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대표 논객으로 불려지는 김규항과 진중권이 최근 한겨레 신문지면 ", 한국사회"에서 한 판 거하게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이 아직 끝난 것 같지는 않지만 관전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진보진영에서 대통합을 모색하고 있는 와중에 두 진보논객의 진검승부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문제의식을 톺아보게 한다. 우리 사회는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아니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를 두고 맹렬하게 벌이는 사투는 발전적인 것인지, 소모적인 것인지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나는 김규항의 사유세계가 펼치는 향연에 때론 감동하고 때론 머뭇거리기도 했고 진중권이 쏟아내는 독설에 때론 환호하기도 하고 때론 씁쓸하기도 했다. 김규항의 도덕성과 진중권의 양심은 무엇으로 비교할 수 없는 나름의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두 논객 모두 휴머니스트일뿐 아니라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태도와 시대 어둠을 꿰뚫는 통찰력은 누구보다 뒤쳐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김규항과 그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발끈하는 진중권의 글을 읽다보면 우리가 오랫동안 내면화 해 온 양면적인 세계를 거침없이 일갈하는 태도가 궁극에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 양면적인 세계는 현실과 이상을 아우르는 인식태도이다.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혹은 불가피하게 라는 변명으로 전술적으로 타협을 모색하거나 양보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지난 역사에서 현실화 된 것을 무수히 목도해 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이상을 비현실적이라 보는 패배적 관념을 부정하고 현실의 무수한 난관과 고통을 감내하거나 자발적으로 감수하면서까지 이상을 고집해 온 역사는 아픔과 따돌림으로 환원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즈음에 좀 더 먼 길을 가야하는 순례자 처지에서 지금 눈 앞에 닥쳐 온 현실을 어떻게 수용하고 대처할 것인가는 전략적으로 진보의 가치와 원칙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좀 더 유연한 전술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도 동의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다는 대진리 앞에서 우리는 늘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지만, 한마리 토끼라도 제대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어리석음도 범하지 않아야 함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두 논객의 진정성 어린 문제제기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계기로 삼아 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마음의 독재 /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이명박 반대 말고는 아무런 내용도 비전도 없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자신들이 정권 교체의 유일한 대안이라 으름장을 놓고 진보 정치 한다는 사람들은 그 줄을 서는 걸 진보연대’ ‘진보집권이라 말하는 참으로 충충한 시절. 그 풍경을 바라보다 불현듯 저들에게 대의하려고만 할 게 아니라 각성된 시민들이 직접 행동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겨울이 가기 전에 사회에 내놓는 걸 목표로 제안문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름이 좌파시민행동이다.

가칭임에도 좌파라는 말이 거부감을 줄 수 있으니 빼자는 의견이 많다. 알다시피 그 거부감은 극우독재 시절 빨갱이 사냥의 공포에서 온다. 극우독재가 물러간 지 30여년, 말하자면 그 공포는 우리 마음에 남은 독재다. 마음의 독재는 우리뿐 아니라 우리를 빨갱이로 몰아대던 사람들에게도 함께 남아 작동한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좌파라는 말은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이 극우세력의 상용어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사례는 더 있다. 한국에선 좌우를 막론하고 국민이라는 말을 상용하는데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다. 다들 인민’(영어로 피플’)을 상용한다. 국민이란 국가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어서 그 상용만으로 국가주의적인 정서가 내면화한다. 국가 안에서의 이해관계는 상충되는 경우가 많음에도(이를테면 정몽구의 이익과 현대자동차 비정규 노동자의 이익은 전혀 상충된다) ‘국익이니 국가경제니 따위 말도 안 되는 선동이 통하는 것도 그와 관련이 있다. 이미 우리는 인민이라는 말을 얼마든 사용할 수 있다. 마음의 독재가 우리를 막아설 뿐이다. ‘괜찮을까?’

그리고 동무’. 지금 우리는 친구라는 말을 상용하지만 옛날엔 대개 동무였다. 동무는 친구보다 훨씬 정겨운 말이고 어깨동무라는 말이 있듯 아이들에겐 동무가 친구보다 훨씬 잘 어울리는 말이다. <고래가 그랬어>2003년 창간 때 이 문제를 놓고 숙고를 거듭했다. 결국 <고래가 그랬어>의 주인은 아이들이니 어려움이 있더라도 정당하게 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독자들은 예상보다 쉽게 익숙해졌다. 이따금 새로운 독자 부모들이 조심스레 문의해오면 괜찮습니다하며 같이 웃는 게 전부다.

