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흥부’와 ‘놀부’에 대한 가치판단은 시대에 따라 변해 왔다. 창작 당시에는 물론 ‘놀부’는 악(惡)의 상징이며, ‘흥부’는 선(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삶의 방식이 급격하게 변하면서 이들 두 인물에 대한 평가도 엇갈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배금주의가 팽배하면서 흥부적 인간상에 대한 비판이 등장하고 놀부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진행되어 드디어는 놀부 추종 세력이 득세하게 되었다. ‘놀부 보쌈’, ‘놀부 부대찌개’는 있어도 흥부집은 없는 현실이 이것을 말해 준다.

여러분들도 이미 흥부전의 내용을 대략 알고 있을 것이다. 글을 읽기 전에 미리 흥부, 놀부에 대한 느낌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1. 흥부전의 개략적인 줄거리를 말해 보자.

2. 흥부와 놀부 중 누구에게 더 호감을 느껴왔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흥부와 놀부에 대한 해석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해 왔는지 다음 글을 읽고 정리해 보자.

 

[글 1] 흥부와 놀부에 대한 해석, 시대따라 엇갈려

흥부전은 친근하다. 학교에서 배우기 전에 이미 그림책, 인형극, 만화 등에서 우린 자연스럽게 흥부전을 접한다. 권선징악과 형제우애가 주제인 흥부전은 우리 정서에 그대로 녹아 있어 다양한 아류 형제작들을 무수히 낳았다. 최근 <형제의 강>에 이르기까지.

 

최남선이 흥부전 연구의 시초

흥부와 놀부는 조선 말엽 서민사회의 신분적 특징과 유형을 반영하는 전형적 인물이다. 대조적인 이들에 대한 인물평가는 현대에 와서 학계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분분했다. 흥부전 연구의 시초는 최남선(<몽고의 흥부, 놀부>, 1922)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몽고의 <박 타는 처녀> 설화와 흥부전의 일치성을 설명하며 흥부전 연구의 장을 열었다.

최남선의 뜻을 이어 흥부전을 학문적으로 분석, 체계화시킨 이는 김태준이었다. 그는 <조선소설사>(1939)를 통해 흥부를 착한 사람으로, 놀부를 악한으로 간주하는 전통적 체계를 확립시켰다. 이는 김기동(<이조시대 소설론>, 1959), 신기형(<한국소설발달사>, 1960) 등으로 이어지면서 학계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전통적 평가를 거부한 최초의 인물은 주왕산이었다. 그는 <조선고대 소설사>(1950)에서 흥부를 ‘가난하면 제 힘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생활 방도를 생각할 것이지, 형제간의 의리만을 찾아 형만을 의존하려는 생활의식은 다 저 유교교리에 중독되어 생산방면에서 유리된 까닭’, ‘흥부는 형도 의존할 수 없게 되면 요행을 바라 힘 안 들이고 박씨 같은 것을 얻어 졸지에 부귀를 누리고 싶어하는 인물’이라고 혹평했다. 이런 평가는 당시로선 상당한 파격이었다.

흥부 비판은 10여년 뒤인 1966년 최인훈의 소설 <놀부뎐>에서 더욱 신랄하게 드러난다. 고대소설을 패러디한 그의 사본고전(私本古典) 시리즈 중 하나인 <놀부뎐>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흥부는 놀부와 똑같이 유산을 분배받는다. 놀부는 모진 고생 끝에 5년 만에 큰 부자가 된다. 그러나 흥부는 잡놈에게 속아 벼락부자를 꿈꾸다 알거지가 되고 만다. 여기에 자식들은 게으르기 짝이 없어 비참한 생활을 한다. 그러던 어느날 놀부는 흥부가 돈을 물쓰듯 한다는 풍설을 듣고 흥부집에 가서 자초지종을 캐묻는다. 이에 흥부는 ‘제비 다리가 어쩌구저쩌구…’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놀부가 ‘허무맹랑한 소리말라.’고 윽박지르자 흥부는 사실대로 고백한다. 즉 산에서 온갖 보화가 들어 있는 큰 철궤를 발견해 가져왔다는 것이다. 놀부는 ‘화가 있을 것이니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한다. 둘은 철궤를 지고 산으로 가다가 관원에게 잡힌다. 그 궤는 봉고파직한 전라감사가 숨겨뒀던 것으로 복권이 되어 찾았으나 그곳에 없자 나졸을 매복해 뒀다가 이들을 잡은 것이다. 결국 이들은 옥에서 온갖 수모를 겪다가 죽고 만다.

황당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한 이 소설을 통해 최인훈은 놀부, 흥부의 인간상이 아닌 변모된 사회상을 이야기하려 했다. 6.25, 4.19, 5.16 등 한국현대사에 굴곡을 이루는 일련의 사건과 외래문화 유입 등으로 과거 윤리관은 무의미하게 됐다. 거기에 60년대 근대화 작업은 ‘돈이 최고’라는 천민자본주의의 확산을 불러일으키며 우리 사회를 근간부터 흔들었다. 공업화와 도시화는 시민의 성공욕구를, 성공욕은 과열된 경쟁을, 과열된 경쟁은 효과적이고 능률적이면 된다는 편법주의를 낳았다. 이로 인해 사회질서가 파괴되고 온갖 부조리가 생겨났다. 최인훈은 <놀부뎐>을 통해 역설적으로 이를 고발한 것이다.

 

교과서 <흥부전> 삭제 요구도

이같은 사회상을 반영하듯 60년대 말 이후 흥부가 비판되고 놀부가 재평가되는 일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논의의 시초로 흥부전에 대해 가장 광범위하게 인용되고 있는 논문이 조동일의 <흥부전의 양면성>(1969)이다. 그는 흥부전의 내용을 고정체계면과 비고정체계면으로 나눠 착한 흥부와 나쁜 놀부라는 고정체계면이 아닌, 이런 양태가 엇갈리게 나타나는 비고정체계면에 오히려 이면적 주제가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비고정체계면을 통해 살펴본 흥부는 소비하는 만큼 일하지 못했기 때문에 놀부에게 쫓겨났으며, 살아갈 대책이 없을 뿐 아니라 살아갈 자신조차 없다. 그의 논문은 가치중립적인 논지를 유지하려 애썼음에도 심리적으로 놀부의 손을 들어주는 면이 강했다.

조동일 이후 흥부비판 분위기는 학계에서 지배적이었고 사회적인 평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한 교육학 교수는 교과서에 실린 ‘흥부전’을 삭제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사회 각계에서 ‘놀부 새롭게 평가하기, 흥부 깎아내리기’가 일반적이었다. 지금도 ‘놀부 보쌈’, ‘놀부 부대찌개’ 집은 있어도 흥부집은 찾아볼 수 없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배금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우리 사회에선 놀부 추종세력만이 그득하게 된 셈이다.

