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나서
채식이 주는 정신적 포만
김종엽 (한신대 교수, 사회학, 문화평론가)
`흰쌀밥에 고깃국` .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상상계를 사로잡아온 행복의 이미지다. 이제 우리는 거의 거기에 도달한 것 같다. 아직도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기 어려운 사람들이 적잖게 있다 하더라도 인구의 대다수는 그것을 꿈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고깃국에서 더 나아가 고기를 구워 먹는 것조차 흔한 일이 되었으며, 삼겹살이나 갈비는 이런저런 회식의 주 메뉴가 되었다. 설 차례상에 올린 고기전. 산적으로나 고기 구경을 하던 시절은 참 옛날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세상은 좋아져만 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확장된 육식의 토대를 살펴보면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먹거리에 관하여 윤리적인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그저 편식과 식탐을 경계하는 일에 그치는 일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꽤나 심각한 윤리적 문제가 거기에 도사리고 있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육류를 전보다 훨씬 쉽게 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의 소득이 증가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와 더불어 육류의 생산량이 많아지지 않는다면, 소득이 증가했다고 해서 육류 소비가 증가할 수는 없다.
우리들이 육류를 전보다 많이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공장식 농장` 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현대의 발달된 가축사육 시스템 덕분이다. 그런데 이런 농산물의 공산품으로의 전환과정은 단순히 생산성의 향상으로만 서술될 수 없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가축을 공장식으로 사육한다는 것은 최소의 비용을 투자하여 가축으로부터 최대한의 고기와 젖과 알을 얻어내기 위한 과정이 되며, 이 과정은 거기에 투하된 원료인 동물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피터 싱어가 『동물 해방』(인간사랑, 1999)에서 들고 있는 예 두어 가지만 들어보자. 송아지를 신속하게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음식을 많이 먹게 하는 동시에 그것의 소모를 최소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축산업자는 우선 송아지에게 물을 주지 않는다. 물을 먹지 못한 송아지가 흡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분은 음식에 내포된 수분뿐이기 때문에 송아지는 과식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더 갈증을 느낀다.
축산업자는 송아지 축사를 항상 따뜻하게 해두는데, 이는 송아지의 열량 손실을 막는 동시에 땀을 흘리게 하여 더욱 갈증을 느껴 식사를 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또 운동량을 줄여야 빨리 살이 찌기 때문에 축산업자는 송아지가 어떤 운동도 할 수 없게 감금한다. 그렇게 해서 송아지는 하루종일 먹는 일 이외에는 아무 짓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비육된다.
우리가 자주 마시는 우유가 어떻게 생산되는가.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서 젖소는 임신 가능해진 그때부터 5~6년 뒤 햄버거나 개 사료가 되기 위해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그날까지 줄곧 강제로 임신 당하게 되고 또 출산 후에는 즉시 새끼를 박탈당한다. 이런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육류 제품이 소비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사료에 가해지는 처방, 각종 호르몬제의 사용, 가축의 운송과정에서 나타나는 가혹함, 좁은 축사 안에서 커지게 마련인 가축들의 공격성을 제어하기 위해 사용되는 각종 조치들에서 잔인함은 다종다양하게 벌어진다.
하지만 이런 고발에 대해 "그래서 어떻다는 거냐? 생태계의 먹이사슬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는 반문이 나올 수 있다. 그런 반문에 대해 피터 싱어는 단호하게 답한다.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에게 아무 이유없이, 혹은 불가피하지 않은데도 고통을 가할 자유는 없다고 말이다. 동의하지 않기 어려운 주장이다. 가학적 변태가 아니고는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려 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식량이 문제인 한에서 그것이 어떤 고통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엄격한 것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불필요한 고통을 막는 정도면 되는가. 또 어느 만큼이 불필요한 고통인가 하는 어려운 문제가 제기된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채식주의야말로 인류가 받아들여야 할 생활양식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채식주의의 일반화는 축산업을 퇴출함으로써 동물에 대한 불필요한 고통을 제거할 뿐 아니라 인류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인류가 육식소비를 포기하면 그 대신 더 많은 식량, 더 나은 생활환경을 얻을 수 있다.
