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논술 수업에 신영복선생님이 쓰신 '강의'를 강독하는데
논어를 공부하다가 문득 이 구절이 새삼스러워졌다.
도반들과 이 구절을 읽고 해독하다가 어쩌면 이리도 인간사가 한결 같을까 하는
생각과 공자께서 지금 여기에 계신다면
우리 사회 모습을 보고 무슨 말씀을 하실까 궁금해졌다.
공자님이 하신 말씀을 되새겨 보면...


논어 第二 爲政編(위정편)에

子曰
道之以政(도지이정)   齊之以刑(제지이형)  民免而無恥(민면이무치)
道之以德(도지이덕)   齊之以禮(제지이례)  有恥且格(유치차격)

공자 말씀하시길
정치로써 백성을 인도하고 형벌로써 다스리면
백성이 형벌은 면하여도 부끄러운 마음은 없어진다.

덕으로써 백성을 인도하고 예법으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이 부끄러움도 알고 또 마음이 바르게 된다.

라 하였다.
참, 어이가 없다. 부끄러움이 없는 사회~!
바로 지금 여기 우리들 모습이어라.
온갖 탈법과 부정 부패로 얼룩진 새정부 장관들과 각료들 모습을 대하면서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적절한 해석이 오버랩된다.

제발, 우리 나라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 되어야 한다는 것인지
부끄러움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오늘 한겨레 칼럼을 읽다가 홍세화 선생의 글이 눈이 박혔다.
곰곰이 읽으면서 맑고 순수한 도반들에게
이 더러운 기성세대의 모습을 숨길 수 없다는 것에 절망스러울 뿐이다.





"뻔뻔하다, 고로 지배한다 "

                                         출전 : 한겨레 신문 칼럼 2008년 3월10일
                                         글쓴이 :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아무리 자율통제가 사라진 사회라지만 도무지 예외가 없다. 이명박 시대에 사회귀족의 반열에 오른 사람치고 뻔뻔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 어렵다. 모든 매체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격리시키자고 외치고 싶을 지경이다. 모든 정보를 차단하는 편이 “뻔뻔하다, 고로 나는 지배한다”를 학습시키는 것보다는 낫겠기 때문이다.

  이미 영악해진 아이들이지만 아직 나라의 중요한 일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면 능력과 자질이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을지 모른다. 그 아이들에게 사회귀족의 뻔뻔함을 배우게 하고 삶의 지침으로 삼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더구나 순진무구해야 할 아이들인데 슈퍼에서 “‘싸과’ 주세요” 했더니 비로소 알아듣더라고 빈정거리며 웃게 해선 안 되는 일 아닌가. 올바른 교육환경에서도 나와 사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올바른 가치관과 분별력을 갖기는 어려운 법인데, 하물며 성찰의 주체가 아닌 암기 기계로 길러지는 교육풍토에서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비양심과 몰염치가 사회적 지위와 부를 거머쥐는 데 장애가 되기는커녕 도리어 필요조건이라는 ‘실용’의 처세술을 아이들이 눈치 채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야말로 염치없는 일이다.

  오늘 한국의 사회귀족 체제는 어미 뱃속에서부터 신분이 규정된 과거와 달라 아직은 후천적 신분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귀족이 되어서 뻔뻔한 것인가, 아니면 뻔뻔해야 사회귀족이 되는 것인가? 후자가 맞다. 오늘 한국의 사회귀족 체제는 사회귀족의 자율 통제는 물론 기대할 수 없고 아래로부터의 견제도 작동하지 않는 대신 뻔뻔해야만 사회귀족 사이의 횡적 견제에서도 자유로워 퇴출당하지 않는 구조를 갖는다.

  가령 이회창씨의 권력에 대한 미련은 무엇보다 억울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자식 군대 문제라는 성질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오늘이었다면 별문제 없었을 터였는데 시기를 잘못 선택한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외 없이 모두 그 짓을 저질렀겠지만 5년 전에는 그래도 공인의 그 짓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견제력이 살아 있었는데, 오늘은 그 최소한의 제어장치마저 무너졌다. 이중 잣대가 사라져 더 솔직해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능력껏 비리와 탈법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선망할 뿐 분노할 줄 모르는 사회보다는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픈 사회가 더 건강한 사회다. 능력껏 땅 투기하기, 능력껏 위장전입하기, 능력껏 자식 군대 안 보내기, 능력껏 탈세하기의 ‘능력’이 견제·비판되지 않는 사회귀족의 자격 조건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권선징악의 해피엔드는 동화책에나 있다는 아이들의 명민한 견해는 다시금 증명되었다. 선거를 통해 선택한 대통령의 선택이니 토 달지 말라는 주류 신문의 주장이나 이명박 정부의 방송통제 시도나 그 성질은 한가지로 뻔뻔함인데, 그나마 조금치의 눈치라도 보는 것은 아직 총선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 총선의 의미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총선이라는 제도가 그나마 사회귀족 체제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크게 기대할 수 없지만 그것밖에 남아 있지 않은 민주주의 장치라는 점을.

  다큐멘터리 속 민주주의는 열정과 역동의 살아 있는 드라마와도 같다. 그러나 생활 속 민주주의는 감동적이지 않다. 그래도 그 힘은 살아 있어야 한다. 돌아보면 ‘민주’라는 말만으로도 울컥했던 때가 그리 멀지 않다. 다시금 시대는 냉소를 떨쳐내고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 줌의 사회귀족이 ‘능력껏’ 요리하는 사회가 아님을 아이들과 웃으며 말할 수 있기를 바라기에.




