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나서
내가 읽은 존 로널드 류엘 톨킨
-반지의 주인
아이에게 동화를 골라주는 일을 하다가 보면, 또는 동화를 들려주려 하다가 보면 스스로 동화의 독자가 될 수도 있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나에게 아내는 그것이 스스로 동화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읽는 것에서 내가 느끼는 어색함, 또는 의식되는 타자의 시선을 무마하기 위한 변명이라고 말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서 나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왜 나 같은 어른들이 동화의 애독자가 되는 것일까? 이런저런 답변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어린 시절로 회귀하려는 퇴행적인 충동 때문일 것이다, 아니 어린 시절의 자신과 현재 간의 거리를 측정해보려는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이렇게도 생각해본다. 막스 베버라는 사회학자에 의하면 우리 세계는 탈마법화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이 탈마법화된 세계 속에서, 상징의 숲이 모두 산성비에 찌들어가는 세계 속에서 나는 작은 공간, 밤이면 장난감 병정들이 깨어나 말을 하는 마법의 정원으로 돌아가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동화의 존재는 바로 이 탈마법화된 세계와 유기적 연관을 가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동화는 탈마법화의 고통을 달래는 보충물일 수도 있다. 해서 어른들은 자신들이 쫓아낸 마법사가 찾은 안식처인 어린이의 정원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그리 마땅치 않은 데가 있다. 생각해보면 그 숱한 동화란 실은 어른들이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동화란 결국 (직접 이야기해주는 것이든, 책을 통해서든, 만화영화를 통해서든) 어른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니 동화는 어른의 환상, 어른의 이데올로기, 어른의 투사물이고, 아이들의 정원을 식민화하는 어른의 담론일 가능성이 오히려 크다. 이제 다 큰 어른이 되었기에 알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어릴 적 끼고 잠들었던 동화들을 다시 보며 나는 거기서 내가 어처구니없게도 기만당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가 많으니 말이다.
하지만 때로 이런 생각의 부담에서 벗어나서 안온하게 끼고 잠들 수 있는 동화가 있다. 톨킨의 『반지의 주인』이 그런 동화이다. 이 책을 끼고 있는 것이 안온한 것은 그것이 영도 쓰기(writing degree-zero)의 동화여서는 아니다. 단지 이 동화가 동화임에도 불구하고 실은 어린이가 읽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분량이어서 오히려 어른(적어도 청소년은 되어야)이 읽기에 적당한 동화이기 때문이다.
내가 톨킨의 『반지의 주인』을 알게 된 것은 인터넷을 통해서였다. 인터넷을 통하여 내가 찾고 싶었던 작가는 프랭크 봄과 조지 맥도널드였다. 국내에서는 구하기가 쉽지 않은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나 조지 맥도널드의 『가벼운 공주』 같은 동화를 풀 텍스트로 올려놓은 사이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이트를 찾으며 저런 사이트를 뒤지다가 톨킨을 발견했다. 그와 관련된 사이트는 금방 나를 흥분으로 들뜨게 했다. 제대로 세어본 것은 아니지만 줄잡아 천여 개나 되는 사이트가 그에 대한, 그리고 그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 사이트들을 찾아 들어가 다시 한번 놀랐던 것은 톨킨 관련 사이트의 화려함이었다. 그래픽과 사진자료가 즐비하고, 『반지의 주인』의 주요장면에 대한 수십 장의 일러스트레이션이 펼쳐지는 갤러리들이 나를 매혹시켰다. 그리고 그런 사이트를 만든 사람들의 나라 또한 대단히 다양했다. 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톨킨 사이트를 만들지 않는 나라가 거의 없다시피했다.
나는 곧장 외국에 사는 친구에게 『반지의 주인』을 사서 보내달라는 편지를 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이미 우리나라에 『반지의 주인』의 번역이 나와 있으니 그것을 사보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래서 나는 서점에 달려가 『호비트』(창작과비평사)와 『반지의 주인』(국역 제목은 『반지전쟁』(예문)이다)을 샀다. 『반지의 주인』을 사서 나는 다시 한번 놀랐는데, 이미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7쇄 이상 찍혔으며, 그것도 1990년 발간 이래로 지금까지 꾸준히 새로 찍혔다는 것이다. 냄비 끓듯이 하는 우리나라 소설 시장에서 세 권짜리 외국소설이 소리소문없이 꾸준히 팔리는 것도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그것은 톨킨 매니아의 출현을 엿보이게 하는 데가 있었다. 그래서 PC통신에 들어가보니 아니나다를까 환상문학 동우회의 게시판에서 톨킨과 관련된 많은 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관심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반지의 주인』의 전편 격인 『호비트』를 읽으며 실망하고 있었다. 재미있지만 표준적인 동화라는 느낌, 동화라는 생각을 접고 본다면 소품이고, 던전스 앤 드래곤즈(Dungeons & Dargons)로서도 이류급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 벨보 베긴스가 속한 종족인 호비트 자체의 매력뿐이었다. 하루에 6번씩이나 식사하고 술 마시고 놀기 좋아하며, 버섯을 좋아하며, 농담을 즐기고, 끽연을 매우 즐기는 난쟁이보다 더 작은 종족 호비트를 보며, 톨킨은 어디서 이런 종족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고는 했다. 호비트는 톨킨이 지적하듯이 영국의 평범한 농민을 모델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파이프를 물고 있는 모습의 톨킨 사진은 그것의 일부는 그 자신의 반영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하지만 평균 90센티의 키를 염두에 둘 때, 호비트는 무엇보다 어린이를 닮았다. 