이런 분위기에 반론을 제기한 이가 임형택이다(<흥부전의 역사적 현실성>, 1969). 그는 놀부를 경제적 이익 때문에 가부장적 윤리까지 거부했으며 사회윤리마저도 파괴한 인물로서 결국 그 끝없는 이익추구로 자멸했다고 주장했다. 즉 박을 켜면서 엄청난 손실을 입지만 결코 중단하지 않는 점은 노름꾼 심리, 요행심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흥부는 재물을 갖고 형제간에 다툴 수 없어서 순순히 물러서는 성인이었으며 생활을 위해 양심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는 것이다. 또 애초에 박 속을 지져 먹고 바가지는 팔아서 쌀을 얻으려고 했을 뿐 놀부 같은 사행심은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흥부의 승리는 양심과 성실이 승리한 것이며 놀부의 패배는 반사회, 반도덕적 이기주의의 패배로 이는 사회모순에 대한 서민층의 준열한 재판이었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당시 대세를 거스르지는 못했다. 흥부비판의 최선두에 섰던 김광순은 <흥부전의 주인공에 대한 인성분석>(1973)에서 같은 이야기로 임형택과 정반대의 논지를 펴며 조목조목 흥부를 꾸짖고 놀부를 칭찬했다. 놀부의 냉대는 흥부에게 자립정신을 불러일으켰으며 놀부가 흥부로부터 화초장 하나를 빼앗아갈 때도 흥부의 하인을 뿌리치고 자신이 지고 가는데 이를 자립심의 발로로 봤다. 또 제비를 해친 것은 잘못이나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 그 욕망만은 간과할 수 없으며 거듭되는 불행에도 13개의 박을 모두 타는 끈질긴 의지는 당시 무기력했던 조선인에게 모범적이었다는 것이다. 반면 흥부는 소극적이며 나태하고 무기력한 인물의 표상으로 평가했다. 노력하지 않은 데서 온 가난을 산소에 돌리려 했으며, 주관도 없이 주면 먹고 시키는 일이나 하는 인간으로 분석했다. 또 흥부는 끼니도 못 잇는 처지에 남은 노잣돈으로 모두 떡을 살 만큼 무계획했으며 수숫대나 뺑대 반짐을 가지고 한나절만에 집을 지은 점을 들어 나태한 인물일 뿐 아니라 부상당한 제비의 다리를 치료해줄 만큼 한가한 시간을 보냈기에 가난을 면치 못했다는 점도 덧붙였다.

 

봉건사회 흥부, 산업사회 놀부……

이처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흥부전의 전통적 인물평가를 뒤집는 것이 80년대까지의 일반적 분위기였다. 본문 마지막에서 패퇴한 놀부는 에필로그에서 컴백에 완전 성공했고 흥부는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맹목적인 부의 추구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모순이 불거지자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왔던 사람들이 다시 한번 주위를 돌아보게 보면서 이런 분위기는 다시 반전되기 시작했다. 이번엔 흥부에 대한 재평가였다. 비록 놀부 재평가 때만큼 폭발력을 지녔거나 급진적이진 않지만 이런 움직임은 학계는 물론 사회적으로 서서히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흥부와 놀부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이처럼 시대관을 그대로 반영한 측면이 강하다. 우린 산업화 과정의 과열된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해 이기는 방법만을 생각했고, 그 결과 ‘나’ 하나만이 존재할 뿐 타인은 안 중에도 없었다. 놀부에겐 친구도 없다. 결국 고립된 상태에서 스스로 소외되어 버렸다. 놀부가 산업화 사회의 한 전형으로 긍정될 수 있던 것은 부정적이던 전대의 가치관이 긍정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봉건사회에서의 흥부, 산업화 사회에서의 놀부, 그리고 산업화 이후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지금 우린 다시 흥부를 그리워하고 있다.(한겨레21, 1997. 3. 13)

 

◐ 생 각 거 리 ◑

1. 흥부전에 대한 해석이 어떠한 변화 과정을 겪어 왔는지 간략하게 정리를 해 보자.

2. 흥부전 해석의 밑바탕에 깔린 사회적 배경은 각각 무엇인지 정리해 보자.

3. 지금까지 시대 의식의 변화와 함께 변모한 흥부, 놀부에 대한 가치 평가를 살펴 보았다. 그렇다면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현재, 흥부와 놀부에 대한 평가를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하여 흥부와 놀부를 평가하는 글을 써 보자.

 

글을 다 썼으면 이제 다음의 글을 읽어 보자. 그리고 자신이 쓴 글과 비교를 해 보고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 보자.

 

 

 

[글 2] 흥부의 재해석

16․17세기의 세계는 돈키호테적 인간상에 의해 주도됐다. 전통적인 공동체의 울타리를 뛰쳐나와, 아직은 비합리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지만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불굴의 도전을 거듭하는 돈키호테적 인간상이 근대 초기 유럽의 비유럽세계 진출의 주인공들이었다. 17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기까지의 세계는 로빈슨 크루소적인 인간상에 의해 주도된다. 그는 돈키호테처럼 하인을 거느릴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사회분화가 진전된 세계의 독립적인 개인이었고, 또다른 독립적인 개인을 만나 계약을 통하여 합리적인 시민사회를 열어나갔다. 19세기 후기 이래 20세기의 세계는 카우보이적인 인간상에 의해 주도됐다. 카우보이는 돈키호테처럼 외부세계에 대해 도전적이었지만 로빈슨 크루소처럼 개인주의적이었고, 나아가 합리적이고 기계적이었다. 카우보이적 인간상은 미국의 서부를 개척하고 다시 태평양을 넘어 아시아로 다시 우주로, 끝없이 외부세계로 도전해 나갔다.

