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명랑국토부]  껍데기에 미쳐버린 공화국이여 / 우석훈

수천km 도로는 턱턱 놓으면서 작은 도서관 하나 만드는 건 힘든 나라
도로와 건물, 아파트엔 목숨 걸면서 껍데기 아닌 것엔 10원도 아까워하는 나라


출처 : 한겨레신문 2006. 5. 26
http://www.hani.co.kr
글쓴이 : 우석훈/초록정치연대 정책실장. 88만원 세대 저자


시대가 천박을 넘어 극한에 도달하는 중이다. 카이스트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외국인 총장을 모셔온 것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카이스트 개혁이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내가 생각한 것은 1년쯤 전의 일이다. 이 변화가 껍데기만의 변화일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것이 건물도 짓고 실험실도 짓는다고 예산을 재조정하면서 제일 먼저 손을 댔던 것이 도서구입비였기 때문이다. 누가 우리나라 과학의 최고 산실인 카이스트에서 대학원생들의 신규도서 구입비가 3,000만원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껍데기만의 개혁은 몇 년을 넘기지 못하고 실패한 개혁으로 종료하였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과학자 한 사람 인건비도 안 되는 신규도서구입으로 우리나라 과학을 재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 안타까운 학교는 더 이상 학교가 아니라 모래 위에 누각을 세우겠다는 귀신 놀음에 불과하다.

막상 도서구입비 항목을 열어보면 민망한 건 서울대 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이나 크게 다르지가 않다. 최근 많은 대학이 100주년을 기념한다고 멋진 기념관들을 몇 개씩 새로 짓고 있지만 새로 정비한 진입로 100m보다 많은 책을 구입하는 대학은 거의 없다. 도서구입비와 자료구입비로 우리나라 대학들을 외국의 좋은 학교들과 비교하면 민망하기 짝이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전문사서와 같이 좋은 자료를 구입하고 정리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잘 확보하느냐가 세계적 경쟁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전국적으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도서구입비를 줄여서 진입로와 건물들을 짓고 있다. 최고의 지성이고 인텔리들이 행정을 결정하는 카이스트나 대학이 이 정도이니까 다른 곳은 챙겨 볼 필요도 없을 정도이다.

우리나라는 껍데기에는 아낌없이 돈을 쓰지만 껍데기가 아닌 것,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는 10원도 쓰고 싶어하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간단하게 도로에 들어가는 비용만을 놓고 추정해보면, 중앙정부 예산, 지방정부 예산 그리고 여기저기 숨어 있는 민자도로에 관한 비용같은 것을 추정해보면 대체적으로 15조원 정도를 매년 도로짓는데 사용한다. 여기에 또 다른 껍데기인 몇 개의 기념건물과 새로운 청사 건립비용 같은 것들을 더하면 가공할 비용이 나올 것이다. 물론 개인들이 치장을 위해서 사용하는 돈들을 빼더라도 껍데기가 아닌 것에 사용하는 금액과 비교해보면 아마 사회적으로 100 대 1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우리나라에선 고속도로와 국도만 합쳐도 연간 4,000㎞ 정도를 새로 건설하는데, 4차선 기준으로 1㎞당 22억원 정도가 필요하다. 정말이지 100㎞짜리 도로를 만들 때 1㎞만큼의 비용만 도서관에 사용한다고 해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은데, 수천㎞짜리 도로는 턱턱 놓으면서 작은 도서관 하나 동네에 만들거나 유지하기가 너무 힘들다. 얼마나 힘들까? 사서자격증을 가진 사서 선출의 경쟁률이 300 대 1을 간단하게 넘겨버리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도서관이 새로 생기지 않는다는것을 반증한다. 그야말로 껍데기에 미쳐버린 공화국이라는 것을 간단하게 반증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도서관은 어디에 있을까? 국회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아니면 카이스트 도서관 같은 데를 상상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여러 가지 비교지표에서 가장 상위의 평가를 자주 받는 도서관은 과천 시립도서관이다. 이유는 간단한데, 신규도로 건설이 가장 작은 지자체 중의 하나가 과천이고, 반면에 도서관의 신규 도서구입비가 전국에서 평균적으로 가장 높은 도서관이 과천 시립도서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마나 높을까? 물경 연간 3억원이다. 우습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순수 지출로 카이스트보다 높다. 잘 산다고 하는 강남구의 도서관 현황과 도서구입비 같은 걸 비교해보면 차마 민망해서 공개하기가 좀 그렇다.

이 껍데기에 미쳐버린 공화국에서 움베르트 에코가 “그래도 사서들이 민주주의를 만들었다”는 발랄한 상상을 기대하기는 너무 힘들다. 책을 안 보는 국민이라는 자조섞인 말은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있는 도서관마저 없어지는 꼴을 봐야 속이 편하겠다는 듯 그나마 있는 도서관마저 껍데기의 열풍에 무너지는 상황은 이 천박한 공화국의 미래가 과연 어디까지 가야 그 끝을 볼 것인가 못내 명랑한 상상력을 자꾸 자극하려고 한다.

도서구입비를 늘려달라거나 전문사서를 늘려달라는 요구도 지금은 너무 호사스러운 요구이다. 더도 말고 딱 과천 시립도서관만큼만 하면 좋겠는데, 서울시 각 구청마다 요즘 도서관 없애는 게 유행이라서 꼭 망가져버린 카이스트 도서관과 똑같은 일들을 하고 있다. 도서관의 이름을 ‘정보센터’로 바꾸는게 요즘 유행이다. 그야말로 껍데기 공화국의 명랑 코메디 초절정인 셈인데, 이보다 ‘껍데기스러운’ 천박한 일이 연간 개인소득 1만불(달러)이 넘어간 다른 나라에서도 벌어진 적이 있는지. 도대체 유사한 사례를 찾기가 어렵다.

도서관과 정보센터의 차이가 뭐냐고? 정보센터에는 책이 필요없기 때문에 그나마 알량한 도서구입비를 대폭 줄여버릴 수 있고, 게다가 책도 사지 않을 건물에 무슨 전문가가 필요하냐고 전문직 사서를 없애버릴 수가 있다. 그 대신 건물은 새로 리노베이션한다고 번쩍거리면서 지을 수 있는데, ‘껍데기 공화국’의 미래가 어떻게될지 너무 뻔하게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사실이다. 도로에 목숨 걸고, 건물에 목숨 걸고, 폼에 목숨 걸고, 한강도 파헤치고, 용산공원도 파헤쳐서 아파트 지어도 좋지만, 그래도 있는 도서관 몇 개라도 그냥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는데, 그나마도 껍데기를 바꾼다고 내버려두지를 않는다.

온 국토를 껍데기로 치장하더라도, 마지막 마지노선인 도서관마저 건설현장으로 바꾸어버릴줄은 미처 몰랐다. 100만, 150만이 산다는 각 구에서 도서구입비 3억원이 없다는 게 말이 되냐? 어른들은 어쩔지 몰라도 아이들은 껍데기를 먹고 사는 게 아니라 책을 먹고 산다는 간단한 진리를 아직도 이해 못하나? 이 천박한 시대에 사서들 몇 명이 도서관을 지키기 위해 최전선에 서 있고, 역사의 진보는 사실 이들 어깨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좌파든 우파든, 개혁이든 보수든, 껍데기에 미쳐서 천박한 시대를 찬란하게 열어제치고들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