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고 /김화경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JU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에는 현직 법조인, 목사, 교수, 전·현직 고위 공무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JU 대표인 주수도씨도 얼핏 보면 미국에서 석·박사를 마친 엘리트이다.  JU 피해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사회 고위 명사들이 앞장서서 JU란 기업을 선전했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 없이 피 같은 돈을 쏟아 부었다고 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 소위 사회 엘리트들이 미치는 파장 효과가 매우 크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사회 엘리트들의 공통점은 모두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엘리트들은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특권의식을 갖게 된다. 특권의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하며 그것을 갖기 위해 안간힘을 쓰거나 애초에 포기를 하곤 한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돌아가고 있다.
사회 엘리트들이 어떤 태생을 지닌 자들인지, 그들이 누리는 사회적 특권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를 알지 못하면 JU사태와 같은 비극적인 일들이 반복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 폴 사르트르가 쓴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매우 가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사르트르가 1960년대에 일본에서 한 강연을 정리해 놓은 책이다. 사르트르는 이 책에서 지식인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본인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사르트르의 견해에 의하면 지식인의 기원은 16세기 프랑스로부터 시작된다. 귀족들의 재산을 관리해주고, 그들의 병을 고쳐주고, 그들을 위해 각종 연구를 하던 이들은 점차 신분제도의 모순을 인식하게 된다. 경제, 의료, 과학 분야에 제 나름대로의 전문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을 가리켜 제3계급 혹은 부르주아라고 한다.
  혁명을 일으켜 봉건제도를 전복시킨 부르주아들은 새로운 사회를 열었다. 그들이 만든 새로운 사회는 보편을 가장한 특수 사회였다. 봉건사회시절 부르주아 계급이 귀족으로부터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던 것처럼 그들도 노동자 계급을 새로운 사회에서 소외시켰다. 부르주아들이 만든 새로운 사회는 얼핏 보면 민주사회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부르주아 계급에게 많은 이익이 보장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얻는 계층은 부르주아 계급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계층은 봉건주의 시대에 부르주아 계층이 담당했던 역할을 하는 지식인들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한 가지는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대시키기 위해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에 편승해서 살아가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것을 비판하는 삶이다.
사르트르는 실용적인 지식만을 소유한 사람들을 전문가라고 부르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지식인들은 사이비 지식인이라고 부르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사르트르가 한 이러한 분류법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는 전문가 내지는 사이비 지식인의 수가 지식인의 수보다 많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렇기 때문이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지식인보다 전문가가 많기 때문이다. 이유는 또 있다. JU 사건에 연루된 사회 엘리트들이 그렇기 때문이고, 유명한 지식인들 대부분이 한 번씩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거나 아직도 감옥에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르트르가 지나치게 계급주의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었다. 그러다가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돌아가므로 이런 해석도 제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가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규정한다는 생각이 든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이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우리 사회의 이런 분위기는 상대적 박탈감 속에 있는 사회 구성원들을 자괴감과 분노 속으로 몰고 간다. 많은 국민들이 이러한 부정적인 정서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불행한 사태를 맞게 된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려면 ‘나’가 누구인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나는 일단 대학원을 나왔으므로 얼치기 전문가에는 속한다. 아이들에게 독서를 가르치고, 논술을 가르치고 있는데, 궁극적으로 아이들을 안내해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 모순들,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도 대충 알뿐 아직 마음 깊숙이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행동도 따르지 못한다.
사르트르는 전문가는 모두 잠재적 지식인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잠재적 지식인은 별로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된다. 사회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지식인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행동하는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잠재적 지식인은 자신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지닌 모순의 피해자가 되거나 아니면 노동자 계층이 그냥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는 경우에 행동하게 된다고 한다. 두 경우 모두 너무 늦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빨리 지식인으로서 사회를 비판하고 고발하는 행동을 하게 될 수는 없을까?