 

왜 다시 흥부인가

20세기 후반 세계사의 가장 큰 사건은 옛 소련의 몰락이라기보다 오히려 일본의 등장인지 모른다. 특히 1980년대초 일본은 한때 세계 금융자본의 약 40%, 세계특허의 약 40%를 점유하면서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영국 이래 역사상 최대의 채권대국이 되었는데 그것은 사무라이적 인간상에 의해 주도됐다. 사무라이는 공동체를 깨고 나온 독립적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강화하는 대변자다. 따라서 사무라이 자본주의는 안으로 일본 시민 사회의 미성숙과 밖으로 세계경제의 불균등성을 매개하고 있고, 최근 일본 시민사회의 성장과 세계경제의 균형회복으로 심각한 후퇴를 맛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21세기는 어떠한 인간상에 의하여 주도될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나는 흥부적 인간상이라고 하고 싶다. 흥부적 인간상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1960년대 후반 근대주의가 한창 휩쓸고 있을 무렵 흥부비판에 열을 올린 적이 있다. 흥부는 자기 재산도 지키지 못한 ‘권리 위에 잠자는 자’요,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수많은 자식을 낳아 고생만 시킨 무책임한 가장이며, 그러면서도 끝내 스스로의 문제해결의 길을 찾지 못한 무능력자이며, 우연히 제비의 도움으로 신비하게 부자가 된 허무맹랑한 자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흥부전>을 교과서에서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흥부비판은 당시의 근대주의적 사조 속에서 상당한 호응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문학쪽과 교육학쪽에서 흥부 비판 논문이 나온 것은 그 뒤의 일이다. 당시 천민자본주의적 풍토 속에서 흥부대신 놀부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하는 해석법이 제법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러나 근대주의에 대한 회의가 일면서 흥부에 대한 원초적인 애정이 서서히 되살아났다. 그러다가 개인적으로 작은 사건이 하나 생겼다. 언젠가 강의실에 늦게 도착해 숨을 헐떡이며 강의를 시작하다가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최영 장군의 말을 인용한다는 것이 그만 ‘돌보기를 황금같이 하라.’고 해버렸다. 학생들의 폭소소리를 듣고서야 실수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실수로 잘못한 말의 의미에 스스로 멈칫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이 무소유 정신을 가르친 것이라면, 역으로 ‘돌보기를 황금같이 하라’는 말은 흔해빠진 돌조차도 무심히 보아 넘기지 말고 무한한 가능성을 살려보자는 혁신(Innovation)의 정신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흥부전>에서 흥부가 박을 타니 별의별 것이 다 나오는데, 쌀도 나오고, 비단도 나오고, 한약재도 나오고, 금도 나오고, 심지어 이본(異本) 중에는 금방 천리를 달리는 축지미투리도 나온다. 이것을 다양한 혁신의 가능성을 다룬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돌보기를 황금같이 하라.’는 것보다 ‘박보기를 황금같이 하라.’는 것이 훨씬 한국적이고 서민적이고 또 상징적이다. 물론 <흥부전>은 선행을 하면 보은이 이루어진다는 도덕적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모래에서 반도체가 나오고, 은행잎에서 기넥신이 나오고, 게나 새우껍질에서 의학용 신소재 키토신이 나오는 판국인데 박에서 비단이 나오고 금이 나온다는 상징이 기술혁신의 문제를 문학적 차원에서 다룬 소설이라고 상상해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박의 기적,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사실 <흥부전>에는 박에서 쌀이나 비단 또는 금이 나오는 결과만 나오지 그 과정에 대한 설명이 없다. 과정의 이노베이션을 상정하는 부분이 비어 있고 그 빈부분이 신비적으로 채워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흥부전>의 여러 이본 중에는 이노베이션을 엿보게 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춘향전>이 지배층에 대한 신분적․계급적 저항을 형상화한 데 비하여 <흥부전>은 농민층 분해과정에서 놀부라는 지주적 부농의 형성으로 토지소유에서 배제된 흥부와 같은 서민들이, 비지주적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과정을 희망적으로 드라마틱하게 형상화한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을 옳게 먹고’, 놀부와 같은 지주에의 의존도 포기하고, 온갖 품팔이 노동으로 살길을 찾아보기도 하다가 결국은 제비를 등장시킨 전혀 엉뚱한 과정으로 새로운 부를 이루게 된다. 제비의 등장에서 박의 기적이 일어나는 과정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상공업적 부농, 경영적 부농의 행태를 엿볼 수 있고, 그것도 국제적 시야 내지 국제적 범위를 갖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우선 제비가 등장하기 전에 흥부 내외는 ‘역곡주인(易穀主人) 역인지기’, ‘각읍주인(各邑主人) 삯질가기’, ‘말질싣기’ 등의 상업적 부분에서 학습과정을 거쳤다. 그뒤 다리 부러진 제비새끼를 치료하는 데 당장 등장하는 것이 ‘오색당사’(五色唐絲)실이다. 치료를 받은 제비는 바다 건너 강남으로 날아가고, 강남에서 받은 박씨를 물고 중국천지를 돌고 황해를 건너 다시 조선천지를 돌아 온갖 물산의 정보를 갖고 남원땅 흥부집으로 돌아 온다. 그리고 나중에 박을 타보니 박에서 나온 물품이, 경판본(京版本)의 경우에는, 진귀한 한약재, 비단, 한산모시, 그릇 등의 수공업제품, 일본, 중국으로부터의 각종 유기제품 등이다. 또 ‘울안에 벌통 놓고’, ‘울밖에 원두 놓고’ 등 온갖 비지대(地代)적 경영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으며, 박에서 나온 물품은 금방 화폐가치로 계산되고 상품으로 상정된다. 이것은 모두 흥부의 부가 지주적 부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형태의 부, 즉 경영적 부이며, 국제무역적 연계를 가진 부인 것을 알 수 있다. 새로운 부 창출의 가능성이 박에서 기적이 나오는 것으로 재미있게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 흥부는 타력의존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철저하게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놀부적인 지주자본에의 의존도 철저하게 포기하고, 온몸을 던져 노동하고, 노동 자체로 먹고 살 수 없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착한 마음과 밝은 희망을 갖고 상공업과 공예작물경영 등의 새로운 방법으로 비지주적 부를 창출해낸다. 박에서 기적이 일어났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처음부터 박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쓰레기보기를 황금같이 하라’

그럼에도 박의 기적으로 표현된 혁신의 과정 논리가 아직도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한계는 오히려 기회로 역이용될 수 있다. <흥부전>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또 판소리 부르는 소리꾼에 따라 조금씩 내용이 달라져 많은 이본이 있음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문제의식을 가미한 이본이 하나 추가된들 이상할 것 없을 성싶다. 흥부는 모든 한국인의 가슴에 살아 있는 영원한 인간상이지만, 그 흥부상을 재해석하고 이본을 추가하는 형태로 끝없이 재생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당시의 놀부적인 지주형 부농과 그것을 뛰어넘는 흥부적인 비지주형 부농의 비전을 오늘날 한국경제의 지대추구형 부, 또는 남의 소득을 이전받아 이룩되는 제로섬 게임적 부의 축적형태를 뛰어넘는 기술혁신형 부 또는 포지티브섬 게임의 비전으로 연결시켜, 그러한 비전으로 본 <흥부전>의 재해석과 그 재해석을 더욱 선명하게 반영한 이본의 구성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흥부상의 재발견과 재구성으로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사적 과제, 즉 지대추구형 부를 혁신추구형 부로, 차용형 경제를 창조형 경제로, 요소투입형 성장을 부가가치증가형 성장으로 전환하는 일을 성취해 보자는 것이다. 한국경제의 선진화는 악명높은 놀부형 인간상이 아니라 흥부형 인간상에 의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돈키호테적 인간상-로빈슨 크루소적 인간상-카우보이적 인간상-사무라이적 인간상에 이어 흥부적인 인간상을 제시했다. 이 문제는 세계문화사적 시야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지만, 우리가 흥부를 새로운 인간 유형의 대안으로 주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돌보기를 황금같이 하는 창조적 혁신의 인간유형이라는 점이다.

