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논술 자료함
청와대브리핑 vs. 국기에 대한 맹세
창비주간논평. 2007-05-22 이장욱 | 시인, 소설가
메일함을 연다. '무이자 대출'과 '외로우세요?' 류의 광고메일들 사이에 언론사에서 보낸 뉴스레터들이 간간이 끼어 있다. 그중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뉴스레터가 있는데, 제목이 '청와대브리핑'이다. 이름 그대로 청와대에서 발송하는 정부정책 홍보메일이다. "대통령과 청와대의 메씨지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직접적인 대국민 창구"라고 한다. 누구나 받아볼 수 있는 이 뉴스레터를 대할 때마다 느껴지는 묘한 호감은, 물론 내용이 아니라 형식과 어조 때문이다.
청와대브리핑
청와대는 광화문의 저편에 있지만, 그 저편은 언제나 우리 삶의 '저편'이기도 했다. 음습한 권력의 이미지는 그 권력이 강압적인 속성을 지닌 탓도 있었지만 그 말의 존재방식 때문에 생긴 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청와대는 말(언론)을 규율함으로써 말을 하는 방식을 취했다. 담화문 같은 권위적인 언어가 청와대의 것이었다. 담화문은 대화가 아니라 지시이며 토론이 아니라 명령이다. 그것은 인간의 말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말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말, 듣는 이들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말이다.
'청와대브리핑'은 오늘의 권력이 저 초월적인 자리에서 내려왔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대한늬우스'처럼 일방적으로 홍보하지 않는다(못한다). 그것은 무이자 대출을 권하는 광고들 사이에서 '한겨레한토마'나 '조선닷컴'과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동등하게 논쟁한다. 때로는 자존심을 드러내며 상대를 비판하고 단편적인 사실을 부각시켜 맥락과 핵심을 감추지만, 이런 '논쟁의 기술'조차 시대의 불가피한 조건인지도 모른다. (하긴, 나는 말실수까지 포함해서 대통령이 하나의 '개인'으로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5시 정각의 '맹세'
여기서 잠시 다른 형식의 '말'을 생각해보자. 내 어린시절의 거리 풍경을 떠올린다. 평화롭게 길을 가던 사람들이 오후 5시 정각이 되자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추어 선다. 전봇대와 학교 운동장의 스피커에서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한 남성의 목소리로 장엄한 낭독이 울려퍼지는 동안 거리의 사람들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어린 나는 어른들의 '얼음 땡' 놀이를 신기해했다. 이렇게 매일 반복해서 들어야 했던 문장, 바로 저 '국기에 대한 맹세'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은 기이한 풍경이다. 돌아보면 기이하게 느껴진다는 것, 아무도 당시의 저 과도한 국가주의를 오늘에 복원할 수 없다는 것, 이런 것이 바로 역사가 반복되면서도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이유인지 모른다.
최근 이 '국기에 대한 맹세'가 존폐 논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보도를 보니 이 '맹세'는 문구를 수정하는 선에서 '시행령'으로 존속될 예정인 모양이다. 한 여론조사기관의 통계에 의하면 이 '맹세'를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의견이 74.2%였으며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은 6.7%에 불과했다. 한 포털의 여론조사도 비슷했다. 존속이 64.2%, 문구 수정은 12%, 폐지가 21.6%였다. 인터넷 조사였고 젊은 네티즌들이 참여한 것이었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던 내게 이 결과는 꽤 놀라웠다. '국기에 대한 맹세' 같은 의전(儀典)를 통해 애국심을 장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 자체가 의아하게 느껴진 탓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 존폐 논란
일부에서는 '맹세'의 문구를 시대에 맞게 수정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 하자는 저 전체주의적인 구절도 문제고, 같은 '민족'이 아닌 이웃이 늘어가는 상황에서 '국민'과 '민족'을 무작정 동일시하는 것도 문제이니 수정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문구가 아닌 것 같다.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강퍅한 구절을 버리고 "정의와 진실로써"라는 원래의 표현으로 순화한다고 해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는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국가가 정해놓은 훈육(訓育)의 언어를 우리 스스로의 입으로 내뱉는다는 그 형식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때로 형식은 내용을 압도한다.