순진하고 자연친화적이며, 별달리 특별한 재능이 없지만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이며 용기 있는 호비트는 나에게 아버지의 담배를 철없이 피워물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어린이의 모습 그대로 이미 어른인 호비트는 확실히 이 책을 읽는 어린이들을 끌어들이는 탁월한 동일시의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호비트』에 톨킨의 친구 찰스 윌리엄스와 C. S. 루이스(후에 『나니아 연대기』를 쓴)가 매혹을 느끼고 알렌 앤 언윈 출판사가 책을 내고 그리고 곧장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이유를 나로서는 잘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반지의 주인』은 확실히 다른 무엇이 있었다. 우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보낸 한 주일이 매우 즐거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우리의 인생을 한 주일 즐겁게 해주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일견 즐거움의 원천은 아주 단순해 보였다. 빌보의 양자 프로도는 백 앤드의 주인이 되자마자 곧장 갠달프의 방문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서 빌보가 예전의 머크우드의 용을 해치울 적에 골롬의 동굴에서 주운 반지의 비밀을 듣게 된다. 그 반지는 모르도르에서 중간계를 지배하기 위해서 사우론이라는 악의 화신이 찾고 있는 절대반지이다. 프로도는 자신의 아름다운 고향 샤이어가 반지를 빼앗으러 올 사우론의 하수인들에 의해서 폐허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반지를 가지고 고향을 떠난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사건은 숨돌릴 틈 없이 계속된다.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절대반지를 없애기 위해서 운명의 산으로 향하는 프로도가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으로 우리는 『반지의 주인』을 단숨에 읽어치우게 된다. 그러니 『반지의 주인』을 떠받치고 있는 즐거움의 원천은 서스펜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서스펜스의 구조만으로는 이 긴 텍스트의 즐거움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야기의 구조가 아주 단순한 것은 아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반지를 폐기하기 위해서 프로도가 가야 할 곳이 바로 반지를 찾고 있는 사우론의 본거지인 모르도르에 있는 운명의 산이라는 점이다. 반지가 소지자를 유혹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이 과정은 매우 위험하고 양가적이며 그런 만큼 서스펜스의 도를 더한다. 왜냐하면 그 과정은 프로도의 입장에서는 반지를 폐기하러 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반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사우론을 향해서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서사구조가 가진 모호함과 서스펜스의 가능성을 톨킨은 그리 충분히 활용하지 않으며, 그 결과 프로도의 행진은 단순한 어드벤처의 구조를 띠게 된다.
그러나 서스펜스 이상의 무엇이 있다. 그가 전개하는 중간계(Middleearth)라는 상상의 지리지 그리고 그 안에서 배치된 다양한 신화적 종족들과 수십 명의 주인공들에게 부쳐진 방대하고 치밀한 고유명사의 세계이다(물론 이것은 『호비트』에서 이미 조짐이 보이긴 했던 것이기는 하다). 이 고유명사의 세계가 우리들을 압도하며, 그로 인해 중간계가 마치 어딘가에 정말로 존재하는 세계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나는 그가 엄청난 시간을 들여 번역한 『가웨인과 녹색 기사들』 같은 중세 신화를 구하지도 못하였거니와 설령 구한다고 하더라도 평가할 능력이 전혀 없지만, 『반지의 주인』에서 펼쳐지는 고유명사들(그리고 뒤에 『실마릴리온』으로 확장되는) 속에서 중세영어와 북구신화의 전공자로서의 톨킨의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그의 능력은 『반지의 주인』 전체를 통하여 구사되고 있는 중간계의 지형 곳곳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통하여 또렷하게 입증된다. 어디를 지나가든 그는 중간계의 지형 모든 곳에 이름을 붙여주고 그 풍경을 묘사한다. 그 묘사의 생생함은 아마도 홍명희의 『임꺽정』을 읽은 후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떤 의미에서 톨킨은 분명 홍명희보다는 한 수 위였다. 왜냐하면 중간계는 조선땅과는 달리 완전히 상상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을 읽으며 도저히 중간계가 톨킨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상상의 공간이라고 믿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러니 톨킨의 풍경 묘사는 홍명희를 뛰어넘는 무엇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나로서는 은근히 화가 나는 결론이기도 하거니와 톨킨에 내 자신이 너무나 압도되는 것 같은 느낌도 약간은 불쾌했다. ꡒ어떻게 어떤 인간이 방대한 묘사의 세계를 아무런 경험적인 근거 없이 구축할 수 있겠는가?ꡓ 이런 오기 비슷한 의문이 치밀었다.
이런 오기 어린 의문에 실마리가 된 것은 톨킨이 후에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ꡒ이야기들은 나의 마음속에서 ꡐ주어진 것ꡑ처럼 떠올랐다.ꡓ 그렇다면 ꡐ주어진 것ꡑ의 출처는 어디일까? 나는 인터넷에서 그의 고향 마을을 볼 수 있었고, 거기서 약간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특히 ꡐ쉐어홀ꡑ이라는 그의 고향 마을의 이름 자체가 호비트의 거주지 샤이어를 연상시킬 뿐 아니라 그 마을에 있는 ꡐ모슬리 습지ꡑ는 가장 흔한 중간계의 풍경을 ꡐ두 개의 탑ꡑ은 미나스 모굴과 미나스 티리스를 연상시켰다. 그의 상상력의 출처는 결국 그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낯선(inheimlich) 세계 안에서 익숙한(heimlich) 것을 실현하는 창작기법을 감안함으로써 나는 홍명희를 그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안도할 수 있었다.
비교적 간단한 서스펜스의 구조와 압도적인 묘사의 세계, 이런 양면성만이 나의 『반지의 주인』에 대한 감정을 양가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양가감정은 인물들에서도 반복되었다.