모든 것을 다 뺏기고 최저변으로 떨어진 흥부가 인간적 선의를 지키면서 자기의존적 노력을 계속하다가 당시의 서민사회에서 가장 친근한 박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창출해내는 과정은 어떠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떠한 평범한 소재로부터도 엄청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희망의 모델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오늘날 정보․기술혁명 아래 세계는 작은 아이디어에서 엄청난 기회를 잡는 벤처 비즈니스의 세계다. 그리고 정보화 시대의 벤처 비즈니스의 세계는 신뢰와 협조를 전제로 한 경쟁세계라는 점에서 흥부적 세계이기도 하다. 더구나 박보기를 황금같이 하는 창조적 혁신정신은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쓰레기보기를 황금같이 하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다. 그것은 산업화의 부산물인 폐기물을 새로운 발전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발전’(ESSD)의 원천으로 연결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무소유와 환경인의 표상이기도

둘째로, 흥부는 ‘돌보기를 황금같이 하는’ 혁신적 인간상이면서 다시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는’ 무소유형 인간상이다. 흥부는 부모로부터 상속적 부를 함께 물려 받았으나 유산상속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흥부전>의 표현처럼 ‘춘하추동 사시절에 남의 일만 모두 다 하는 고로 제 벌이를 할 수 없네.’ 또는 ‘마음 인후하여 청산유수와 곤륜옥결이라…, 물욕에 탐이 없고 주색에 무심하니, 마음이 이러하매 부귀를 바랄소냐.’였다. 부자가 된 뒤에 제일 먼저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아, 흥부집으로 들어오는 나도 오늘부터 기민(饑民)을 헐란다.’고 선언하고 아울러 놀부를 초청하여 재산을 나누어 가질 뿐 아니라 자신이 부를 축적한 ‘노하우’도 모두 가르쳐준다. 그는 가난의 밑바닥에서도 밝은 인간성을 잃지 않았지만 부의 정점에서도 따뜻한 인간성에 때묻히지 않았다. 무소유는 가난해서 가질래야 가질 것도 없는 것을 포함하지만, 부자가 되어도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것도 포함한다. 이것은 청부(淸富)의 정신이기도 하다. 21세기 세계자본주의는 이러한 흥부적 인간상에 의해 주도돼야 구제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흥부는 일종의 환경인의 상이기도 하다. 오늘날 환경사상의 궁극적인 도달점의 하나는 동물과 식물의 생존권을 인정하는 광역인권개념이다. ‘짐승 살해를 아니하니 미륵의 벗이로다.’라는 흥부는 제비를 먹으려는 구렁이를 보고 ‘무정타 저 대맹아, 너 먹을 것 많었구나. 어이타 내 집에 와서 제비새끼를 먹느냐.’고 꾸짖되 죽이지는 않는다. 다리 부러진 제비새끼를 돌봐주는 정성하며 박씨 심어 박을 키우는 정성 또한 가족사랑의 경지다. 그는 제비며 박과 인격적 교류를 하는 환경인의 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기술적 효율을 추구하되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하는 자연의 한 구성원으로 구실하고 있는 것이다. 신<흥부전>은 이러한 환경인적 모델을 더욱 완벽하게 보여주는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흥부상은 정보인 모델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지역사회의 이곳저곳의 밑바닥을 떠돌며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인지라 지역사회 정보에 가장 밝은 입장이었지만, 다시 제비를 통하여 동남아와 중국대륙 그리고 황해 연안과 조선천지의 정보를 시야에 넣고 있다. 박씨는 국내는 물론 동아시아의 정보를 다 파악한 반도체인 셈이다. 따라서 박에서 나온 물품은 한국의 각종 물품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제품도 포함되고 있으며 그 제품 가격은 금방 시장가격으로 환산될 정도이다.

마지막 다섯째로 흥부는 각종 이질적인 요소와 대립적인 관계를 껴안고 화해시키는 화해형 인간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사는’ 흥부적인 정신 필요

흥부는 제비도 끌어안고 뱀도 끌어안고 박도 끌어안고 모든 이질적인 요소를 끌어안고 결합시키면서 혁신을 연출했지만, 다시 가난한 사람도 포용하고 자신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간 놀부형 인간도 포용하고 그리고 모든 것을 나누어준다. 그는 남의 부를 이전받아 자신의 부를 늘리는 제로섬 게임의 승자가 아니라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포지티브섬 게임의 승자이며, 그러한 포지티브섬의 결과를 공동체의 구성원과 함께 나누어 가지면서 화해의 공동체를 이룩해 나간다.

한국은 동북아의 틀 속에서 경합하고 있는 4강을 끌어안고 화해시키면서 동북아의 평화와 협력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흥부적 화해상은 매우 시사적이다. 아울러 국내의 노사간․지역간의 모순을, 그리고 북한 동포의 굶주림을 흥부적 정신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한국이 넘어야 할 아리랑 고개는 아직도 많고 그것을 넘기 위해서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는 ‘함께 사는 정신’이 중요하고 그런 점에서 선진화도, 통일도, 동북아 4강의 평화협력의 증진도 흥부적인 함께 사는 정신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한국인이 창출한 가장 평범하고 가장 비범한 흥부상의 현대적 재현이야말로 바로 위기에 빠진 한국의 사회경제적․국제적 한계를 극복하는 길이며, 21세기 세계사의 문명적 전환의 대안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남원의 흥부축제를 국민축제로, 나아가 세계인의 축제로 승화시키면서 신흥부가 판소리와 함께 우리 모두 스스로 흥부적 인간상을 닮아가보자.(김영호, 경북대교수․경제학)

 

 

◐ 생 각 거 리 ◑

1. 글쓴이가 제시한 흥부상과 자신이 쓴 글에 들어있는 내용을 비교해 보자. 어떤 점이 차이가 있는가?

2. 20세기 후반까지 세계를 지배해 왔던 인간상이 어떠했는지 알기 쉽게 정리해 보자.