좌파’ ‘인민’ ‘동무는 제정신을 가진 모든 나라에서 상용하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들을 빼앗겼고 되찾기 위해 반세기의 시간과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치렀다. 그렇게 되찾은 소중한 우리의 말을 우리는 여전히 남의 말인 양 꺼리고 우리에게서 그 말을 빼앗아갔던 저들은 도리어 본디 저희 말인 양 마음껏 상용하니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좌파’ ‘인민’ ‘동무까지 갈 것도 없다. 지금 벽이나 책상 위의 달력에 51일이 뭐라고 적혀 있는지 보라. 떡하니 근로자의 날이라 적혀 있다. 근로자는 근면하게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박정희 정권이 노동자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하려고 지어낸 말이다.

마음의 독재를 몰아내자. 우리의 말을 우리의 말로 만들자. 저들이 좌파라고 몰아대면 나 좌파인데 좌파가 어때서?’ ‘난 좌파는 아니지만 좌파가 어때서?’라고 받아치는 것이다. ‘나라의 주인은 부자와 권력자가 아니라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인민입니다’ ‘아이들이 공부에 짓눌리지 않고 동무들과 마음껏 뛰노는 세상을 만듭시다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어색한가? 우리의 말을 우리가 사용하는 게? 그러니 상용하고 또 상용하자. 진보적인 사람들부터 진보적 언론부터 앞장서야 하는 거야 두말할 것 없는 이치다.

 

 

좀더 양식 있게 / 김규항 <고래가그랬어> 발행인

 

몇해 전 새사연(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손석춘 선생에게서 들은 이야기. 손 선생이 연구소를 구상할 무렵 박원순 선생에게 함께하면 어떨지 의논했던 모양이다. 구상을 들어본 박원순 선생이 그러더란다. “손 선생이 하시려는 건 민중 기반의 운동이고 제가 하는 건 시민 기반의 운동이니 따로 하는 게 효율적이지 싶습니다.” ‘민중 기반의 운동에 속한 나는 박원순 선생과 견해가 종종 달랐고 두어 번 직접적인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고 박 선생이 매우 양식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태도는 적어도 한국 사회에선 매우 특별한 것이다.

박원순 선생 말마따나 사회엔 시민 기반 운동(개혁이라 불리는)도 필요하고 민중 기반 운동(진보라 불리는)도 필요하다. 시민 기반 운동이 민중 영역까지 포괄하기 어렵고 민중 기반 운동이 시민 영역까지 포괄하긴 어려우며,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서로를 존중하며 각자의 역할을 해내면 된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급부상한 시민 기반 운동엔 민중까지 포괄하는 운동인 양 과장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즐겨 사용해온 말이 진보 개혁 세력이라는 말이다. 그 말은 대세가 된 시민 기반의 운동에 민중 기반의 운동을 귀속시키기 위해 사용되어왔다.

그런데 근래 들어선 아예 개혁을 떼버리고 진보로 가는 형국이다. 이를테면 오연호, 조국 선생이 얼마 전 낸 책의 제목은 <진보집권플랜>이다. 이런저런 지당하고 좋은 이야기들이 들었지만 결국 골자는 이명박 정권 교체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선거 연합, 즉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을 중심으로 하는 정권교체를 주장하는 책이다. 과연 그런 정권교체가 진보집권인가? 며칠 전 한 노동운동가가 나에게 보내온 편지를 읽어보자.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노무현이나 이명박은 그 밥에 그 나물입니다. 저는 열혈 노사모였습니다. 노무현이 대통령 되니 세상 좋아진 줄 알고 노조 가입해서 비정규직 투쟁하다 노무현 정부에 의해 구속되고 해고되었습니다. 저야 구속 정도로 끝났지만 수많은 노동자들은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아직 그 노동자들의 유언과 얼굴을 가슴에 박고 사는 저 같은 사람들은 혼란스럽습니다. 함께했던 동지들도 통합과 연합현실이고 대세라고 합니다. 그쪽으로 안 가면 영원히 낙오할 것 같은 불안감마저 듭니다.”