오늘날 개인화, 단자화되는 세태에 비추어 이런 '맹세'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학생시절에 의미도 모른 채 동원되곤 하던 '매스게임'의 유니폼과 오늘날 '붉은악마'의 유니폼은 같은 유니폼이 아니다. 그 유니폼들은 똑같이 '하나'(uni-)의 형식(form)일 터이지만 그 내포는 같지 않다. 전자의 '하나'가 과거 '국풍81' 같은 국책 문화사업의 획일적인 '하나'라면 뒤의 '하나'는 자발적이고 축제적인 '하나'다. 후자에도 이런저런 문제가 없지 않겠지만, 적어도 80년대와 2000년대를 상징하는 이 두 '하나'를 구분하고 변별하는 것은 시대정신의 기본에 가깝다. '맹세' 같은 획일적인 문구로 정해놓은 애국심은 하다못해 '국가경쟁력'에조차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하다.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와 유사한 형식이 미국에도 있다는 사실도 '맹세'를 정당화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런 맹세는 이딸리아 파시즘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만일 이런 형식 탓에 일말의 진심이 생긴다면, 그게 더 큰 문제다. 질문 없이 국가를 승인하고 국가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은 '시민'(市民)의 자세가 아니라 '신민'(臣民)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왜 국가 같은 정치공동체가 필요한지, 민족 같은 공동체 단위가 오늘날 어떤 의미인지, 이런 것은 학교나 사회에서 토론하고 판단할 문제다. 국가에 '충성'을 하고 안하고는 국가가 몇개의 문장으로 정해놓을 주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맹세문이라는 맹목의 형식
오늘날 '맹세문'의 형식으로 민족의식이나 국가관을 고취시킨다는 것은 일종의 넌쎈스에 가깝다. 국가가 국가에 대한 '충성'을 국가가 만든 문구로 정해놓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청와대브리핑'은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며 또 스스로도 이를 의식하는) 수많은 언론 가운데 하나이며, 말의 이러한 존재 방식은 오늘날의 불가피한 정황이라고 할 수 있다. '맹세문'이라는 맹목적이며 초월적인 형식이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P.S. 한가지를 사족처럼 덧붙이고 싶다. 설문조사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가 필요하다는 쪽에 찬동했던 6,70% 중 많은 사람들이, 바로 축구장과 거리에서 '대한민국'을 연호했던 우리 자신에 다름 아니리라는 것, 사실 나는 그게 더 두렵다.
2007.5.22 ⓒ 이장욱
창비주간논평. 2007-05-22 이장욱 | 시인, 소설가
메일함을 연다. '무이자 대출'과 '외로우세요?' 류의 광고메일들 사이에 언론사에서 보낸 뉴스레터들이 간간이 끼어 있다. 그중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뉴스레터가 있는데, 제목이 '청와대브리핑'이다. 이름 그대로 청와대에서 발송하는 정부정책 홍보메일이다. "대통령과 청와대의 메씨지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직접적인 대국민 창구"라고 한다. 누구나 받아볼 수 있는 이 뉴스레터를 대할 때마다 느껴지는 묘한 호감은, 물론 내용이 아니라 형식과 어조 때문이다.
청와대브리핑
청와대는 광화문의 저편에 있지만, 그 저편은 언제나 우리 삶의 '저편'이기도 했다. 음습한 권력의 이미지는 그 권력이 강압적인 속성을 지닌 탓도 있었지만 그 말의 존재방식 때문에 생긴 것이기도 하다. 과거의 청와대는 말(언론)을 규율함으로써 말을 하는 방식을 취했다. 담화문 같은 권위적인 언어가 청와대의 것이었다. 담화문은 대화가 아니라 지시이며 토론이 아니라 명령이다. 그것은 인간의 말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말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말, 듣는 이들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말이다.
'청와대브리핑'은 오늘의 권력이 저 초월적인 자리에서 내려왔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대한늬우스'처럼 일방적으로 홍보하지 않는다(못한다). 그것은 무이자 대출을 권하는 광고들 사이에서 '한겨레한토마'나 '조선닷컴'과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동등하게 논쟁한다. 때로는 자존심을 드러내며 상대를 비판하고 단편적인 사실을 부각시켜 맥락과 핵심을 감추지만, 이런 '논쟁의 기술'조차 시대의 불가피한 조건인지도 모른다. (하긴, 나는 말실수까지 포함해서 대통령이 하나의 '개인'으로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5시 정각의 '맹세'
여기서 잠시 다른 형식의 '말'을 생각해보자. 내 어린시절의 거리 풍경을 떠올린다. 평화롭게 길을 가던 사람들이 오후 5시 정각이 되자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추어 선다. 전봇대와 학교 운동장의 스피커에서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한 남성의 목소리로 장엄한 낭독이 울려퍼지는 동안 거리의 사람들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어린 나는 어른들의 '얼음 땡' 놀이를 신기해했다. 이렇게 매일 반복해서 들어야 했던 문장, 바로 저 '국기에 대한 맹세'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은 기이한 풍경이다. 돌아보면 기이하게 느껴진다는 것, 아무도 당시의 저 과도한 국가주의를 오늘에 복원할 수 없다는 것, 이런 것이 바로 역사가 반복되면서도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이유인지 모른다.