우선 『반지의 주인』의 주인공들에게 나는 아무런 매력도 느낄 수 없었다. 프로도를 생각해보라. 그는 영문도 모르고 내키지도 않는 마음으로 반지를 운명의 산에 던져 그것을 폐기해야 하는 사명을 떠맡는다. 그는 별다른 재능도 없고 미천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을 수행해낸다. 내키지 않는 사명을 받은 미천한 자의 위대한 성취, 이것은 너무나 익숙해서 거의 클리세나 다름없어진 테마이다. 그의 하인이자 동반자인 샘 겜기, 그 또한 너무나 충직해서 한 사람의 인물로서의 개성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그런 끈기 있는 사명의 완수는 지나친 영웅주의의 혐의가 짙다. 스트라이더 또한 그렇다. 그의 아라곤으로의 변신은 아무런 계기 없이 너무나 갑작스럽다. 회색의 갠달프가 백색의 갠달프로 귀환하는 것도 그렇다. 죽었던 줄 알았던 그가 돌아올 때 독자는 반갑기 그지없지만, 그의 놀랍도록 성장한 능력과 권능에 찬 모습은, 애들이라면 좋아할까, 나로서는 그의 귀환의 반가움을 반감시키는 느낌이었다. 사우만과 그의 배신은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만들기는 하지만 별달리 흥미롭지도 설득력 있지도 않다.
배신자로서는 보로미르가 좀더 호감이 가는 인물이지만, 그 역시 그의 죽음 때문에 우리들이 깊은 슬픔에 잠기기에는 어딘가 개성이 부족한 인물로 느껴진다. 그 외에 요정 나라의 숱한 인물들도 지금은 기억이 가물거릴 만큼 평면적이다. 톨킨이 공들여 묘사하는 갈라드리엘조차 나에게는 소녀취향으로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안타고니스트 사우만조차 너무나 추상적인 힘으로 느껴지며, 최후의 결전에서도 그는 절대반지의 소멸과 함께 추상적으로 소멸해버린다.
하지만 이런 평면적인 인물들 속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우리를 매혹하는 인물들이 있으며, 그것이 『반지의 주인』의 매력을 유지하는 힘이 된다. 먼저 피핀, 메리와 친구가 되는 엔트족의 트리비어드가 있다. 숲에 살며, 나무를 사랑하여 나무가 되어가는 종족, 나무 인간 엔트에 대해 피핀은 자신의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ꡒ그 눈 안쪽에는 여러 시대에 걸친 기억과 오랫동안 꾸준히 쌓아둔 사고로 가득 찬 거대한 샘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눈동자는 거대한 나무의 바깥쪽 잎새에 부딪는 햇살처럼, 또는 아주 깊은 호수의 잔물결처럼 현재를 빤짝이고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것은 마치 지상에서 자라는 어떤 것 " 잠들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또는 스스로를 뿌리와 나뭇잎 사이, 깊은 대지와 하늘 사이의 그 어떤 것으로만 느끼고 있는 " 이 갑자기 깨어나서는 무한한 세월에 걸쳐 스스로의 내부적인 일에 쏟아왔던 바로 그 느긋한 관심의 눈길로 지금 우리들을 살펴보고 있는 것 같았다.ꡓ(『반지의 주인』 2권, 79쪽) 이런 문장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엔트의 시선이 나의 몸속에도 신선한 수액처럼 밀려드는 듯한 느낌이 든다. 게다가 그가 돌 항아리에서 퍼서 주는 물을 마신 피핀과 메리는 ꡒ실제로 자신들의 머리카락이 곤두서 물결치며 자라나는 느낌ꡓ(89쪽)에 사로잡힌다. 나는 이 대목에서 침을 꿀꺽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멋진 인물 옆에 골렘이 있다. 더럽고 비쩍 말라붙은 몸으로 물고기를 뜯으며 절뚝거리고 걷는 인물, ꡒ오, 나의 보물, 나의 보물……ꡓ 하며 반지를 향한 맹목적인 열정에 사로잡힌 이 비굴하고 냄새나는 인물 또한 매력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제2시대에 인두인 대하 속으로 사라진 절대반지를 제3세계의 무대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며, 『반지의 주인』 전체를 통하여 절대반지에 의해서 밑바닥으로까지 타락한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1권에서 갠달프가 지적하였듯이 ꡒ호비트와 비슷한 존재ꡓ이다. 그러니 그는 빌보 \ 프로도의 이중체(double)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까지 프로도의 사명을 방해하고 반지를 얻기 위해서 운명의 산에 오른다. 거기서 우리는 『반지의 주인』이 제공하는 수수께끼 하나를 보게 된다. 프로도는 운명의 산의 분화구에서 반지를 던지지 못한다. 그는 반지의 힘에 감염되고 스스로 반지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반지를 분화구에 던질 것을 종용하는 겜기를 떨구고자 절대반지를 끼고 모습을 감춘다. 그러나 골렘은 사라진 프로도를 찾아내어 그와 싸우고 반지를 낀 그의 손가락을 물어뜯어 잘라내어 반지를 가진다. 그리고 그 순간 발을 헛디뎌 반지와 함께 분화구로 떨어져버린다. 그러니 진정으로 사명을 완수한 자는 골렘인 것이다. 그는 어떻게 반지를 끼고 사라진 프로도를 볼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가 반지에 대한 집착 속에서 마침내 반지의 권능을 넘어서버린 것일까? 아니면 어떤 섭리가 반지에 예속되어 비루하게 살아온 그에게 최후의 역설적인 승리를 안배한 것일까? 아무튼 이 냄새나는 인물의 최후로 인해서 『반지의 주인』은 비장미 넘치는 종결을 획득한다.
