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애벌레로서의 삶을 버린다는 뜻일 겁니다.
풀밭에서 뒹굴었든 기둥을 기어올랐든 애벌레로서 살아 온 날들을 버리고
그것을 뛰어 넘는(아니, 날아오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까요) 삶을 꿈꾼다는 것이지요.
늙은 애벌레의 말마따나 그것은, 다시는 애벌레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길이고,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 무엇을 위해 노랑 애벌레와 늙은 애벌레는 안온한 일상을 버리고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그 결과조차 불분명한 고치가 되려는 걸까요.
저는 이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비에의 포기할 수 없는 꿈.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꿈.

나비가 된 애벌레들은 그런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꿈은,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꿈꾸는 자들을 가혹하게 다룬다고 했습니다.
혹독한 어려움과 끝없는 자기 의심을 넘어 마침내 꿈꾸던 나비가 된 애벌레들이
세상에 꽃을 피우고 희망과 아름다움을 퍼뜨립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신을 버리고 기꺼이 고치가 된 많은 사람들이
나비가 되어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주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나비가 된다는 것은 나의 존재를 넘어서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나를 던지는,
그럼으로써 나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소시민적 삶에 매몰되어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래서 나비의 꿈은 실현불가능해 보이고 위험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만, 내 속에 있는 나비의 존재를 부정하고 살찐 애벌레로 생을 마감하고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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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내 속의 나비를 느꼈다면, 애벌레의 일상이 무의미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면
다시 꿈꾸어 볼 일입니다.
솜털투성이인 내 몸 속에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어 나갈 나비가 숨어 있음을 믿고
스스로 고치를 짓고 그 안에 들어 앉아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다른 나비가 가져다주는 꽃가루로 꽃이 피어나기만 원할 것이 아니라 내가 나비가 되어
세상을 온통 꽃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꿈꾸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