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원석연

  이청준의 작품 ‘당신들의 천국’에서 조백헌 원장은 나름대로의 사명을 가지고 소록도에 부임한다. 조 원장은 나환자들 있는 소록도를 천국으로 만들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런 원장의 생각은 번번이 원생들의 냉대를 받는다. 그러나 이런 냉대 속에서도 조 원장은 나환자 선수들과 일반 선수들과의 축구 경기, 오마도 간척사업들을 통해 원장이 생각하는 천국의 모습을 이루어 나간다. 하지만 소록도는 조 원장의 천국이 될 수는 있어도 원생들의 천국은 될 수도 없다. 원생들은 조 원장의 ‘천국 만들기’에 이용당했을 뿐이다. 천국을 만든다는 구실로 소록도 주민들은 착취와 고통의 생활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복서는 ‘농장에서 가장 충실한 일꾼’이다. 복서는 항상 두 가지 모토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더 열심히 일하자’ 이고 다른 하나는 ‘나폴레옹 동지는 항상 옳다’이다. 결국 복서는 나폴레옹 동지를 너무 믿고 열심히 일한 나머지 병에 걸리고 폐마 도살장으로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복서는 옳지 못한 현실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다. 인간 사회에서도 이러한 무지함으로 인해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하는 사람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 박정희 정권 때 눈부신 경제 성장을 떠올리며 제2의 박정희를 기다린다. 이런 경제 성장 아래에 복서처럼 비참히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이는 옳지 못하다. 제시문에 나오는 다른 동물들은 무지해서 스퀼러의 말에 쉽게 설득 당한다. 뛰어난 언변술을 가지고 있는 스퀼러는 동물들을 선동하고 충실한 일꾼으로 만든다. 오늘날 우리는 언론에 좌지우지 되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언론이 무조건 사실만을 전달하지는 않는 다는 것을 망각하고 무비판적으로 이를 받아들인다. 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이 이런 언론의 기능을 이용하여 동물들을 충실한 일꾼으로 만들듯이 현실 사회에서 우리도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조종당할 위험이 크다. 그 예로 박정희 정권 시대에 언론은 일종의 박정희 대변인 노릇을 했다.
  복서의 죽음은 곧 어리석은 민중이 이르는 최후이다. ‘동물농장’ 속 동물들은 혁명을 통해 그들의 천국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꿈은 나폴레옹이라는 치자에 의해 왜곡된다. 하지만 무지한 민중들은 이를 알지 못한다. 그중 복서는 나폴레옹을 무조건적으로 믿고 그를 위한 일이 곧 전체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독재자를 향한 이런 맹신은 일방향적인 것이다. 복서가 비참하게 죽은 것처럼 독재자는 오로지 스스로의 이익을 생각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 개발도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아야한다. 사람들은 보통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 개발을 그의 업적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경제 개발이 전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정부에서 일방적인 대기업 중심의 경제 개발 정책을 펴서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하청 기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실업률은 오히려 증가하고 근로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해야 했다. 급기야 이런 상황에서 분신자살을 한 전태일이라는 노동자도 등장했다. 박정희 중심의 경제 개발 속에 충실한 부품이 돼서 일한 많은 사람들은 결국 복서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제2의 박정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민중을 선동하여 착취한 과거의 독재자를 다시 기다리는 것이다. 문제점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오로지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이런 사람들은 결국 제2의, 제3의 복서가 될 것이다.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은 변질된 러시아의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이상적인 공약과 선동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혁명과 그의 타락을 비판한 풍자 우화 소설이다. 이 소설이 오늘날까지 계속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권력의 부패가 어느 시대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물농장’에서 알 수 있듯이 통치자의 부패만이 문제가 아니다. 더욱 큰 문제는 무지한 피치자들이 통치자의 부패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피치자들의 무지와 무관심은 부패한 권력과 독재를 정당화시켜준다. ‘당신들의 천국’에서 원생들이 원장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현실 사회에서 진정한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현명한 국민들이 권력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동물농장과 현실   홍성현


사람들은 흔히 젊을 때 죽어라 일하고 노후를 즐기라는 말을 한다, 젊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나이가 든 후에 편안한 삶을 즐기라는 뜻일 것이다.
이 말에 어느 정도 동의는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도 한다 ‘죽어라 일한 뒤엔 반드시 그 보상이 있을까? 젊었을 때 죽어라 일한 뒤에 남는 건 늙어버린 나 자신, 지쳐버린 나 자신일 텐데 허무하지 않을까?’
제시문 ‘동물농장’에서의 복서는 정말 정년퇴직만을 바라보며 열심히 일 해온 말 이다.