이에 대한 답으로 사르트르는 끊임없이 지식인적 순간을 부정할 것과, 자기 자신의 문제부터 공격하기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지식인은 자신이 부르주아의 도움으로 컸기 때문에 자주 자신이 부르주아인 것으로 착각한다. 나도 내가 부르주아인 것으로 착각한다. 나는 부르주아가 아니다. 그렇다고 생산력을 갖춘 노동자도 되지 못한다. 이것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다. 나는 현재 전문가이다. 내가 지식인이 되는 방법은 내가 지식인이라는 주제파악을 하고 그에 걸맞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지식인의 역할은 사회의 부조리를 깨닫고 고발하는 것이다. 이를 나의 삶에 적용해 본다면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추구해야 할 방향이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알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사회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이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 무엇인지, 이 사회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하면 여럿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는지, 학생들과 함께 고민하고 답을 찾아보는 것이 전문가인 내가 지식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이다.




제목 : 참지식인을 보는 눈 / 장홍례

  신석기혁명이후 지배해온 계층구조가 현대 지배구조와 별반 다르지 않음은 신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신화 속 인물들의 우상화속에서 무언가를 캐내기보다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민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민중을 기만한 권력층의 사회장악이 여러 모순을 드러내면서 사회구조에 순응하는 지식인이 생겨났다.
  조선시대 사림을 지식인으로 본다면 500년 세월 속에서 안일함을 후려칠 근현대의 짧고 역동적인 역사에서 한국 지식인의 고뇌 또한 타국의 지식인보다 몇 배는 힘들어 보였다. 일제시대의 문화정치에서 많은 지식인이 친일행각을 벌였다. 그 일환으로 일제의 억압과 착취행위는 제국주의에 타당한 일이고 그에 맞춰 농민과 노동자가 동아시아 전쟁에 자진 출두하도록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한 지식인이 한국사회의 지배계층을 이루었다. 지식인은 두터운 권력 계층구조와 손을 잡고 있고 상황을 은폐하기 위해서라도 관계형성을 하게 된다. 또한 국가의 지나친 개입하게 학교의 역사교과서가 만들어진다. 민족주의만 강조한 역사교육과 사상이 민중의 획일화된 사고를 주입받게 된다. 이런 교육을 받고 지식인이 된 경우 사회에서의 내적·외적 대립과 실질적인 모순을 찾아내기란 어렵다.
  노동자 입장에 관점을 두면 지배계급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임을 알게 되고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객관적 사고는 분열을 하게 된다. 지식인은 버림받은 계층(노동자)과 동일한 목표로 유기적 하방연대를 형성해야 한다. 그러나 대중을 마비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분쟁·충돌이 생길 때마다 지배계층은 사이비지식인을 내세운다. 사이비지식인은 지극히 온건하고 이상주의자들이기 때문에 혼란을 가져다준다.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복거일은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서 친일파를 변호하기 위한 근거자료를 제시했다. “누가 친일파냐? 일본제국주의 시절은 사회구조 때문에 모두가 일제에 협조했다. 그런 상황에서의 친일행동은 정당하다. 조선후기보다 일제식민지시절 인구가 90%이상 증가해 민중의 삶이 더 좋아졌다.”라고 했다. 소수의 친일행각을 뒤덮기 위해 대중을 일시에 친일파로 몰아가는 혼란을 주기도 한다. 어떤 이는 사상의 자유 아니냐? 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제시대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떳떳했던 애국자의 명예는 어쩌란 말인가? 지식인의 이상적 학문을 펼칠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사이비지식인은 지식인의 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복잡한 사회구조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파악하고 민중이 나아갈 길을 지식인은 인식과 실천 재인식과 재실천의 변증법을 실천함에 있다. 신영복교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민중은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계기로 창조되고 응집되고 증폭된 사회적 역량이라고 했다. 민중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한 그 시대, 그 사회를 총제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고 했다. 아래로부터의 통합연대인 것이다.
  참지식인은 대중을 위해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고 분열된 사회구조 속에서 폭로해야 한다. 거기에 맞부딪치면 과격하게 투쟁해야 한다. 참된 지식인은 그런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