보니, 여름방학용으로 보는 사람이 대부분(59%)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 전 <씨네21>에 보낸 내 글이 생각난다. "<디 워>의 스토리를 의문 없이 따라가려면, 마음의 연령이 네버랜드 주민의 평균을 넘어서는 안 된다. <디 워>의 연출력은 아직도 방학특선 어린이 영화에서 그리 멀리 나가지 못했다." 근데 이게 외려 흥행에 도움을 준 모양이다. 세상의 이치는 이렇게 오묘하다.
거기서 나는 또 "이 글을 읽고 받은 열에너지를 <디 워>의 반복관람으로 승화시키는 거룩한 이도 더러 있을 터, 이 기여로써 <디 워>의 관람에 의무로 따르는 내 몫의 애국질을 대신"한다고 썼다. 실제로 기사를 보니, <디 워>를 보는 또 다른 이유가 <100분 토론>으로 생긴 호기심 때문이라고 한다. 이로써 남을 못살게 구는 데 사용됐던, '비평이 흥행을 떨어뜨린다'는 열광자들의 믿음은 아무 근거도 없는 기우로 드러났다.
내기 걸기?
어차피 <디 워>는 미국을 겨냥해 만들어진 영화. 그쪽에서는 어떨까? 이른바 '빠'와 '까' 사이에 내기가 벌어진 모양이다. 거기에 대해서 내가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다. 정답. '예언 같은 것은 되도록 안 하는 게 좋다.' <디 워>의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은 굳이 예언을 안 해도 유지된다. 그런데 뭐 하러 쓸 데 없이 예언에 따르는 증명의 의무를 스스로 지는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디 워>는 미국 평단에서도 좋은 평을 듣기를 기대하지는 말라는 것.
'흥행성=작품성'이라고 주장했던 이들은 사정이 좀 다르다. 그들은 흥행의 성공으로 작품성을 증명하려 했고, 또 이제 증명해야 한다. 이래서 제 주장을 예언에 묶어두는 것은 별로 현명한 수가 못 되는 거다. 어차피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성공하여 달러를 벌어다 주겠다고 약속한 영화. 거기서 실패하면, 그들의 마지막 논리마저 파산하게 된다. 물론 나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거국적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꼴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500개의 개봉관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터. CG에 볼만한 부분이 있고, 용과 이무기라는 새로운 괴수의 이미지도 있고, 미국에는 괴수 영화 마니아들이 꽤 많을 테니, 부디 미국의 관객들이 <디 워>에서 뭔가 서사의 가공할 허접스러움마저 용서하게 해주는 또 다른 측면을 찾아내기를 바랄 뿐이다.
토론 이후
당연히 블로그에 난리가 났다. 실명 올린 지인의 글은 행여 피해가 갈까 다 지워놓았지만, 학교 홈피 다운되는 것은 막을 방법이 없다. 한편 걱정과 격려의 문자와 메일도 날아온다. 어떤 이는 네이버 검색 1위 캡처 화면을 "기념으로" 보낸다며,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축하해요." 허걱. 황우석 때문에 감금됐을 때 '허걱'했던 일이 있었다. 가족들에게 감금에서 풀려놨다고 전화했더니, "야, 벌써 풀려나면 어떻게 하냐? 재미없게…."
황우석 때에 비하면 포스는 10분의 1 수준에, 욕설도 그때 들었던 것의 재탕이라 스릴도, 재미도 없다. 욕을 하더라도 좀 창의적으로 하면 안 되나? 대부분 진부해서 하품이 난다. 성의를 봐서라도 다 읽어주고 싶은데, 너무 지루해서 읽을 수가 없다. 욕을 하더라도 욕먹는 사람 생각 좀 해줬으면 한다. 욕설도 예술적으로 승화해서 하면 어디가 덧나나? 가령 두 손에 딸기를 들고 있는 '꼭지 중권' 패러디 사진. 그건 맘에 들어 따로 컴퓨터에 저장해 놨다.
인터넷 바닥에서 그나마 DC의 '디 워갤' 애들 글은 읽는 재미가 좀 있다. 그 지루함 속에서 한 가지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게 있긴 있었다. '디빠'들이 들고 나온 진중권의 학력 위조 의혹. 세상에, 그건 내가 아니라 외려 그 분을 괴롭혔던 문제가 아닌가. 이렇게 논리에 전혀 구속되지 않는 이 두뇌의 무한한 자유로움에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어떤 종교적 숭고함이 있다. 자폭 테러리스트를 보며 느끼는 외경심이랄까? 하긴, 영화 한 편 보고 후지다고 말하는 졸지에 사회적 사건이 되는 그런 나라에 사는 국민들이 아닌가.
후기
<디 워> 팬 카페에서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고, "<디 워> 팬들이 황우석 지지자들처럼 맹목적인 부류가 되어버렸다"고 비판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사실 모든 <디 워> 팬이 광적인 것은 아니다. 실은 인터넷의 다른 곳과 달리 <디 워> 팬 카페에는 비교적 합리적인 글들이 많이 올라온다. <디 워> 팬 카페가 부디 건전한 지지와 합리적 비평의 온상이 되기 바란다.
'애국' 내걸고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소수에게 폭력을 가하는 문화. 개인적으로 질색이다. "네티즌의 저력을 보여줍시다." 그들은 아마 그런 짓을 하면서, 모종의 권력을 느끼는 모양이다. 현실에서는 고독한 개인으로 권력에 눌려 살던 이들이 집단을 이루어 소수의 약자를 향해 권력을 휘두르며 비로소 느끼는 쾌감이랄까? 안쓰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워낙 하는 짓의 죄질이 고약해서 그런지 동정할 마음이 생기지를 않는다.
내 "꼭지"를 돌린 것은 실은 <디 워> 자체가 아니라, 그 영화를 지지하는 광적인 방식이었다. 도대체 왜 '영웅' 없이 혼자서는 못 살아가는 걸까? 하도 요란하게 광고하던 영화라 기대하고 봤다가 큰 실망을 했지만, 솔직히 나도 한국에서 가장 많은 돈을 들여 만든 영화가 미국에서 망신당하는 것보다는 흥행에서라도 웬만큼 성과를 내는 것을 보고 싶다.
2. 논쟁을 보고 - '디 워' 는 한국영화계의 이무기 같은 존재다
출전 http://blog.cine21.com/iq01/57678 2007-08-11 00:33:48
영화 '디 워' 를 보지 않은 상황에서 영화에 대해 얘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하기로 마음 먹었으니 해야겠다.
내가 본 건 '디 워' 를 주제로 놓고 벌어진 mbc '100분 토론' 이었다. '디 워' 러닝타임이 90분 남짓이라니 이걸 놓고 100분 토론이 벌어졌으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꼴이다. 영화에 관한 글을 블로그에 쓰면서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도 되었다. 진중권 선생은 ‘영화에 대해 뭐 할 말이 있어야지’ 하는 태도로 나왔는데, 내가 블로그에 올리는 글들은 대부분 검증이 끝난 고전영화나 특정감독의 영화 아니면 장르영화에 관해서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영화들, 그것도 1,2년이 아니라 10년, 20년, 30년이 지난 영화를 보고 평을 하는 건 어쩌면 꽤나 수익성이 보장되는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투자의 전설인 워렌 버핏처럼 이건 ‘우량주’ 에게 달러를 담뿍 갖다대주는 꼴이다. 60년대 베스트, 70년대 베스트 음악 CD를 들으면 일단 버릴 곡은 없으니 말이다. 베스트는 말 그대로 베스트고, 이미 당대 관객과 비평가들 그리고 여기에 시간이 더해지면서 살아남은 영화들을 보고 한마디 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디 워’를 둘러싼 논지의 핵심은 이전까지 영화에 대해서 미리 시사회에 초청되어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따끈따끈한 신작에 미리 비평을 할 수 있는, 그리고 이를 신문이나 영화잡지 등의 기성언론에 실음으로써 ‘초야권’을 늠름하게 행사할 수 있었던 문화권력에 대한 대중들의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평론가들이 악평을 해댔기 때문에 대중들이 여기에 대한 반발심리로 뭉친 점도 있을 것이다. 영주가 미리 맛을 보고, 이건 아니다라고 선언한 규수가 ‘결혼시장’ 에서는 대박을 올리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평론가들이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평을 해야한다는 말에 100% 동의한다. 영화를 CG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발그릇’ 사용하듯 만드는 것이 심형래 감독의 영화철학이라해도, 적어도 이야기의 서사구조를 만들어는 놓고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엉성한 서사를 놀라운 CG로 때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세계영화 또는 미국시장을 석권할 만한 그릇이 애초부터 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CG관련 회사를 세워서 한국영화의 전체적인 발전을 위해 일을 하는게 낫다. 감독으로써 세계영화계를 석권하겠다는 야심을 버리는 것이 한국영화 전체를 위해 올바른 선택이 될 것이다.
그가 몬스터영화로 미국석권을 노린다면 1500여개의 극장에서 동시개봉하는 블록버스터의 전략은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몬스터영화는 마이너리그에 속한다. 소수 컬트광들이 일본의 고질라나 용가리 류, 또는 거대한 거미나(‘스파이더맨’ 이 아닌) 외계생물이 등장하는 영화에 미쳐있지만, 이런 영화는 전 미국극장 동시개봉이나 와이드 릴리즈가 아닌, 특정 전문상영관이나 DVD 판매 등으로 수익을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길고 가늘게 가는 롱테일 전략이 먹히는 장르를 짧고 굵게 가는 블록버스터의 전략으로 공략하려고 하는 것이다.
올 여름에도 ‘스파이더 맨 3’ 이나 ‘커리비안의 해적 3’ 같은 블록버스터가 흥행성공을 거두었다. 미국시장정복을 노리는 심형래 감독은 과연 샘 레이미가 ‘스파이더 맨’ 시리즈에서 보여줬던 주인공 피터 파커에 대한 정성들인 캐릭터 창조(사실 스파이더맨은 ‘스파이더맨’ 이 주인공이 아니라, 거미옷을 잠깐잠깐 입는 피터 파커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영웅이나 몬스터가 아닌, 평범한 주인공 캐릭터가 전면으로 부상한 영화다)를 어느 정도 의식이라도 했을까? ‘커리비안의 해적’은 시리즈의 재탕,삼탕이라고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은 영화지만, 흥행에 성공했다. 이는 쟈니 뎁이라는 배우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3편에선 특히 ‘아버지’ 키스 리처드도 잠깐 얼굴을 비췄고) 그런데 ‘디 워’에 쟈니 뎁 같은 매력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든 상관없이, 관객을 두 시간동안 쏙 잡아놓을 배우가 있는가?
심형래 감독은 미국 내 개봉을 목표로 영화를 만들었고, 배우들도 영어로 대사를 하고, 정작 열광했던 한국관객들은 한글자막을 읽어가며 한국감독과 스탭이 만든 영화를 봤다. 400만이 넘는 관객동원으로 300억의 제작비 본전은 뽑았다고 생각된다. 락음악 공연에서는 밴드의 본 공연 전에 무명의 밴드들이 오프닝 공연을 한다. ‘디 워’ 는 미국 본 시장을 점령하기 전에 맛뵈기로 선을 보인 한국시장에서 이미 본전을 다 뽑아버린 격이 되어버렸다. 미국에서 흥행에 실패를 하더라도 심형래 감독의 앞으로 계획에 별 차질은 없을 거란 얘기다. 어쩌면 이것이 핵심전략은 아니었을까? 정말로 미국시장에서 인정받고 싶었다면, 미국으로 과감하게 날라가서 그곳에서 최초로 개봉을 해서 미국관객의 심판을 먼저 받고 난 뒤에 금의환향했어야 옳지 않을까? 그의 안전한 분산투자전략이 한국에서 미리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미국관객들은 한국의 애국주의나 아리랑 삽입, 이무기 전설에는 관심이 없다. 머리 아프지 않게 90분동안 저녁데이트용 SF영화 하나 땡길 사람들은 ‘디 워’ 를 찾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당연히 이들은 ‘디 워’ 를 미국영화로 생각하고 볼 것이다. 할리웃 진출을 꿈꾸는 한국인 심형래 감독의 포부치고는 너무 음침한 전략은 아닐까?
지금에야 시대를 뛰어넘는 걸작이라는 소릴 듣고 있지만, 개봉 때는 혹평을 면치 못했던 영화도 많다. 영화 연출이 형편없는데도 걸작의 전당에 올라버린 영화도 여럿 있다. 뉴어메리칸 시네마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지 라이더’ 는 배우인 데니스 호퍼가 감독연출을 한 작품이다. 이 영화가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데니스 호퍼의 연출실력이 월등해서는 아니다. 1960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이지 라이더’ 가 의미하는 것, 관습적인 스튜디오 시스템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영화제작의 시대를 열고자했던 새로운 헐리우드 세대들이 꽉 짜여진 헐리웃의 매너리즘화된 프로페셔널리즘을 공격하고 비꼬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영화 내의 우연성과 황당함, 플롯이나 대사의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걸작으로 칭송받는 것이다. 섹스 피스톨즈를 우리가 기억하는 이유는 그들의 쓰리 코드 스타일의 락음악이 레드 제플린과 핑크 플로이드로 대표되는 과도화된 음악의 전문주의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고, 이것이 락음악의 역사와 흐름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졌고, 많은 이들의 공감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일부러 못 만들고 오랫동안 기억되는 감독으로는 전설적인 B급 영화의 대부, 에드우드가 있다. 그의 대표작 ‘외계로부터의 9번 계획’ 에서는 판지로 만든 묘비석이 흔들거리고 곳곳에 극의 흐름과는 상관없는 장면이 갑자기 튀어나오고, 비행접시 - 정말로 ‘접시’로 만든게 분명한 - 가 지구를 잘도 파괴한다. 에드우드는 ‘못 만든 영화’ 라는 자체가 브랜드가 되는 B급 영화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예산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영화를 만들면서 그렇게 카메라에 담을 수 밖에 없는 작품을 만들어 냈던 것이고, 이것이 하나의 키치이자 웰메이드 영화에 대한 일종의 반항으로 받아들여지고 승화되면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 케이스가 되었다.
300억이라는 예산을 손에 쥔 심형래 감독에게 ‘이지 라이더’ 나 에드우드 작품 류의, 일부러 손을 놓거나 뻔한 결함을 드러내고 있는 영화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CG 하나만을 위해 스토리는 어떻게 되든 신경 안 썼다, 그러니 CG만 보고 손뼉 쳐주고 지지해달라는 요구는 한국, 한국인, 한국영화, 한국감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또는 이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은 잘못을 덮어주고 등을 다독여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매국노와 등식이 성립되어 버리는 이상한 마피아 같은 공식을 구성원 전체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이는 상도덕을 지나쳐버린 행위다. 한국제품이니 무조건 써달라? 이런 현실에서 과연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우리가 가질 수 있을까? 그가 조지 루카스나 제임스 카메론처럼 세계적인 SF감독을 꿈꾼다면, 이는 다음 작품에서 반드시 고쳐야 할 점이다. 늑대소년의 거짓외침이 더 이상은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디 워’를 둘러싸고 우리가 갖고 있는 이분법적인 사고구조가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낸 것 같다.
‘디 워’ = 애국자, 미국의 헐리우드 대자본과 맞서 싸우는 우리의 희망,
아리랑, 한국의 얼과 정신과 전설
여기에 반(反)하는 놈들은?
꼬투리를 잡거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비판을 하는 놈들은?
= “대~한민국” 공동체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다.