마지막으로 톰 봄바딜이 있다. 그는 『반지의 주인』 속에서 잠깐만 등장하는 아주 예외적이고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푸른 외투를 입었고, 갈색 수염을 가진 홍안의 노인이며, 두툼한 발을 감싼 노란색 구두로 쿵쾅거리며, 물을 마시러 내려가는 암소처럼 풀밭을 마구 뭉개며 걷는 존재이다. 그는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하며 못된 버드나무를 타일러 뜻대로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바로 그만이 반지를 둘러싼 전쟁, 선악의 거대한 투쟁 속에서 유일하게 초연한 존재이며, 올드 포레스트라 불리는 숲 안에 스스로 경계를 설정하고 사는 자이다. 그리고 절대반지를 끼어도 몸이 사라지지 않는 신비한 존재이고, 절대반지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존재이다. 또한 반지를 끼고 사라진 사람도 그의 눈에는 보인다. 『반지의 주인』 안에 등장한 선한 인물은 모두 반지를 가까이 하기를 꺼린다. 호비트같이 약하고 보잘것없는 인물이 반지를 소지하고 그것을 폐기하는 사명을 맡게 된 것은 바로 그가 약하고 보잘것없어서 설령 그들이 반지의 힘에 이끌린다고 해도 반지의 권능조차 그를 지배자로 만들지는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톰 봄바딜은 이런 반지에 아무런 유혹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반지를 가진 사람은 누구든 반지의 힘에 이끌려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하고 아무에게도 그것을 건네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톰 봄바딜이 프로도에게 반지를 보여달라고 불쑥 말하자 ꡒ프로도는 스스로 놀랍게도 얼른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어 줄에서 끌러서 톰에게 넘겨ꡓ(1권, 160쪽)준다. 요컨대 그에게는 절대반지의 권능이 미치지 못하며, 그 앞에서는 반지가 다른 사람에게도 그 권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 그에게는 반지의 권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또 그는 누구인가? 후자의 답을 구하기 위해서 많은 톨킨 매니어들이 달려들었다.2) 그가 누구인가는 열린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문제에 관해서는 약간의 답이 이미 『반지의 주인』 안에 이미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버드나무를 타이르는 그의 모습이다. 그는 자연과 더불어 놀며, 자연을
2) 예컨대 "Who is Tom Bombadil?"( http://cas.unt.edu/~hargrove/bombadil.html ) 참조.
알지만 자연을 지배하지 않는 자이다. 텍스트 전체를 통하여 톰 봄바딜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였듯이 이질적이며, 텍스트의 일관성을 떨어뜨리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 선, 선악을 초월하며 지배 없는 지식과 사랑을 표상한다. 그래서 그는 『반지의 주인』의 중간계를 불어가는 한 줄기 미풍처럼 우리들의 마음을 위무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양가감정이 있다. 그것은 ꡐ환상의 정치학ꡑ과 관련된 것이다. 톨킨은 『반지의 주인』을 『호비트』를 쓰고 난 후 무려 15년 이상이 걸려서 1954년에 완성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에 걸쳐 있는 시기였다. 이 엄청난 국가간의 권력투쟁의 시기에 쓰여진 『반지의 주인』은 그것과 내면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배를 향한 인간의 갈망 속에서 악을 보았고, 그 지배자의 자리, 누구든 점할 수 있고 또 점하고자 하는 자리를 절대반지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그 반지는 갠달프의 말을 빌리자면 스스로 자신의 주인을 선택하고, 유혹하는 것이기조차 하다. 『호비트』에서는 그저 모습을 감출 수 있는 희한한 보물, 순진하게까지 여길 수도 있는 반지가 『반지의 주인』에서는 이토록 위험한 것으로 변모한 데는 아마도 그가 목도한 엄청난 전쟁의 경험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반지의 주인』은 시대의 알레고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값진 것은 그가 매우 신화론적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권력의 논리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푸코와 다르지 않게 권력과 지배의 원천이 사라져 보이지 않을 수 있는 힘에 있다는 것을 절대반지의 권능을 통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지를 만든 자이자 반지를 추구하는 악인 사우론을 모든 것을 쏘아보는 눈동자로 형상화한 것은 권력이 시선, 남김없이 바라보는 시선 자체라는 것을 그가 통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반지의 주인』은 다른 계기들을 가지고 있다. 『반지의 주인』에는 중세에 매혹된 인간 톨킨의 학문적 이력이 그 안에 녹아들어가 있다. 이야기의 무대인 중간계의 이름 자체가 그것이 바로 중세의 공간화라고 적시하고 있다. 더불어 그가 공들여 묘사하는 중간계와 호비트가 은밀히 그가 성장한 버밍햄의 시골 마을과 그곳에 사는 농민, 또는 그곳에 살았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톨킨의 사고가 반자본주의적인 낭만주의에 경도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엔 어떤 퇴행적인 경향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환상을 구성하기 위한 전략으로 승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심쩍은 것이 남아 있다. 그것은 해피엔딩이라는 이야기 구조 자체이다. 과연 『반지의 주인』 속에서 절대반지는 자신이 태어난 공간인 운명의 산의 분화구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반지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사라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지배를 향한 인간의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반지의 주인』에서의 선한 인간들의 종국적 승리는 거짓된 화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만일 나의 판단이 옳다면, 『반지의 주인』은 박식하고 현란한 천재의 노고에 찬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낯선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 우리의 상상력을 애써 개방하지만, 그 상상력은 현실의 모순을 밝히고 비판하는 무기가 되지 못하고 환상으로만 남는 것이다. 나는 나의 판단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찜찜한 기분을 지금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반지의 주인
