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습니다, 켄 로치 감독님 [출전: 씨네21  2008.10.03 제729호]
사회주의자로서의 열정과 작가로서의 순수함을 다 보여준 영화 <자유로운 세계>
켄 로치 감독의 영화 <자유로운 세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였다. 한 아티스트의 음악을 통해 어쭙잖게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던 나의 작품 <필승 ver 2.0 연영석>을 공개하는 날, <자유로운 세계>를 봤다.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이었고 영화제 피크인 주말이 지난 평일 오후 시간대였지만, 극장은 붐볐다. <자유로운 세계>의 상영이 끝나면 저 멀리 해운대 어느 극장에서 상영될 작품 <필승 ver 2.0 연영석>을 만든 사람의 입장에선 이래저래 ‘배알이 꼴리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된 뒤, 동유럽 어느 국가의 길거리가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순간부터 그런 배알 따위는 잊혀지기 시작했다. 켄 로치는 예의 그 담담한 카메라로 지금 여기의 현실과 사람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자유로운 세계>는 자영업자가 된 해고 노동자를 통해 노동을 이야기한다.

아, 그래서 카메라가 자유롭지 못했구나

켄 로치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사회주의자, 것도 국제사회주의자다. 철저하게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서 역사를 이해하고 사회를 이야기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자신의 조국 영국은 아일랜드 민중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데 혈안이 된 나라로 묘사돼 있을 정도다. 그리고 그는 지구적 계급투쟁의 현실로 작품 세계를 확장해왔다. 대처 정부 시절에는 당장 필요한 투쟁에 함께하려 (내용은 전투적이지만 형식은 한 편의 시적 다큐멘터리인)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를 만들었다. 공기업 민영화, 이 끝없는 자본의 욕망으로 점철된 끔찍한 현실은 그의 영화 <하층민들>에서 잘 드러난다. 이번 <자유로운 세계> 또한 이주노동과 비정규 노동, 또한 소규모 자영업을 하는(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점점 더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노동자 계급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사회주의자로서, 그리고 이 사회를 살아가는 한 명의 정치적인 인간으로서 거리낌 없는 자연스러운 행보를 그의 필모그래피는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점점 강화되는 당파성까지.

그렇다면 다만 정치적 입장 때문에 켄 로치가 주목받았을까. 아니다. 그의 영화를 보면 이런 화면이 많이 나온다. 주로 대화 신인데, 앵글은 눈높이이며 화면은 평평하다. 렌즈는 대부분이 표준렌즈인 듯하고 그 흔한 스테디캠이나 달리숏(카메라가 피사체로부터 후퇴 또는 피사체 쪽으로 전진하면서 찍은 화면) 등은 그의 영화에서 찾기 힘들다. 이른바 ‘켄 로치 숏’이라 할 수 있는 화면인데, 이 펑퍼짐하고 세련되지 않은 앵글 속에서 바로 켄 로치 영화의 진가가 발휘된다. <빵과 장미>에서 작업반장이 나이 든 여성 노동자를 해고하는 신이 있었는데, 이 신에서 감독은 이런 화면을 유지한 채 이들의 대화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상황은 격렬해지고 노동자들과 작업반장 간의 긴장은 극에 달한다. 굳이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강조해서 보여주지 않더라도 이 상황이 주는 비극에 충실하며 이들이 겪는 현실을 성찰하게 만든다. 1950년대 말 영국의 프리시네마와 텔레비전 드라마 연출가로 데뷔한 경력이 영향을 미쳤겠지만, 이러한 화면은 한 명의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관철하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가 아닐까. 강조와 표현이 아니라 사실에 의한 공감이라는, 점점 강화되는 그의 자신감이 영화작가로서의 그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로서 열정에서 시작해 순수한 영화작가로서 완결된 그의 영화는 그래서 어딘가 빈 듯한 영화를 만드는 이곳의 작가들에게 말하는 바 크다 하겠다.

» 켄 로치 감독(사진 가운데)은 담백하지만 깊이 있는 연출로 노동계급의 모습을 그려왔다.

<자유로운 세계>를 보고 해운대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필승 ver 2.0 연영석>을 만들면서 해결되지 않았던 고민들. 바로 상영 전까지 나를 자괴하게 했던 문제. 오랜 기간 노동자들의 현실을 카메라에 담아왔지만 오히려 그들에 의해 나의 카메라는 자유롭지 못했던 상황들. 이런 것들이 <자유로운 세계>를 본 뒤 조금은 풀어졌다. 켄 로치의 사회주의자로서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의 결을 느꼈고 카메라 바깥에서 두꺼운 점퍼를 입고 영화 속 주인공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그를 상상하니까 말이다.


진짜 적은 2MB 따위가 아니라고

<자유로운 세계>는 상사의 성희롱을 참지 못해 저항하다 부당 해고를 당한 앤지(키얼스턴 워레잉)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앤지는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인력알선 사업을 시작하지만, 미등록(불법) 이주노동자를 쓰는 편이 수익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싱글맘인 앤지는 부모에게 맡겨둔 아들과 함께 살고 싶은 욕심에 미등록 이주노동자 알선사업에 점점 깊이 관여하게 되는 이야기다. 이렇게 앤지는 처음부터 노동자였고 잠시 고용주의 위치에 서게 되지만, 영화 끝까지 앤지를 바라보는 켄 로치의 시선은 노동자 계급인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었다. 남자를 그리워하는 앤지에겐 유머스런 연민이 보였고, 도와줬던 이주노동자들을 고발하며 자신의 사업을 지키는 그녀에겐 준엄한 현실의 비극이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애정 속에 녹아든 당파성이었다. 허황된 계급적 이미지만이 존재했던 나의 카메라와 계급과 인간이 담겨 있던 그의 카메라의 차이를 확인한 순간, 슬픈 것이 아니라 고맙고 신났다. 그의 영화는 이렇게 항상 고맙다.

켄 로치의 영화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처럼 소리 소문 없이 우리 곁을 왔다 간다. 이번에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하지만 <자유로운 세계>는 정독도서관 앞에 있는 극장 ‘아트선재 아트홀’까지 긴 걸음을 하기에 전혀 아깝지 않은 영화다. 이 천박한 자본주의에 지친 영혼들에게 우리의 진짜 적은 2MB 따위가 아님을 알려주고, 연대할 대상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까지 주는 영화이니 두말할 필요 없겠다. <자유로운 세계>를 통해 ‘평등한 세계’를 꿈꾸는 이들에게 다음 세상의 꿈을 품게 해주는 <자유로운 세계>를 깊은 호흡 가다듬고 있을 그대에게 추천한다. 9월25일 개봉했다.

태준식 영화감독·<필승 ver 2.0 연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