이런 천박한 이분법에 사로잡힌 덕분에 어쩌면 한국영화에서 아웃사이더적이고 독보적인 장르를 개척한 심형래 감독이 6년에 걸쳐 피땀흘린 결과물은 제대로 심사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있다. “일주일만에 관객 400만 동원” 이것이 알파요 오메가다. 어쩌면 우린 인간 심형래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려 들고 있는건 아닐까? ‘영구와 땡칠이’ 의 21세기 업그레이드 버전, 300억 제작비로 새로 태어난 용가리의 스핀오프. 이정도가 그의 수준에 맞는 평가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에게 ‘한국영화의 희망’ 이라든가 ‘대한민국의 힘’ 같은 수식어를 함부로 붙여줘서도 안 되는 것 아닌가?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최근 들어 솔솔 들려오던 ‘한국영화 위기론’은 앞으로 한국영화의 장기적인 발전방향에 대한 논의를 제대로 짚어보기도 전에, ‘화려한 휴가’ 와 ‘디 워’ 의 흥행성공으로 굴을 타고 땅속으로 쏙 들어가버린 듯하다. 영화 한 두편의 천만관객동원이 전체 산업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지는 의문이다. 동네 사람 중 억만장자 한 명 있고 나머지는 다 가난한 동네나 골고루 잘 사는 동네나 전체 소득수준은 비슷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한국영화계도 해마다 한 두편의 대박흥행만 바라보고, 또 이런 영화들 때문에 그래도 사람들이 한국영화를 사랑하고 꾸준히 보는구나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위험한 로또 도박판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출전: 씨네 21
3. 칼럼 : <디 워> 논란 / 남동철(씨네 21 편집장)
<디 워>를 둘러싸고 말이 많다. 순수하게 영화적 성과를 논하는 것부터 심형래 감독의 학력 위조에 관한 입장까지. 한편의 오락영화일 뿐이니 재미있냐 없냐만 말하면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디 워>는 이미 하나의 사회현상이 된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이지만 인터넷을 뒤져보니 <디 워>와 심형래 감독을 둘러싼 다양한 입장을 접할 수 있었다. 간략하게 쟁점들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영화에 관한 평가는 ‘뛰어난 컴퓨터그래픽과 다소 허술한 이야기’라는 말로 축약되는 분위기지만 긍정적인 입장과 부정적인 입장 사이의 거리는 멀다. “이무기가 도심에서 벌이는 파괴 행위와 여의주를 둘러싸고 두 마리 이무기가 벌이는 박진감 넘치는 배틀은, 그 어떤 거대괴수영화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장관”이라고 말하는 호평이 있는 반면 “이야기의 구성에 아무런 개연성과 매력이 없다보니 이무기가 떼로 몰려와서 LA를 파괴하는 장면도 게임 신작 오프닝을 보는 정도로만 재미있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2. 한국영화의 세계화라는 전략적 측면에서 <디 워>의 시도를 어떻게 보느냐도 입장 차이가 상당하다. 심형래 감독은 <디 워>가 100% 한국 기술로 이뤄진 것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는데 여기서 100%란 컴퓨터그래픽이나 미니어처에 한한 이야기일 것이다. <디 워>의 엔딩 크레딧에 나오듯 촬영, 음악, 음향, 편집 등 주요 스탭들의 자리엔 외국인의 이름이 올라 있다. <용가리>에 비해 많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나 이렇게 주요 스탭과 배우가 할리우드 인력일 때 <디 워>를 모범적인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볼 수 있느냐는 논란거리다. <괴물>도 외국 스탭을 동원했으나 <디 워>에 비하면 그 비중은 아주 작다. 300억원의 제작비가 투자된 영화인 만큼 <디 워>가 한국형 블록버스터 전략으로 얼마나 성공적인지는 두고 볼 대목이다.
3. 애국심 마케팅을 둘러싼 논란이다. <디 워>의 엔딩에는 심형래 감독이 관객에게 보내는 편지가 들어 있다. SF영화의 불모지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영웅적 이미지를 부각하고 있는데 은연중에 ‘자랑스런 한국인’이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제작진은 특별히 애국심을 강조하는 마케팅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엔딩장면만 놓고 보면 무색한 이야기다. 다만 영화 본편 자체는 애국심과 별 관련이 없다. 문제는 네티즌인데 일부 심형래 지지자들이 너무 과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어 오히려 반감을 사는 분위기다.
4. 예기치 않게 터져나온 심형래 감독의 학력 위조 사건은 심형래의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주고 있다. 학력 위조가 단순 실수로 비롯된 것인지 의도적인 거짓말인지도 논란이지만 이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이냐도 입장 차이가 큰 문제다. 광주비엔날레 신정아씨 사건이 터진 직후에 불거진 얘기라 대중적 관심이 각별할 수밖에 없다. 지지자들은 심형래가 학력 위조로 특별한 이득을 취한 적이 없음을 강조한다. 신정아는 학력 위조가 그의 경력에 큰 디딤돌이 됐지만, 심형래는 학력 위조로 인기를 얻은 것도 아니고, 영화제작에 이용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심형래 스스로 사과를 했지만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미지수다.
이번호에는 <디 워>의 제작과정을 담은 기획기사와 함께 <디 워> 배급사인 쇼박스가 제공하는 <디 워> 스페셜 에디션이 별책부록으로 나간다. 앞서 언급한 논란과 별개로 영화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차원이다. <디 워>에 관한 쟁점은 영화가 개봉하면서 더 뜨거워질 전망이므로 추후 더 깊이 있는 기획기사를 준비할 예정이다.
4. (영화비평) 기대 반 우려 반, 딱 그만큼!
특수효과·음악은 합격점, 이야기 흐름·배우들의 연기는 낙제점, 심형래 감독의 <디 워>
출전: 한겨레 21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디 워>(D-War)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LA의 한복판, 거대한 무언가 휩쓸고 간 흔적이 남는다. 방송사 CGNN 기자 이든(제이슨 베어)은 취재를 위해서 현장에 접근하다 거대한 비늘 자국을 발견한다. 그리고 직감에 휩싸여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린다. 이든은 아버지와 함께 골동품 가게에 갔다가 주인인 잭(로버트 포스터)에게 500년 전 한국의 전설을 듣는다. 잭은 이든에게 이무기가 500년에 한 번씩 여의주를 물고서 승천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든이 여의주를 지키려다 숨진 조선시대 무사의 환생이라는 사실도 알려준다. 이무기에는 선악이 있는데 악한 이무기, 부라퀴가 500년 전 여의주를 훔치려다가 실패했다. 여의주를 품은 소녀가 부라퀴 일당을 피해 달아나다 숨졌기 때문이다. 양반집 규수였던 소녀의 곁에는 이든의 전생인 무사가 있었다. 여기에 잭은 무사를 키웠던 노스님의 환생이다. 500년 전의 소녀는 LA의 아가씨 세라(아만다 브룩스)로 환생했다. 브라퀴는 세라의 여의주를 노리는 것이다.
미숙한 연기에 느닷없는 로맨스라니
이렇게 500년을 뛰어넘는 서사는 기승전결 정확한 구분을 거치지 않고 빠르게 압축된다. 그리고 LA에서 이든과 세라를 쫓는 부라퀴 일당의 추격전이 시작된다. 공력이 높은 잭은 적당히 변신을 하면서 이들을 돕는다. 명백한 선악 구조가 지루해질 무렵에 본격적으로 컴퓨터 그래픽(CG)을 활용한 특수효과가 효과를 발휘한다. 괴수 부라퀴, 달리는 샤콘, 날으는 불코, 기는 더들러, CG를 통해서 탄생한 괴물들의 활약은 할리우드 영화에 견줄 만큼 볼 만하다. 부라퀴가 고층 빌딩을 감고 올라가고, 익룡처럼 생긴 불코가 하늘을 날으는 장면처럼 인상적인 장면이 적지 않다. CG만 놓고 보면, <디 워>의 이무기는 <괴물>의 괴물보다 몸놀림이 가볍고 움직임이 유연하다. 할리우드 스태프들이 참여한 편집, 음악, 음향도 영화에 긴박감을 더한다. <브로큰 애로우> <콘에어>의 편집을 담당했던 스티브 미르코비치와 팀 앨버슨의 속도감 있는 편집은 특수효과를 제대로 살리고, <트랜스포머>의 음악감독 스티브 자블론스키가 만든 음악은 후반부의 추격신에 박진감을 불어넣는다.
특수효과는 박진감이 있지만, 배우들의 연기는 딱딱하다 못해 미숙하다. 이야기는 시대를 넘나드는 것이 아니라 건너뛰는 것처럼 단절된다. 한 시대 안에서도 감정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다. 심형래 감독은 일부러 선악 구조를 단순화했다고 주장하지만, 정말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단순화한 것인지 의문이 남는다. 어린이를 포함한 다양한 연령의 관객을 고려해 압축해서 편집한 86분의 상영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이야기의 개연성은 부족하고 연기의 능숙도는 떨어진다. 환생의 연결 고리가 단단하게 묶이지 않고,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도 느닷없이 시작된다. 때때로 일차원적인 설정은 실소마저 자아낸다. 실사와 특수효과가 충돌하는 장면도 있다. 조선시대에 갑자기 우주 악당 같기도 하고, 중세 용사 같기도 한 적들이 나타나는 장면은 아무래도 뜬금없다. 전반적으로 악당의 액션에 공을 들였으나 선의 동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한 것이다. 악과 맞서는 인물의 동기에 몰입이 되지 않으니 그저 액션만 즐기게 된다. <디 워>에 앞서 퍼졌던 기대 반, 우려 반의 예감은 이렇게 현실로 나타났다. 그래도 할리우드 영화를 즐기는 관객이라면 여름방학용 영화로 맞춤하다.
‘HOLLYWOOD’ 앞에서 성공 다짐하는 심형래
<디 워>는 심형래 감독이 <용가리> 이후 8년 만에 절치부심으로 내놓는 야심작이다. 제작비 300억원이 투여된 판타지 대작이다. 1999년 기획을 시작해 2003년 한국 촬영, 2004년 미국 촬영, 이후의 특수효과와 후반 작업까지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심형래 감독 필생의 야심작답게 심혈을 기울였다. 심형래 감독은 아널드 슈워제네거 주지사에게 서신을 보내는 노력을 기울여 9·11 이후에 최초로(혹은 드물게) LA 시가전 촬영을 허가받았다. 이 밖에도 500벌의 특수의상과 2만4천여 명의 엑스트라도 동원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디 워>는 500개의 스크린을 확보해 8월1일 개봉한다. 심형래 감독은 “미국에서도 1700∼2천 개의 스크린에서 (개봉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대규모 개봉을 한다고 덧붙였다.
<디 워>는 장엄한 아리랑으로 영화를 마무리하면서 애국주의 정서를 자극한다. 영화가 끝나고 예외적으로 에필로그가 이어진다. 심형래 감독이 살아온 역사가 사진에 담겨서 2분이나 계속된다. 여기에 비장한 자막이 얹힌다. 심형래 감독은 자신이 얼마나 처절한 도전과 실패의 역사를 딛고서 <디 워>를 만들었는지 강조한다. 저 멀리 산 위에 새겨진 ‘HOLLYWOOD’라는 활자를 배경으로 “나는 세계 시장에서 <디 워>로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고 다짐하는 모습은, 아메리칸드림을 기필코 이루겠다고 다짐하는 ‘코메리칸’ 아저씨 같았다. 그에게 영화는 전투 같았다.
5. 씨네21영화비평: 서늘한 구성상의 빈약함 <디 워> 글 : 주성철 | 2007.08.01
대낮의 LA 도심을 가로지르는 CG의 뜨거운 쾌감 뒤에 찾아오는 서늘한 구성상의 빈약함
심형래 감독의 7년 만의 신작 <디워>는 <용가리>(1999)로부터, 혹은 더 멀리 영구아트의 창립작이기도 한 <영구와 공룡 쮸쮸>(1993)로부터 이어지는 심형래식 한국형 SF의 현재형이다. 그것은 또한 <용가리>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심형래가 직접 ‘영구’로 출연한 이전 영화들은 특수효과와 더불어 그 특유의 개그가 반반씩 섞인 구조였다면, 말 그대로 ‘영구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용가리>와 <디워>는 할리우드의 뒤를 좇겠다는 야심찬 목표 아래 블록버스터급 특수효과 영화를 지향하고 있다.
LA에서 벌어진 대형 참사를 취재하던 이든(제이슨 베어)은 정체불명의 비늘을 보고 회상에 잠긴다. 어렸을 적 잭(로버트 포스터)에게 옛 한국의 전설을 들었던 그는 그것이 이무기의 것임을 직감한다. 이무기가 용으로 승천하기 위해서는 여의주를 지닌 처녀를 제물로 삼아야 하는데, 과거 승천에 실패했던 이무기가 다시 LA에 나타난 것. 잭은 여의주를 지닌 세라(아만다 브룩스)를 찾아내고, 악한 이무기 ‘부라퀴’의 추종세력 또한 LA로 몰려와 거대한 전쟁이 벌어진다.
대부분이 야간 전투신이었던 <용가리>와 비교하자면, 대낮의 LA 도심을 질주하는 <디워>의 시각적 성취는 한국영화로서는 분명 선두에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할리우드와 경쟁하겠다는 그 야심이 무모한 것이 아니라, 한국 영화산업의 취약한 기반 위에서 그 300억원의 야심 자체가 신기루로 보인다는 데 있다. 무릇 경쟁이란 서로 주고받는 것일 텐데 <용가리>와 <디워> 사이 7년이란 긴 시간은 너무나 고독한 개인의 전쟁으로 비쳐진다. 관습적인 말로 ‘장르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디워>는 분명 격려 받을 시도임이 분명하지만, 앞으로도 그 허기가 차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6. 한겨레신문 토론방
디워논쟁을 통해서 본 인터넷 문화 아기공룡쮸쮸 (dinggomen) 2007년08월16일
http://hantoma.hani.co.kr/board/ht_culture:001032/188614
8월 1일 개봉한 영화 디워 때문에, 영화와 관련된 인터넷의 수많은 커뮤니티들은 아수라장이 됐었다. 개봉한지 보름이 지난 지금, 논란의 열기는 조금 식었지만, 아직도 곳곳에선 영화에 대해서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향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서로 헐뜯고, 욕하는데 바빴다. 말꼬투리 잡는데 급급해 했고, 쉽게 흥분했다. 오랫동안 계속된 공방전을 지켜보면서, 나는 수준 낮은 인터넷 토론문화에 많은 실망을 했다.
디워에 대한 공방전은, 작품의 흥행에 대한 당위성여부, 작품성여부 등 여러 가지를 주제로 삼아 벌어졌다. 수많은 네티즌들이 관심을 갖았던 이번 공방전의 주제만을 놓고 본다면, 참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영화산업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첫 영화로서의 의의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네티즌들의 날카로운 지적을 통해 제시해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범네티즌적 토론을 공방전이라 표현하는 것은, 토론의 내용에 그 이유가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 의문을 품지만, 다른 의견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못하다. 소수의 의견을 조롱하고, 자신과 반대의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는 욕설과 인신공격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존중은 찾아보기 힘들다. 권위 있거나, 말 잘하는(!) 중재자가 나서거나, 소수의 의견을 가진 자가 수적으로 심각하게 불리할 때, 공방전은 잠시 잠잠해진다.
이렇게 질 낮은 공방전이 생기게 되는 것에는, 우선 인터넷의 특성과 관련하여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 타인을 비방하거나 조롱할 때, 사람은 심리적으로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터넷의 익명성이란 특성은 그 불안함을 줄여주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인터넷상에서 아무리 질 낮은 언행을 보이더라도, 그 사람의 실질적 프라이드에는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네티즌들의 인식문제에서도 원인을 찾아볼 수 가 있다. 인터넷에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이다. 키보드 치는 것은 펜을 굴리는 것보다 빠르며, 클릭 몇 번 하는 것은 편지를 부치는 일보다 쉽다. 이러한 절차상의 간단함이 부추긴 것은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책임의식의 부재이다. 어떻게 보면 솔직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요즘 네티즌들은, 자신이 쓴 글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고, 몇 번의 타이핑과 몇 번의 클릭으로 간단하고 직설적이게 글을 써 올린다.
사실 익명성과 네티즌들의 인식문제는 오래전부터 문제로서 제기되어 왔지만, 해결은 힘들어 보인다. 몇몇 포털사이트는 실명제를 도입했지만, 좋은 해결책은 아니다. 인터넷은 현실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매력을 갖는다. 인터넷 실명제 도입은 인터넷의 가장 큰 매력을 없애는 일이다. 인식문제 역시, 근본적인 해결을 명분으로, 인터넷에 글을 쓰는데 복잡한 절차를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인터넷상에서의 의사표현에 관한 문제점을 해결하기위해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퇴보를 향한 길이다. 강압적이고 불편한 환경의 디지털 세대는, 과거 아날로그 세대와 다를 바가 없다.