떴다방 내각, 떴다

                                   출   전: 한겨레21 700호 2008년 3월6일
                                   글쓴이: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이명박 정권의 첫 내각은 가히 ‘떴다방 내각’이라 할 만하다. 물론 지체 높은 분들이 상스러운 복부인들과 거간꾼들이나 드나드는 ‘떴다방’을 실제로 사용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강남 몇 지역에 살고 있는 관료, 정계 인사, 기업인 등의 부인들이 정기적으로 연다는 사교 모임이 바로 이러한 부동산 및 여러 자산 가격의 향방에 대한 정보 교환의 장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대부분의 국민들이 알고 있는 바이다. 따라서 어수선한 봉고차냐 품격 있는 레스토랑 미술관이냐 하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끼리끼리 모여 쉬쉬하며 여러 자산 가격 동향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 행동에 나선다는 의미에서는 이들 또한 ‘떴다방’ 출신들이 다수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경부운하, 고양이에게 생선을?
  
   이 ‘떴다방 내각’의 정당성과 도덕성에 대한 세인의 질타가 높다. 응당한 일이다. 하지만 모럴리스트가 아닌 필자는 좀 다른 각도에서 걱정이 된다.

  첫째, 앞으로 국정 전반을 책임질 이 ‘떴다방’ 출신 인사들의 고민과 실력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 5년간 부동산 시장이 큰 널뛰기를 겪었음을 감안한다면 그 와중에 이렇게 성공적인 자산 보유를 위해 사방팔방으로 정보 수집과 몸소 발품 파는 현지답사가 필수였을 것이다. 그 바쁜 와중에 이들이 ‘21세기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기 위한 고민과 연구와 조사를 과연 얼마나 축적했을까. 실제로 이들의 경력과 업적을 둘러보면 혁신적 내용을 담은 이론 및 실천의 흔적은 고사하고 그 흔한 ‘전문성’조차 의심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스스로(!) 사퇴한 남주홍 교수의 경우 지난 10년간 학술진흥재단 등재 논문이 단 한 편도 없었다고 한다.

   둘째, 이들이 청문회 과정에서 줄줄이 뱉어놓은 엽기적 발언들로 볼 때 ‘사회적 백치’임이 의심되기 때문이다. 원래 ‘백치’(idiot)란 지능지수를 문제 삼는 용어가 아니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안에서 함께 사는 다른 이들의 고통과 고민이 무엇인지라는 공적인 고민을 일체 끊어버리고 자기 이익만을 좇아서 사는,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아예 소통이 되지 않고 사오정 노릇이나 하게 되는 이들을 일컫는 고대 그리스 말에서 온 용어이다. ‘자연을 사랑하여 땅을 샀다’든가 ‘친환경적 주거를 찾아 여의도를 버리고 송파구의 아파트 오피스텔을 구입했다’든가 하는 파격적인 발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몇 년에 걸쳐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일체의 관심과 토론의 욕망을 끊어버리고 스스로를 오로지 자기 이익이라는 토굴 속에 가둬 용맹정진했던 이들만이 내놓을 수 있는 법문인 것이다. 이러한 절정의 선승(禪僧)들이 신개발 지역의 부동산이 아닌 민주 정부의 각료 자리로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어질거린다.

   셋째,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아주 우려되는 문제가 있다. 이명박 정부는 현재 대운하 사업 그리고 공기업의 대대적 민영화 등의 사업을 공언하고 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인간과 자연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이 중차대한 대역사를 앞두고 만의 하나 고민도 실력도 사회적 소통 능력도 모자라는 이들로 내각을 채우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혹시 내각 전체가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떴다방 내각’이 되는 것이 아닐까. 다른 것은 몰라도 지난 몇 년간 정부가 어떤 계획을 추진하고 있고 그것이 어떻게 자산 가격에 영향을 줄 것인지를 알아내고,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치부와 연결할 것인지에 탁월한 능력과 의욕을 가진 이들로 채워진다면? 대운하 공사는 말할 것도 없다. 공기업의 민영화와 매각 과정도 엄청난 금액이 오가는 덩치 큰 계약 과정들을 포함하는, 그야말로 ‘빅딜’이다. 그런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 못할 치밀한 고민과 논리에 기초해 투명성과 엄정성을 갖춘 과정으로 진행해야 할 ‘빅딜’의 책임 주체가 ‘떴다방 내각’으로 전락한다면 이는 실로 가공할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거대한 뭉칫돈과 결부된 정보를 생산하는 내각이 이로 말미암아 하나의 거대한 ‘내부자거래’ 집단으로 변할 개연성이 넘쳐나지 않는단 말인가? 어째서 고양이들이 어류 배달업체를 운영하게 될 것이라는 불안을 심는 것인가?


교체한다고 큰 흐름 바뀌나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지난해 12월19일에 선택을 한 바 있고 내각의 구성은 그 결과에 의해 거의 절대적으로 좌우될 것이다. 몇몇 인사들이 교체됐지만 이러한 큰 흐름이 바뀔지는 잘 모르겠고 결과는 우리 손을 떠난 것 같다. 허탈하게 <텔미> 후렴구에 맞춰 노래나 불러보는 수밖에. “떴다방 내각,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