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제:
동서고금의 많은 선현들이 인생이 무상함을 깨우치고 도에 정진하는 삶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었다. 그러나 다른 측면으로 보면 깨달음이란 개인적인 욕망의 한 실현이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사회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한 자신이 책임져야 할 부분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의무를 소홀히 하고 깨달음만을 추구한다면 어떤 면에서 부도덕한 행위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다음 글에 나타난 논점과 의도를 파악하여 이를 인생에 대한 깨달음의 관점에서 현대인의 삶에 적용해 보고, 이와 관련하여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논술하시오


제시문

  옛날, 신라 시대에 세규사란 절이 있어 그 절의 장원이 명주 날리군에 소재해 있었다. 본사에서는 중 조신을 그 절의 관리인으로 파견했다. 조신은 날리군의 그 장원에 있으면서 태수 김흔의 딸을 좋아하여 깊이 매혹되어 버렸다. 그는 누차 낙산사의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그녀와의 결합을 남몰래 빌었다. 이러기가 수 년 간, 그 사이 김흔의 딸은 이미 시집을 가 버리고 말았다.

조신은 관음보살 앞으로 갔다. 관음보살이 자기의 비원을 성취시켜 주지 않음을 원망하여 그는 슬피 울었다. 날이 저물 무렵 그의 사념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는 깜박 풋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그 김씨 처녀가 반가운 얼굴로 문을 들어섰다. 함빡 웃으면서 그녀는 조신에게 말했다.

  “저는 대사님의 모습을 어렴풋이 알고부터는 마음속 깊이 사모해 왔었지요. 잠시도 대사님을 잊은 적이 없었어요. 부모님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시집을 갔었지만, 죽어서도 대사님과 한 무덤에 묻힐 반려가 되고 싶어 지금 이렇게 왔어요.”

조신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40여 년의 세월을 살았다. 자식만이 다섯이나 생겼을 뿐 집안은 휑뎅그렁하여 남은 것이라곤 없었다. 나물죽마저도 넉넉하지 못했다. 드디어 실의에 찬 몰골들도 잡고 끌고 하여 먹고살기 위해 사방을 헤매 다녔다. 이렇게 10년 간 초야를 두루 유랑했다. 너덜너덜 헤어진 옷은 몸을 가리지 못했다. 명주 해현 고개를 지나다가 열 다섯 살 난 큰 아이가 굶어 죽었다. 통곡을 하며 시체를 거두어 길에다 묻었다.

  남은 네 자녀들을 데리고 우곡현으로 왔다. 길 곁에가 띠풀로 집을 얽어 살았다. 부부는 이미 늙고 병들었다. 거기에다 굶주림에 지쳐 일어나 다니지를 못했다. 열 살 난 딸아이가 돌아다니며 걸식을 했다. 그러나 그 딸아이마저 마을의 개에게 물려 아파서 울부짖으며 앞에 누워 있었다. 부부는 탄식을 하며 두 줄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아내가 눈물을 훔치고 나더니 돌연 얘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내가 당신과 처음 만났을 땐 얼굴도 아름다웠고 나이도 젊었습니다. 그리고 의복도 깨끗하고 고운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라도 맛 좋은 음식이 있으면 당신과 나누어 먹었고, 두어 자 옷감이 생겨도 당신과 함께 지어 입었습니다.  이러구러 살아온 지 50년, 정은 더할 수 없이 쌓였고 사랑은 얽히고 얽혀 정말 두터운 연분이라 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 노쇠와 병고는 날로 더욱 깊어가고, 춥고 배고픔은 날로 더욱 핍박하게 되었습니다. 남의 집 곁방살이, 간장 한 병의 구걸도 사람들은 용납해 주지 않았고, 수많은 집 문전에서의 그 수치는 무겁기 산더미 같았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지쳐 있어도 그걸 면하게 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판국이 이러한 데 어느 겨를에 부부 간의 애정을 즐기겠습니까? 젊은 얼굴 예쁜 웃음을 풀잎 위의 이슬 같고, 굳고 향기롭던 그 가약(佳約)도 한갓 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 같을 뿐입니다. 당신에겐 내가 있어 짐이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지난날의 즐거움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바로 번뇌로 오르는 계단이었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요? 뭇 새가 모여 있다 함께 굶어 죽기보다는 차라리 짝없는 난새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순경(順境)일 때는 친하고 역경(逆境)일 때는 버리는 것이 인정상 차마 못할 짓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가고 머무는 것이 사람의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요, 헤어지고 만남에는 운명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여기서 서로 헤어지도록 하십시다.”