3. 글쓴이는 자신이 실수로 말한 ‘돌보기를 황금같이 하라.’는 말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재해석이 이 글 전체의 내용과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는가?

4. 흥부의 부(富)가 이전까지 사회를 지탱해 왔던 놀부적 부(富)와 어떻게 다르다고 했는가?

5. 글쓴이는 흥부상의 재발견과 재구성으로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사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보자.

6. 글쓴이가 흥부를 새로운 인간 유형의 대안으로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흥부적 인간상’과 ‘놀부적 인간상’을 통해 흥부전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제 다음에 제시된 글을 읽고 물음들에 대한 답을 찾아 보자.

 

 

[글 3] 중세사회 해체기의 빈부모순과 『흥부전』

판소리는 민간에서 구비 전승되던 설화를 발전시킨,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민중 연행 예술(演行藝術)이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민중들의 역동적인 삶과 그들이 꿈꾸던 세계가 담겨 있다. 조선 후기에 불리던 판소리 열 두 마당 가운데, 이런 특성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작품은 『흥부전』일 것이다. 그 곳의 밑바닥에는 어릴 때 즐겨 듣던 「혹부리 영감」이나 「단방귀 장사」와 같은 동화의 세계가 흐르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가난하면서도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무한한 복이 주어지지만, 부유하면서도 탐욕에 가득 찬 사람은 자신의 욕심 때문에 결국 파멸하고 만다는 삶의 이치를 깨우쳐 주고 있다. 땀흘리며 살아가는 민중들이 꿈꾸던 이 같은 정직한 세상, 『흥부전』은 이런 세상을 어떻게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었던가?

 

흥부와 놀부, 과연 형제이기‘만’ 한가?

『흥부전』은 이같이 소망스런 세계로 가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사실적으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환상적인 꿈으로만 일관하던 여타 민담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그 곳에는 조선 후기 가난한 농민이 극심한 궁핍에 시달리며 겪던 애환과 그로부터 비롯된 현실사회의 모순에 대한 의문이 심각하게 자리잡고 있다. 흥부처럼 가난한 사람은 양심을 지키며 피나는 노력을 했음에도 굶주려야 했던 반면, 놀부처럼 부유한 사람은 온갖 악질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는 현실, 말하자면 부익부 빈익빈이 빚어 낸 조선 후기 사회의 모순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모순된 현실과 그것이 초래한 갈등의 이면에는 조선 후기의 급속한 사회경제적 변동이 깔려 있다. 조선 후기는 놀라운 생산력의 발전과 새로운 상품화폐 경제질서의 확산에 따라 넉넉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부류가 농민들 가운데서 나타나게 된다. 놀부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와 대조적으로 논밭을 잃고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지어야만 했던 소작인이나 품을 팔아 그날 그날 입에 풀칠하던 임노동자들이 있다. 심지어 유리걸식하며 떠돌아다니다 죽어 갔던 유랑민도 적지 않다. 흥부의 궁핍한 삶에서 이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두 부류는 더 이상 동등한 처지에 있지 못했다. 그들은 경제적 이해 관계를 둘러싸고 뺏고 빼앗기는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같은 사회적 추이에 편승하여 재물의 축적은 점차 당대인들이 지향하던 최종목표가 되어 갔는가 하면, 그들의 행위를 좌우하는 지표가 되기도 했다. 놀부가 보여 주던 ‘석숭(石崇, 중국 진나라 때의 부자)과 같은 부자가 되어 황제를 부러워할 개자식이 어디 있겠느냐.’는 장담과 ‘걸인 보면 자루 찢기’, ‘빚값에 계집 뺏기’와 같은 악행 모두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경제적인 힘에 의한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들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궁반(窮班) 보면 관 찢기’, ‘늙은 영감 덜미 잡기’, ‘부형(父兄) 연갑(年甲)에 벗질하기’와 같은 심술도 서슴지 않고 있는 바, 이는 그가 신분적 질서는 물론 장유유서와 같은 중세 봉건 사회의 규범에 구애받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하겠다. 재물이 그에게 무소불위의 자신감과 실질적인 힘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흥부전』은 ‘형제 선악담’이라는 민담에 기원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애라는 윤리적인 문제를 넘어서 있는 작품이다. 놀부가 흥부를 쫒아냈던 까닭은 형제 간의 우애가 없어서가 아니라,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독차지한 뒤 흥부 가족을 내쫓으면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동생까지도 재산 증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여지없이 내치고 있는 바, 경제적 이익추구가 형제 간의 관계까지도 파괴해 가던 시대적 추이의 정점을 『흥부전』은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흥부전』을 형제간의 우애라는 잣대로서만이 아닌, 재물에 대한 추구욕이 극대화되어 가던 조선 후기 농촌 사회의 빈부모순과 그에 따라 심화되던 계층간의 갈등이라는 사회경제사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왜곡된 게으름뱅이인 흥부의 제얼굴 찾기

우리는 흥부와 놀부가 비록 형제 간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이들이 벌이고 있는 갈등의 의미를 단지 형제 간의 불목(不睦)으로 축소시켜서는 안된다는 점을 살폈다. 그들은 욕심쟁이 형과 마음씨 착한 동생이라는 구체적인 개인인 동시에 빈부 격차로 나누어진 조선 후기 농민층의 두 부류를 대표하는 전형적 인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흥부의 형상에는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던 가난한 농민의 삶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놀부에게 쫒겨난 뒤 겪게 된, 흥부의 궁핍을 잠시 들여다보자.

집안에 먹을 것이 있든지 없든지, 소반이 네 발로 하늘게 축수하고, 솥이 목을 매어 달리고, 조리가 턱걸이를 하고, 밥을 지어 먹으려면 책력(冊曆)을 보아 갑자일(甲子日)이면 한 끼씩 먹고, 새앙쥐가 쌀알을 얻으려고 밤낮 보름을 다니다가 다리에 가래톳이 서서 파종하고 앓는 소리에 동네 사람이 잠을 못 자니, 어찌 아니 서러울손가.

제때 제때 끼니를 끓여 먹지 못해 적막하기 그지없는 부엌 풍경도 ‘생쥐 가래톳 삽화’를 빌려 쌀 한 톨 없는 궁핍상을 사실적이면서도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슬픔을 웃음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조선 후기 민중들의 뛰어난 미의식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하겠는데, 이런 수법은 판소리 문학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같은 웃음 뒤에 자리잡고 있는 흥부의 피눈물 나는 가난을 소홀히 넘겨서는 안된다.