아이에게 동화를 골라주는 일을 하다가 보면, 또는 동화를 들려주려 하다가 보면 스스로 동화의 독자가 될 수도 있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나에게 아내는 그것이 스스로 동화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읽는 것에서 내가 느끼는 어색함, 또는 의식되는 타자의 시선을 무마하기 위한 변명이라고 말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서 나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왜 나 같은 어른들이 동화의 애독자가 되는 것일까? 이런저런 답변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어린 시절로 회귀하려는 퇴행적인 충동 때문일 것이다, 아니 어린 시절의 자신과 현재 간의 거리를 측정해보려는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이렇게도 생각해본다. 막스 베버라는 사회학자에 의하면 우리 세계는 탈마법화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이 탈마법화된 세계 속에서, 상징의 숲이 모두 산성비에 찌들어가는 세계 속에서 나는 작은 공간, 밤이면 장난감 병정들이 깨어나 말을 하는 마법의 정원으로 돌아가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동화의 존재는 바로 이 탈마법화된 세계와 유기적 연관을 가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동화는 탈마법화의 고통을 달래는 보충물일 수도 있다. 해서 어른들은 자신들이 쫓아낸 마법사가 찾은 안식처인 어린이의 정원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그리 마땅치 않은 데가 있다. 생각해보면 그 숱한 동화란 실은 어른들이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동화란 결국 (직접 이야기해주는 것이든, 책을 통해서든, 만화영화를 통해서든) 어른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니 동화는 어른의 환상, 어른의 이데올로기, 어른의 투사물이고, 아이들의 정원을 식민화하는 어른의 담론일 가능성이 오히려 크다. 이제 다 큰 어른이 되었기에 알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어릴 적 끼고 잠들었던 동화들을 다시 보며 나는 거기서 내가 어처구니없게도 기만당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가 많으니 말이다.
하지만 때로 이런 생각의 부담에서 벗어나서 안온하게 끼고 잠들 수 있는 동화가 있다. 톨킨의 『반지의 주인』이 그런 동화이다. 이 책을 끼고 있는 것이 안온한 것은 그것이 영도 쓰기(writing degree-zero)의 동화여서는 아니다. 단지 이 동화가 동화임에도 불구하고 실은 어린이가 읽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분량이어서 오히려 어른(적어도 청소년은 되어야)이 읽기에 적당한 동화이기 때문이다.
내가 톨킨의 『반지의 주인』을 알게 된 것은 인터넷을 통해서였다. 인터넷을 통하여 내가 찾고 싶었던 작가는 프랭크 봄과 조지 맥도널드였다. 국내에서는 구하기가 쉽지 않은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나 조지 맥도널드의 『가벼운 공주』 같은 동화를 풀 텍스트로 올려놓은 사이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이트를 찾으며 저런 사이트를 뒤지다가 톨킨을 발견했다. 그와 관련된 사이트는 금방 나를 흥분으로 들뜨게 했다. 제대로 세어본 것은 아니지만 줄잡아 천여 개나 되는 사이트가 그에 대한, 그리고 그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 사이트들을 찾아 들어가 다시 한번 놀랐던 것은 톨킨 관련 사이트의 화려함이었다. 그래픽과 사진자료가 즐비하고, 『반지의 주인』의 주요장면에 대한 수십 장의 일러스트레이션이 펼쳐지는 갤러리들이 나를 매혹시켰다. 그리고 그런 사이트를 만든 사람들의 나라 또한 대단히 다양했다. 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톨킨 사이트를 만들지 않는 나라가 거의 없다시피했다.
나는 곧장 외국에 사는 친구에게 『반지의 주인』을 사서 보내달라는 편지를 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이미 우리나라에 『반지의 주인』의 번역이 나와 있으니 그것을 사보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래서 나는 서점에 달려가 『호비트』(창작과비평사)와 『반지의 주인』(국역 제목은 『반지전쟁』(예문)이다)을 샀다. 『반지의 주인』을 사서 나는 다시 한번 놀랐는데, 이미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7쇄 이상 찍혔으며, 그것도 1990년 발간 이래로 지금까지 꾸준히 새로 찍혔다는 것이다. 냄비 끓듯이 하는 우리나라 소설 시장에서 세 권짜리 외국소설이 소리소문없이 꾸준히 팔리는 것도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그것은 톨킨 매니아의 출현을 엿보이게 하는 데가 있었다. 그래서 PC통신에 들어가보니 아니나다를까 환상문학 동우회의 게시판에서 톨킨과 관련된 많은 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관심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반지의 주인』의 전편 격인 『호비트』를 읽으며 실망하고 있었다. 재미있지만 표준적인 동화라는 느낌, 동화라는 생각을 접고 본다면 소품이고, 던전스 앤 드래곤즈(Dungeons & Dargons)로서도 이류급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 벨보 베긴스가 속한 종족인 호비트 자체의 매력뿐이었다. 하루에 6번씩이나 식사하고 술 마시고 놀기 좋아하며, 버섯을 좋아하며, 농담을 즐기고, 끽연을 매우 즐기는 난쟁이보다 더 작은 종족 호비트를 보며, 톨킨은 어디서 이런 종족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고는 했다. 호비트는 톨킨이 지적하듯이 영국의 평범한 농민을 모델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파이프를 물고 있는 모습의 톨킨 사진은 그것의 일부는 그 자신의 반영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하지만 평균 90센티의 키를 염두에 둘 때, 호비트는 무엇보다 어린이를 닮았다. 