  조신은 아내의 제의를 듣고 무척 반가워했다. 네 아이들을 각각 둘씩 나누어 갈라서려 할 때 아내가 말했다.

  “나는 고향으로 갈 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서로 잡았던 손을 마악 놓고 돌아서서 길을 나서려 할 때, 조신은 꿈에서 깨어났다. 희미한 등불은 으스름한 불 그림자를 너울거리고 밤은 그윽히 깊어가고 있는 참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머리털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조신은 멍청히 넋이 나간 듯, 인간 세상이라곤 전혀 없었다. 이미 인간의 그 고된 생애에의 염증이 느껴짐이 마치 실제 백년의 고생을 모조리 겪기라도 한 듯했다. 탐욕의 마음은 얼음이 녹아 버리듯 말끔히 가시었다. 조신은 관음의 그 성스러운 모습을 부끄러이 우러르며 참회를 금하지 못했다.

  해현으로 가서 꿈속에서 굶어 죽은 큰 아이를 묻었던 자리를 파 보았더니 돌미륵이 나왔다. 깨끗이 씻어서 그 부근의 절에다 봉안한 후, 서울로 돌아가 절 관리의 임무를 벗었다. 그리고 사재를 기울여서 정토사를 세우고 부지런히 선행을 쌓더니, 나중에 그 종적을 알 수 없었다.         (삼국유사 중 조신몽)

  ☞ 유의사항
  (1) 구체적인 논거를 제시할 것.
  (2) 제시된 속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 쓰지 말 것.
  (3) 답안지의 수험번호와 성명 표기란 이외에는 성명이나 제목, 기타 어떠한 표시도 하지 말 것.
  (4) 글의 길이는 1400자 내외(±100자 허용)로 할 것.


**  예시글**

  현대인들의 대표적인 특성을 몇 가지로 요약하자면 분명 개인주의를 포함할 것이다. 개인주의란 타인의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행위하고 사고하는 방식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개인주의의 장점인 합리성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유대와 공존을 요구하는 공동체적 삶의 균형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개인주의적 합리성과 공동체적 삶의 유대감을 동시에 포괄하여 조화시킬 수는 없을까?

  동양에는 전통적으로 개인의 수양과 해탈을 강조하는 사상들이 있다. 그 한 예로 불교에서는 열반에 드는 것을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다. 바로 해탈의 경지에 오르는 것인데 그것이 완성되는 경우 그는 일차적으로 한 개인으로서의 목적을 달성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방식을 현대의 개인주의와 일맥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부분적으로 개인적 욕망 실현이 목적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그 욕망의 질에 있다. 개인주의의 욕망이 세속적이고, 일회적이며, 배타적이라면, 해탈에의 욕망은 탈속과 더불어 해탈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궁극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파급 효과의 차이점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 연쇄적 파급 효과의 존재가 우리가 풀어야 할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효율성, 합리성을 제고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사회 성원의 완벽한 공유와 공존은 비현실적 관념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전통적 사상에 입각하여 인생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기본적 토대로 하고, 그 바탕 위에 현대 개인주의의 장점인 효율성과 합리성을 부가하여 양자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 개개인은 자신의 욕망 추구의 결과가 긍정적이며, 연쇄적일 수 있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전통적 개인주의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바람직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개인주의를 더욱 한 차원을 높여 개개인이 속한 사회를 의식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방법을 꾸준히 모색해 나가야 한다.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점들이 물질 만능주의나 가족 이기주의와 같은 배타적이고 세속적인 성격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적으로 위와 같은 부정적 속성을 제거하여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주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성원 모두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책임 의식을 갖고, 현대 개인주의와 전통적 깨달음의 추구, 그리고 공동체적 유대감을 조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