이같은 흥부는 한때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형의 도움에만 의지하려 하거나 탄식으로 세월을 허송하는 의타적이고 게으른 인물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처자식 먹여 살릴 방도 하나 세우지 못한 처지에, 착한 심성만으로 험난한 세상사를 헤쳐 나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흥부의 모습이 무기력하게 보일 법도 하다. 놀부의 눈에도 그렇게 비쳤거니와, 경제개발이 지상 최고의 목표라며 목청을 돋구던 1960년대의 ‘경제적 동물들’에게 있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부지런히 많은 재물을 모았다는 이유 하나로 놀부를 추켜세우던 기이한 가치관이 판치던 때의 일이다.

그렇지만 흥부에 대한 평가가 전도된 가치관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는 점은 그만두고서라도, 이는 작품을 꼼꼼하게 읽고서 내린 결론도 아니다. 실제로 작품에서 흥부는 무기력하고 게으른 존재에 머물고 있지 않다. 놀부에게 쫓겨난 뒤, 자신이 직면한 궁핍한 현실 속에서 차츰 새로운 인물로 변화되어 갔던 것이다. 그 계기는 형 놀부를 찾아갔다 매만 맞고 돌아오면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부터다. 굶주린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초상난 집의 의복짓기’나 ‘정이월에 가래질하기’부터 ‘언 손 불고 오줌치기’나 ‘ 두 푼 받고 똥재치기’에 이르기까지, 흥부 부부는 돈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해 댔다. 그러나 눈물겨운 분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끼니조차 제대로 이어갈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자기 몸을 팔아서라도 가족을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목숨을 거는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작품에서는 그 같은 흥부의 비장한 각오를 매품팔이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감영에 매품 팔러 갔다가는 맷값은커녕 목숨 먼저 끊어질 것이라며 만류하는 부인의 등을 두드리며 했던, 흥부의 눈물 섞인 말을 들어 보자.

여보 마누라, 볼기 내력 들어 보오. 이 놈이 장원급제하여 초헌 위에 앉아 보며, 팔도감사하였으니 선화당(宣化堂)에 앉아 보며, ……이골 좌수(座首)가 되었으니 향청(鄕廳) 마루에 앉아 볼까? 쓸데없는 이 볼기짝, 감영에 올라가 볼기 삼십 대만 맞으면 돈 삼십 냥이 생길 터이나. 열 냥은 고기 사서 매맞은 소복(蘇復)하고, 열 냥은 쌀을 팔아 집안 식구 포식하고, 남은 열 냥 가지고는 소를 사세.

흥부가 부르는 ‘볼기짝 타령’의 한 구절이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비극을 해학으로 처리하는 민중의 넉넉한 낙관주의를 여기서도 읽어 낼 수 있지만, 말하고 있는 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눈물겹다. 자기 한 사람의 희생으로 온 가족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그리고 농사지을 밑천인 소를 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고통도 감수하겠다는 흥부의 비장한 각오. 하지만 그는 매품조차 팔지 못했다. 흥부보다 더 가난한, 옆집 사는 꾀쇠 아비가 선수를 쳤기 때문이다. 흥부 부부는 다시 절대적인 궁핍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팔자 좋아 고대광실 높은 집에 부귀공명 누리며 호의호식하건만, 세상에 난 연후에 불의행사(不義行事) 아니하고 밤낮으로 벌어도 삼순구식(三旬九食) 할 수 없고 일 년 사철 헌옷뿐’이라는 흥부 부부의 탄식은 실로 비감하게 읽힌다.

이처럼 공평치 못한 삶, 이것이 그들이 처했던 조선 후기의 엄연한 현실이었다. 이런 흥부를 두고 누가, 가난은 제 못났기 때문이라며 그를 게으름뱅이라 비난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흥부는 남보다 열심히 일해 행복하게 살아 보려고 해도, 이를 결코 용납하지 않던 조선 후기 현실이 만들어 낸 사회모순의 희생자였던 것이다.

 

탐욕으로 일어선 놀부는 탐욕으로 망하고

조선 후기 농촌사회에는 재물을 축적하여 새로운 삶을 영위하던 부류가 형성되고 있었다고 말한 바 있는데, 놀부야말로 바로 그 같은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인물이다. 남의 집 종살이하던 미천한 신분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엄청난 재물을 모은 덕에 양반처럼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놀부는 온갖 못된 심술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한 입지전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부모의 분재전답(分財田沓) 저 혼자 차지하고, 농사짓기 일삼는다. 윗물 좋은 논에 모를 붓고……그렁 논에 찰벼하고, 살진 밭에 면화하기, 자갈 밭에 서숙 갈고, 황토 밭에 참외 놓며, 비탈밭에 담배하기, 토옥한 밭에 팥을 갈아, 울콩ㆍ불콩ㆍ청대콩이며, 동부ㆍ녹두ㆍ기장이며, 참깨ㆍ들깨ㆍ피마자를 사이사이 심어 두고, 때를 찾아 기음매여 우걱지걱 실어 들여 앞 뒤 뜰에 노적하네.

토양에 적합한 곡식을 가려 심어, 때를 놓치지 않고 가꾸는 놀부의 부지런한 모습은 합리적인 농업경영을 하던 농촌의 독농가(篤農家)와 방불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재물을 모으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던 위인이기도 했다. 마을 공동소유인 산을 몰래 팔아먹는가 하면, 일년 동안 부려먹던 머슴을 한 푼 품값도 주지 않고 내쫓고, 빚 못 갚는 집에 가서 계집 빼앗아 오는 일도 예사로 여겼다. 남이 잘되는 꼴은 배가 아파, 더더욱 눈 뜨고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남의 노적가리에 불도 지르고, 다른 사람 논의 물꼬를 몰래 터놓는 심술도 부렸던 것이다. 예순여 가지나 나열되는 그의 심술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처럼 경제적 이해관계와 얽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못할 짓이 없고 남의 불행을 자기 행복으로 여기던 놀부는, 가위 ‘탐욕의 화신’이 아니면 ‘재물의 노예’였음에 틀림없다.