최근 이 '국기에 대한 맹세'가 존폐 논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보도를 보니 이 '맹세'는 문구를 수정하는 선에서 '시행령'으로 존속될 예정인 모양이다. 한 여론조사기관의 통계에 의하면 이 '맹세'를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의견이 74.2%였으며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은 6.7%에 불과했다. 한 포털의 여론조사도 비슷했다. 존속이 64.2%, 문구 수정은 12%, 폐지가 21.6%였다. 인터넷 조사였고 젊은 네티즌들이 참여한 것이었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던 내게 이 결과는 꽤 놀라웠다. '국기에 대한 맹세' 같은 의전(儀典)를 통해 애국심을 장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 자체가 의아하게 느껴진 탓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 존폐 논란
일부에서는 '맹세'의 문구를 시대에 맞게 수정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 하자는 저 전체주의적인 구절도 문제고, 같은 '민족'이 아닌 이웃이 늘어가는 상황에서 '국민'과 '민족'을 무작정 동일시하는 것도 문제이니 수정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문구가 아닌 것 같다.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강퍅한 구절을 버리고 "정의와 진실로써"라는 원래의 표현으로 순화한다고 해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는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국가가 정해놓은 훈육(訓育)의 언어를 우리 스스로의 입으로 내뱉는다는 그 형식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때로 형식은 내용을 압도한다.
오늘날 개인화, 단자화되는 세태에 비추어 이런 '맹세'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학생시절에 의미도 모른 채 동원되곤 하던 '매스게임'의 유니폼과 오늘날 '붉은악마'의 유니폼은 같은 유니폼이 아니다. 그 유니폼들은 똑같이 '하나'(uni-)의 형식(form)일 터이지만 그 내포는 같지 않다. 전자의 '하나'가 과거 '국풍81' 같은 국책 문화사업의 획일적인 '하나'라면 뒤의 '하나'는 자발적이고 축제적인 '하나'다. 후자에도 이런저런 문제가 없지 않겠지만, 적어도 80년대와 2000년대를 상징하는 이 두 '하나'를 구분하고 변별하는 것은 시대정신의 기본에 가깝다. '맹세' 같은 획일적인 문구로 정해놓은 애국심은 하다못해 '국가경쟁력'에조차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하다.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와 유사한 형식이 미국에도 있다는 사실도 '맹세'를 정당화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런 맹세는 이딸리아 파시즘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만일 이런 형식 탓에 일말의 진심이 생긴다면, 그게 더 큰 문제다. 질문 없이 국가를 승인하고 국가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은 '시민'(市民)의 자세가 아니라 '신민'(臣民)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왜 국가 같은 정치공동체가 필요한지, 민족 같은 공동체 단위가 오늘날 어떤 의미인지, 이런 것은 학교나 사회에서 토론하고 판단할 문제다. 국가에 '충성'을 하고 안하고는 국가가 몇개의 문장으로 정해놓을 주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맹세문이라는 맹목의 형식
오늘날 '맹세문'의 형식으로 민족의식이나 국가관을 고취시킨다는 것은 일종의 넌쎈스에 가깝다. 국가가 국가에 대한 '충성'을 국가가 만든 문구로 정해놓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청와대브리핑'은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며 또 스스로도 이를 의식하는) 수많은 언론 가운데 하나이며, 말의 이러한 존재 방식은 오늘날의 불가피한 정황이라고 할 수 있다. '맹세문'이라는 맹목적이며 초월적인 형식이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P.S. 한가지를 사족처럼 덧붙이고 싶다. 설문조사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가 필요하다는 쪽에 찬동했던 6,70% 중 많은 사람들이, 바로 축구장과 거리에서 '대한민국'을 연호했던 우리 자신에 다름 아니리라는 것, 사실 나는 그게 더 두렵다.
2007.5.22 ⓒ 이장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