그는 퇴직연금을 받기 전에 돈을 충분히 모아 놓기 위해 자신의 몸이 상해 가는 것을 개의치 않았고 몸이 다쳐 병원에 보내져도 퇴직 후 커다란 목장 한구석에서 평화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될 것과 생전처음 공부를 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여생을 보낼 것 을 기대하며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마차를 끄는 마부에 의해 도살장인지 아님 정말 병원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그동안 그가 열심히 한 몸 바쳐 일 해온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 내용은 우리 사회의 노후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를 비춰주는 듯 했다. 우리 국민들은 안정된 삶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보장되어 있지 않다. 국민들은 열심히 일 해가며 국가를 지탱하는데 그에 비해 국가가 국민에게 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스위스나 스웨덴 같은 경우에는 국민들이 노후에 대한 걱정이 매우 낮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병원, 약국은 무료이며 버스, 택시 역시 돈 한 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모두 국가에서 관리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후에 대한 걱정 없이 즐겁게 현재 자신의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우리 사회는 내 집 마련하기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보장돼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기회역시 줄어드는 것이다.
또한 이 글에서 우두머리 돼지인 나폴레옹은 복서가 죽은 뒤에 이렇게 말한다. ‘더 열심히 일하자!’ ‘나폴레옹 동지는 항상 옳다’ 이것은 하나의 주입식 생활이다. 동물농장의 존재의 이유는 말하자면 우두머리인 나폴레옹 인 것이다. 복서의 죽음 따위는 우두머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로 인해 구성원들이 일을 하지 않을까봐 오히려 거짓말로 그들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비춰주고 있다. 대기업에서 재해를 입은 사원하나쯤은 문제가 되지 않고 각종 무책임한 정책들에 의해 죽어가는 서민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지금도 국가뿐만 아니라 한 집단의 대표가 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 의해 집단이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의 개개인들에 의해 집단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모든 문제점들을 종합해보면 복서의 죽음은 결국 자신도 동물농장의 동료도 아닌 우두머리를 위한 죽음이었을 뿐이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도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일하고 살아가는지를 정확히 의도하고 주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고 국가는 그러한 국민들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보호해 주어야 할 것이다.


  
동물 농장은 끝나지 않았다.  / 장헌수

  복서는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말이었다. 동물 농장의 번영을 위해 언제나 자신을 희생하고, 솔선수범하는 존경할만한 동물이었다. 비록 머리가 나빠서 알파벳은 네 글자 밖에 못 외우지만, 위대한 나폴레옹 동지의 말은 언제나 옳다고 믿는 현명한 말이었다. 또한 그는 그 엄청난 노동량을 감당하면서도, 은퇴 후 농장 구석에 자리 잡아 알파벳 외우기를 하며 여생을 보내는 작은 꿈을 가진 소박하고 욕심 없던 말이었다. 온갖 질병에 견디다 못해 쓰러지던 그 날조차도 그는 풍차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돼지들이 불러온 마차에 실려 가기 전에 노동의 대가로 주어질 평화로운 여생을 생각하며 미소 짓는다. 동물들은 그가 어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지만, 다시 농장으로 돌아온 것은 건강한 모습의 복서가 아닌 위스키 한 상자였다. 그의 노동에 대한 대가도 도살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동물 농장의 우두머리인 돼지들은 젊었을 땐 이용가치가 높았으나 이제는 늙고 지쳐버린 말 한 마리를 팔아버리고 얻은 위스키로 그들만의 잔치를 벌인다. 그토록 믿었던 위대한 지도자 나폴레옹 동지에게 복서는 밤낮없이 일하는 기특한 기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동물농장은 혁명 초기에는 모든 동물들이 함께 모여 의견을 내며 생활하는 이상적인 공동체였다. 물론 처음부터 돼지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긴 했지만, 그 것은 단지 돼지들이 다른 동물들보다 좀 더 똑똑하다는 이유일 뿐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다른 경쟁자들을 몰아내고 농장의 우두머리가 되자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이 나폴레옹이란 욕심 많은 권력자는 순진한 동물들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채워나간다. 혁명 초기 작성했던 계명들은 돼지들의 편의에 따라 임의로 조작되고, 더 이상 모두가 함께 모여 의견을 나누지도 않는다. 노동 시간은 길어졌고, 계몽운동은 찾아 볼 수 없다. 농장의 동물들은 나폴레옹을 호위하는 개들의 이빨에 눌리고, 돼지들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스퀼러의 말에 속아 그 모든 불합리와 불평등을 당연시하게 여기게 된다. 독재자 나폴레옹의 민중에 대한 연막 정치와 폭력을 통한 억압은 동물 사회의 사고력을 마비시킨다.  