보다 성숙한 인터넷 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해결책의 키워드는 ‘조화’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장점을 무시하는 강압적인 해결책을 시행하는 것도 옳지 못하고, 서로에 대한 조롱과 형식 없는 비판이 판을 치는 현실 앞에서 무조건적인 자유를 바라는 것도 옳지 못하다. 익명성은 보장한 채, 네티즌 서로의 평가를 통한 포인트 제도나, 비성숙한 언행을 보이는 네티즌에게 벌점을 부과하는 제도 등도 고려해볼 만하다. 네티즌들을 위한 인터넷예절교육도 필요하다.
이번 디워 논쟁 전에도 인터넷에서는 수많은 논쟁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의견을 같이할 수 없는 일이 생길 때 마다, 인터넷 커뮤니티는 전란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번 디워 논쟁은 조금 심각한 편이다. 공중파 방송의 토론 프로그램에서 주제로 삼기도 하였다. 이번 디워 논쟁이, 우리 인터넷 문화의 비성숙함을 깨닫고, 보다 성숙한 인터넷 문화의 확립을 위한 제도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7. 디워논쟁 제 2막 / 강병진 (씨네 21 기획리포트 2007.08.21)
<100분 토론> 이후 <디 워> 팬의 전방위 공격 잠잠해지고 미국 개봉에 관심 쏠려
논란의 종지부인가. 거대한 태풍을 맞이하기 전의 고요함인가. <디 워>를 둘러싼 여러 논란들이 지난 8월9일 있었던 MBC <100분 토론> 이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평소의 세배인 4.7%의 시청률(AGB닐슨 집계)을 기록한 이날 <100분 토론>은 특히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의 거침없는 언변으로 큰 화제를 낳았다. 토론이 끝나자 <디 워> 팬들은 진중권 교수에게 집중적인 공격을 가했고, 변희재 문화평론가를 비롯한 몇몇 논객도 이 비난에 가세해 논란의 판을 키웠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현재는 <100분 토론>이 마치 <디 워> 논쟁의 분수령이 된 듯한 양상이다.
8월16일 현재, 극장가를 비롯해 인터넷 뉴스 창, <디 워> 팬카페 게시판 등은 눈에 띄게 조용한 분위기다. 인터넷 언론 또한 더이상 ‘영화전문가 vs <디 워> 팬’들의 논쟁을 기사화하기보다는 <디 워>의 흥행기록과 미국 흥행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쟁점을 옮겼으며 <디 워>를 본 관객의 평점도 낮아지고 있다. 영화를 예매하고 관람이 확인된 관객의 평점만을 집계하는 맥스무비에 따르면 개봉 다음 날인 8월2일, <디 워>의 관객평점은 8.76점(133명 참여)이었으나, <100분 토론> 전인 9일 오후 5시에는 8.08점(2379명 참여)으로 낮아졌으며 8월15일 현재는 7.96점(3927명 참여)을 기록하고 있다. <디 워>를 찾는 관객의 발길도 예전에 비해 둔해졌다. 개봉 둘쨋주만 해도 하루 평균 3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던 <디 워>는 개봉 3주차를 맞아 하루 20만명선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마련된 ‘디 워&영구아트 팬카페’의 회원들도 더이상 진중권 교수에게 날을 세우려 하지 않는 모습이다. 팬카페 회원인 ‘다이쇼군(rooam)’은 “진중권씨의 발언에는 틀린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 몸에 좋은 약은 쓴 법이고, 듣기 좋은 말은 나를 망치는 근본”이라고 말했으며 ‘소보(7kiaora)’란 닉네임을 가진 회원은 “진중권씨의 신랄한 비판은, 어디까지나 심 감독님이 받아들여야 할 자세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한 것이며, 이런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음 작품에서의 발전은 무엇을 기대고 바랄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개봉 3주차를 맞으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일 수도 있지만, <100분 토론>과 진중권 교수가 <디 워> 논쟁에 어느 정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방학시즌이 끝나는 오는 8월 말이면 <디 워>를 놓고 벌였던 격렬한 논란이 완전히 한풀 꺾일 전망이다.
그렇다면 이제 <디 워>를 둘러싼 모든 논란은 잠들어버릴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논란이 <디 워>를 화제의 중심으로 올려놓을 가능성이 남아 있다. <디 워>는 8월15일 현재, 전국누적관객 660만명을 돌파하여 역대 한국영화 흥행 8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아직 손익분기점까지 다다르기엔 고지가 멀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300억원이란 제작비와 일반적으로 관객 1명의 입장료에서 배급사가 가져가는 2800원에서 2900원 정도의 수익을 고려할 때, <디 워>의 손익분기점은 약 1100만명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쇼박스쪽은 “<디 워>는 한국시장이 아닌 세계시장을 목표로 기획된 작품”이라며 “해외개봉성적과 DVD등 부가판권수입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손익분기점을 산출하기가 힘들다”는 입장이지만 순전히 국내 관객만 놓고 보면 아직 돈을 벌지 못한 상태다. 그만큼 이제는 <디 워>의 국내외 흥행여부와 그로 인한 수익분배문제가 또 다른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미국개봉 규모와 수익분배문제 또 다른 논란거리로
우선 오는 9월14일 미국에서 개봉될 <디 워>가 과연 쇼박스의 발표처럼 “이미 17개국에 선판매가 이루어졌으며, 1500개 이상의 스크린에서 개봉될 것이고 미국쪽 배급사인 프리스타일 릴리징이 개봉에 소요되는 150억원의 마케팅 비용을 부담할 것”인지 여부가 첫 번째 문제다. 배급사인 쇼박스쪽의 발표와 달리 로튼토마토닷컴 등 미국 영화 관련 사이트에 <디 워>의 배급 규모가 와이드 릴리즈가 아닌 리미티드로 표기되어 있다는 논란은 미국 야후사이트에서 와이드로 표기된 사실이 발견되면서 어느 정도 일단락 됐다(로튼토마토닷컴에는 아직 리미티드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프리스타일 릴리즈’란 회사가 한편의 영화를 와이드 릴리즈할 수 있는 배급사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심쩍은 눈초리가 남아 있다. <버라이어티> 한국 통신원인 달시 파켓은 “미국에서 1500개 스크린을 연다는 것은 가능은 하겠지만 주로 평범한 규모의 배급을 해오던 회사라 개봉 뒤에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고, <씨네21>이 이메일로 인터뷰한 미국쪽 배급 관계자는 “미국에서 1500개란 스크린 수는 작은 것은 아니지만 와이드 릴리즈라고 볼 수는 없는 규모”라고 말했다. 그는 프리스타일 쪽이 150억원의 마케팅 비용을 부담한다는 것도 확신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프리스타일이 이 돈을 전부 지불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프리스타일이 영화를 배급할 때는 주로 제작사나 DVD 배급자들이 마케팅 비용을 제공했다. 게다가 150억원이면 TV광고를 하는 데에는 충분하지만 와이드 릴리즈를 하기에는 부족한 돈이다.”
<디 워>가 남길 것으로 예상되는 또 하나의 논란은 수익분배문제다. 2006년 말 선진회계법인이 작성한 (주)영구아트(옛 영구문화아트)의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디 워>에 투자한 투자자는 현대스위스저축은행, 에이스저축은행과 제작사인 영구아트무비와 심형래 감독 등이다. 또한 공시자료에 따르면 여기에 미디어플렉스가 일정 금액을 부분 투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한 금액은 밝혀진 바 없지만 지난 7월24일, <할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쇼박스 정태성 상무는 “<디 워>의 총제작비는 3억달러(300억원)이며 쇼박스는 이 가운데 1/3을 투자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투자 관계자들은 <디 워>의 투자자들이 두손으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초기투자자들부터 마지막에 투자한 사람들까지 계약조건이 저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에 수익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빚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프로덕션 과정에서 막판에 투자한 사람들에게는 원금보장을 해주거나, 손익분기점을 낮게 책정하거나, 주식을 담보로 투자를 유치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픈앤디드픽쳐스의 서영관 대표는 “이런 상황이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태극기 휘날리며>나 <괴물> 때 있었던 소송문제처럼 자신의 수익은 왜 이것밖에 안 되는지 항의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라고 말했으며, 센츄리온기술투자의 이세형 전무는 “일반 영화에서 부분투자자들은 6개월이나 1년 정도 참여하기 때문에 투자자들의 계약조건이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디 워>처럼 오랜 시간 펀딩이 계속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후반에 들어온 투자자들이 위험부담을 적게 가져가려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센츄리언기술투자는 영구아트무비로부터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몇 차례의 투자제의를 받았던 회사다. 같은 회사의 문수봉 팀장은 “프로덕션 중반부터는 우리뿐만 아니라 많은 곳에 투자제의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쪽에 제의를 할 때는 그쪽 담당자도 영화의 흥행을 반신반의했는지, 과감하게 투자를 제의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9월14일 미국개봉 성적에 모든 관심 쏠려
현재 <디 워>는 지난 15일, 심형래 감독의 출국과 함께 미국 개봉 준비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다. ‘<디 워>&영구아트 팬카페’쪽도 영화 전문가들에게 날을 세우기보다는 <디 워>의 미국 흥행을 주시하고 있는 상태다. 일부 회원들은 “<디 워>의 미국 흥행을 위해 미국 주요 사이트의 영화예고편 순위에 <디 워>를 올리도록 조직적인 행동이 필요하다”(jurbill114)거나, “<디 워> 안티들 때문에 6.6점이던 <디 워>의 IMDb평점이 6.4점으로 내려갔다. 우리 모두 가서 별점을 주고 오자”(ready2scrap) 등의 논의를 하고 있다. 하지만 <디 워>의 미국 흥행여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달시 파켓은 “9월이면 미국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름보다는 조용한 시즌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고 말한 반면, 앞서 이야기한 미국쪽 배급관계자는 “<디 워>가 정말 흥행을 목적으로 한다면 1500개 이상의 스크린을 확보해 개봉 첫주와 둘쨋주 스코어를 노려야 할 것이다. 배우 연기와 각본 등에서 문제가 있는 <디 워>가 1500개 스크린으로 출발해 극장에서 장기적으로 버틸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아마도 <디 워>의 미국 흥행여부는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100분 토론> 못지않게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배급 규모와 흥행성과에 따라 심형래 감독과 쇼박스 측의 주장이 입증될 것이고, 투자자들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자신에게 돌아올 수익을 계산할 것이다.
8. 이보다 더 위험한 마케팅이 있는가 (한겨레21 영화비평2007년8월23 674호)
강성률 영화평론가
손 대면 톡 하고 터지는 민족주의, 심형래를 망치는 길
영화 <디 워>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도 이제 지겨울 때가 됐다. 그리고 더 지겨워지기 전에 논란을 차분히 곱씹어볼 때가 됐다. <디 워>는 그동안 한국 사회에 잠복해 있던 여러 문제들을 일거에 ‘환생’시켰기 때문이다. ‘<디 워> 현상’은 여러 겹이다. 이 중에서 우리가 반드시 돌아봐야 할 두 가지 논점에 대한 글을 싣는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애국주의와 대중주의다. 반대하건 찬성하건 입가의 거품을 닦고 차분해지자. 이제 그럴 때가 됐다. 편집자
한 편의 영화를 두고 이렇게까지 말이 많은 것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것 같다. 심형래 감독의 <디 워>를 둘러싸고 말들이 참으로 많다. 각 방송사에서는 메인 뉴스에서 이 영화의 놀라운 흥행에 대해 수시로 보고하듯이 방송하고 있고, 한 방송사에서는 대표 시사 프로그램에서 이 영화로 100분간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방송의 보도는 인터넷에 비하면, 말 그대로 조족지혈(鳥足之血)이다. 인터넷에서 <디 워>는 전쟁(the war)이다. <디 워> 서포터스들은 평론가와 충무로를 상대로 더블 전쟁(D(ouble) war)을 치르고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인터넷에 들어가면 그들의 놀라운 활약상을 볼 수 있다.
벗어날 수 없는 애국심 마케팅
<디 워>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비판한 평론가들을 비판한다. 자신들이 볼 때 재미있고 의미 있는 영화를 왜 무지막지하게 비판하냐는 것이다. 그들은 평론가와 영화인을 싸잡아서 ‘충무로’로 통칭하며 충무로가 이제까지 심형래 감독을 배척한, 아주 좋지 않은 집단이라고 규정한다. 특히 그들은 불합리한 구조의 충무로에 대항해 대안을 내세운 심형래를 대단한 감독으로 치켜세운다. 특히 한국 영화의 위기가 불거진 지금 심형래는 한국 영화의 ‘구세주’가 된다.
불행하게도 <디 워>는 영화 자체로서 이야기되지 않고 그것을 둘러싼 환경을 통해 이야기되고 있다. 영화로서는 참으로 불행한 경우지만, 마케팅의 차원에서 보면 이것은 대단히 뛰어난 마케팅이다. 영화 자체의 흠을 거론하지 않고 영화를 둘러싼 환경을 통해 무조건적으로 영화를 봐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잘된 마케팅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여론의 촉수라고 할 수 있는 인터넷에는 온통 <디 워>를 ‘둘러싼’ 이야기가 오가고 있고, 이것이 결국 흥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 탁월한 마케팅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한다.
이 영화를 둘러싼 환경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충무로에서 철저하게 배척된 영화제작자 심형래가 고독하게 걸어온 승리의 길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다 아는, 가장 잘나가던 개그맨에서 영화감독이자 제작자로 변신해 충무로의 푸대접을 이겨내고 결국에는 성공한 감독이 되었다는 이야기,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한국에서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던 디지털 기술에 참으로 끈기 있게 도전해서 결국에는 해냈다는 디지털 전쟁(D(igital) war)의 승리가 들어 있다. 그리고 영화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적어도 1500개, 많으면 2천 개 이상의 스크린을 통해 개봉한다는 ‘용들의 전쟁’(D(ragon) war) 이야기가 있다. 외국 영화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미국에서 대규모로 개봉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기적인 것이다.
<디 워>의 마케팅은 영화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영화를 둘러싼 이런 이야기에 집중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강조한 마케팅은 ‘애국심 마케팅’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통해 일상어가 될 정도로 이 영화의 마케팅은 성공적(?)이다. 심지어 애국심 마케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이 글 역시, 역설적이게도 <디 워>의 흥행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디 워> 마케팅의 탁월함을 알 수 있다. 이제 <디 워>를 언급하는 것은 <디 워>의 마케팅을 도와주는 것에서 그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
<디 워>를 옹호하는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다. 모든 영화가 홍보하고자 하는 영화에 맞는 마케팅을 하듯이 <디 워>도 영화에 맞는 애국심 마케팅을 했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냐고. 일견은 맞는 말이다. 모든 영화는 마케팅을 한다. 게다가 애국심 마케팅이 <디 워>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애국심 마케팅을 구사하는 영화가 모두 흥행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당장 보더라도 심형래의 전작 <용가리>는 한국 영화 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수출 실적을 근거로 애국심 마케팅을 벌였지만 처참한 실패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디 워>는 성공을 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황우석과 금 모으기
애국심 마케팅이 등장한 것이 <디 워>가 처음은 아니었다. 영화를 넘어 우리에게 애국심 마케팅이 일상화됐다고 할 수 있었던 때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직후였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제품에서 애국심 마케팅을 벌였다. 외국 브랜드도 한국에서 만들기 때문에 한국에 폐를 끼치지 않고 이익을 준다는 것이 당시 마케팅의 전략이었다. 혹시 ‘콜라독립 815’를 기억하는가? 철저하게 애국심에 기대어 마케팅한 제품이다. 그런데 이 마케팅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지금 슈퍼에 가면 콜라독립 815를 찾으려고 해도 도저히 찾을 수 없다. 결국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은 제품의 질이다. 애국심 마케팅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영화에서도 그런 것은 많았다. 먼저 기억나는 것은 칸영화제를 비롯한 해외의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을 두고 벌이는 마케팅이다. <올드보이>처럼 국내에서 흥행을 마친 뒤 칸영화제에서 수상한 경우는 다르지만, 국내에 개봉하기 전에 수상한 <취화선>은 애국심 마케팅에 기댄 영화였다. 해외에서 국위를 선양했기 때문에 우리가 밀어줘야 한다는, 철저하게 애국심에 호소하는 마케팅이었다. 그런데 <디 워>는 <취화선>과 조금 다르다. <취화선>이 해외에서 인정받은 영화를 국내에 상영한 경우라면, <디 워>는 그렇지 않다. 미국 개봉 일정만으로 국내 마케팅을 하고 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해외에서 아직 인정받지 못했지만, 오히려 역으로 이 상황을 이용해서 마케팅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애국심 마케팅이 개입된다. 미국에서 <디 워>의 흥행은 한국 영화, 더 나아가 한국의 승리이기 때문에, <디 워>를 한국에서 많이 봐줘서 미국 시장에서 흥행하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논리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버린다. 갑자기 한국과 미국의 대결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때문에 한국의 대표선수인 심형래를 응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로 바뀌어버린다.