순진하고 자연친화적이며, 별달리 특별한 재능이 없지만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이며 용기 있는 호비트는 나에게 아버지의 담배를 철없이 피워물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어린이의 모습 그대로 이미 어른인 호비트는 확실히 이 책을 읽는 어린이들을 끌어들이는 탁월한 동일시의 장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호비트』에 톨킨의 친구 찰스 윌리엄스와 C. S. 루이스(후에 『나니아 연대기』를 쓴)가 매혹을 느끼고 알렌 앤 언윈 출판사가 책을 내고 그리고 곧장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이유를 나로서는 잘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반지의 주인』은 확실히 다른 무엇이 있었다. 우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보낸 한 주일이 매우 즐거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우리의 인생을 한 주일 즐겁게 해주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일견 즐거움의 원천은 아주 단순해 보였다. 빌보의 양자 프로도는 백 앤드의 주인이 되자마자 곧장 갠달프의 방문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서 빌보가 예전의 머크우드의 용을 해치울 적에 골롬의 동굴에서 주운 반지의 비밀을 듣게 된다. 그 반지는 모르도르에서 중간계를 지배하기 위해서 사우론이라는 악의 화신이 찾고 있는 절대반지이다. 프로도는 자신의 아름다운 고향 샤이어가 반지를 빼앗으러 올 사우론의 하수인들에 의해서 폐허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반지를 가지고 고향을 떠난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사건은 숨돌릴 틈 없이 계속된다.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절대반지를 없애기 위해서 운명의 산으로 향하는 프로도가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으로 우리는 『반지의 주인』을 단숨에 읽어치우게 된다. 그러니 『반지의 주인』을 떠받치고 있는 즐거움의 원천은 서스펜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서스펜스의 구조만으로는 이 긴 텍스트의 즐거움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야기의 구조가 아주 단순한 것은 아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반지를 폐기하기 위해서 프로도가 가야 할 곳이 바로 반지를 찾고 있는 사우론의 본거지인 모르도르에 있는 운명의 산이라는 점이다. 반지가 소지자를 유혹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이 과정은 매우 위험하고 양가적이며 그런 만큼 서스펜스의 도를 더한다. 왜냐하면 그 과정은 프로도의 입장에서는 반지를 폐기하러 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반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사우론을 향해서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서사구조가 가진 모호함과 서스펜스의 가능성을 톨킨은 그리 충분히 활용하지 않으며, 그 결과 프로도의 행진은 단순한 어드벤처의 구조를 띠게 된다.
그러나 서스펜스 이상의 무엇이 있다. 그가 전개하는 중간계(Middleearth)라는 상상의 지리지 그리고 그 안에서 배치된 다양한 신화적 종족들과 수십 명의 주인공들에게 부쳐진 방대하고 치밀한 고유명사의 세계이다(물론 이것은 『호비트』에서 이미 조짐이 보이긴 했던 것이기는 하다). 이 고유명사의 세계가 우리들을 압도하며, 그로 인해 중간계가 마치 어딘가에 정말로 존재하는 세계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나는 그가 엄청난 시간을 들여 번역한 『가웨인과 녹색 기사들』 같은 중세 신화를 구하지도 못하였거니와 설령 구한다고 하더라도 평가할 능력이 전혀 없지만, 『반지의 주인』에서 펼쳐지는 고유명사들(그리고 뒤에 『실마릴리온』으로 확장되는) 속에서 중세영어와 북구신화의 전공자로서의 톨킨의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그의 능력은 『반지의 주인』 전체를 통하여 구사되고 있는 중간계의 지형 곳곳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통하여 또렷하게 입증된다. 어디를 지나가든 그는 중간계의 지형 모든 곳에 이름을 붙여주고 그 풍경을 묘사한다. 그 묘사의 생생함은 아마도 홍명희의 『임꺽정』을 읽은 후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떤 의미에서 톨킨은 분명 홍명희보다는 한 수 위였다. 왜냐하면 중간계는 조선땅과는 달리 완전히 상상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을 읽으며 도저히 중간계가 톨킨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상상의 공간이라고 믿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러니 톨킨의 풍경 묘사는 홍명희를 뛰어넘는 무엇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나로서는 은근히 화가 나는 결론이기도 하거니와 톨킨에 내 자신이 너무나 압도되는 것 같은 느낌도 약간은 불쾌했다. ꡒ어떻게 어떤 인간이 방대한 묘사의 세계를 아무런 경험적인 근거 없이 구축할 수 있겠는가?ꡓ 이런 오기 비슷한 의문이 치밀었다.
이런 오기 어린 의문에 실마리가 된 것은 톨킨이 후에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ꡒ이야기들은 나의 마음속에서 ꡐ주어진 것ꡑ처럼 떠올랐다.ꡓ 그렇다면 ꡐ주어진 것ꡑ의 출처는 어디일까? 나는 인터넷에서 그의 고향 마을을 볼 수 있었고, 거기서 약간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특히 ꡐ쉐어홀ꡑ이라는 그의 고향 마을의 이름 자체가 호비트의 거주지 샤이어를 연상시킬 뿐 아니라 그 마을에 있는 ꡐ모슬리 습지ꡑ는 가장 흔한 중간계의 풍경을 ꡐ두 개의 탑ꡑ은 미나스 모굴과 미나스 티리스를 연상시켰다. 그의 상상력의 출처는 결국 그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낯선(inheimlich) 세계 안에서 익숙한(heimlich) 것을 실현하는 창작기법을 감안함으로써 나는 홍명희를 그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안도할 수 있었다.
비교적 간단한 서스펜스의 구조와 압도적인 묘사의 세계, 이런 양면성만이 나의 『반지의 주인』에 대한 감정을 양가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양가감정은 인물들에서도 반복되었다.