이런 놀부에게 삼강이니 오륜이니 하는 윤리도덕이란 하찮은 것으로 보일 따름이다. 돈 버는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까지도 재산 모으는 데 방해가 된다고 쫓아내는 데 있어서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물론 그의 이같은 행위를 역사적으로 볼 때, 중세 봉건적 사회를 해체해 가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는 동정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경제적인 이익의 추구는, 이제까지 모든 사람에게 질곡으로 작용하던 봉건적 윤리 규범이나 가치와 갈등하고 대립하면서 이를 여지없이 깨뜨려 나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놀부가 취하고 있는 삶의 태도는 공동체사회 내의 모순을 심화시켜 나가면서, 황금 만능주의적 사고방식을 확산시키고 있던 역기능을 간과할 수 없다. 그로 인해 비록 당대 민중은, 물질의 힘이 급속도로 무게를 더해 가는 시대를 살아갔으면서도 놀부가 보여 주는 삶의 방식을 단호하게 거부하게 된다. 작품 후반부에서 길게 펼쳐지는 놀부에 대한 징치는 인간관계를 황폐화시키는 재물의 폐해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놀부의 파멸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제비의 ‘놀부박’이라는 우연적이거나 신비로운 힘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이제까지 자신을 일으켜 세워 준 재물에 대한 탐욕이, 역으로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 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는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다는 욕심 때문에 스스로 제비다리를 부러뜨린다. 재앙을 자초한 셈이다. 제비가 가져다 준 박씨를 심어, 화(禍)가 구체적인 현실로 실현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박통을 탈 때마다 재물을 빼앗겼지만 다음 박에는 분명 재물이 잔뜩 들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릴 수 없었던 것은 그의 탐욕 때문이었다. 박을 그만 타자는 삯꾼과 아내의 만류를 무릅쓰고 ‘흥하면 흥하고 망하면 망한다(成則成敗則敗)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던 놀부의 놀라운 집념, 이것은 탐욕에 가득 찬 자가 으레 지니고 있던 한탕주의이거나 도박근성에 다름 아니다.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는 격언처럼, 놀부야말로 탐욕으로 일어선 자 탐욕으로 망한다는 말에 해당된다 할 만하다.

이런 점에서 신비로운 박을 등장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부의 성장과 파멸이 보여 주는 삶의 궤적은 현실 생활의 법칙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탐욕스런 놀부가 이른 지점은 어디였던가?

별안간 박 속에서 모진 바람이 쏘아 나오며 벽력 같은 소리가 나더니, 똥줄기는 천군만마가 달려오는 듯, 태산을 밀치고 바다를 메울 듯, 삽시간에 놀부집 안팎에 가득하니, 놀부 부부 왼몸이 황금 덩어리가 되어 달아나 멀찍이서 바라보니 왼집이 똥에 묻혔는지라. 만일 왕십리 거름 장사가 알게 되면 한 밑천 잡게 되었더라.

황금만을 좇던 놀부 부부가 누런 똥을 뒤집어써 ‘황금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는 이 대목에서 우리는 황금 만능주의자의 말로를 실감하게 된다. 이 같은 그의 처절한 파멸에 대해 『흥부전』 작자는 한마디의 동정적 언사도 내비치지 않는다. 대신, ‘이런 일도 또 있는가? 이러할 줄 알았으면 동냥할 바가지나 가지고 나오면 좋을 뻔하였구나?’ 하고, ‘뻔뻔한 이 놈이 처자를 이끌고 흥부를 찾아가니라’라는 냉소로 작품을 끝맺고 있을 따름이다. 놀부에 대한 증오심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말해 준다. 민중은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늘 따스한 시선으로 감싸안지만, 때론 가차없는 단죄를 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는 법이다.

 

환상적인 제비 박이 담고 있던 현실적 의미

『흥부전』은 전반부에서 빈부의 양극화로 초래된 문제를, 후반부에서 제비가 가져다준 박을 통해 해결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작품 전편을 읽어 나갈 때, 전후반의 분위기가 아주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흥부의 고난이 전반부에서 눈물겹도록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데 반해, 후반부에서는 기쁨에 넘친 환상적 빛깔로 채색되어 있다. 놀부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흥부가 겪던 절대적 궁핍이 신비로운 존재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곧 절망적 현실의 역설적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제비가 가져다 준 박은 피눈물나게 분투하는 흥부에 대한 당대 민중의 보답이었고, 거기에는 그네들이 꿈구던 세상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점을 보다 주의 깊게 읽어 내야 한다.

선량한 동생 흥부가 못된 형 놀부에게 쫓겨날 때, 모두 ‘군자 같은 그 심덕에 어디 가면 못살겠나, 암데 가도 부자 되지’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렇기는커녕 거지 행색으로 전전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지켜보던 그들은 ‘세상에 공도(公道) 없소’하며 당대 현실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건강한 삶을 매몰차게 저버리고마는 현실에 대한 깊은 회의와 비판적 시선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대 민중들은 성실히 살아가면 반드시 그 보답을 받고 자기만 잘살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면 그 대가를 언젠가는 치른다는 삶의 이치, 곧 자신들이 꿈꾸던 올바른 세계를 제비박을 통해 형상화했던 것이다. 이것이 신비로운 제비박을 두 차례나 끌어들였던 진정한 이유이다.

먼저, 흥부박을 보자. 흥부가 켠 박통 속에는 ‘전곡(錢穀)’과 ‘비단’과 ‘고루거각(高樓巨閣)’이 들어 있었다. 그것들이 가난한 민중들에게 있어 긴요한 식의주(食衣住)였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더욱이 ‘많이 나왔다’라는 말로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품목 하나하나를 지루할 정도로 길게 나열하고 있는 표현 수법은 주목할 만하다. 이에 대한 당대인들의 원망(願望)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다 눈여겨 보아야 할 사실은, 흥부가 단지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 것에 그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놀부보다 몇 배 부자가 된 흥부의 태도를 보자.

얼씨고나 돈 봐라. 잘난 사람은 더 잘난 돈, 못난 사람도 잘난 돈. 생살지권(生殺之權)을 가진 돈, 부귀공명이 붙은 돈. 이놈의 돈아, 아나 돈아. 어디를 갔다 이제 오느냐? 얼씨구나 좋을씨고. 둘째 놈아 말 듣거라. 건넌 마을 건너가서 너의 백부님 오시래라. 경사를 보아도 형제 볼란다. 얼씨고나 좋을시고. 지화자 좋을시고.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 박흥보를 찾아오오. 나도 내일부터 기민(饑民)을 줄란다. 얼씨고나 좋을시고.

박에서 쏟아져 나온 돈을 보고 흥부가 기뻐하며 부르던 ‘돈타령’의 일부인데, 그의 입을 빌려 표현된 당대인들의 소망스런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돈의 많고 적음으로 인간됨이 평가된다는 사실을 누가 모를 것이며, 생사여탈권까지 지닌 돈을 누가 마다할 것이랴? 흥부야말로 돈 없는 설움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실감했던 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졸지에 엄청난 돈을 얻게 된 흥부는 지기가 당한 설움을 되갚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돈 때문에 자기를 쫓아낸 형을 불러 그 기쁨을 함께 하고자 했으며, 자기처럼 가난한 사람을 당장 내일부터 구제하겠다고 한다. 흥부의 이 노래는, 돈이 초래한 황폐화된 인간관계를 회복하여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을 꿈꾸던 민중의 소망이 아니겠는가?