<디 워>의 마케팅이 위험한 것은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애국심 마케팅을 넘어 민족주의를 자극하면서, 민족주의의 아주 위험한 함정인 전체주의적 경향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디 워>에는 한국 소재인 이무기가 등장하고, 500년 전의 조선이 영화 속의 짧은 배경이 되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아리랑>이 엔딩 음악으로 사용되었다. 이뿐인가. 이 영화는 순 우리 기술로 완성되었다. 여기서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심형래의 발언이 이어졌다. TV 쇼 프로그램에 나온 그는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두 번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영화 속 인물이 이무기 설화를 설명하면서 “This is Korean legend”, 즉 이것은 한국의 전설이라고 말하는 부분과, 영화 마지막의 <아리랑>이 울려퍼지는 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는 덧붙이기를 서구의 클래식이 훌륭한 음악이라면, 우리의 <아리랑>도 훌륭한 음악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모든 스태프들이 반대했지만 결국 <아리랑>을 삽입했다고 했다. 이런 영화가 미국에서 대규모로 개봉되기 때문에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어야 한다는 민족주의가 등장한다. 이것은 마치 IMF 시절의 금모으기 광풍을 보는 것 같다.
나는 <디 워>를 둘러싼 일련의 이런 움직임이 한국의 민족주의가 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내가 떠올린 것은 황우석 사건이었다. 두 사건은, 흥미롭게도 거의 유사하다. 심형래가 순 우리의 기술로 만든 영화, 그것도 한국의 설화를 소재로 한 영화로 세계 최고 시장인 미국에서 1500개 이상의 스크린에서 개봉하는 것과, 황우석이 순 우리 기술로 만든 복제 기술로 의료 기술이 최고로 발단된 미국에서 인정받은 것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황우석이 “맞춤형 줄기세포는 대한민국의 기술”이라고 말한 것과, “미국의 심장부에서 생명공학의 고지 위에 태극기를 꽂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말한 것을 심형래에게 적용하면 너무도 잘 들어맞는다. 게다가 줄기세포가 대한민국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주장과, 컴퓨터그래픽(CG) 기술이 엄청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도 동일하다. 두 사람이 구사한 전술은 건드리면 똑 하고 터지는 우리의 취약한 부분을 적절하게 건드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면에서 심형래는 참으로 영리한 사람이다. <용가리>에서 못다 이룬 꿈을 <디 워>에서는 결국 이룩한 것이다.
약소국으로 살아온 우리에게 민족주의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다. 민족주의를 대하는 태도가 보수건 진보건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월드컵 축구를 보면서, 독도 문제를 대하면서 진보와 보수는 별반 다르지 않게 반응한다. 그런데 민족주의 자체가 반역일 수는 없지만, 민족주의가 이기적 국수주의, 획일적 전체주의로 흐를 때에는 어떡해야 하나? 민족주의가 국수주의나 전체주의, 더 나아가 또 다른 제국주의로 나아갈 때 필연적으로 파시즘과 만나게 된다. 그럴 때 국익에 반대되는 것은 그 어떤 의견이라도 언급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지금 <디 워>를 둘러싼 인터넷의 상황을 보면 그런 전조를 느낀다. 어떤 논리적인 비판이나 생산적인 토론도 불가능한 가운데 오로지 <디 워>를 옹호해야만 하는 분위기다. 국익이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국익인가? 국익이란 말을 들으면 나는 박정희가 떠오른다. 수출만이 살길이라며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하면서 결국 국민을 착취하지 않았던가? 체력까지 국력이라면서 인간을 수출 병기로 삼았던 시대가 떠오른다.
심형래의 발전을 기대하며
<디 워>의 마케팅은 단순한 마케팅이 아니다. 한국인이 가장 쉽게 현혹되는 민족주의의 주술로 대중을 마취시키는 것이다. 그 누구도 <디 워>에 대해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비판을 가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만약 비판이 있으면 거의 테러에 가까운 인신공격과 비판, 심지어 협박이 있기 때문에 평론가들이 어떤 비판도 하지 못한다. 아예 평론가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지금의 이 사태에서 월드컵 축구 경기를 보는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나만일까?
이런 애국심 마케팅은 영화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이들도, 마치 멀쩡하게 존재하는 영구가 “영구 없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영화 자체를 논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분명 이것은 광풍이다. 이것은 <디 워> 서포터스들이 그토록 아끼는 <디 워>를 망치는 길이고, 심형래 감독을 망치는 길이다. 이런 자세는 심형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형래의 영화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마케팅이 위험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떤 마케팅이 위험하다는 말인가!
심형래가 걸어온, 고독한 영화의 길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이 비웃을 때, 그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단지 개그맨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또는 아동용 영화만 연출했다는 점 때문에 수준이 낮은 감독으로 평가받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충무로에서 평가받지 못한 감독은 숱하다. 심형래는 이런 평가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정작 그가 고민하고 괴로워해야 것은 이 폭풍을 내면화해서 더 좋은 차기작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의 흥행을 통해 충무로의 자본으로 차기작을 제작하더라도, 지금 같은 영화로는 평단의 냉대를 결코 피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나는 그의 발전을 진정으로 기대한다.
토론하기
1. 영화비평의 가치는 무엇일까?
2. 우리 영화 바로보기의 올바른 태도를 충족하는 요건은 무엇일까?
3. 위 글들에서 볼 수 있는 “디-워‘ 논쟁,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평가해보자.
* 아래 글들은 최근 심형래 감독이 7년 만에 들고나온 영화"디-워"에 대한 논란을 담았습니다. 각 글들을 읽고 1. 영화비평 어떻게 해야하나? 2. 우리 영화 바로보기의 올바른 태도 3. "디-워"논쟁, 무엇이 옳고 그른가? 에 대해 토론해 봅시다.
1. 진중권 냉정한 비평, 논쟁에 휩싸이는 이유
[100분토론 후기] 진중권 교수의 '디빠에게 고함' / 진중권(angelus) 기자
<디 워> 논란이 뜨겁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9일 방송된 MBC <100분 토론>에서 영화 <디 워>를 비판한 후 네티즌에게 집중 포화를 맞은 문화평론가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에게 <100분 토론> 뒤 일어난 일과 영화 <디 워>에 대한 원고를 청탁했다. 진 교수는 아래 글이 <100분 토론>과 그 뒤에 일어난 일들, 일부 네티즌이 진 교수 블로그에 몰려가 올려놓은 글들에 대한 답변을 포함하고 있다고 밝혔다. <편집자 주>
비평=비판=비난=비방=흥행 망치기?
<디 워> 광팬들, 집단행패 그만해라 글쓴이 : 진중권 (중앙대 교수)
<디 워> 찬성 쪽 패널들이 말을 못했다고 질타를 좀 받는 모양이다. 이건 말재주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적 포지션의 문제다. 어느 누구라도 그 포지션에서는 그 이상 할 수 없다. 나도 그렇게 못할 게다. 심형래 감독의 열광자들은 자기 패널들을 향해 '이렇게 했어야 한다, 저렇게 했어야 한다'고 구구하게 주문을 많이 한다. 하재근씨는 네티즌들이 애써 마련해 준 '총탄'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사과까지 한다. 하씨는 나와 달라서 전쟁터에 나오기에는 너무 착한 사람이다.
사실 하씨와 나는 견해가 많이 다르지 않다. 나는 다수가 조성하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발언의 자유를 빼앗긴 소수를 옹호하려 했고, 하씨는 <디 워>를 비판하는 소수를 존중하고 <디 워>를 보고 감동하는 다수를 이해하면서 두 그룹이 화해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하지만 화해의 전제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는 것. 사과 없는 '화해'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나는 토론을 어정쩡한 타협에서 끝내기보다는 논리적으로 끝장을 보는 쪽을 택해야 했다.
인터넷에서 집단의 품에 묻혀서 까부는 네티즌들은 야무지게도 하씨 말고 자기들이 나왔으면 상황이 달랐을 거라고 믿는 모양이다. 그 허접스러운 논리를 들고 용감하게 방송에 나왔다면, 그날 <100분 토론> 시청률이 거의 '무릎 팍 도사'에 육박했을 게다. 제일 까부는 친구를 대표로 뽑아 한번 내보내보라. 집단 속에선 그렇게 사납던 아이들도 정작 개인으로 만나보면, 그렇게 착할 수가 없다. 우기지도 않고, 싹싹하게 사과도 잘 하고.
애초에 <디 워> 열풍은 논리가 아니라 정서에서 비롯된 것. 논리와 정서는 원래 만날 필요가 없었다. 내 돈 내고 내가 영화 보고, 내가 좋다는 데 뭐가 문제인가? 그럼. 그렇다면 내 돈 내고 내가 영화 보고, 후지다고 말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말아야지.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된다는 게 문제다. 그러니까 이 논쟁은 '논리로는' 애초에 '심빠'들이 이길 수 없는 구조. 틀린 논리는 아무리 많은 수의 머릿속에 담겨 와도 한 큐. 큐질을 머릿수만큼 반복할 필요는 없다.
작품 자체로
방송을 위해 받아본 큐시트에는 정작 작품 자체에 관한 얘기는 별로 없었다. 이래서는 논의가 겉돌 수밖에 없다. 헝클어진 실타래가 있으면, 실마리를 잡아내야 한다. 실 끝을 잘못 선택하면 실타래는 겉잡을 수 없이 엉켜버린다. 반면 제대로 실마리를 잡으면 실타래는 술술 풀린다. 이 논쟁에서 실마리는 바로 작품 자체. 모든 논의가 작품의 질에 대한 평론가들의 언급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대중이 평론가들의 혹평에 분노하는 것은, 작품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 그저 막연히 '작품이 좀 허술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감독의 노력, 컴퓨터그래픽(CG)의 성과, 미국에서 거둘 성공에 비하면 그 정도 결함은 눈감아줘야 한다'는 게 대중의 정서다. 이런 상황에서 논쟁의 승패는 작품의 구조적 결함이 얼마나 심각한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데에 달려 있다.
토론이 시작되자 곧바로 작품 자체로 덤벼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 매듭만 풀면 나머지 논점은 저절로 다 풀리게 되어 있다. 상대편에서는 이를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긴, 예상을 했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워낙 작품 자체에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격하는 쪽은 마침 전공이 미학이라 애초에 무장의 수준이 다르다. 거기에 성깔도 그다지 온순한 편이 못 된다.
'싸가지'에 관하여
"논리는 옳다, 그런데 '싸가지'가 없다." 반응은 대충 이렇게 요약된다. 내가 인간성마저 좋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태도까지 점잖았다면, 그나마 끓어오르는 분노를 배출할 통로마저 막혀 임상의학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사태가 벌어졌을 게다. 이는 재정 악화를 낳고, 다시 의료보험 개혁 요구로 이어질 것이며, 그럼 유시민씨가 부랴부랴 보건복지부로 복귀하여 2007년 대선 구도에까지 영향을 끼쳤을 게다(애국 두뇌에게는 이게 농담이라는 것까지 일일이 다 말해줘야 한다).
'꼭지가 돌았다'는 말을 트집 잡는 모양이다. 나는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감독에 대한 네티즌들의 사이버 폭력에 꼭지가 돌아야 한다고 믿는다. 왜? 언젠가 대중의 폭력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짓은 하면 안 된다. <100분 토론>에 나간 것도 <디 워>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행패 부리는 짓 좀 그만 하라'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EBS 개고기 토론과 MBC <디 워> 토론을 비교해 보면, 내 태도가 다름을 알 수 있을 게다. 개고기 토론에서 상대는 사회적으로 소수다. 극우파가 아닌 한, 소수자는 함부로 몰아치면 안 된다. 반면 <디 워> 토론의 상대는 사회적으로 다수이고, 상당수는 수적인 우세로 소수의 입을 가로막고 있다. 당연히 태도가 다를 수밖에. 나는 이런 게 민주시민의 진정한 '싸가지'라 믿는다.
평론가의 임무
대중의 환호를 등에 업고 설치는 것은 검객이 아니라 양아치나 할 짓이다. 물론 이럴 때 슬쩍 대중의 감정에 편승하면 여러 모로 얻는 게 많다는 것을 내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먹물 노릇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이 들어야 할 얘기를 하는 것. 그게 먹물의 임무이고, 먹물의 윤리다. 평론가라는 이름의 먹물도 마찬가지다. 평론가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축복만 하는 예식장의 주례가 아니다.
평론은 예술적 소통에서 피드백 시스템에 해당한다. 하다못해 신발을 하나 만들어도 출시 전에 철저하게 검사한다. 그래야 시장에 나가 흠을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나라도 아니고 영화의 본고장인 할리우드에, 심지어 그것도 블록버스터로 승부를 걸겠다는 영화가 검사조차 안 받겠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제품의 질이 떨어진다는 검사 결과를 없앤다고 제품의 질이 좋아지는가?
우리 사회의 평론에 대한 관념을 보자. '비평=비판=비난=비방=흥행 망치기', 그리하여 급기야는 '매국행위.' 더 가관은 트집을 잡기 위해 늘어놓는 궤변이다. 그 논리를 들어보면, 호모 사피엔스의 두뇌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수준으로 퇴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1. 나는 <디 워>를 감동적으로 보았다.
2. 근데 너는 왜 작품이 후지다고 하냐?
3. 그것은 나를 우습게 보는 거다.
4. 500만 관객을 무시하는 오만이다.
5. 그러므로 모 감독은 사과하라.
6. 여러분, 대국민 사과 요구 서명합시다.
7. 이것은 전쟁이다. 충무로를 타격하라, 평론가를 타도하라.
놀라운 것은, 이런 일이 정신병동의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중의 혁명?
일부 언론에서는 '대중지성' 운운하며 상황을 '대중 대 평론가'의 싸움으로 몰고 갔다. '대중지성'이 뭔지나 알고 떠드는 걸까? 평론가 중 그 누구도 자기가 권하는 영화가 언제나 대중의 사랑을 받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매트릭스 I>처럼 대중성과 작품성이 일치하는 영화도 있고, <디 워>처럼 작품성은 없는데 대중성만 있는 영화도 있고, <블레이드 러너>처럼 작품성은 있는데 대중성이 없는 영화가 있는 거다.
이번 사태가 평론가에 대한 대중의 반란, 디지털 민주주의 혁명이란다. 영구가 한 말이 아니다. 언론에서 떠드는 말이다. 작품성이 뛰어나면 대개 대중성은 떨어진다. 가령 백남준 비디오 아트 전시장은 텅텅 비어도, 동네 앞 비디오 가게는 늘 북적인다. 나 역시 가끔 후진 영화를 재미있게 보지만, 그렇다고 그게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평론가들을 향해 이 대중적 취향을 미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민주주의라고 우기지도 않는다.
"가르치려 들지 말라"고도 한다. 누가 가르치려 들었다는 걸까? 그렇게 말하는 바보에게는 이렇게 대꾸하겠다. '평론가가 할 일 없냐. 너 같은 분을 수업료도 안 받고 가르치려 들게. 아니, 아무리 수업료를 많이 내도, 배움에 대한 욕구도 없고, 이해할 머리도 없어 아무리 얘기해도 못 알아듣는 돌 머리는 애초에 제자로 받아주지 않으니, 그 문제에 관해서는 하나도 걱정할 것 없어요.'
평론의 역할
무식하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평론은 크게 (1) 영화 구조에 대한 분석, (2) 그 영화의 영화사적 의미, (3) 종합적 평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앞의 둘이 기술적(descriptive) 부분이라면, 세 번째는 평가적(evaluative) 측면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토론에서 내가 제시했던 <디 워>의 허술한 서사구조에 대한 지적은 첫 번째에 해당한다. <디 워>의 CG 이미저리에 대한 분석은 시간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할 수가 없었다.