우선 『반지의 주인』의 주인공들에게 나는 아무런 매력도 느낄 수 없었다. 프로도를 생각해보라. 그는 영문도 모르고 내키지도 않는 마음으로 반지를 운명의 산에 던져 그것을 폐기해야 하는 사명을 떠맡는다. 그는 별다른 재능도 없고 미천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을 수행해낸다. 내키지 않는 사명을 받은 미천한 자의 위대한 성취, 이것은 너무나 익숙해서 거의 클리세나 다름없어진 테마이다. 그의 하인이자 동반자인 샘 겜기, 그 또한 너무나 충직해서 한 사람의 인물로서의 개성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그런 끈기 있는 사명의 완수는 지나친 영웅주의의 혐의가 짙다. 스트라이더 또한 그렇다. 그의 아라곤으로의 변신은 아무런 계기 없이 너무나 갑작스럽다. 회색의 갠달프가 백색의 갠달프로 귀환하는 것도 그렇다. 죽었던 줄 알았던 그가 돌아올 때 독자는 반갑기 그지없지만, 그의 놀랍도록 성장한 능력과 권능에 찬 모습은, 애들이라면 좋아할까, 나로서는 그의 귀환의 반가움을 반감시키는 느낌이었다. 사우만과 그의 배신은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만들기는 하지만 별달리 흥미롭지도 설득력 있지도 않다.
배신자로서는 보로미르가 좀더 호감이 가는 인물이지만, 그 역시 그의 죽음 때문에 우리들이 깊은 슬픔에 잠기기에는 어딘가 개성이 부족한 인물로 느껴진다. 그 외에 요정 나라의 숱한 인물들도 지금은 기억이 가물거릴 만큼 평면적이다. 톨킨이 공들여 묘사하는 갈라드리엘조차 나에게는 소녀취향으로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안타고니스트 사우만조차 너무나 추상적인 힘으로 느껴지며, 최후의 결전에서도 그는 절대반지의 소멸과 함께 추상적으로 소멸해버린다.
하지만 이런 평면적인 인물들 속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우리를 매혹하는 인물들이 있으며, 그것이 『반지의 주인』의 매력을 유지하는 힘이 된다. 먼저 피핀, 메리와 친구가 되는 엔트족의 트리비어드가 있다. 숲에 살며, 나무를 사랑하여 나무가 되어가는 종족, 나무 인간 엔트에 대해 피핀은 자신의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ꡒ그 눈 안쪽에는 여러 시대에 걸친 기억과 오랫동안 꾸준히 쌓아둔 사고로 가득 찬 거대한 샘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눈동자는 거대한 나무의 바깥쪽 잎새에 부딪는 햇살처럼, 또는 아주 깊은 호수의 잔물결처럼 현재를 빤짝이고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것은 마치 지상에서 자라는 어떤 것 " 잠들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또는 스스로를 뿌리와 나뭇잎 사이, 깊은 대지와 하늘 사이의 그 어떤 것으로만 느끼고 있는 " 이 갑자기 깨어나서는 무한한 세월에 걸쳐 스스로의 내부적인 일에 쏟아왔던 바로 그 느긋한 관심의 눈길로 지금 우리들을 살펴보고 있는 것 같았다.ꡓ(『반지의 주인』 2권, 79쪽) 이런 문장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엔트의 시선이 나의 몸속에도 신선한 수액처럼 밀려드는 듯한 느낌이 든다. 게다가 그가 돌 항아리에서 퍼서 주는 물을 마신 피핀과 메리는 ꡒ실제로 자신들의 머리카락이 곤두서 물결치며 자라나는 느낌ꡓ(89쪽)에 사로잡힌다. 나는 이 대목에서 침을 꿀꺽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멋진 인물 옆에 골렘이 있다. 더럽고 비쩍 말라붙은 몸으로 물고기를 뜯으며 절뚝거리고 걷는 인물, ꡒ오, 나의 보물, 나의 보물……ꡓ 하며 반지를 향한 맹목적인 열정에 사로잡힌 이 비굴하고 냄새나는 인물 또한 매력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제2시대에 인두인 대하 속으로 사라진 절대반지를 제3세계의 무대 위에 올려놓은 인물이며, 『반지의 주인』 전체를 통하여 절대반지에 의해서 밑바닥으로까지 타락한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1권에서 갠달프가 지적하였듯이 ꡒ호비트와 비슷한 존재ꡓ이다. 그러니 그는 빌보 \ 프로도의 이중체(double)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까지 프로도의 사명을 방해하고 반지를 얻기 위해서 운명의 산에 오른다. 거기서 우리는 『반지의 주인』이 제공하는 수수께끼 하나를 보게 된다. 프로도는 운명의 산의 분화구에서 반지를 던지지 못한다. 그는 반지의 힘에 감염되고 스스로 반지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반지를 분화구에 던질 것을 종용하는 겜기를 떨구고자 절대반지를 끼고 모습을 감춘다. 그러나 골렘은 사라진 프로도를 찾아내어 그와 싸우고 반지를 낀 그의 손가락을 물어뜯어 잘라내어 반지를 가진다. 그리고 그 순간 발을 헛디뎌 반지와 함께 분화구로 떨어져버린다. 그러니 진정으로 사명을 완수한 자는 골렘인 것이다. 그는 어떻게 반지를 끼고 사라진 프로도를 볼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가 반지에 대한 집착 속에서 마침내 반지의 권능을 넘어서버린 것일까? 아니면 어떤 섭리가 반지에 예속되어 비루하게 살아온 그에게 최후의 역설적인 승리를 안배한 것일까? 아무튼 이 냄새나는 인물의 최후로 인해서 『반지의 주인』은 비장미 넘치는 종결을 획득한다.