물론 오연호, 조국 같은 분들에게, 즉 개혁적인 중산층 엘리트들에게 이명박인가 노무현인가는 그 밥에 그 나물이 아니다. 그들에게 이명박인가 노무현인가는 정권은 물론 학술, 문화, 방송, 엔지오(NGO) 등의 헤게모니를 우리가 갖는가 저들이 갖는가가 달린 절체절명의 일이다. 그들에게 그런 정권교체가 세상이 뒤집히는 수준의 변화라는 것, 그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변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을 존중한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정권교체를 굳이 진보집권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 정권교체를 진보집권이라 부르는 건 그런 정권교체로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이명박이냐 노무현이냐가 그 밥에 그 나물인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폭력이다. 진보란 먹고사는 데 별 걱정이 없는 중산층 엘리트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변화를 대다수 인민들을 위한 변화라 과장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에겐 충분한 변화더라도 대다수 인민들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면 변화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오연호, 조국 선생이 이제라도 <진보집권플랜>이라는 책 제목을 좀더 양식 있게 바꿔주길 정중하게 요청한다. ‘시민집권플랜혹은 민주집권플랜쯤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철인좌파의 딱지치기 / 진중권 문화평론가

 

플라톤은 세계를 세 등급으로 나눈다. A급은 이데아 세계, B급은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계, C급은 현실계를 흉내 낸 유사계(=시뮐라크르). 정치인에도 세 등급이 있다. A급은 이상적정치인. 하지만 이상은 현실이 아니기에, 실존하는 것은 이데아를 모방한 B급과, 다시 이를 흉내 낸 C급뿐이다.

민주정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개나 소나 정치를 한다고 나서는 것. 이런 상황에서 플라톤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과제를 자임한다. A급이 실존할 수 없다면, 불완전하게나마 그 이상형을 닮은 B급에라도 폴리스의 정치를 맡겨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철인정치론이다.

플라톤의 환생일까? 이 사회에도 좌파를 세 등급으로 나누는 이들이 있다. 물론 A급 좌파는 존재하지 않거나, 이념형으로만 존재한다. 고로 실제로 존재하는 건 B급과 C. 이 둘을 구별하는 게 이들에게 좌파정치의 핵심 과제가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을 “B급 좌파라 부르는 철인좌파가 있다. 최근 C급 가짜 시뮐라크르 좌파를 폭로하는 일에 단단히 맛을 들였다.

유감스럽게도 그 일을 하는 데에 그는 이 지면을 활용하곤 한다. 그는 얼마 전 내 이마에 자유주의자딱지를 붙였다. 이번엔 조국·오연호에게 중산층 엘리트딱지를 붙인다. 그 딱지가 우리 사회를 좀더 양식 있게만들어줄 거란다. 그의 비판의 요지는 상표권 도용. 왜 자기 허락 없이 진보좌파라는 상표를 쓰냐는 것.

그가 남의 이마에 딱지 붙이는 데 쓰는 접착제는 공허하기가 허무할 정도. 양당제가 고착되면 복지국가는 없다? 그래서 남들은 지난 10년간 맨땅에 헤딩하며 진보정당 만들었다. 반한나라 전선에 매몰되지 말라? 그래서 남들은 선거 때마다 표 분산시킨다고 몰매를 맞았다.

그동안 철인은 ‘B의 이미지를 위해 진보정당보다 늘 조금 더 왼쪽에 계시느라 이 모든 번거로움을 모르고 지내셨다. 그러던 분이 지난 10년 동안 올림포스 산정에 오르사 전능하신 플라톤 선생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가짜와 진짜를 심판하러 오셨다.

현재 진보정당은 집권 전망도, 수권 능력도 없다. 이것이 철인좌파마저 모자 눌러쓰고 진보정당을 외면해온 바람에 생긴 빌어먹을 현실이다. 하지만 그보다 암울한 것은 앞날. 딱지치기로 진보하는 좌파정치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게다가 진보정당의 상황을 제대로 알고나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다가올 연합 속에서 되도록 진보의 가치를 많이 관철시키는 것이지, 그 연합에 딱지나 갈아붙이는 것은 확실히 아니리라.