둘째는 가령 이런 거다. <라쇼몽>은 사건을 보는 여러 관점을 병행 진행하는 비선형적 서사, <메멘토>는 시간을 되돌리는 역행카논의 서사를 보여준다. <스타워즈>는 최초로 영화에 CG를 도입했고, <쥬라기 공원>은 최초로 실사와 CG의 구별을 없앴으며, <아이스 에이지>는 최초로 털 달린 포유동물을 시뮬레이션 해냈다. 이는 전에 없던 시도다. 그럼 <디 워>는? 'CG를 한국 기술로 최초로 해냈다.' 한국에서는 통하겠지만, 할리우드와 경쟁하겠다는 영화의 성과로 꼽기는 좀 뭐하지 않은가?
대중을 분개시킨 평론가들의 언급은 (3)에 속한다. 뭔가 찾아봤더니 대부분 짤막한 열자 평이다. 글자 열 개로 (1)과 (2)를 다 담을 수는 없고, 그것으로 담을 수 있는 것은 오직 (3)뿐이다. 그러자 왜 성의 있게 비평을 안 하느냐고 따진다. 시장에 나오는 모든 영화를 어떻게 다 자세히 평한단 말인가? 평론가에게 성의 있는 비평을 받아내려면, 일단 영화에 말할 건더기가 있어야 한다. <디 워>에 어디 그런 게 있던가?
게다가 자세히 비평하면 뭐하는가? <100분 토론>에서 이미 서사 구조의 결함, 그것과 미숙한 연기의 관계, 플롯과 CG의 어색한 결합 등 일일이 다 지적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어디 소용이 있던가? 다음날 신문에는 어차피 이런 기사만 실릴 텐데.
"<디 워>는 비평할 가치조차 없다”, 진중권 막말, 일파만파
진중권, <디 워> 보고 "꼭지가 돌았다"
이 글의 내용도 이렇게 요약하지 않을까?
"<디 워> 관객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진중권 폭언, 일파만파
"<디 워> 보면 바보, 돌 머리", 진중권 막말, 언제까지 계속되나
재미있다. 대한민국에 살아서 좋은 거 한 가지. 도대체 심심할 틈이 없다는 것이다.
CG의 진전, 영화의 후퇴
어떤 평론가가 <디 워>의 서사구조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배우들의 연기가 어색했을 뿐이라고 말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배우들의 연기가 어색해서 목걸이 한 방에 부라퀴 군단이 다 날아가고, 배우들의 연기가 어색해서 선한 이무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배우들의 연기가 어색해서 FBI 요원이 약 먹고 동료에게 총을 쐈다는 얘기다. 대중의 분위기가 평론의 수준까지 떨어뜨리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영화가 혼자 발달하는 게 아니다. 영화가 발달한 나라는 평론도 고도로 발달해 있고, 평론의 토대가 되는 인문학적 담론도 풍성하고, 괜찮은 영화를 보아내는 감식안을 갖춘 일반 관객의 층도 두껍다. 이게 바로 좋은 영화가 나오는 인프라다. 전문적 평론가의 높은 식견과 수준 있는 관객의 높은 기대라는 검증을 통과한 영화라면, 세계 어느 곳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드러난 우리의 영화 인프라의 꼴을 보라.
사실 충무로의 영화언어는 지난 십여 년 동안 엄청나게 발달했다. 각종 국제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가 상을 타는 것을 보는 것은 이제 흔한 일. 전도연을 비롯한 여러 배우들의 수상으로 한국 영화의 연기능력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디 워>에 그동안 한국 영화가 이룬 성취가 조금이라도 반영되어 있던가? 충무로 탓하는 것과 별도로 그 성취를 조금이라도 따라가려 했다면, 영화가 이렇게까지 나오지는 않았을 게다.
서사에 관하여
'디빠'들의 주장에 따르면 어느 시민논객이 내 꼭지를 돌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녀에게 꼭지가 돈 기억이 안 난다(방송이 끝난 후 그녀는 내가 쓴 책을 들고 와서 사인을 받아갔다). 내 꼭지를 돌린 것은, 영화에 대해 평도 못하게 하는 분위기, 소수에게 사이버 폭력을 가하는 집단의 행태였다. '꼭지가 돌아 <디 워>에 대한 평을 썼다'는 게 평론은 냉정해야 한다는 말과 모순된다는 얘기도 있다. 꼭지가 돌았기에 <디 워>에 대해서는 더욱 더 냉정하게 글을 썼다.
<300>에서 나는 "서사보다는 CG가 더 중요한 영화"라고 말했다. <300>의 CG는 마약과 비슷한 환각성이 있다. 그녀의 지적은 '그런데 왜 <디 워>에는 같은 기준을 적용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거기에 대한 답은 이미 내가 1주일 전에 써서 <씨네21>에 보낸 글 속에 들어 있다. "장르 영화는 웬만하면 근사한 CG만 갖고도 서사의 빈곤을 가릴 수 있다. 사실 <트랜스포머>의 경우에도 서사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그것도 서사가 웬만할 때의 일. <디 워>의 서사는 CG의 화려함으로 수습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섰다."
<300>에는 서사가 있다. 왜? 그것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사건이며, 플루타르크가 기록한 텍스트가 있으며, 그 드라마틱한 측면 때문에 서양예술에서 여러 번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항복 권유-레오니다스의 거절-전쟁을 금하는 신탁-호위병 300명만 데리고 출병-에피알테스의 간청-레오니다스의 거절-에피알테스의 배반-300용사의 전멸-그리스 연합군의 결성.' 발단부터 결말까지 철저히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디 워>는 할리우드 괴수 영화와 비교해야 한단다. 괴수 영화에서는 괴물이 주인공이란다. 그럼 <킹콩>을 예로 들어 보자. 이 거대한 괴수에게는 감성이 있다. 그래서 관객은 그의 최후를 안타까워하게 된다. 부라퀴는 어떤가? 그에게서 감성이 느껴지던가? 또 <킹콩>에서는 인간과 괴수가 애정에 가까운 감정의 교류를 보여준다. 반면 <디 워>에서는 둘 다 사람이면서 90분 내내 사랑조차 제대로 못 한다. 이런, 얘기, 더 해야 하는가?
<트랜스포머>에 대해서는 "서사가 미흡하지만 CG가 훌륭하다"고 하면서 <디 워>에 대해서는 "CG는 훌륭한데 서사가 미흡하다"고 말하는 평론가의 이중 잣대(?)를 지적하는 논리도 있다. 아둔한 머리에는 이 두 문장이 모순으로 보이겠지만, 논리적으로 두 문장은 모순이 아니다. 왜? <트랜스포머>는 CG나 플롯 모두 <디 워>보다 낫기 때문이다. 정 못 믿겠으면, 나중에 '디빠'들의 유일한 기준인 그 잘난 흥행성적으로 직접 확인해 보라.
"하면 된다"?
토론 마지막에 내가 했던 말은 "<디 워>, 한국 영화의 희망인가?"라는 토론 제목과 관련되어 있다. 자신을 '대중'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그 말을 "독일, 프랑스도 못하니 한국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진중권 부라퀴는 '사대주의' 부라퀴라고 떠들고 다닌다. 이 규모에 대한 동경. 거대함에 대한 열망. 그들이야말로 영화에서 오로지 커다란 덩치만을 사모하는, 글자 그대로의 사대(大)주의자가 아닐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영화 한 편에 2000억원 이상을 쓰기도 한다. <디 워>와 비교가 안 된다. 충무로에서 무리 없이 동원하는 자본의 규모는 편당 100억원 정도. 편당 300억원씩 들여 영화를 만들어 수출하다가는 자칫 충무로 바닥 전체가 파산한다. 그렇기 때문에 <디 워>의 전략은 한국 영화의 일반적 모델이 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하면 된다"는 전두환 철학으로 <디 워>의 깃발 아래 충무로 타도에 나설 일이 아니다.
제작비가 상상을 초월하는 만큼 할리우드 영화도 자국 시장만으로는 제작비 뽑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시장을 겨냥해 영화를 만든다. 하지만 미국 영화가 전 세계를 시장으로 삼는 것은, 영어가 사실상 세계 공용어이고 미국 문화가 이미 전 세계의 대중문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디 워>에서 배우의 대사가 어색한 것은 한국어 대본을 영어로 직역했기 때문이다. 미국 시장을 점령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미국과 한국의 감성의 간극을 거기서 볼 수 있다.
CG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할리우드에는 그밖에도 최고의 영화미학, 고도의 평론수준, 발달한 관객문화가 있다. 한국 영화에는 그런 인프라도 아직 부족하다. 심 감독에게 "겸손하라"고 말한 어느 감독의 말에 대중은 "주제 파악하라"고 대꾸한다. 그 말은 심형래의 인격에 관한 언급이 아니다. '조지 루카스나 스티븐 스필버그를 따라잡겠다'며 언어의 인플레이션을 남발하지 말라는 얘기다. 약속은 적게 할수록 더 많이 지킬 수 있는 법이니까.
비평과 흥행의 관계
평론가가 '좋은 작품이다', 혹은 '나쁜 작품이다'라고 말할 때, 반드시 그 영화를 봐야 하거나 혹은 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영화를 볼 때 참고하라는 것이다. 내 경우에도 그냥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에는 웬만하면 영화 평론가들이 권하는 영화는 안 본다. 반면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영감을 얻기 위해서나, 혹은 특정한 사람과 같이 영화를 볼 때는 평론가들이 권하는 작품 중에서 골라서 본다.
대중은 충무로의 사주를 받은 평론가들이 <디 워>의 흥행을 막기 위해 악평을 한다고 생각한다. 기자들도 이런 어리석음에 기꺼이 동참한다. "<디 워> 500만 돌파, 관객 입심이 평론가들보다 세다." 평론이 어디 대중과 전문가 사이에 관객 수로 승부를 내는 입심 전쟁인가? 평론이 관객 수의 함수를 구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걸까? "평가는 우리가 한다." 누가 하지 말하고 했나? 당신들도 하는 평가, 평론가들도 하게 좀 내버려두라는 얘기다.
대단히 허탈하겠지만 평론가들은 영화의 흥행에 전혀 이해가 걸려있지 않다. <디 워>를 비판하러 나가던 그날도 나는 강의를 듣는 수강생들에게 "꼭 보라"고 권했다. 영화가 훌륭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너무나 허술해서 영화에서 미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하는 좋은 기회라고 믿어서다. 정말 대형 스크린 위에서 이렇게 서사가 허술한 영화를 다시 보기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살아서 핼리혜성 볼 기회만큼이나 희귀하다. 이런 귀한 기회를 어떻게 놓칠 수 있단 말인가?
비평과 흥행 사이에는 별 인과관계도 없다. 기사를 보니, 여름방학용으로 보는 사람이 대부분(59%)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 전 <씨네21>에 보낸 내 글이 생각난다. "<디 워>의 스토리를 의문 없이 따라가려면, 마음의 연령이 네버랜드 주민의 평균을 넘어서는 안 된다. <디 워>의 연출력은 아직도 방학특선 어린이 영화에서 그리 멀리 나가지 못했다." 근데 이게 외려 흥행에 도움을 준 모양이다. 세상의 이치는 이렇게 오묘하다.
거기서 나는 또 "이 글을 읽고 받은 열에너지를 <디 워>의 반복관람으로 승화시키는 거룩한 이도 더러 있을 터, 이 기여로써 <디 워>의 관람에 의무로 따르는 내 몫의 애국질을 대신"한다고 썼다. 실제로 기사를 보니, <디 워>를 보는 또 다른 이유가 <100분 토론>으로 생긴 호기심 때문이라고 한다. 이로써 남을 못살게 구는 데 사용됐던, '비평이 흥행을 떨어뜨린다'는 열광자들의 믿음은 아무 근거도 없는 기우로 드러났다.
내기 걸기?
어차피 <디 워>는 미국을 겨냥해 만들어진 영화. 그쪽에서는 어떨까? 이른바 '빠'와 '까' 사이에 내기가 벌어진 모양이다. 거기에 대해서 내가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다. 정답. '예언 같은 것은 되도록 안 하는 게 좋다.' <디 워>의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은 굳이 예언을 안 해도 유지된다. 그런데 뭐 하러 쓸 데 없이 예언에 따르는 증명의 의무를 스스로 지는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디 워>는 미국 평단에서도 좋은 평을 듣기를 기대하지는 말라는 것.
'흥행성=작품성'이라고 주장했던 이들은 사정이 좀 다르다. 그들은 흥행의 성공으로 작품성을 증명하려 했고, 또 이제 증명해야 한다. 이래서 제 주장을 예언에 묶어두는 것은 별로 현명한 수가 못 되는 거다. 어차피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성공하여 달러를 벌어다 주겠다고 약속한 영화. 거기서 실패하면, 그들의 마지막 논리마저 파산하게 된다. 물론 나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거국적 희망이 와르르 무너지는 꼴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500개의 개봉관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터. CG에 볼만한 부분이 있고, 용과 이무기라는 새로운 괴수의 이미지도 있고, 미국에는 괴수 영화 마니아들이 꽤 많을 테니, 부디 미국의 관객들이 <디 워>에서 뭔가 서사의 가공할 허접스러움마저 용서하게 해주는 또 다른 측면을 찾아내기를 바랄 뿐이다.
토론 이후
당연히 블로그에 난리가 났다. 실명 올린 지인의 글은 행여 피해가 갈까 다 지워놓았지만, 학교 홈피 다운되는 것은 막을 방법이 없다. 한편 걱정과 격려의 문자와 메일도 날아온다. 어떤 이는 네이버 검색 1위 캡처 화면을 "기념으로" 보낸다며,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축하해요." 허걱. 황우석 때문에 감금됐을 때 '허걱'했던 일이 있었다. 가족들에게 감금에서 풀려놨다고 전화했더니, "야, 벌써 풀려나면 어떻게 하냐? 재미없게…."
황우석 때에 비하면 포스는 10분의 1 수준에, 욕설도 그때 들었던 것의 재탕이라 스릴도, 재미도 없다. 욕을 하더라도 좀 창의적으로 하면 안 되나? 대부분 진부해서 하품이 난다. 성의를 봐서라도 다 읽어주고 싶은데, 너무 지루해서 읽을 수가 없다. 욕을 하더라도 욕먹는 사람 생각 좀 해줬으면 한다. 욕설도 예술적으로 승화해서 하면 어디가 덧나나? 가령 두 손에 딸기를 들고 있는 '꼭지 중권' 패러디 사진. 그건 맘에 들어 따로 컴퓨터에 저장해 놨다.
인터넷 바닥에서 그나마 DC의 '디 워갤' 애들 글은 읽는 재미가 좀 있다. 그 지루함 속에서 한 가지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게 있긴 있었다. '디빠'들이 들고 나온 진중권의 학력 위조 의혹. 세상에, 그건 내가 아니라 외려 그 분을 괴롭혔던 문제가 아닌가. 이렇게 논리에 전혀 구속되지 않는 이 두뇌의 무한한 자유로움에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어떤 종교적 숭고함이 있다. 자폭 테러리스트를 보며 느끼는 외경심이랄까? 하긴, 영화 한 편 보고 후지다고 말하는 졸지에 사회적 사건이 되는 그런 나라에 사는 국민들이 아닌가.
후기
<디 워> 팬 카페에서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고, "<디 워> 팬들이 황우석 지지자들처럼 맹목적인 부류가 되어버렸다"고 비판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사실 모든 <디 워> 팬이 광적인 것은 아니다. 실은 인터넷의 다른 곳과 달리 <디 워> 팬 카페에는 비교적 합리적인 글들이 많이 올라온다. <디 워> 팬 카페가 부디 건전한 지지와 합리적 비평의 온상이 되기 바란다.
'애국' 내걸고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소수에게 폭력을 가하는 문화. 개인적으로 질색이다. "네티즌의 저력을 보여줍시다." 그들은 아마 그런 짓을 하면서, 모종의 권력을 느끼는 모양이다. 현실에서는 고독한 개인으로 권력에 눌려 살던 이들이 집단을 이루어 소수의 약자를 향해 권력을 휘두르며 비로소 느끼는 쾌감이랄까? 안쓰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워낙 하는 짓의 죄질이 고약해서 그런지 동정할 마음이 생기지를 않는다.