마지막으로 톰 봄바딜이 있다. 그는 『반지의 주인』 속에서 잠깐만 등장하는 아주 예외적이고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푸른 외투를 입었고, 갈색 수염을 가진 홍안의 노인이며, 두툼한 발을 감싼 노란색 구두로 쿵쾅거리며, 물을 마시러 내려가는 암소처럼 풀밭을 마구 뭉개며 걷는 존재이다. 그는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하며 못된 버드나무를 타일러 뜻대로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바로 그만이 반지를 둘러싼 전쟁, 선악의 거대한 투쟁 속에서 유일하게 초연한 존재이며, 올드 포레스트라 불리는 숲 안에 스스로 경계를 설정하고 사는 자이다. 그리고 절대반지를 끼어도 몸이 사라지지 않는 신비한 존재이고, 절대반지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존재이다. 또한 반지를 끼고 사라진 사람도 그의 눈에는 보인다. 『반지의 주인』 안에 등장한 선한 인물은 모두 반지를 가까이 하기를 꺼린다. 호비트같이 약하고 보잘것없는 인물이 반지를 소지하고 그것을 폐기하는 사명을 맡게 된 것은 바로 그가 약하고 보잘것없어서 설령 그들이 반지의 힘에 이끌린다고 해도 반지의 권능조차 그를 지배자로 만들지는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톰 봄바딜은 이런 반지에 아무런 유혹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반지를 가진 사람은 누구든 반지의 힘에 이끌려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하고 아무에게도 그것을 건네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톰 봄바딜이 프로도에게 반지를 보여달라고 불쑥 말하자 ꡒ프로도는 스스로 놀랍게도 얼른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어 줄에서 끌러서 톰에게 넘겨ꡓ(1권, 160쪽)준다. 요컨대 그에게는 절대반지의 권능이 미치지 못하며, 그 앞에서는 반지가 다른 사람에게도 그 권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 그에게는 반지의 권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또 그는 누구인가? 후자의 답을 구하기 위해서 많은 톨킨 매니어들이 달려들었다.2) 그가 누구인가는 열린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문제에 관해서는 약간의 답이 이미 『반지의 주인』 안에 이미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버드나무를 타이르는 그의 모습이다. 그는 자연과 더불어 놀며, 자연을
2) 예컨대 "Who is Tom Bombadil?"( http://cas.unt.edu/~hargrove/bombadil.html ) 참조.
알지만 자연을 지배하지 않는 자이다. 텍스트 전체를 통하여 톰 봄바딜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였듯이 이질적이며, 텍스트의 일관성을 떨어뜨리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 선, 선악을 초월하며 지배 없는 지식과 사랑을 표상한다. 그래서 그는 『반지의 주인』의 중간계를 불어가는 한 줄기 미풍처럼 우리들의 마음을 위무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양가감정이 있다. 그것은 ꡐ환상의 정치학ꡑ과 관련된 것이다. 톨킨은 『반지의 주인』을 『호비트』를 쓰고 난 후 무려 15년 이상이 걸려서 1954년에 완성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에 걸쳐 있는 시기였다. 이 엄청난 국가간의 권력투쟁의 시기에 쓰여진 『반지의 주인』은 그것과 내면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배를 향한 인간의 갈망 속에서 악을 보았고, 그 지배자의 자리, 누구든 점할 수 있고 또 점하고자 하는 자리를 절대반지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그 반지는 갠달프의 말을 빌리자면 스스로 자신의 주인을 선택하고, 유혹하는 것이기조차 하다. 『호비트』에서는 그저 모습을 감출 수 있는 희한한 보물, 순진하게까지 여길 수도 있는 반지가 『반지의 주인』에서는 이토록 위험한 것으로 변모한 데는 아마도 그가 목도한 엄청난 전쟁의 경험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반지의 주인』은 시대의 알레고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값진 것은 그가 매우 신화론적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권력의 논리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푸코와 다르지 않게 권력과 지배의 원천이 사라져 보이지 않을 수 있는 힘에 있다는 것을 절대반지의 권능을 통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지를 만든 자이자 반지를 추구하는 악인 사우론을 모든 것을 쏘아보는 눈동자로 형상화한 것은 권력이 시선, 남김없이 바라보는 시선 자체라는 것을 그가 통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반지의 주인』은 다른 계기들을 가지고 있다. 『반지의 주인』에는 중세에 매혹된 인간 톨킨의 학문적 이력이 그 안에 녹아들어가 있다. 이야기의 무대인 중간계의 이름 자체가 그것이 바로 중세의 공간화라고 적시하고 있다. 더불어 그가 공들여 묘사하는 중간계와 호비트가 은밀히 그가 성장한 버밍햄의 시골 마을과 그곳에 사는 농민, 또는 그곳에 살았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톨킨의 사고가 반자본주의적인 낭만주의에 경도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엔 어떤 퇴행적인 경향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환상을 구성하기 위한 전략으로 승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심쩍은 것이 남아 있다. 그것은 해피엔딩이라는 이야기 구조 자체이다. 과연 『반지의 주인』 속에서 절대반지는 자신이 태어난 공간인 운명의 산의 분화구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반지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사라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지배를 향한 인간의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반지의 주인』에서의 선한 인간들의 종국적 승리는 거짓된 화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만일 나의 판단이 옳다면, 『반지의 주인』은 박식하고 현란한 천재의 노고에 찬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낯선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 우리의 상상력을 애써 개방하지만, 그 상상력은 현실의 모순을 밝히고 비판하는 무기가 되지 못하고 환상으로만 남는 것이다. 나는 나의 판단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찜찜한 기분을 지금도 떨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