다음으로 놀부박을 보자. 놀부는 열세 통의 제비박에 의해, 아니 실은 끝없는 자신의 탐욕 때문에 파산하게 된다. 흥부박이 세 통에 지나지 않는 데 비해, 네 배가 넘는 박을 설정한 것에서 놀부를 징치하고자 했던 민중의 적대감을 엿볼 수 있다. 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놀부가 재물을 빼앗겨 가는 구체적인 과정들이다. 놀부박 안에는 수백 수천의 거지떼, 풍각쟁이패, 사당패, 초라니패, 짐꾼들을 비롯하여 몰락 양반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들이 때로는 완력으로, 때로는 놀이값으로, 때로는 점쳐 준 대가로, 때로는 속량(屬良) 대가로 돈을 뜯어 가는 것이다. 왜 하필 이들인가? 여기서 우리는 작품 서두에 열거된 놀부의 심술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심술은 이루 다 열거하기 어렵지만, ‘궁반 보면 관 찢기’, ‘걸인 보면 자루 찢기’, ‘초라니패 소고(小鼓) 도둑’, ‘옹기짐의 작대기 차기’ 등등을 우선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놀부박에서 나와 놀부를 파멸로 몰아가던 인물들은 그에게 온갖 수모를 받아야만 했던 바로 그들이었다. 더욱이 이들은 놀부와 같은 몇몇 부류가 경제적으로 성장하며 산출시켰던 조선 후기 농촌사회의 구조적 희생자들, 곧 하층 유랑민들이기도 했다. 이제 그들 개개인이 당했던 수모를, 수백 수천 명이 함께 모여 비로소 몇 배로 분풀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진 자들은 본래 ‘단합된 무리’를 가장 두려워하는 위인들이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제비다리를 제 손으로 부러뜨려 재앙의 씨앗을 뿌려 중간에 그만두어도 될 박을 탐욕으로 계속 타다 결국 파멸하고 만 것이 자업자득이라면, 이들에 의한 파멸이야말로 ‘진짜’ 자업자득이라 하겠다. 우리는 여기서 조선 후기 내내 끊이지 않던 민란을 연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흥부전에서는 니를 그처럼 살벌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여기서 잠시 놀부박의 한 대목을 보기로 하자.

박이 딱 쪼개져 노니, 박통 속에서 남사당패, 여사당, 거사, 초라니패, 각설이패, 모다 이런 것들이 나오것다. ‘아, 거 나오던 중 기중 낫다마는, 그럼 어디 한 번 놀아 봐라.’ ‘아이 샌님, 그렇게 함부로 얼른 노는 것이 아니올시다.’ ‘그럼 어쩐다냐?’ ‘여기서 한 번 우리가 노는 데 행하(行下, 구경값)가 천 냥이올시다.’ ‘뭣이, 천 냥이여? 아따 너무 비싸다.’ ‘아따, 샌님도. 이왕 없어진 돈, 뭣이 그리 아까워서 그래 쌓소. 천 냥 주고 한 번 재밌게 노시요.’ ‘그려. 어디 한 번 노는 구경이나 해 보자. 한 번 놀아 봐라.’

온갖 놀이패와 실랑이를 벌이고, 그들이 벌인 흥겨운 놀이에 웃고 즐기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놀부는 자기 전재산을 탕진하고 만다. 이런 방식을 취하는 까닭은 원수 같은 놀부의 파멸을 통쾌하게 여기던 민중들에게 신명나는 놀이판을 마련해 주기 위한 문학적 배려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재물에 그토록 악착같던 놀부가 놀이판에 빠져들게 되는 것은 나름대로 현실적인 근거가 있다. 졸부들이야 예나 지금이나 유흥과 쾌락을 한 번 맛보면 끝내 헤어나지 못하기 마련 아니던가?

 

흥부가 꿈꾸던 세상, 그러나 아직도 미완인 세상

우리는 이제까지 『흥부전』을 단순히 형제간의 우애로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거기에 담긴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사적인 맥락에서 조망해 보았다. 그렇지만, 우애의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방향으로 점차 변모해 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들이 『흥부전』하면 으레 형제간의 우애를 떠올리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같은 영향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곳에서 조선 후기 농촌사회의 여러 군상들이 빚어내는 삶의 갈등과 원망을 읽어 낼 수 있다. 어쩌면 한 형제의 갈등을 통해 당대 사회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던 것은, 구체적인 한 사건을 통해 중세 봉건 해체기의 모순들을 총체적으로 담아 낼 수 잇었던 판소리 문학의 뛰어난 성취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형제 갈등과 빈부 모순이라는 주제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겠다.

그런데 『흥부전』을 『춘향전』다음에 놓은 것은, 이것이 다루고 있는 문제의식의 역사적 성격 때문이다. 두 작품 모두 중세 사회가 해체되며 근대 사회로 나아가던 이행기에 나타난 사회모순을 그리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흥부와 놀부의 갈등’을 ‘춘향과 변학도의 대결’과 비교해 볼 때, 그 사이에 역사적인 발전을 느낄 수 있다. 집권층과 서민층의 대결보다는 농민층 내부의 분열로 야기된 갈등이 보다 새로운 역사의 양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재물에 의해 봉건 윤리가 파괴되고 인간관계가 새롭게 정립되어 가던 현상이야말로, 돈이 세상을 움직여 나가는 근대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흥부가 “돈을 눈에 대고 보면 삼강오륜이 다 보여도, 조금 있다가 떼고 보면 보이는 게 돈밖에 또 있느냐?”라 했던 바, 그는 이 점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있었다.

흥부가 꿈꾸던 세상은 이처럼 돈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분명 인간 모두가 함께 잘사는 대동세계(大同世界)였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 같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죽었고, 아직까지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 역사 발전 방향은 한 개인의 꿈에 의해 뒤바뀔 수 없는 법이다. 오늘날의 농촌도, 흥부처럼 가난한 농민들은 농산물의 완전 개방으로 파산 직전에 놓였다. 그런데도 놀부 같은 탐욕의 화신들의 기세는 꺾일 줄 모르고 나날이 높아만 간다. 그러기에 흥부가 꿈꾸던 세상은 여전히 사람다운 세상을 소망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꿈꿀 자유’는 있다.

 

(고전 문학 이야기 주머니. 진경환 우응순 외지음. 녹두)

 

 

◐ 생 각 거 리 ◑

1. 글쓴이가 흥부의 입장을 두둔하는 논거를 찾아 모두 적어 보자.

2. 각자 조사해 온 논거를 놓고 토의를 하여 정리를 해 보자.

3. 이 글을 통해 ‘흥부전’에서 제기할 수 있는 문제를 다섯가지 이상 만들고 모둠 토의를 통하여 그 답을 정리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