내 "꼭지"를 돌린 것은 실은 <디 워> 자체가 아니라, 그 영화를 지지하는 광적인 방식이었다. 도대체 왜 '영웅' 없이 혼자서는 못 살아가는 걸까? 하도 요란하게 광고하던 영화라 기대하고 봤다가 큰 실망을 했지만, 솔직히 나도 한국에서 가장 많은 돈을 들여 만든 영화가 미국에서 망신당하는 것보다는 흥행에서라도 웬만큼 성과를 내는 것을 보고 싶다.
2. 논쟁을 보고 - '디 워' 는 한국영화계의 이무기 같은 존재다
출전 http://blog.cine21.com/iq01/57678 2007-08-11 00:33:48
영화 '디 워' 를 보지 않은 상황에서 영화에 대해 얘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하기로 마음 먹었으니 해야겠다.
내가 본 건 '디 워' 를 주제로 놓고 벌어진 mbc '100분 토론' 이었다. '디 워' 러닝타임이 90분 남짓이라니 이걸 놓고 100분 토론이 벌어졌으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꼴이다. 영화에 관한 글을 블로그에 쓰면서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도 되었다. 진중권 선생은 ‘영화에 대해 뭐 할 말이 있어야지’ 하는 태도로 나왔는데, 내가 블로그에 올리는 글들은 대부분 검증이 끝난 고전영화나 특정감독의 영화 아니면 장르영화에 관해서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영화들, 그것도 1,2년이 아니라 10년, 20년, 30년이 지난 영화를 보고 평을 하는 건 어쩌면 꽤나 수익성이 보장되는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투자의 전설인 워렌 버핏처럼 이건 ‘우량주’ 에게 달러를 담뿍 갖다대주는 꼴이다. 60년대 베스트, 70년대 베스트 음악 CD를 들으면 일단 버릴 곡은 없으니 말이다. 베스트는 말 그대로 베스트고, 이미 당대 관객과 비평가들 그리고 여기에 시간이 더해지면서 살아남은 영화들을 보고 한마디 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디 워’를 둘러싼 논지의 핵심은 이전까지 영화에 대해서 미리 시사회에 초청되어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따끈따끈한 신작에 미리 비평을 할 수 있는, 그리고 이를 신문이나 영화잡지 등의 기성언론에 실음으로써 ‘초야권’을 늠름하게 행사할 수 있었던 문화권력에 대한 대중들의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평론가들이 악평을 해댔기 때문에 대중들이 여기에 대한 반발심리로 뭉친 점도 있을 것이다. 영주가 미리 맛을 보고, 이건 아니다라고 선언한 규수가 ‘결혼시장’ 에서는 대박을 올리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평론가들이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평을 해야한다는 말에 100% 동의한다. 영화를 CG를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발그릇’ 사용하듯 만드는 것이 심형래 감독의 영화철학이라해도, 적어도 이야기의 서사구조를 만들어는 놓고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엉성한 서사를 놀라운 CG로 때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세계영화 또는 미국시장을 석권할 만한 그릇이 애초부터 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CG관련 회사를 세워서 한국영화의 전체적인 발전을 위해 일을 하는게 낫다. 감독으로써 세계영화계를 석권하겠다는 야심을 버리는 것이 한국영화 전체를 위해 올바른 선택이 될 것이다.
그가 몬스터영화로 미국석권을 노린다면 1500여개의 극장에서 동시개봉하는 블록버스터의 전략은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몬스터영화는 마이너리그에 속한다. 소수 컬트광들이 일본의 고질라나 용가리 류, 또는 거대한 거미나(‘스파이더맨’ 이 아닌) 외계생물이 등장하는 영화에 미쳐있지만, 이런 영화는 전 미국극장 동시개봉이나 와이드 릴리즈가 아닌, 특정 전문상영관이나 DVD 판매 등으로 수익을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길고 가늘게 가는 롱테일 전략이 먹히는 장르를 짧고 굵게 가는 블록버스터의 전략으로 공략하려고 하는 것이다.
올 여름에도 ‘스파이더 맨 3’ 이나 ‘커리비안의 해적 3’ 같은 블록버스터가 흥행성공을 거두었다. 미국시장정복을 노리는 심형래 감독은 과연 샘 레이미가 ‘스파이더 맨’ 시리즈에서 보여줬던 주인공 피터 파커에 대한 정성들인 캐릭터 창조(사실 스파이더맨은 ‘스파이더맨’ 이 주인공이 아니라, 거미옷을 잠깐잠깐 입는 피터 파커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영웅이나 몬스터가 아닌, 평범한 주인공 캐릭터가 전면으로 부상한 영화다)를 어느 정도 의식이라도 했을까? ‘커리비안의 해적’은 시리즈의 재탕,삼탕이라고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은 영화지만, 흥행에 성공했다. 이는 쟈니 뎁이라는 배우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3편에선 특히 ‘아버지’ 키스 리처드도 잠깐 얼굴을 비췄고) 그런데 ‘디 워’에 쟈니 뎁 같은 매력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든 상관없이, 관객을 두 시간동안 쏙 잡아놓을 배우가 있는가?
심형래 감독은 미국 내 개봉을 목표로 영화를 만들었고, 배우들도 영어로 대사를 하고, 정작 열광했던 한국관객들은 한글자막을 읽어가며 한국감독과 스탭이 만든 영화를 봤다. 400만이 넘는 관객동원으로 300억의 제작비 본전은 뽑았다고 생각된다. 락음악 공연에서는 밴드의 본 공연 전에 무명의 밴드들이 오프닝 공연을 한다. ‘디 워’ 는 미국 본 시장을 점령하기 전에 맛뵈기로 선을 보인 한국시장에서 이미 본전을 다 뽑아버린 격이 되어버렸다. 미국에서 흥행에 실패를 하더라도 심형래 감독의 앞으로 계획에 별 차질은 없을 거란 얘기다. 어쩌면 이것이 핵심전략은 아니었을까? 정말로 미국시장에서 인정받고 싶었다면, 미국으로 과감하게 날라가서 그곳에서 최초로 개봉을 해서 미국관객의 심판을 먼저 받고 난 뒤에 금의환향했어야 옳지 않을까? 그의 안전한 분산투자전략이 한국에서 미리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미국관객들은 한국의 애국주의나 아리랑 삽입, 이무기 전설에는 관심이 없다. 머리 아프지 않게 90분동안 저녁데이트용 SF영화 하나 땡길 사람들은 ‘디 워’ 를 찾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당연히 이들은 ‘디 워’ 를 미국영화로 생각하고 볼 것이다. 할리웃 진출을 꿈꾸는 한국인 심형래 감독의 포부치고는 너무 음침한 전략은 아닐까?
지금에야 시대를 뛰어넘는 걸작이라는 소릴 듣고 있지만, 개봉 때는 혹평을 면치 못했던 영화도 많다. 영화 연출이 형편없는데도 걸작의 전당에 올라버린 영화도 여럿 있다. 뉴어메리칸 시네마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지 라이더’ 는 배우인 데니스 호퍼가 감독연출을 한 작품이다. 이 영화가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데니스 호퍼의 연출실력이 월등해서는 아니다. 1960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이지 라이더’ 가 의미하는 것, 관습적인 스튜디오 시스템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영화제작의 시대를 열고자했던 새로운 헐리우드 세대들이 꽉 짜여진 헐리웃의 매너리즘화된 프로페셔널리즘을 공격하고 비꼬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영화 내의 우연성과 황당함, 플롯이나 대사의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걸작으로 칭송받는 것이다. 섹스 피스톨즈를 우리가 기억하는 이유는 그들의 쓰리 코드 스타일의 락음악이 레드 제플린과 핑크 플로이드로 대표되는 과도화된 음악의 전문주의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고, 이것이 락음악의 역사와 흐름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졌고, 많은 이들의 공감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일부러 못 만들고 오랫동안 기억되는 감독으로는 전설적인 B급 영화의 대부, 에드우드가 있다. 그의 대표작 ‘외계로부터의 9번 계획’ 에서는 판지로 만든 묘비석이 흔들거리고 곳곳에 극의 흐름과는 상관없는 장면이 갑자기 튀어나오고, 비행접시 - 정말로 ‘접시’로 만든게 분명한 - 가 지구를 잘도 파괴한다. 에드우드는 ‘못 만든 영화’ 라는 자체가 브랜드가 되는 B급 영화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예산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영화를 만들면서 그렇게 카메라에 담을 수 밖에 없는 작품을 만들어 냈던 것이고, 이것이 하나의 키치이자 웰메이드 영화에 대한 일종의 반항으로 받아들여지고 승화되면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 케이스가 되었다.
300억이라는 예산을 손에 쥔 심형래 감독에게 ‘이지 라이더’ 나 에드우드 작품 류의, 일부러 손을 놓거나 뻔한 결함을 드러내고 있는 영화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CG 하나만을 위해 스토리는 어떻게 되든 신경 안 썼다, 그러니 CG만 보고 손뼉 쳐주고 지지해달라는 요구는 한국, 한국인, 한국영화, 한국감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또는 이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은 잘못을 덮어주고 등을 다독여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매국노와 등식이 성립되어 버리는 이상한 마피아 같은 공식을 구성원 전체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이는 상도덕을 지나쳐버린 행위다. 한국제품이니 무조건 써달라? 이런 현실에서 과연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우리가 가질 수 있을까? 그가 조지 루카스나 제임스 카메론처럼 세계적인 SF감독을 꿈꾼다면, 이는 다음 작품에서 반드시 고쳐야 할 점이다. 늑대소년의 거짓외침이 더 이상은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디 워’를 둘러싸고 우리가 갖고 있는 이분법적인 사고구조가 다시금 그 모습을 드러낸 것 같다.
‘디 워’ = 애국자, 미국의 헐리우드 대자본과 맞서 싸우는 우리의 희망,
아리랑, 한국의 얼과 정신과 전설
여기에 반(反)하는 놈들은?
꼬투리를 잡거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비판을 하는 놈들은?
= “대~한민국” 공동체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다.
이런 천박한 이분법에 사로잡힌 덕분에 어쩌면 한국영화에서 아웃사이더적이고 독보적인 장르를 개척한 심형래 감독이 6년에 걸쳐 피땀흘린 결과물은 제대로 심사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있다. “일주일만에 관객 400만 동원” 이것이 알파요 오메가다. 어쩌면 우린 인간 심형래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려 들고 있는건 아닐까? ‘영구와 땡칠이’ 의 21세기 업그레이드 버전, 300억 제작비로 새로 태어난 용가리의 스핀오프. 이정도가 그의 수준에 맞는 평가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에게 ‘한국영화의 희망’ 이라든가 ‘대한민국의 힘’ 같은 수식어를 함부로 붙여줘서도 안 되는 것 아닌가?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최근 들어 솔솔 들려오던 ‘한국영화 위기론’은 앞으로 한국영화의 장기적인 발전방향에 대한 논의를 제대로 짚어보기도 전에, ‘화려한 휴가’ 와 ‘디 워’ 의 흥행성공으로 굴을 타고 땅속으로 쏙 들어가버린 듯하다. 영화 한 두편의 천만관객동원이 전체 산업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지는 의문이다. 동네 사람 중 억만장자 한 명 있고 나머지는 다 가난한 동네나 골고루 잘 사는 동네나 전체 소득수준은 비슷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한국영화계도 해마다 한 두편의 대박흥행만 바라보고, 또 이런 영화들 때문에 그래도 사람들이 한국영화를 사랑하고 꾸준히 보는구나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위험한 로또 도박판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출전: 씨네 21
3. 칼럼 : <디 워> 논란 / 남동철(씨네 21 편집장)
<디 워>를 둘러싸고 말이 많다. 순수하게 영화적 성과를 논하는 것부터 심형래 감독의 학력 위조에 관한 입장까지. 한편의 오락영화일 뿐이니 재미있냐 없냐만 말하면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디 워>는 이미 하나의 사회현상이 된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이지만 인터넷을 뒤져보니 <디 워>와 심형래 감독을 둘러싼 다양한 입장을 접할 수 있었다. 간략하게 쟁점들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영화에 관한 평가는 ‘뛰어난 컴퓨터그래픽과 다소 허술한 이야기’라는 말로 축약되는 분위기지만 긍정적인 입장과 부정적인 입장 사이의 거리는 멀다. “이무기가 도심에서 벌이는 파괴 행위와 여의주를 둘러싸고 두 마리 이무기가 벌이는 박진감 넘치는 배틀은, 그 어떤 거대괴수영화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장관”이라고 말하는 호평이 있는 반면 “이야기의 구성에 아무런 개연성과 매력이 없다보니 이무기가 떼로 몰려와서 LA를 파괴하는 장면도 게임 신작 오프닝을 보는 정도로만 재미있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2. 한국영화의 세계화라는 전략적 측면에서 <디 워>의 시도를 어떻게 보느냐도 입장 차이가 상당하다. 심형래 감독은 <디 워>가 100% 한국 기술로 이뤄진 것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는데 여기서 100%란 컴퓨터그래픽이나 미니어처에 한한 이야기일 것이다. <디 워>의 엔딩 크레딧에 나오듯 촬영, 음악, 음향, 편집 등 주요 스탭들의 자리엔 외국인의 이름이 올라 있다. <용가리>에 비해 많이 발전한 것은 사실이나 이렇게 주요 스탭과 배우가 할리우드 인력일 때 <디 워>를 모범적인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볼 수 있느냐는 논란거리다. <괴물>도 외국 스탭을 동원했으나 <디 워>에 비하면 그 비중은 아주 작다. 300억원의 제작비가 투자된 영화인 만큼 <디 워>가 한국형 블록버스터 전략으로 얼마나 성공적인지는 두고 볼 대목이다.
3. 애국심 마케팅을 둘러싼 논란이다. <디 워>의 엔딩에는 심형래 감독이 관객에게 보내는 편지가 들어 있다. SF영화의 불모지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영웅적 이미지를 부각하고 있는데 은연중에 ‘자랑스런 한국인’이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제작진은 특별히 애국심을 강조하는 마케팅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엔딩장면만 놓고 보면 무색한 이야기다. 다만 영화 본편 자체는 애국심과 별 관련이 없다. 문제는 네티즌인데 일부 심형래 지지자들이 너무 과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어 오히려 반감을 사는 분위기다.
4. 예기치 않게 터져나온 심형래 감독의 학력 위조 사건은 심형래의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주고 있다. 학력 위조가 단순 실수로 비롯된 것인지 의도적인 거짓말인지도 논란이지만 이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이냐도 입장 차이가 큰 문제다. 광주비엔날레 신정아씨 사건이 터진 직후에 불거진 얘기라 대중적 관심이 각별할 수밖에 없다. 지지자들은 심형래가 학력 위조로 특별한 이득을 취한 적이 없음을 강조한다. 신정아는 학력 위조가 그의 경력에 큰 디딤돌이 됐지만, 심형래는 학력 위조로 인기를 얻은 것도 아니고, 영화제작에 이용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심형래 스스로 사과를 했지만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미지수다.
이번호에는 <디 워>의 제작과정을 담은 기획기사와 함께 <디 워> 배급사인 쇼박스가 제공하는 <디 워> 스페셜 에디션이 별책부록으로 나간다. 앞서 언급한 논란과 별개로 영화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차원이다. <디 워>에 관한 쟁점은 영화가 개봉하면서 더 뜨거워질 전망이므로 추후 더 깊이 있는 기획기사를 준비할 예정이다.
4. (영화비평) 기대 반 우려 반, 딱 그만큼!
특수효과·음악은 합격점, 이야기 흐름·배우들의 연기는 낙제점, 심형래 감독의 <디 워>
출전: 한겨레 21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디 워>(D-War)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LA의 한복판, 거대한 무언가 휩쓸고 간 흔적이 남는다. 방송사 CGNN 기자 이든(제이슨 베어)은 취재를 위해서 현장에 접근하다 거대한 비늘 자국을 발견한다. 그리고 직감에 휩싸여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린다. 이든은 아버지와 함께 골동품 가게에 갔다가 주인인 잭(로버트 포스터)에게 500년 전 한국의 전설을 듣는다. 잭은 이든에게 이무기가 500년에 한 번씩 여의주를 물고서 승천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든이 여의주를 지키려다 숨진 조선시대 무사의 환생이라는 사실도 알려준다. 이무기에는 선악이 있는데 악한 이무기, 부라퀴가 500년 전 여의주를 훔치려다가 실패했다. 여의주를 품은 소녀가 부라퀴 일당을 피해 달아나다 숨졌기 때문이다. 양반집 규수였던 소녀의 곁에는 이든의 전생인 무사가 있었다. 여기에 잭은 무사를 키웠던 노스님의 환생이다. 500년 전의 소녀는 LA의 아가씨 세라(아만다 브룩스)로 환생했다. 브라퀴는 세라의 여의주를 노리는 것이다.