가축을 사육하기 위해 인류는 많은 농경지를 포기하며, 많은 농경지를 사료 생산지로 쓰며, 가축의 오물을 처리하고, 숱한 지하수를 소모하고 파괴하며, 전기와 화석 연료를 소모한다. 그러니 그것을 피하게 해주는 채식주의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 양식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선진 사회에서 고기를 포식하는 동안 후진국에서 기아와 영양실조가 생기는 것을 막을 사회적 토대를 구축하는 일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문제는 길이 외줄기라 해도 종종 사람들이 그 길에 들어서려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인데, 피터 싱어의 책은 그 길에 발을 내디딜 용기를 자극하는 책이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 사회학, 문화평론가)
`흰쌀밥에 고깃국` .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상상계를 사로잡아온 행복의 이미지다. 이제 우리는 거의 거기에 도달한 것 같다. 아직도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기 어려운 사람들이 적잖게 있다 하더라도 인구의 대다수는 그것을 꿈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고깃국에서 더 나아가 고기를 구워 먹는 것조차 흔한 일이 되었으며, 삼겹살이나 갈비는 이런저런 회식의 주 메뉴가 되었다. 설 차례상에 올린 고기전. 산적으로나 고기 구경을 하던 시절은 참 옛날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세상은 좋아져만 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확장된 육식의 토대를 살펴보면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먹거리에 관하여 윤리적인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그저 편식과 식탐을 경계하는 일에 그치는 일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꽤나 심각한 윤리적 문제가 거기에 도사리고 있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육류를 전보다 훨씬 쉽게 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의 소득이 증가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와 더불어 육류의 생산량이 많아지지 않는다면, 소득이 증가했다고 해서 육류 소비가 증가할 수는 없다.
우리들이 육류를 전보다 많이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공장식 농장` 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현대의 발달된 가축사육 시스템 덕분이다. 그런데 이런 농산물의 공산품으로의 전환과정은 단순히 생산성의 향상으로만 서술될 수 없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가축을 공장식으로 사육한다는 것은 최소의 비용을 투자하여 가축으로부터 최대한의 고기와 젖과 알을 얻어내기 위한 과정이 되며, 이 과정은 거기에 투하된 원료인 동물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피터 싱어가 『동물 해방』(인간사랑, 1999)에서 들고 있는 예 두어 가지만 들어보자. 송아지를 신속하게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음식을 많이 먹게 하는 동시에 그것의 소모를 최소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축산업자는 우선 송아지에게 물을 주지 않는다. 물을 먹지 못한 송아지가 흡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분은 음식에 내포된 수분뿐이기 때문에 송아지는 과식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더 갈증을 느낀다.
축산업자는 송아지 축사를 항상 따뜻하게 해두는데, 이는 송아지의 열량 손실을 막는 동시에 땀을 흘리게 하여 더욱 갈증을 느껴 식사를 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또 운동량을 줄여야 빨리 살이 찌기 때문에 축산업자는 송아지가 어떤 운동도 할 수 없게 감금한다. 그렇게 해서 송아지는 하루종일 먹는 일 이외에는 아무 짓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비육된다.
우리가 자주 마시는 우유가 어떻게 생산되는가.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서 젖소는 임신 가능해진 그때부터 5~6년 뒤 햄버거나 개 사료가 되기 위해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그날까지 줄곧 강제로 임신 당하게 되고 또 출산 후에는 즉시 새끼를 박탈당한다. 이런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육류 제품이 소비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사료에 가해지는 처방, 각종 호르몬제의 사용, 가축의 운송과정에서 나타나는 가혹함, 좁은 축사 안에서 커지게 마련인 가축들의 공격성을 제어하기 위해 사용되는 각종 조치들에서 잔인함은 다종다양하게 벌어진다.
하지만 이런 고발에 대해 "그래서 어떻다는 거냐? 생태계의 먹이사슬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는 반문이 나올 수 있다. 그런 반문에 대해 피터 싱어는 단호하게 답한다.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에게 아무 이유없이, 혹은 불가피하지 않은데도 고통을 가할 자유는 없다고 말이다. 동의하지 않기 어려운 주장이다. 가학적 변태가 아니고는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려 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식량이 문제인 한에서 그것이 어떤 고통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엄격한 것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불필요한 고통을 막는 정도면 되는가. 또 어느 만큼이 불필요한 고통인가 하는 어려운 문제가 제기된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채식주의야말로 인류가 받아들여야 할 생활양식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채식주의의 일반화는 축산업을 퇴출함으로써 동물에 대한 불필요한 고통을 제거할 뿐 아니라 인류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인류가 육식소비를 포기하면 그 대신 더 많은 식량, 더 나은 생활환경을 얻을 수 있다.
가축을 사육하기 위해 인류는 많은 농경지를 포기하며, 많은 농경지를 사료 생산지로 쓰며, 가축의 오물을 처리하고, 숱한 지하수를 소모하고 파괴하며, 전기와 화석 연료를 소모한다. 그러니 그것을 피하게 해주는 채식주의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 양식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선진 사회에서 고기를 포식하는 동안 후진국에서 기아와 영양실조가 생기는 것을 막을 사회적 토대를 구축하는 일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문제는 길이 외줄기라 해도 종종 사람들이 그 길에 들어서려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인데, 피터 싱어의 책은 그 길에 발을 내디딜 용기를 자극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