  또한 돼지들은 다른 동물들이 외부와 접촉할 수 없도록 한다. 농장 내부에선 혁명이라 말하겠지만, 사실은 그 안의 동물들이 돼지 집단에 의해 고립된 것이다. 안으로도 밖으로도 고립된 동물들은 이제 돼지들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고 조종된다. 스퀼러가 전해준 복서의 최후가 사실인지 아닌지 그들은 확인할 길이 없다. 복서가 실려 간 마차에 도살업 관련 글씨가 써있는 걸 분명 보았는데도 말이다. 그들에게는 이제 부당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나폴레옹의 의견에 대립 각을 세운 이유로 쫓겨난 또 다른 돼지 스노우볼처럼 되지 않기 위해 동물들은 돼지들이 하라는 대로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된다. 그러한 생활이 지속되면서 동물농장에는 하나, 둘 씩 나폴레옹의 추종자들이 생겨난다. 전체주의가 확립되는 마지막 단계인 이 현상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은 그나마 남아있던 사고력과 판단력마저 버리게 된다. 좋은 이상을 가지고 시작 된 동물농장의 아름다운 혁명은 살벌하고 반복적이며 노동과 복종만을 강요하는 왜곡된 전체주의로 마무리되었다. 나폴레옹이 혁명의 동지였던 경쟁자를 숙청하고 동물농장을 자기 손바닥위에 올려놓는 과정보다 더욱 무섭고 황당한 것은 언젠가는 동물농장의 동물들이 억압받는 삶을 당연하게 여기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소설 ‘동물농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에게 있어왔으며,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작가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서의 경험을 통해 파시즘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 그 후 작가는 ‘동물농장’을 통해 혁명을 거쳐 중심 세력이 된 자가 민중에 대한 억압과 고립을 시도해나가는 모순 된 전체주의를 비판한다. 소설 ‘동물농장’을 읽을 때 돼지들을 권력자로 생각하고, 나머지 동물들을 힘없는 민중들로 생각하면 인간 사회에서의 전체주의 국가 형성 과정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동물농장’에서 조지 오웰은 내면에 축적해놓은 파시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복서의 죽음을 통해 터뜨린다.
  전체주의 국가에서의 한 개인은 우리 몸속의 한낱 세포와 다름없다. 하나의 유기체를 지탱하고 유지시켜주는 의미에서의 세포가 아닌, 목적도 없고 생각도 없이 그저 주어진 일만을 반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의미에서의 세포 말이다. 복서는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일을 한 세포였다. 그러나 복서가 아무리 많은 업적과 일을 남겨두었다고 해도, 전체주의란 사상 아래 개인의 희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복서의 죽음은 그저 하나의 개체가 소멸되고 또 다른 개체의 대체가 이루어지는 계속적인 반복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러한 하나의 인격체에 대한 무시와 무관심은 전체주의의 가장 기본적이고 결정적인 모순이다. 공익을 추구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개인의 인격은 무시되고 희생되어야 한다면, ‘도대체 누굴 위한 공익인가’란 질문밖에는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라는 사상이 결국에는 모순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결정적인 이유는, 복서와 같은 평범한 개체에 대해서는 그토록 무관심하고 비인격적이면서 나폴레옹과 같은 중심 세력 자들에 대해서는 온갖 찬사와 관심이 쏟아진다는 사실이다. 사익보다 공익을 추구한다는 전체주의의 기본 개념은 이상적이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독재와 개인권리에 대한 무시는, 본래의 이상적인 개념을 감안하더라도 용서될 수 없다. 복서가 그렇게 허무하게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복서는 도대체 누굴 위해 일한 것인가? 복서가 쓸쓸하고 비참하게 죽어도 될 만큼 공동의 이익만 추구될 것이라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더 이상 무의미하지 않은가? 복서의 희생이 공익에 보탬이 되었다면 나폴레옹의 뱃속에 들어간 위스키가 공익을 위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폴레옹의 존재 자체가 공익인가? 그 어떠한 대답도 나올 수 없는 질문들이다. 동물농장의 위대한 지도자 나폴레옹이 추구한 전체주의는 그 자체로 모순인 것이다. 그리고 그 모순 속에 발생한 복서의 희생은 안타깝게도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복서는 자기가 행하는 일이 모두에게 행복과 이익을 가져다 줄 거라고 생각하고 평생을 바쳤지만, 그는 그저 희생물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노동은 오직 한 동물, 나폴레옹만을 웃게 했다.
  인터넷이나 TV와 같은 대중매체의 발달과 보급이 최고점에 달한 현대 사회에서도 동물농장은 있을 수 있다. 인류는 갈수록 TV와 인터넷의 노예가 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의 정보들을 진실이라는 확신도 없이 받아들인다. 20세기의 전체주의는 경제적 측면에서의 고갈에서 전체주의가 비롯되었다. 21세기 이후에는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의 고갈에서 새로운 전체주의가 생겨날 수 있다. 서로 마음을 나누지 못하고 전자파를 쏟아내는 화면 앞에서 하루를 보내는 인류에게, 거대한 네트워크 속의 미디어 독재자가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을 조종하게 될 수도 있다. 그는 우리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형식의 공익을 제시할 것이고, 우린 그 공익을 위해 각자의 역할과 노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 것이 오직 한 사람 독재자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언제든지 또 다른 복서가 될 수 있으며, 어쩌면 새로운 동물농장이 이 세계 한쪽에서 운영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현 시대에도 ‘동물 농장’이란 소설이 큰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