미숙한 연기에 느닷없는 로맨스라니
이렇게 500년을 뛰어넘는 서사는 기승전결 정확한 구분을 거치지 않고 빠르게 압축된다. 그리고 LA에서 이든과 세라를 쫓는 부라퀴 일당의 추격전이 시작된다. 공력이 높은 잭은 적당히 변신을 하면서 이들을 돕는다. 명백한 선악 구조가 지루해질 무렵에 본격적으로 컴퓨터 그래픽(CG)을 활용한 특수효과가 효과를 발휘한다. 괴수 부라퀴, 달리는 샤콘, 날으는 불코, 기는 더들러, CG를 통해서 탄생한 괴물들의 활약은 할리우드 영화에 견줄 만큼 볼 만하다. 부라퀴가 고층 빌딩을 감고 올라가고, 익룡처럼 생긴 불코가 하늘을 날으는 장면처럼 인상적인 장면이 적지 않다. CG만 놓고 보면, <디 워>의 이무기는 <괴물>의 괴물보다 몸놀림이 가볍고 움직임이 유연하다. 할리우드 스태프들이 참여한 편집, 음악, 음향도 영화에 긴박감을 더한다. <브로큰 애로우> <콘에어>의 편집을 담당했던 스티브 미르코비치와 팀 앨버슨의 속도감 있는 편집은 특수효과를 제대로 살리고, <트랜스포머>의 음악감독 스티브 자블론스키가 만든 음악은 후반부의 추격신에 박진감을 불어넣는다.
특수효과는 박진감이 있지만, 배우들의 연기는 딱딱하다 못해 미숙하다. 이야기는 시대를 넘나드는 것이 아니라 건너뛰는 것처럼 단절된다. 한 시대 안에서도 감정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다. 심형래 감독은 일부러 선악 구조를 단순화했다고 주장하지만, 정말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단순화한 것인지 의문이 남는다. 어린이를 포함한 다양한 연령의 관객을 고려해 압축해서 편집한 86분의 상영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이야기의 개연성은 부족하고 연기의 능숙도는 떨어진다. 환생의 연결 고리가 단단하게 묶이지 않고,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도 느닷없이 시작된다. 때때로 일차원적인 설정은 실소마저 자아낸다. 실사와 특수효과가 충돌하는 장면도 있다. 조선시대에 갑자기 우주 악당 같기도 하고, 중세 용사 같기도 한 적들이 나타나는 장면은 아무래도 뜬금없다. 전반적으로 악당의 액션에 공을 들였으나 선의 동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한 것이다. 악과 맞서는 인물의 동기에 몰입이 되지 않으니 그저 액션만 즐기게 된다. <디 워>에 앞서 퍼졌던 기대 반, 우려 반의 예감은 이렇게 현실로 나타났다. 그래도 할리우드 영화를 즐기는 관객이라면 여름방학용 영화로 맞춤하다.
‘HOLLYWOOD’ 앞에서 성공 다짐하는 심형래
<디 워>는 심형래 감독이 <용가리> 이후 8년 만에 절치부심으로 내놓는 야심작이다. 제작비 300억원이 투여된 판타지 대작이다. 1999년 기획을 시작해 2003년 한국 촬영, 2004년 미국 촬영, 이후의 특수효과와 후반 작업까지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심형래 감독 필생의 야심작답게 심혈을 기울였다. 심형래 감독은 아널드 슈워제네거 주지사에게 서신을 보내는 노력을 기울여 9·11 이후에 최초로(혹은 드물게) LA 시가전 촬영을 허가받았다. 이 밖에도 500벌의 특수의상과 2만4천여 명의 엑스트라도 동원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디 워>는 500개의 스크린을 확보해 8월1일 개봉한다. 심형래 감독은 “미국에서도 1700∼2천 개의 스크린에서 (개봉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대규모 개봉을 한다고 덧붙였다.
<디 워>는 장엄한 아리랑으로 영화를 마무리하면서 애국주의 정서를 자극한다. 영화가 끝나고 예외적으로 에필로그가 이어진다. 심형래 감독이 살아온 역사가 사진에 담겨서 2분이나 계속된다. 여기에 비장한 자막이 얹힌다. 심형래 감독은 자신이 얼마나 처절한 도전과 실패의 역사를 딛고서 <디 워>를 만들었는지 강조한다. 저 멀리 산 위에 새겨진 ‘HOLLYWOOD’라는 활자를 배경으로 “나는 세계 시장에서 <디 워>로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고 다짐하는 모습은, 아메리칸드림을 기필코 이루겠다고 다짐하는 ‘코메리칸’ 아저씨 같았다. 그에게 영화는 전투 같았다.
5. 씨네21영화비평: 서늘한 구성상의 빈약함 <디 워> 글 : 주성철 | 2007.08.01
대낮의 LA 도심을 가로지르는 CG의 뜨거운 쾌감 뒤에 찾아오는 서늘한 구성상의 빈약함
심형래 감독의 7년 만의 신작 <디워>는 <용가리>(1999)로부터, 혹은 더 멀리 영구아트의 창립작이기도 한 <영구와 공룡 쮸쮸>(1993)로부터 이어지는 심형래식 한국형 SF의 현재형이다. 그것은 또한 <용가리>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심형래가 직접 ‘영구’로 출연한 이전 영화들은 특수효과와 더불어 그 특유의 개그가 반반씩 섞인 구조였다면, 말 그대로 ‘영구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용가리>와 <디워>는 할리우드의 뒤를 좇겠다는 야심찬 목표 아래 블록버스터급 특수효과 영화를 지향하고 있다.
LA에서 벌어진 대형 참사를 취재하던 이든(제이슨 베어)은 정체불명의 비늘을 보고 회상에 잠긴다. 어렸을 적 잭(로버트 포스터)에게 옛 한국의 전설을 들었던 그는 그것이 이무기의 것임을 직감한다. 이무기가 용으로 승천하기 위해서는 여의주를 지닌 처녀를 제물로 삼아야 하는데, 과거 승천에 실패했던 이무기가 다시 LA에 나타난 것. 잭은 여의주를 지닌 세라(아만다 브룩스)를 찾아내고, 악한 이무기 ‘부라퀴’의 추종세력 또한 LA로 몰려와 거대한 전쟁이 벌어진다.
대부분이 야간 전투신이었던 <용가리>와 비교하자면, 대낮의 LA 도심을 질주하는 <디워>의 시각적 성취는 한국영화로서는 분명 선두에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할리우드와 경쟁하겠다는 그 야심이 무모한 것이 아니라, 한국 영화산업의 취약한 기반 위에서 그 300억원의 야심 자체가 신기루로 보인다는 데 있다. 무릇 경쟁이란 서로 주고받는 것일 텐데 <용가리>와 <디워> 사이 7년이란 긴 시간은 너무나 고독한 개인의 전쟁으로 비쳐진다. 관습적인 말로 ‘장르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디워>는 분명 격려 받을 시도임이 분명하지만, 앞으로도 그 허기가 차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6. 한겨레신문 토론방
디워논쟁을 통해서 본 인터넷 문화 아기공룡쮸쮸 (dinggomen) 2007년08월16일
http://hantoma.hani.co.kr/board/ht_culture:001032/188614
8월 1일 개봉한 영화 디워 때문에, 영화와 관련된 인터넷의 수많은 커뮤니티들은 아수라장이 됐었다. 개봉한지 보름이 지난 지금, 논란의 열기는 조금 식었지만, 아직도 곳곳에선 영화에 대해서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향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서로 헐뜯고, 욕하는데 바빴다. 말꼬투리 잡는데 급급해 했고, 쉽게 흥분했다. 오랫동안 계속된 공방전을 지켜보면서, 나는 수준 낮은 인터넷 토론문화에 많은 실망을 했다.
디워에 대한 공방전은, 작품의 흥행에 대한 당위성여부, 작품성여부 등 여러 가지를 주제로 삼아 벌어졌다. 수많은 네티즌들이 관심을 갖았던 이번 공방전의 주제만을 놓고 본다면, 참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영화산업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첫 영화로서의 의의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네티즌들의 날카로운 지적을 통해 제시해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범네티즌적 토론을 공방전이라 표현하는 것은, 토론의 내용에 그 이유가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 의문을 품지만, 다른 의견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못하다. 소수의 의견을 조롱하고, 자신과 반대의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는 욕설과 인신공격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존중은 찾아보기 힘들다. 권위 있거나, 말 잘하는(!) 중재자가 나서거나, 소수의 의견을 가진 자가 수적으로 심각하게 불리할 때, 공방전은 잠시 잠잠해진다.
이렇게 질 낮은 공방전이 생기게 되는 것에는, 우선 인터넷의 특성과 관련하여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 타인을 비방하거나 조롱할 때, 사람은 심리적으로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터넷의 익명성이란 특성은 그 불안함을 줄여주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인터넷상에서 아무리 질 낮은 언행을 보이더라도, 그 사람의 실질적 프라이드에는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네티즌들의 인식문제에서도 원인을 찾아볼 수 가 있다. 인터넷에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이다. 키보드 치는 것은 펜을 굴리는 것보다 빠르며, 클릭 몇 번 하는 것은 편지를 부치는 일보다 쉽다. 이러한 절차상의 간단함이 부추긴 것은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책임의식의 부재이다. 어떻게 보면 솔직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요즘 네티즌들은, 자신이 쓴 글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고, 몇 번의 타이핑과 몇 번의 클릭으로 간단하고 직설적이게 글을 써 올린다.
사실 익명성과 네티즌들의 인식문제는 오래전부터 문제로서 제기되어 왔지만, 해결은 힘들어 보인다. 몇몇 포털사이트는 실명제를 도입했지만, 좋은 해결책은 아니다. 인터넷은 현실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매력을 갖는다. 인터넷 실명제 도입은 인터넷의 가장 큰 매력을 없애는 일이다. 인식문제 역시, 근본적인 해결을 명분으로, 인터넷에 글을 쓰는데 복잡한 절차를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인터넷상에서의 의사표현에 관한 문제점을 해결하기위해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퇴보를 향한 길이다. 강압적이고 불편한 환경의 디지털 세대는, 과거 아날로그 세대와 다를 바가 없다.
보다 성숙한 인터넷 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해결책의 키워드는 ‘조화’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장점을 무시하는 강압적인 해결책을 시행하는 것도 옳지 못하고, 서로에 대한 조롱과 형식 없는 비판이 판을 치는 현실 앞에서 무조건적인 자유를 바라는 것도 옳지 못하다. 익명성은 보장한 채, 네티즌 서로의 평가를 통한 포인트 제도나, 비성숙한 언행을 보이는 네티즌에게 벌점을 부과하는 제도 등도 고려해볼 만하다. 네티즌들을 위한 인터넷예절교육도 필요하다.
이번 디워 논쟁 전에도 인터넷에서는 수많은 논쟁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의견을 같이할 수 없는 일이 생길 때 마다, 인터넷 커뮤니티는 전란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번 디워 논쟁은 조금 심각한 편이다. 공중파 방송의 토론 프로그램에서 주제로 삼기도 하였다. 이번 디워 논쟁이, 우리 인터넷 문화의 비성숙함을 깨닫고, 보다 성숙한 인터넷 문화의 확립을 위한 제도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7. 디워논쟁 제 2막 / 강병진 (씨네 21 기획리포트 2007.08.21)
<100분 토론> 이후 <디 워> 팬의 전방위 공격 잠잠해지고 미국 개봉에 관심 쏠려
논란의 종지부인가. 거대한 태풍을 맞이하기 전의 고요함인가. <디 워>를 둘러싼 여러 논란들이 지난 8월9일 있었던 MBC <100분 토론> 이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평소의 세배인 4.7%의 시청률(AGB닐슨 집계)을 기록한 이날 <100분 토론>은 특히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의 거침없는 언변으로 큰 화제를 낳았다. 토론이 끝나자 <디 워> 팬들은 진중권 교수에게 집중적인 공격을 가했고, 변희재 문화평론가를 비롯한 몇몇 논객도 이 비난에 가세해 논란의 판을 키웠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현재는 <100분 토론>이 마치 <디 워> 논쟁의 분수령이 된 듯한 양상이다.
8월16일 현재, 극장가를 비롯해 인터넷 뉴스 창, <디 워> 팬카페 게시판 등은 눈에 띄게 조용한 분위기다. 인터넷 언론 또한 더이상 ‘영화전문가 vs <디 워> 팬’들의 논쟁을 기사화하기보다는 <디 워>의 흥행기록과 미국 흥행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쟁점을 옮겼으며 <디 워>를 본 관객의 평점도 낮아지고 있다. 영화를 예매하고 관람이 확인된 관객의 평점만을 집계하는 맥스무비에 따르면 개봉 다음 날인 8월2일, <디 워>의 관객평점은 8.76점(133명 참여)이었으나, <100분 토론> 전인 9일 오후 5시에는 8.08점(2379명 참여)으로 낮아졌으며 8월15일 현재는 7.96점(3927명 참여)을 기록하고 있다. <디 워>를 찾는 관객의 발길도 예전에 비해 둔해졌다. 개봉 둘쨋주만 해도 하루 평균 3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던 <디 워>는 개봉 3주차를 맞아 하루 20만명선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마련된 ‘디 워&영구아트 팬카페’의 회원들도 더이상 진중권 교수에게 날을 세우려 하지 않는 모습이다. 팬카페 회원인 ‘다이쇼군(rooam)’은 “진중권씨의 발언에는 틀린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 몸에 좋은 약은 쓴 법이고, 듣기 좋은 말은 나를 망치는 근본”이라고 말했으며 ‘소보(7kiaora)’란 닉네임을 가진 회원은 “진중권씨의 신랄한 비판은, 어디까지나 심 감독님이 받아들여야 할 자세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한 것이며, 이런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음 작품에서의 발전은 무엇을 기대고 바랄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개봉 3주차를 맞으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일 수도 있지만, <100분 토론>과 진중권 교수가 <디 워> 논쟁에 어느 정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방학시즌이 끝나는 오는 8월 말이면 <디 워>를 놓고 벌였던 격렬한 논란이 완전히 한풀 꺾일 전망이다.
그렇다면 이제 <디 워>를 둘러싼 모든 논란은 잠들어버릴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논란이 <디 워>를 화제의 중심으로 올려놓을 가능성이 남아 있다. <디 워>는 8월15일 현재, 전국누적관객 660만명을 돌파하여 역대 한국영화 흥행 8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아직 손익분기점까지 다다르기엔 고지가 멀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300억원이란 제작비와 일반적으로 관객 1명의 입장료에서 배급사가 가져가는 2800원에서 2900원 정도의 수익을 고려할 때, <디 워>의 손익분기점은 약 1100만명이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쇼박스쪽은 “<디 워>는 한국시장이 아닌 세계시장을 목표로 기획된 작품”이라며 “해외개봉성적과 DVD등 부가판권수입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손익분기점을 산출하기가 힘들다”는 입장이지만 순전히 국내 관객만 놓고 보면 아직 돈을 벌지 못한 상태다. 그만큼 이제는 <디 워>의 국내외 흥행여부와 그로 인한 수익분배문제가 또 다른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미국개봉 규모와 수익분배문제 또 다른 논란거리로
우선 오는 9월14일 미국에서 개봉될 <디 워>가 과연 쇼박스의 발표처럼 “이미 17개국에 선판매가 이루어졌으며, 1500개 이상의 스크린에서 개봉될 것이고 미국쪽 배급사인 프리스타일 릴리징이 개봉에 소요되는 150억원의 마케팅 비용을 부담할 것”인지 여부가 첫 번째 문제다. 배급사인 쇼박스쪽의 발표와 달리 로튼토마토닷컴 등 미국 영화 관련 사이트에 <디 워>의 배급 규모가 와이드 릴리즈가 아닌 리미티드로 표기되어 있다는 논란은 미국 야후사이트에서 와이드로 표기된 사실이 발견되면서 어느 정도 일단락 됐다(로튼토마토닷컴에는 아직 리미티드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프리스타일 릴리즈’란 회사가 한편의 영화를 와이드 릴리즈할 수 있는 배급사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심쩍은 눈초리가 남아 있다. <버라이어티> 한국 통신원인 달시 파켓은 “미국에서 1500개 스크린을 연다는 것은 가능은 하겠지만 주로 평범한 규모의 배급을 해오던 회사라 개봉 뒤에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고, <씨네21>이 이메일로 인터뷰한 미국쪽 배급 관계자는 “미국에서 1500개란 스크린 수는 작은 것은 아니지만 와이드 릴리즈라고 볼 수는 없는 규모”라고 말했다. 그는 프리스타일 쪽이 150억원의 마케팅 비용을 부담한다는 것도 확신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프리스타일이 이 돈을 전부 지불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프리스타일이 영화를 배급할 때는 주로 제작사나 DVD 배급자들이 마케팅 비용을 제공했다. 게다가 150억원이면 TV광고를 하는 데에는 충분하지만 와이드 릴리즈를 하기에는 부족한 돈이다.”
