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글은 우리가 한 편의 글을 읽고 자신의 감상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에 대해 하나의 사례를 보여주기 위해 싣는 자료입니다.

이 글을 쓴 이는 대학교수로서 대단히 글쓰기에 능할 뿐만 아니라 고도의 사고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그리고 유창하게 발현해 내는 능력을 갖춘 분입니다.
이렇게 독후 감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토해낼 수 있는 내공을 키우기 위해 우리는 글을 읽고 부지런히 독후감을 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글을 읽는 이들은 글을 읽고나서 '담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어 볼 기회를 가질 뿐만 아니라 담배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글쓴이의 논리전개과정을 보면서
어떤 글쓰기가 감동을 줄 수 있는 지, 혹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공부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는 배움과정에 있는 도반으로서 글쓰기에 대한 자기과시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다시한번 되돌아보고 다른 이들의 다양한 견해를 들어 볼 기회를 가짐으로써 나를 성장시키기 위함입니다.

이 방을 만들고나서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도반들 글이 올라오지 않아서
열러 도반들에게 분발을 촉구하고 격려를 하기 위해
이 글을 올려 둡니다.

좋은 참고가 되시길....



리처드 클라인의 담배론  /  김종엽 (한신대 교수, 사회학, 문화평론가)

새해 들어 금연을 결심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런데 쉽지가 않다.
매일 찾아오는 금단 현상 때문만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속살거리며 일어나는 유혹과 금지, 합리화와 자기기만의 순환 때문이다. 이것도 물론 한 결심이 낳은 자기 존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라면 발견이긴 하다만, 왜 이 지겨운 자신과의 숨바꼭질을 마다하지 않고 금연을 결심하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다들 건강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확실하게 밝혀진 몇 안 되는 암의 원인이 담배이니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담배를 둘러싼 의학적 협박이 끔찍한 영상을 동반하며 우리를 엄습해오는 적은 또 얼마나 많은가?


작은 숭고함을 주는 존재

그런데 왜 사람들은 담배를 피는가?
맛이 좋아서는 아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사탕과 달리 그것은 조금 쓰고 조금 메스껍다.
깊게 연기를 들이마실 때 머리가 아릿하게 취하기 때문인가?
첫 담배나 그렇지 담배를 필 때마다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분명 담배는 몸에 해롭다.

그것을 아는 데 대단한 의학적 지식이 필요하진 않다.
담배를 조금만 많이 피면 다음날 아침 목이 붓고, 때로는 가래가 생긴다. 정도를 넘어서면 구역질도 나고 몸도 피곤해진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이유를 리처드 클라인의 『담배는 숭고하다』(문학세계사, 1995)는 칸트의 숭고미 분석을 통해 제시한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을 통해 무관심 상태의 만족인 `아름다움` 과는 다른 심미적 범주인 `숭고` 에 대해 논했다.
그에 의하면 숭고는 우리가 장엄한 어떤 현상에 직면할 때 느끼는 것이다.
장엄한 것은 우리의 감각적 상상력을 초월한다.
예컨대 검은 밤하늘은 우리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무엇이며, 그 앞에서 우리는 무한 앞에 서있는 미소(微小)한 존재로 느껴진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오성(悟性)을 통해 그것의 무한성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며, 이 파악이 우리에게 쾌락을 산출한다.
요컨대 숭고는 감각적 불쾌와 그것을 극복하는 오성의 쾌가 병존하는 현상이다.

마찬가지로 담배를 필 때, 그 담배는 숭고하다.
왜 그런가?
담배와 더불어 우리 자신이 숭고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초조할 때 담배를 핀다.
그리고 담배를 빨아들일 때 맹렬하게 빛을 발하는 불똥처럼, 우리는 초조를 넘어서는 우리의 오성적 능력을 동원한다.
긴 연기를 내뿜으면 그것이 매혹적으로 휘감겨 흩어져 감과 더불어 우리를 위협하는 공포가 밀려난다.
거기서 우리는 영혼의 깨어남과 활개짓을 본다.
담배가 영혼을 소환하는 것이다.

또한 담배의 재는 삶의 덧없음, 우리 존재의 소멸을 탁월하게 상징한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우리들을 소모하는 것, 그리하여 불꽃을 피우고 황홀한 연기를 피워내고 그렇게 해서 하얀 재가 되는 과정이라는 것, 그러니 두려워하고 연연하기보다 감행하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요컨대 담배는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숭고의 과정을 외재화하며 그리하여 자아의 숭고를 부추기는 숭고한 것이다.

혹자는 그런 담배의 기능이란 전장의 병사의 담배, 그리고 사형수의 마지막 담배에서나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병사와 사형수의 담배가 상징하는, 죽음을 대면할 수 있는 인간의 숭고함이라는 테마는 두 가지를 추가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병사나 사형수의 담배란 극적인 예일 뿐이며, 우리는 일상 속에서 날마다 작은 고통과 초조함, 자아를 무화하려는 힘에 시달린다. 그러니 담배는 그런 일상 속에서도 `작은` 숭고를 낳는 존재다. 담배는 우리가 실패와 낙담과 기다림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 하루에 20~30번쯤은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작은 우물인 것이다.


흡연의 순기능. 역기능

다른 하나는 담배는 독이며, 그렇기 때문에 담배를 피는 행위는 적은 양의 죽음을 들이키는 것이라는 점이다.
담배는 전쟁터의 병사에게처럼 일상 속에서도 작은 죽음과의 대면이며, 존재의 무화에 대한 숭고하고 영웅적인 반응인 것이다.
이 점은 우리가 담배를 피우는 것은 그것이 해로움에도 피는 것이 아니라 해롭기 `때문` 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그것이 담배에 대한 의학적 협박이 넘기 어려운 문턱인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확실히 모순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담배의 모순이라기보다는 우리 존재의 모순됨으로부터 나온다.
나는 지금도 이 글을 쓰며 담배를 피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다음 문장이 머리 속에서 떠오르지 않는 긴장감, 원고 마감 시간이 야기하는 초조함, 과연 나는 이 글을 마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인해 담배를 피고 싶어지고 담배를 비벼 끄듯이 글을 마치고 싶어진다.

삶도 이렇게 스스로 마칠 수 있는 무엇, 스스로 타오르고 스스로 비벼 끌 수 있는 무엇일 수 있다면 하고 말이다.
이 담배가 외재화하는 우리 자신의 모순을 깨달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담배와 이별하려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