오연호, 조국 같은 중산층 엘리트들에게 이명박인가 노무현인가는 학술, 문화, 방송, 엔지오 등의 헤게모니를 우리가 갖는가 저들이 갖는가가 달린 절체절명의 일이다.”

이 어법은 그의 입에 되물리는 게 좋겠다. 정권이 바뀐다고 조국 교수의 팔자가 설마 획기적으로 바뀌겠는가. “중산층엘리트쯤 되면 굳이 좌파딱지 없어도 먹고산다. ‘진보로 먹고사는 이들은 따로 있을 게다. 그런 이들일수록 생존권 차원에서 상표권 문제를 절체절명의 일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좌파딱지를 허락받고 써야 한다면 차라리 반납하자. 좌파증은 좌파등급심사위원회로 보내면 되나? 그러니 이제 상표권 걱정은 마시되, 그저 우리를 C급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자신을 A급으로 구하소서. 그래야 고래와 권세와 영광이 아저씨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소망교회에서 집사 10년이면 장로 한다. B급 좌파 10, 이제 영전하실 때도 됐다.

 

 

 

난감한 풍경 /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진중권씨의 철인좌파의 딱지치기는 아쉬운 글이다. 진씨가 김규항이 틀렸다는 비아냥거림만 반복할 게 아니라 김규항이 왜 틀렸는가를 말했다면 모두에게 좀더 유익했을 것이다. 공적 논쟁은 사적 다툼과 다른 것이니. 어쨌거나, 진씨는 현재 개혁우파 세력과 일부 진보정치 세력이 진행중인 선거연합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씨는 꽤 오랫동안 진보정당 활동을 하면서 이런 선거연합을 반대해왔는데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하긴 그는 몇달 전 나와 진보정당의 정체성에 관한 논쟁 뒤에 진보신당을 탈당하며 다시는 좌파니 진보니 안 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부러 밝히자면, 나는 이명박 정권 교체를 위한 선거연합을 찬성한다. 중국 공산당은 일제를 물리치기 위해 원수인 국민당과도 연합했는데 그깟 이명박 정권 교체를 위한 연합을 못하겠는가. 진씨는 말한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다가올 연합 속에서 되도록 진보의 가치를 많이 관철시키는 것이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내가 문제 삼는 건 선거연합 자체가 아니라 지금 진행중인 선거연합이 과연 진보의 가치를 관철시킬 수 있는 선거연합인가 하는 것이다.

본디 연합이란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걸 전제로 정체성이 다른 집단과 힘을 모으는 전략적 행위다.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는 연합은 연합을 빙자한 흡수통합일 뿐이다. 극우세력의 집권(혹은 재집권)을 막기 위한 선거연합은 비판적 지지의 이름으로 지난 20년 동안 반복되어왔다. 처음이라면 모를까 20년을 반복한 일이라면 당연히 그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비판적 지지는 언제나 가장 현실적인 진보의 방법이라 선전되곤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20년만큼의 진보가 아니라 이명박 정권의 탄생, 그리고 진보정치 세력의 쇠락이다.

우리는 선거연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어리석은 역사를 또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현재의 선거연합은 정권교체만 강조될 뿐 정작 진보의 가치를 관철시킬 수 있는 물리적 방안이 없다. 정치는 냉혹한 것이다. 이런 선거연합은 개혁우파 세력의 집권욕에 진보정치의 자원과 가능성을 헌납하는 절차일 뿐이다. 그래도 이명박 정권보다야 낫지 않겠냐고? 물론 그렇긴 하겠지만 이명박 정권에 대한 우리의 반감이 개혁우파 세력을 턱없이 미화하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이란 당장의 통증이 지나버린 통증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개혁우파 세력이 집권하면 세상이 어떨까는 전주를 보면 된다. 버스 노동자들이 86일째 추위와 폭력 속에 파업하고 있는데 민주당이 장악한 전주시와 전주시의회는 이명박보다 덜하지 않다. 법원이 합법 파업임을 인정했음에도 전주시와 전주시의회는 불법 파업으로 매도하며 자본가 편에 서 왔다. 선거연합을 통해 진보정치를 구현한다는 민주노동당이 중앙당 차원의 논평 하나 없다는 건 선거연합의 정체를 보여준다. 개혁우파 세력이 집권한다면 전주의 상황은 전국의 상황이 될 것이다. 그들이 집권했던 10년이 그랬듯 말이다.