<디 워>가 남길 것으로 예상되는 또 하나의 논란은 수익분배문제다. 2006년 말 선진회계법인이 작성한 (주)영구아트(옛 영구문화아트)의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디 워>에 투자한 투자자는 현대스위스저축은행, 에이스저축은행과 제작사인 영구아트무비와 심형래 감독 등이다. 또한 공시자료에 따르면 여기에 미디어플렉스가 일정 금액을 부분 투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한 금액은 밝혀진 바 없지만 지난 7월24일, <할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쇼박스 정태성 상무는 “<디 워>의 총제작비는 3억달러(300억원)이며 쇼박스는 이 가운데 1/3을 투자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투자 관계자들은 <디 워>의 투자자들이 두손으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초기투자자들부터 마지막에 투자한 사람들까지 계약조건이 저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에 수익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빚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프로덕션 과정에서 막판에 투자한 사람들에게는 원금보장을 해주거나, 손익분기점을 낮게 책정하거나, 주식을 담보로 투자를 유치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픈앤디드픽쳐스의 서영관 대표는 “이런 상황이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태극기 휘날리며>나 <괴물> 때 있었던 소송문제처럼 자신의 수익은 왜 이것밖에 안 되는지 항의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라고 말했으며, 센츄리온기술투자의 이세형 전무는 “일반 영화에서 부분투자자들은 6개월이나 1년 정도 참여하기 때문에 투자자들의 계약조건이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디 워>처럼 오랜 시간 펀딩이 계속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후반에 들어온 투자자들이 위험부담을 적게 가져가려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센츄리언기술투자는 영구아트무비로부터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몇 차례의 투자제의를 받았던 회사다. 같은 회사의 문수봉 팀장은 “프로덕션 중반부터는 우리뿐만 아니라 많은 곳에 투자제의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쪽에 제의를 할 때는 그쪽 담당자도 영화의 흥행을 반신반의했는지, 과감하게 투자를 제의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9월14일 미국개봉 성적에 모든 관심 쏠려
현재 <디 워>는 지난 15일, 심형래 감독의 출국과 함께 미국 개봉 준비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다. ‘<디 워>&영구아트 팬카페’쪽도 영화 전문가들에게 날을 세우기보다는 <디 워>의 미국 흥행을 주시하고 있는 상태다. 일부 회원들은 “<디 워>의 미국 흥행을 위해 미국 주요 사이트의 영화예고편 순위에 <디 워>를 올리도록 조직적인 행동이 필요하다”(jurbill114)거나, “<디 워> 안티들 때문에 6.6점이던 <디 워>의 IMDb평점이 6.4점으로 내려갔다. 우리 모두 가서 별점을 주고 오자”(ready2scrap) 등의 논의를 하고 있다. 하지만 <디 워>의 미국 흥행여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달시 파켓은 “9월이면 미국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름보다는 조용한 시즌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고 말한 반면, 앞서 이야기한 미국쪽 배급관계자는 “<디 워>가 정말 흥행을 목적으로 한다면 1500개 이상의 스크린을 확보해 개봉 첫주와 둘쨋주 스코어를 노려야 할 것이다. 배우 연기와 각본 등에서 문제가 있는 <디 워>가 1500개 스크린으로 출발해 극장에서 장기적으로 버틸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아마도 <디 워>의 미국 흥행여부는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100분 토론> 못지않게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배급 규모와 흥행성과에 따라 심형래 감독과 쇼박스 측의 주장이 입증될 것이고, 투자자들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자신에게 돌아올 수익을 계산할 것이다.
8. 이보다 더 위험한 마케팅이 있는가 (한겨레21 영화비평2007년8월23 674호)
강성률 영화평론가
손 대면 톡 하고 터지는 민족주의, 심형래를 망치는 길
영화 <디 워>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도 이제 지겨울 때가 됐다. 그리고 더 지겨워지기 전에 논란을 차분히 곱씹어볼 때가 됐다. <디 워>는 그동안 한국 사회에 잠복해 있던 여러 문제들을 일거에 ‘환생’시켰기 때문이다. ‘<디 워> 현상’은 여러 겹이다. 이 중에서 우리가 반드시 돌아봐야 할 두 가지 논점에 대한 글을 싣는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애국주의와 대중주의다. 반대하건 찬성하건 입가의 거품을 닦고 차분해지자. 이제 그럴 때가 됐다. 편집자
한 편의 영화를 두고 이렇게까지 말이 많은 것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것 같다. 심형래 감독의 <디 워>를 둘러싸고 말들이 참으로 많다. 각 방송사에서는 메인 뉴스에서 이 영화의 놀라운 흥행에 대해 수시로 보고하듯이 방송하고 있고, 한 방송사에서는 대표 시사 프로그램에서 이 영화로 100분간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방송의 보도는 인터넷에 비하면, 말 그대로 조족지혈(鳥足之血)이다. 인터넷에서 <디 워>는 전쟁(the war)이다. <디 워> 서포터스들은 평론가와 충무로를 상대로 더블 전쟁(D(ouble) war)을 치르고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인터넷에 들어가면 그들의 놀라운 활약상을 볼 수 있다.
벗어날 수 없는 애국심 마케팅
<디 워>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비판한 평론가들을 비판한다. 자신들이 볼 때 재미있고 의미 있는 영화를 왜 무지막지하게 비판하냐는 것이다. 그들은 평론가와 영화인을 싸잡아서 ‘충무로’로 통칭하며 충무로가 이제까지 심형래 감독을 배척한, 아주 좋지 않은 집단이라고 규정한다. 특히 그들은 불합리한 구조의 충무로에 대항해 대안을 내세운 심형래를 대단한 감독으로 치켜세운다. 특히 한국 영화의 위기가 불거진 지금 심형래는 한국 영화의 ‘구세주’가 된다.
불행하게도 <디 워>는 영화 자체로서 이야기되지 않고 그것을 둘러싼 환경을 통해 이야기되고 있다. 영화로서는 참으로 불행한 경우지만, 마케팅의 차원에서 보면 이것은 대단히 뛰어난 마케팅이다. 영화 자체의 흠을 거론하지 않고 영화를 둘러싼 환경을 통해 무조건적으로 영화를 봐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잘된 마케팅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여론의 촉수라고 할 수 있는 인터넷에는 온통 <디 워>를 ‘둘러싼’ 이야기가 오가고 있고, 이것이 결국 흥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보다 더 탁월한 마케팅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한다.
이 영화를 둘러싼 환경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충무로에서 철저하게 배척된 영화제작자 심형래가 고독하게 걸어온 승리의 길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다 아는, 가장 잘나가던 개그맨에서 영화감독이자 제작자로 변신해 충무로의 푸대접을 이겨내고 결국에는 성공한 감독이 되었다는 이야기,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한국에서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던 디지털 기술에 참으로 끈기 있게 도전해서 결국에는 해냈다는 디지털 전쟁(D(igital) war)의 승리가 들어 있다. 그리고 영화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적어도 1500개, 많으면 2천 개 이상의 스크린을 통해 개봉한다는 ‘용들의 전쟁’(D(ragon) war) 이야기가 있다. 외국 영화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미국에서 대규모로 개봉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기적인 것이다.
<디 워>의 마케팅은 영화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영화를 둘러싼 이런 이야기에 집중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강조한 마케팅은 ‘애국심 마케팅’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통해 일상어가 될 정도로 이 영화의 마케팅은 성공적(?)이다. 심지어 애국심 마케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이 글 역시, 역설적이게도 <디 워>의 흥행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디 워> 마케팅의 탁월함을 알 수 있다. 이제 <디 워>를 언급하는 것은 <디 워>의 마케팅을 도와주는 것에서 그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
<디 워>를 옹호하는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다. 모든 영화가 홍보하고자 하는 영화에 맞는 마케팅을 하듯이 <디 워>도 영화에 맞는 애국심 마케팅을 했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냐고. 일견은 맞는 말이다. 모든 영화는 마케팅을 한다. 게다가 애국심 마케팅이 <디 워>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애국심 마케팅을 구사하는 영화가 모두 흥행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당장 보더라도 심형래의 전작 <용가리>는 한국 영화 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수출 실적을 근거로 애국심 마케팅을 벌였지만 처참한 실패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디 워>는 성공을 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황우석과 금 모으기
애국심 마케팅이 등장한 것이 <디 워>가 처음은 아니었다. 영화를 넘어 우리에게 애국심 마케팅이 일상화됐다고 할 수 있었던 때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직후였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제품에서 애국심 마케팅을 벌였다. 외국 브랜드도 한국에서 만들기 때문에 한국에 폐를 끼치지 않고 이익을 준다는 것이 당시 마케팅의 전략이었다. 혹시 ‘콜라독립 815’를 기억하는가? 철저하게 애국심에 기대어 마케팅한 제품이다. 그런데 이 마케팅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지금 슈퍼에 가면 콜라독립 815를 찾으려고 해도 도저히 찾을 수 없다. 결국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은 제품의 질이다. 애국심 마케팅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영화에서도 그런 것은 많았다. 먼저 기억나는 것은 칸영화제를 비롯한 해외의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을 두고 벌이는 마케팅이다. <올드보이>처럼 국내에서 흥행을 마친 뒤 칸영화제에서 수상한 경우는 다르지만, 국내에 개봉하기 전에 수상한 <취화선>은 애국심 마케팅에 기댄 영화였다. 해외에서 국위를 선양했기 때문에 우리가 밀어줘야 한다는, 철저하게 애국심에 호소하는 마케팅이었다. 그런데 <디 워>는 <취화선>과 조금 다르다. <취화선>이 해외에서 인정받은 영화를 국내에 상영한 경우라면, <디 워>는 그렇지 않다. 미국 개봉 일정만으로 국내 마케팅을 하고 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해외에서 아직 인정받지 못했지만, 오히려 역으로 이 상황을 이용해서 마케팅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애국심 마케팅이 개입된다. 미국에서 <디 워>의 흥행은 한국 영화, 더 나아가 한국의 승리이기 때문에, <디 워>를 한국에서 많이 봐줘서 미국 시장에서 흥행하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논리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버린다. 갑자기 한국과 미국의 대결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때문에 한국의 대표선수인 심형래를 응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로 바뀌어버린다.
<디 워>의 마케팅이 위험한 것은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애국심 마케팅을 넘어 민족주의를 자극하면서, 민족주의의 아주 위험한 함정인 전체주의적 경향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디 워>에는 한국 소재인 이무기가 등장하고, 500년 전의 조선이 영화 속의 짧은 배경이 되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아리랑>이 엔딩 음악으로 사용되었다. 이뿐인가. 이 영화는 순 우리 기술로 완성되었다. 여기서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심형래의 발언이 이어졌다. TV 쇼 프로그램에 나온 그는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두 번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영화 속 인물이 이무기 설화를 설명하면서 “This is Korean legend”, 즉 이것은 한국의 전설이라고 말하는 부분과, 영화 마지막의 <아리랑>이 울려퍼지는 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는 덧붙이기를 서구의 클래식이 훌륭한 음악이라면, 우리의 <아리랑>도 훌륭한 음악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모든 스태프들이 반대했지만 결국 <아리랑>을 삽입했다고 했다. 이런 영화가 미국에서 대규모로 개봉되기 때문에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어야 한다는 민족주의가 등장한다. 이것은 마치 IMF 시절의 금모으기 광풍을 보는 것 같다.
나는 <디 워>를 둘러싼 일련의 이런 움직임이 한국의 민족주의가 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내가 떠올린 것은 황우석 사건이었다. 두 사건은, 흥미롭게도 거의 유사하다. 심형래가 순 우리의 기술로 만든 영화, 그것도 한국의 설화를 소재로 한 영화로 세계 최고 시장인 미국에서 1500개 이상의 스크린에서 개봉하는 것과, 황우석이 순 우리 기술로 만든 복제 기술로 의료 기술이 최고로 발단된 미국에서 인정받은 것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황우석이 “맞춤형 줄기세포는 대한민국의 기술”이라고 말한 것과, “미국의 심장부에서 생명공학의 고지 위에 태극기를 꽂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말한 것을 심형래에게 적용하면 너무도 잘 들어맞는다. 게다가 줄기세포가 대한민국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주장과, 컴퓨터그래픽(CG) 기술이 엄청난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도 동일하다. 두 사람이 구사한 전술은 건드리면 똑 하고 터지는 우리의 취약한 부분을 적절하게 건드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면에서 심형래는 참으로 영리한 사람이다. <용가리>에서 못다 이룬 꿈을 <디 워>에서는 결국 이룩한 것이다.
약소국으로 살아온 우리에게 민족주의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다. 민족주의를 대하는 태도가 보수건 진보건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월드컵 축구를 보면서, 독도 문제를 대하면서 진보와 보수는 별반 다르지 않게 반응한다. 그런데 민족주의 자체가 반역일 수는 없지만, 민족주의가 이기적 국수주의, 획일적 전체주의로 흐를 때에는 어떡해야 하나? 민족주의가 국수주의나 전체주의, 더 나아가 또 다른 제국주의로 나아갈 때 필연적으로 파시즘과 만나게 된다. 그럴 때 국익에 반대되는 것은 그 어떤 의견이라도 언급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지금 <디 워>를 둘러싼 인터넷의 상황을 보면 그런 전조를 느낀다. 어떤 논리적인 비판이나 생산적인 토론도 불가능한 가운데 오로지 <디 워>를 옹호해야만 하는 분위기다. 국익이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국익인가? 국익이란 말을 들으면 나는 박정희가 떠오른다. 수출만이 살길이라며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하면서 결국 국민을 착취하지 않았던가? 체력까지 국력이라면서 인간을 수출 병기로 삼았던 시대가 떠오른다.
심형래의 발전을 기대하며
<디 워>의 마케팅은 단순한 마케팅이 아니다. 한국인이 가장 쉽게 현혹되는 민족주의의 주술로 대중을 마취시키는 것이다. 그 누구도 <디 워>에 대해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비판을 가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만약 비판이 있으면 거의 테러에 가까운 인신공격과 비판, 심지어 협박이 있기 때문에 평론가들이 어떤 비판도 하지 못한다. 아예 평론가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 지금의 이 사태에서 월드컵 축구 경기를 보는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나만일까?
이런 애국심 마케팅은 영화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이들도, 마치 멀쩡하게 존재하는 영구가 “영구 없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영화 자체를 논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분명 이것은 광풍이다. 이것은 <디 워> 서포터스들이 그토록 아끼는 <디 워>를 망치는 길이고, 심형래 감독을 망치는 길이다. 이런 자세는 심형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형래의 영화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마케팅이 위험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떤 마케팅이 위험하다는 말인가!
심형래가 걸어온, 고독한 영화의 길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이 비웃을 때, 그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단지 개그맨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또는 아동용 영화만 연출했다는 점 때문에 수준이 낮은 감독으로 평가받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충무로에서 평가받지 못한 감독은 숱하다. 심형래는 이런 평가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정작 그가 고민하고 괴로워해야 것은 이 폭풍을 내면화해서 더 좋은 차기작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의 흥행을 통해 충무로의 자본으로 차기작을 제작하더라도, 지금 같은 영화로는 평단의 냉대를 결코 피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나는 그의 발전을 진정으로 기대한다.
토론하기
1. 영화비평의 가치는 무엇일까?
2. 우리 영화 바로보기의 올바른 태도를 충족하는 요건은 무엇일까?
3. 위 글들에서 볼 수 있는 “디-워‘ 논쟁,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평가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