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을 얼마나 더 괴롭혀야 시원할까
  
                                                   출전/ 한겨레 사설 2008년4월 16일


  이명박 정부가 대학입시 자율화 정책에 이어 어제 초·중등학교 자율화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학교 운영에 관한 권한을 학교장에게, 초·중등 교육에 관한 권한은 시·도 교육감에게 넘긴다는 게 뼈대다. 각 학교로 하여금 다양하고 질 높은 교육을 하도록 하고, 각 시·도가 지역 실정에 맞는 교육 정책을 펴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나무랄 데 없는 취지다.

  그러나 이 정책은 우리의 교육 현실을 철저하게 무시한 결과, 학교 교육을 왜곡시키고, 학생과 학부모의 고통만 배가할 가능성이 크다. 대학입시 자율화는 이미 대학들로 하여금 점수제 선발로 회귀하게 했다. 각 고교는 이에 맞춰 문제풀이식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그런 시점에서 정부가 학교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 획일적인 보충수업과 0교시 수업이 부활하고, 다양성 교육을 위한 방과후 학교가 사라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여기에 학원 강사를 학교로 불러들이고 사설 모의고사도 치를 수 있으니, 학교가 입시학원으로 변질되는 걸 어떻게 막을까. 아무리 훌륭한 교육철학을 갖고 있는 학교장이라도, 입시 성적으로 능력을 평가받는 현실에서 달리 선택할 방도는 없을 것이다. 창의성 인성 교육을 실시하다가는 무능력자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권한이 대폭 강화된 시·도 교육감에게도 기대를 걸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들은 시·도 사이 경쟁에서 앞서고자 학교간 경쟁을 더욱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이미 일제고사를 부활시켰고, 학교별 혹은 학생별 성적순 줄세우기를 시도하고 있다. 일부 교육감은 일제고사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교에 대해 포상금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부 학교에선 성적이 나쁜 학생들은 아예 일제고사를 치르지 않도록 제외하기도 했다.

  학교 자율화가 정착되려면, 먼저 입시교육이 혁파돼야 한다. 아울러 교육 주체인 교직원·학생·학부모가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갖는, 학교 민주주의가 이뤄져야 한다. 지금까지 이를 막은 것은 학교장이나 재단의 전횡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이들의 권한만 늘리겠다고 한다. 그러면 얼마나 더 우리 교육은 왜곡되고, 학생은 고통을 당하게 될까. 교육 현실에 대한 이 정부의 무지가 놀랍기만 하다.




불만 없는 불안 /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

                                         출전/ 한겨레 칼럼 2008년4월16일


  지난 두 번의 선거에서 진정한 승자는 불안이다. 보수는 더 이상 과거에 대한 향수나 현재의 안락으로 유권자를 유혹하지 않는다. 품 안의 것이 욕망의 대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보수는 ‘더 높이 날아라, 아니면 추락한다’는 구호로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그러나 기꺼이 몰락할 수 없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한때 자유와 정의를 위해 온몸으로 싸웠던 사람들이 힘없이 무너지고 있는 까닭이다.

  민주화 이후 선거에서 서로 다른 욕망들이 격렬하게 부딪히고 다투었지만 사회는 언제나 균형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꿈을 찾곤 했다. 이는 무엇보다 서울 시민이 남북과 동서로 갈라진 한반도를 묶어주는 균형추 역할을 했고, 20대가 허가받지 못한 미래의 이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제 집 팔면 다른 곳에 두세 배 큰집 살 수 있는 서울시민이 자기 집값이 더 오르길 바라고, 학교와 학원에 갇혀 있는 대가로 풍족하게 살아온 20대가 정치에 관심을 끊으면서 균형도 깨지고 꿈도 사라졌다.

  과잉소비사회에서 불만은 작아지고 불안은 커진다. 전통적 산업사회에서도 빈곤이나 직업상실, 혹은 공동체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불안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불안이 일시적이고 국부적이었다면 지금은 항구적이고 전면적이다. 특히 산업사회에서 불안이 소유와 관련된다면 지식기반경제에서는 접속이 문제다. 자동차를 소유하지 못해서 갖는 불안이 과거의 것이라며, 지금의 불안은 자동차의 상표가 갖는 상징체계에 접속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소유의 주체가 사람이라면, 접속에서 주체는 자본의 상징체계다. 따라서 소유의 정도에 따라 나의 불만이 증감하는 반면, 접속은 내가 아닌 체계의 논리에 따라 단절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불안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서울시민과 20대가 이미 완전한 접속의 시대를 살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소유와 접속이 뒤섞인 시대에 머물러 있다. 이미 충분히 부를 축적한 서울시민과 컴퓨터와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20대는 자본과 성공의 상징체계에서 분리되지 않기 위해 더 큰 성공에 몰입할 것이다.

  이들은 현재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공동체를 외면한다. ‘따로 또 함께 가는 길’이 이들에겐 보이지 않는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중심에 접속하고 있으려면 쉽게 넘나들 수 없는 장벽으로 성을 쌓고 그 속에서 자기들끼리 키 재기를 해야 한다. 이렇게 스스로를 감금시키는 사람들은 접속을 통제하는 권력 앞에서 한없이 굽실거린다. 본래 불안과 복종은 이음동의어다. 이제 권력은 감옥을 넓히는 대신 불안을 키울 것이다.

  욕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삶은 행복한 만큼 언제나 불행하다. 좌절된 욕망은 실망을 불러오고, 금지된 욕망은 불쾌감을 주며, 억압된 욕망은 고통의 뿌리가 된다. 불행을 막겠다고 욕구를 차단하면 그만큼 남아 있는 욕구에 집착하게 된다. 따라서 욕구를 없애는 것보다 다원화하는 것이 덜 불행한 삶을 위한 지혜일 것이다.

  ‘불만 없는 불안’을 떨쳐내려면 중심에 접속하려고 집착하기보다 욕구를 다원화해야 한다. 욕구의 다원화는 금욕과 쾌락 사이에서 ‘불안 없는 불만’을 가지고 이쪽저쪽을 넘나들며 관계를 넓히는 것이다. 관계맺음은 반드시 매개가 있어야 한다. 다양한 욕구와 가치를 매개로 관계를 확장하면 불만이 커져도 불안은 작아진다. 더구나 이때의 불만은 부정적 현실을 부정하는 전복의 동력, 곧 잘못된 권력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다. 불안 세력과 맞서려면 진보가 서울에서 그리고 20대와 새로운 관계맺음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