그런 무작정한 선거연합을 진보집권 플랜이라 주장하는 게 양식 있는 행동일까? 그런 선거연합을 진보라 부르면 제대로 된 선거연합을 모색하는 진보는 뭐라고 불러야 하나? 순진보, 원조 진보라 할까? 진보가 참기름, 족발인가? 그걸 지적했더니 도리어 진보를 전세 냈느냐’ ‘딱지를 붙인다성을 내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태도다. 그런 태도는 심지어 진씨 자신의 활동과도 배치된다. 지난 10여년 진중권씨가 해온 활동이란 대개 보수 행세하는 극우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진보 행세하는 개혁을 저리 옹호하는 풍경은 참으로 난감하다.

 

 

 

우리 좌파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 이윤영 인디고 유스 북페어 팀장

 

튀니지를 기점으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아랍권 국가들의 혁명 사태에 대해 세계가 주목한다. 최초의 분석들과는 달리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들은 절대적 빈국이 아니라는 해석들이 나오면서, 혁명의 원인이 경제보다 정치에 있다는 박노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혁명의 가능성이 없는가?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적으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배제되지 않고 있는가?

보이는 적과 보이지 않는 적. 적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정의와 경제, 윤리와 정치를 가르치는 대학에서 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생사를 걸고 주목받지 못하는 투쟁을 해야 하는가? 왜 위험한 투자를 서슴지 않는 부자들의 돈은 안전한데 평생을 걸고 지키려 했던 서민들의 돈은 공중에서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는가? 누구 혹은 무엇에 의해서, 도대체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가? 간교한 독재라서, 리비아처럼 시민을 대놓고 학살하는 독재가 아니라서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다. 도대체 누구의 소행인지 전혀 짐작도 못한 채 우리는 항상 헛다리를 짚는다.

한국 사회에는 소리 없이 고통받는 사람들이 아랍 혁명에서 국가와 군대의 총에 의해 죽어가는 시민들의 수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고통받아야 하는 원인도 모른 채 말이다. 유일한 원인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 못난 탓이다. 혹여 외적인 원인을 깨닫고 저항한다 하더라도 순식간에 절멸당하고 만다. 고통이 분할된 까닭에 타인의 고통에 무섭도록 무감하다. 한국 사회는 경제대국과 민주주의 실현 국가라는 이름 아래 이제 혁명을 꿈꿀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위험한 사회는 유혈혁명의 국가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와 같은 사회라는 진단은 수도 없이 내려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좌파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생긴다. 얼마 전 슬로베니아에서 만났던 슬라보이 지제크는 인터뷰에서 신의 조각상에 소변을 봄으로써 표준적 관념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예술가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그럴 수 있지요. 그래서 무엇이 논점이지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것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속에 가려진 채 썩어 있거나 고여 있는 것들을 정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질문을 정치적 논쟁으로 이끌어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겨레> 지면에서 진중권과 김규항의 무엇이 진보고 무엇이 좌파인지에 대한 것처럼 보이는 논쟁은 그래서 무엇이 논점이지요?”

좌파가 분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지금 없는 무엇, 지금 불가능한 일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진짜이고 더 옳은지에 대한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논쟁은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가능해야 하는 것들, 그것이 진보정당이 집권하는 것이든 민중들에게 진정한 자유가 부여되는 것이든 지금 좌파는 현재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도록 우리 사회를 움직일 도덕적 다수를 차지할 수 있는 생산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다양한 프롤레타리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이끌어내 변화를 촉발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과 철학적 논쟁이 필요하다는 지제크의 말이 정확히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한 논쟁이 공적으로 제기되어야 할 지면에 두 사람의 냉소적인 논쟁은 자칫 좌파 전체의 분열과 편가르기만 가져올 뿐이다.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집요하게, 때론 미치광이처럼 새로운 세계를 요구하고 획득하는 것이 좌파이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서는 정말이지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 좌파가 이전까지의 영광스러운 순간과 절연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